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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몽상가의 정치, 사회 관련글

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1/08
    그녀들의 뺑뺑이 삶을 위하여!
    몽상가
  2. 2009/06/26
    쌍용차 김수경 아저씨
    몽상가
  3. 2009/01/09
    <미행美行 - 7차> 예비 비정규 노동자, 10대와 20대를 만나다(프레시안)
    몽상가
  4. 2008/10/12
    기륭에 다녀왔어요!
    몽상가
  5. 2008/09/15
    갈 곳 없는 88만원세대는 거리가 좋다!(1)
    몽상가
  6. 2008/08/04
    2008/08/04(1)
    몽상가
  7. 2008/08/02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2)
    몽상가
  8. 2008/07/28
    7월 26일 집회 후기(?)
    몽상가
  9. 2008/07/14
    민주주의 독재
    몽상가
  10. 2008/07/14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나라(2)
    몽상가

그녀들의 뺑뺑이 삶을 위하여!

제가 도당에서 일 한지 1년이 되었습니다.

저 는 업무상 우체국에 가야하는 일이 많습니다.

각 당협에 선전물, 기타등등을 배송하는 일이 제 일이거든요. 전 수원역 앞에 있는 우체국을 갈 때마다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편 업무를 보는 창구가 총 세개인데 그 중에 왼쪽 첫번째 창구에 계시는 제일 고참인 중년의 여성분이 참 친절하고 열심히 일하시거든요. 그 분을 뵐 때마다 매일 어쩜 저렇게 열심히 일하실까 생각하곤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창구에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남성분, 세번째 창구에는 역시 제 또래의 여성분이 계셨습니다.남자분은 그냥 너무 평범해서 뭐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고 세번째 창구의 여성분은 확실히 저보다 힘이 약했습니다.빼빼 마른 몸으로 선전물이 한 가득 담겨있는 박스를 저보다도 더 낑낑대며 겨우 들어 업무를 보았으니까요. 그리고 왠지 좀..다른 분들과 달리 움츠러 들어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우체국이란 공간에 완전히 적응해 있는데 그 분은 좀.. 적응이 덜하다고 할까요.

세 분은 모두 왼쪽 가슴에 명찰을 차고 있는데 첫번째 두번째 분들은 이름이 써 있는 명찰이었고 세번째 여성분은 '연수생'이라고만 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6개월 정도 인턴처럼 일하고 정식채용이 되나보다 하고 짐작했습니다. 연수생이라서 좀 움츠러든 느낌인가? 뭐 그랬죠. 그게 1년이었습니다. 1년간, 제가 그랬듯 그 분도 업무에 익숙해지셨습니다.

어제. 출근을 하면서 일이있어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창구에 다른 여성분이 '연수생' 명찰을 차고 앉아계시는 겁니다.

그 래서 저는 옆의 남자분께 물어봤습니다. 그 여자분 어.디.가.셨.냐.고.

그랬더니 다른데로 갔다고  대답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이제 정식발령이 되어 다른 곳에서 근무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 디.로.가.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계.약.이.끝.나.서 가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렇 습니다. '연수생'이라는 명찰을 차고 1년간 일하셨던 그 분은 비정규직이었던 것입니다.

1년간, 옆의 두 분과 똑같은 창구에서 똑같은 일을 하던 사람이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다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 녀는 지금쯤 별다른 '스펙'이 없는 자신의 이력서를 탓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고용주 혹은 인사담당자 앞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를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채,

그리고 비정규직의 뺑뺑이 삶에서 놓여날 수 없겠죠.

새로 '연수생'이 되신 20대 초중반의 그 여성분도 역시.........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에서 흔히 쓰는 '우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이렇게 절절히 느낀 건 처음이었습니다.

1 년 동안 같이 일했던 사람에 대해서 '계약이 끝나서 가셨다'라고 건조하게 말하던 그 남성분,

모피 코트를 입고 화려하게 출근하시던(제 눈에 순간적으로 그 분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편집장처럼 보였습니다) 그 중년의 여성분이 이유없이 미워보였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고용불안, 저임금, 차별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으로 끝없이 살아가야하는 그 여성분을위해,

또 하나의 뺑뺑이 삶을 시작한 새로 온 '연수생' 그녀를 위해

잠 시 가슴 아파했습니다.

1년 동안 그 여성분 정말 자주뵈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체국 홈페이지에 가서 항의성 글을 올리는 것 정도일 겁니다.

하지만 저의 그 항의가 먹힌다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게 아니라

명찰을 없애버리겠죠.

이런 제 자신의 무기력함에 한없이 허탈한 기분입니다.

많이 고민하고 많이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런 일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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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김수경 아저씨

 

저는 진보신당 창당 초기때부터 평택에 적을 두고 활동해왔었습니다. 부모님이 평택에 사셔서 저도 거기 얹혀 살았었거든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해왔는데,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 40대 이상의 아저씨 당원들이 다수였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 쌍용차 노조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분도 계시고 옥쇄 파업에 참여하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창당 초기, 우리는 그냥 모든 게 다 재밌고 신났습니다.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거 운동도 했고, 심상전 전 대표 사무실 개소식에도 가고, 한 당원님 댁을 선거 사무실로 등록해 엄청 큰 현수막도 달았습니다. 아파트 베란다를 다 가릴만큼 정말 큰 현수막이었는데 불행히도 그 아파트가 16층이어서 밑에서는 그냥 이불 널어놓은 것 같이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동지’라는 말은 영 어색하고 입에도 안 붙어 아저씨, 아저씨 하며 열심히 중장년층 당원들을 따라다녔죠. 그렇게 따라다니던 아저씨 당원들 중에는 김수경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를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어딜가나 심상정 심상정, 심지어 사무실 자기 자리 벽에도 심 전 대표 사진을 붙여놨다고 하시더라구요. 아저씨는 참 재밌는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유쾌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으셨어요. 왜 그런 분들 있잖아요. 특유의 재치와 밝음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
집에 담궈놓은 술이 엄청 많다며 남자 친구와 꼭 놀러오라고 그러셨는데...
그런 아저씨가 지금 옥쇄 파업에 참여 중이십니다. 파업 초기에 아저씨는 ‘투쟁은 내 체질’이라며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재밌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지내셨어요.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말라며 주위의 지친 동료들을 격려하고 ‘체력은 투쟁력’이라며 밥도 맛있게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원들과 지지 방문을 가면 반갑게 맞아주시며 재밌게 이 곳 저 곳 안내도 해주셨습니다. 농담삼아, 희망퇴직 신청하면 3천만원 더 준다는데 빨리 신청하시라고 하면 그런 소리가 어딨냐며 택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평소엔 그냥 옆 집 사는 재밌는 아저씨 같았던 분이 이렇게 싸움이 벌어지자 열심히 참여하시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전 정말로 아저씨는 ‘투쟁 체질’ 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파업이 길어지면서 점점 아저씨는 지친 모습을 보이십니다.
깊은 새벽까지 지지 방문 간 당원들과 얘기 나누시던 아저씨가 11시만 되면 피곤함에 그냥 어디라도 누우십니다. 점점 격해지는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동료들의 얘기를 하시며 아저씨 도 말수가 적어지셨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구사대가 투입됐습니다.
전경들은 공장의 출구를 막았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가족 대책위의 어머니들도 이제 정말 한계에 다다른 듯 그동안 쌓여왔던 많은 것들을 쏟아내십니다. 공장안에서는 노동자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 관제데모에 동원되어 각지에서 모여든 구사대는 머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습니다. 재밌나 봅니다. 사진 기자들은 싸움이 나는 곳마다 우루루 몰려들어 연신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저 공장안, 어디선가, 아저씨도 복면을 하고 쇠파이프를 들고 싸움을 준비하고 계실텐데......
그냥 자꾸 나쁜 경우가 생각나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자기 남편, 동생, 오빠, 형을 쌍용이라는 전장에 보낸 남은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어떨까요. 정말이지 제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저는 파업 참여를 말리고 싶을 것 같습니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국 선언을 하고 쌍용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어이 그들은 공권력을 투입했습니다. 이제라도, 단 한 명의 부상자가 나오기 전에, 이미 두 명의 희생자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공권력 투입을 중단하고, 해고는 살인이라 부르짖는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수경 아저씨 댁 진열장에서 저를 어여뻐해줄 주인과 손님을 움전히 기다리고 있을 그 술을 빨리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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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美行 - 7차> 예비 비정규 노동자, 10대와 20대를 만나다(프레시안)

"꿈이요? 안 가지는 게 차라리 나아요"

[美行] 예비 비정규 노동자, 10대와 20대를 만나다

 

이 기사는 "미행(美行) :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미디어 행동 네트워크"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지역 순회 사업, '미디어 게릴라들이 비정규 노동자들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미행'은 블로거, 만화가, 노동자, 작가 등 다양한 미디어 생산자들이 함께 모여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고민하는 프로젝트 팀이다. 미행의 지역 순회 사업은 진보신당과 함께 진행된다.

지난 12월 26~27일 '미행' 팀을 따라 경북 구미와 경산에 다녀왔습니다. 10대 실업계 고등학생 친구들과 20대 대학생들을 만나 학교생활과 비정규직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어요. 저 역시 그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같이 답답해하고 그랬답니다.

저는 '88만원 세대'입니다. 대학을 나왔지만 지방대 예능계열 학과를 졸업했고, 별다른 계급상승의 욕구도 없었기에 여성 고졸 학력 직업들과 알바를 전전했습니다. 늙으신 부모님한테 삐대고 살만치 뻔뻔스러운 성격도 못 되서 급한 대로 이 일 저 일 해댔죠.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데 그럼 어떡해요.

그 결과, 평균 4개월의 근무기간, 평균 90만원의 월급, 4대 보험? 뷁!!

이런 초라한 사회생활의 성적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계속된 실직으로 인한 불안정한 생활과 빈곤 때문에 꽤 심각한 우울증에 아주 심각하게 시달리기도 했었죠. 지금 20대들이 처한 이 곤란한 경제 상황은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나 인생 설계에만 악영향을 미치는 게 아닙니다. 정서적인 측면에 주는 상처도 커요. 사회 부적응, 우울증, 대인 기피증 등 여러 신경 질환과 자살 충동으로 젊은이들을 몰아넣습니다. 흔히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거창하게 칭송받는 젊은이들이 병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제가 그랬던 것처럼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낼 운명을 앞두고 있는 10대, 20대 친구들을 만나고 왔어요. 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짧지 않은 시간 내내, 하루 종일 편의점에 서서 시급 2,500원 받으며 식사도 제공받지 못 하고 지긋지긋하게 밀려드는 바코드들을 찍어대던 그 시절 나의 악몽, 등록금을 벌기위해 끊임없이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해야했던 내 친구의 악몽, 학자금 대출로 졸업 전부터 1000만원, 2000만원씩의 빚을 지게 되는 동기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가는 우리의 악몽이 망령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았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그래서, 그렇게도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 20대들이 처한 이 곤란한 경제 상황은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나 인생 설계에만 악영향을 미치는 게 아닙니다. 정서적인 측면에 주는 상처도 커요." ⓒ프레시안


구미. 무엇보다 죽은 독재자의 고향이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보수적 일 거라 예상되는 곳이었는데, 그 지역의 실업계 고교생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두 명, 커플인 듯 어울리는 한 쌍, 중소기업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인 남학생 한 명, 고등학생 인 줄 알았던 젊은 취업 담당 선생님 한 분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고졸이란 최종 학력으로 취업을 해야 하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는 이 친구들은 비정규직을 바로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비정규직이란 상시적인 고용불안 그 자체. 구조조정이 단행될 시 가장 먼저 희생되는 노동 약자들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의 부모님께서 그런 고용 불안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공사판 노가다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 빈부가 고착화 된 사회에서 가계를 통해 대물림되는 비정규직의 아픈 모습입니다.

현실에 대해 너무나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이 친구들과의 대화 끝에 우리는, 우리들의 잊혀진 로망인 10대의 감성 같은 것에 굉장히 목말라졌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꿈이 뭐에요?"

돌아오는 답변, 꿈은 꾸어봤자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현실을 빨리 직시하는 게 낫다. 먹고 살기도 벅찬 세상에 꿈은 필요 없다. 평생 가지고 갈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

취직, 먹고 사는 것, 이것 외에는 무엇도 바랄 수 없는 10대들. 우리 사회는 왜 젊은 그들에게서 꿈을 약탈했을까요? 그리고 언제까지 우린 이런 약탈에 고요히 동조하고만 있을까요? 꿈은 사치라는 젊은 그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미래가 있을까요?

구미의 전교조 사무실에서 10대들을 만나고 우리는 밤길을 달려 경산에 이르렀습니다. 대구 지역의 대학생들을 만났어요. 인터뷰에 응해 준 다섯 명의 대학생들 가운데 연극의 꿈을 가진 한 친구 외에 누구도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서 '이렇다'라고 말하지 못 했습니다. 모두들 그저 막막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선배, 동기들의 얘기만 늘어놓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모두들 그저 막막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선배, 동기들의 얘기만 늘어놓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프레시안
곧이어 2008년 대한민국 대학 사회의 숨 가뿐 일상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등록금이 매년 가파르게 오르기 때문에 일단 학교에 입학한 이상 최대한 빨리 졸업하는 게 가장 돈이 적게 들게 되죠. 그래서 남학생들은 종종 대학 4년 과정을 먼저 마치고 군대에 입대합니다. 어떤 가난한 학생들은 휴학을 해서 등록금을 벌어 수업을 듣고, 돈이 떨어지면 또 휴학해서 등록금을 번 후 또 학교를 다니는 식으로 대졸 학력 쟁취를 향해 진격하고 있고요. 비정규직 노동자인 아버지와 알바를 하시는 어머니께서 당신들의 노후에 대한 준비는 전혀 못 하시고 사범대를 다니는 자신에게 마치 투자하듯 학비를 대주신다는 하소연(?). 이렇듯 비싼 대학 졸업장을 딴 지 채 몇 년 안 된 저로서도 새로 듣는 얘기가 뭔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이럴 수도 있구나'하는 흥미진진함에 어느새 피곤함도 잊어버리고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한 후 고 몇 년 사이에 또 대학생들의 형편은 더 악화 된 듯 보였습니다.

2006년도에 편의점에서 시급 2500원을 받으면서 야간 알바를 했다는 여학생의 이야기는 참 화나더군요. 어떻게 밤새 일을 시켜놓고 시급 2500원을 줄 수 있는지. 또 사장에게 최저 시급을 요구해봤자 결국 싫으면 나가라는 얘기밖에 들을 수 없는 힘없는 알바생의 현실이 토해져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비정규직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구질구질 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 따위는 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다른 대학생들이 다 실업자나 비정규직이 될지라도 나는 자격증 많이 따고, 토익 공부 열심히 하고, 학과 성적 관리하고, 거기에 보험으로(!) 공무원 시험도 준비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어떻게든 나 하나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맹목합니다. 이것은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대학생이라는 특권 의식에서 발로하는 것입니다. 사방 천지에 널려있는 고깟 대학생이 뭐라고 말예요.

보다 깊은 원인은 우리 모든 국민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공교육에 있습니다. 초·중·고 12년의 공교육 과정 동안 공동체, 연대라는 가치보다는 경쟁, 우위, 승리라는 가치만을 배워온 결과입니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나 하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사고가 머릿속 깊숙이 박혀있는 거죠. 저처럼 경쟁에서 도태된 다수의 삶은? 물론 알바 아닙니다. 그치들도 자기들이 다 각자 알아서 살아가는 거죠.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그 때 어느 일간지에 이런 만평이 실렸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의 기쁨은 내 일처럼 함께 기뻐하고, 기륭 노동자들의 고통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사람들이 자기 편한 대로 들이대는 이중 잣대에 대한 슬픈 꼬집음. 이 편협한 이중 잣대의 가장 큰 피해자는 20대인 당사자이면서도 끝내 그 편협함 안에서 스스로들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입히고 있는 그들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친구들도 당장 먹고 살기위해 아무데나 취직해서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그냥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나처럼 꿈도 희망도 없이 매일 술이나 퍼마시며 지내게 될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마음 한 켠이 어두워졌습니다.

취업을 앞둔 그 여고생이 월급 40만원을 받고 미용실에서 일하지 않게 되길 바래봅니다. 유아 교육을 전공한 그 여대생이 월급 60만 원을 받고 어린이 집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을 보살피는 중노동에 시달리지 않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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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정 블로거·진보신당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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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에 다녀왔어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얼굴 한 번 비추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제껏 한 번도 가질 못했습니다. 바쁘고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에도 거기까지 간다는게 좀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가지 말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륭에서 보자는 지인과의 약속을 이미 여러번 파토낸 까닭에 이번에는 꼭 가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약 두시간에 걸친 여정 끝에 그곳, 기륭에 도착했죠.

 

직접 와보니 농성장은 생각보다 작고 평범한, 그저 그런 골목길이었습니다. 컨테이너와 천막, 경비실 위의 철망 각종 단체의 깃발과 연대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들에는 4년이란 시간의 아련한 고단함들이 묻어났습니다. 94일간 단식을 하셨던 김소연 분회장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말이지 뼈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발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참 씩씩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요.

 

문화제는 시종일관 밝게 진행되었습니다. 조합원님들, 연대 방문한 사람들 모두는 작은 일에도 크게 웃고 떠들며 아주 즐거워합니다.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으면 이 힘든 싸움 버텨낼 수 없기에, 이 고단한 나날들을 견뎌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즐거움이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기륭 네티즌 연대 1기 운영진이 해산하고 2기 운영진이 출범한다고 인사를 합니다. 앞으로 고생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모한 아빠들이라는 그룹(?)이 나와 노래를 합니다. 두 분다 애아빠시라는데 오른쪽 분은 애아빠라는 사실이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 훈남입니다. 그 분 쳐다보는 사이 노래가 끝납니다.

 

문화제가 끝나고 막걸리를 한 잔씩들 합니다. 평소에는 입맛에 맞지않아 잘 안 먹던 홍어 무침이 너무나 맛있습니다. 당원들과 여러 얘기를 나눕니다. 당원들을 만나면 참 할 말이 많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에세이스트 김현진씨와 인권 운동가 박래군 아저씨가 보입니다. 수줍음 많은 저는 술기운을 빌려 김현진씨에게 다가가 당신 책도 샀다고. . . 글 잘 보고 있다고 한 마디 했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2차를 갔습니다. 노래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그뒤부턴 기억이 선명치 않습니다. 일군의 사람들이 맥주를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박래군 아저씨가 제 옆에 앉으시는군요. 이미 술에 기분좋게 취한 저는 래군 아저씨에게 술 주정 같은 걸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계속 자기는 노래 못 해서 안 할 거라고 말 하면서 연신 곡목록을 찾습니다.

 

노래방을 나와 좀 걸었습니다. 귀가하시려던 래군 아저씨가 잡혀 오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 . .

어제 끝까지 같이 있었던 여성 멤버 정주영씨가 인사를 하고 출근길에 오릅니다. 나는 지금 찜질방 여자 탈의실 375번 옷장 앞에서 찌그러져 자고 있습니다.

 

주위의 권유대로 수면실로 올라가 잠을 청합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제 같이 놀던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며 우산을 들고 오셨습니다. 기륭으로 가잡니다. 장투 사업장에 아침부터 술냄새 풍기며 가는게 너무 민망했지만 사양 못하고 따라나섭니다.

 

기륭 농성 천막 안에 누웠습니다. 천막의 반은 각종 투쟁 용품들이 쌓여있고 반은 전기 장판이 깔려있습니다. 한 쪽 벽에 10월 일정이 쓰여있는 화이트 보드가 걸려있습니다. 무슨 집회, 무슨 집회, 무슨 회의, 무슨 회의, 교섭 또 교섭. . .  이런 일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에 불과했던 이분들을 시위 전문가로 만든 세상이 슬펐습니다. 마침 비도 처량맞게 오는 천막안에서 주체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립니다.

 

한 여성 노동자가 94일간 단식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자본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4년간, 그분들 말대로 안 해 본 것이 없을 겁니다. 이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이렇게 고단한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걸까요. 4년 했으니 10년 마저 채울까요? 그러면 정규직화 쟁취할 수 있는걸까요? 너무 막막했습니다.

 

평범하고 허름한 어느 골목. 천막을 치고 컨테이너를 들여놓은 그곳에서, 김포 공항 착륙 항로이기에 쉴새없이 비행기 소음이 들리는 그곳에서, 오랜시간 싸워온 그 분들께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언론 보도를 통해 낯이 익은 한 조합원님께서 설거지를 하고 계십니다. 저를 보며 학생 밥먹고 가야돼지 않냐며 잡으십니다. 그 마음. 감사하게 받고 떠났습니다.

 

그저 건강하시기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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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88만원세대는 거리가 좋다!

요즘 저는 작은 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부모님이 청춘을 다바쳐 뼛골빠지게 일해서 마련하신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저는 정말이지 이 곳에서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답니다. 오죽하면 추석 연휴에 아침부터 pc방와서 라면먹고 있겠어요.

 

편하게 집에서 담배도 피우고 백수 남친도 불러서 밖으로 돌아다니며 돈 쓸 것 없이 데이트 하고, 샤워할 때 화장실에 옷입고 들어가서 벗고 또 옷 입고 나올 필요 없이 걍 편하게 홀딱 벗고 화장실로 입장하고, 제가 좋아하는 현미밥도 마음껏 해먹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이 집으로부터 독립할 방법이 없어요.

경제적인 능력이 없거든요. 월세 방 한 칸 얻더라도 보증금 1000만원은 있어야 되는데요. 뭐~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걸 쪽팔려 하는 것 같던데 저는 이 나이 되도록 단돈 만원도 모아놓은 돈이 없답니다.

 

글구 보증금을 어찌어찌 마련해서 월세 20만원짜리 방을 얻는다해도 이것저것 공과금까지(핸드폰요금 포함) 합하면 평균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30만원인데요.  별다른 능력 없는 88만원 세대는 유지할 수 없는 가계랍니다.  

 

저는 정말로 명박씨가 말하는 부모 등골 빼먹는 나약한 젊은이인가봐요. 사실 요즘 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이러고 살고 있는게 사회의 책임인가 나의 책임인가 헷갈릴 때가 있답니다.  

 

이렇듯 내 몸 하나 편히 쉴 곳이 없는 저는 요즘 부쩍 거리로 나돌아다닙니다. 이 거리라는 것이  번쩍번쩍한 간판 불빛아래 잘익은 고기 냄새와 술취한 사람들 냄새 북적북적한 그런 거리를 말하는게 아니고요.

각종 투쟁 현장과 선전전, 행사,회의들을 말하는 겁니다. 

 

괜히 마음 불편한 집에 들어가 있는건 싫고, 돈이 없으니 딱히 갈 데도 없고 앞서 나열한 곳에 참여하고 있으면 재미와 감동이 있으니 가장 좋습니다. 이리하여 갈 곳 없는 88만원 세대는 그저 거리를 방황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전 그게 좋답니다.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고, 현장의 그 많은 신념과 희망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만난 많은 사람들. . .  연대만이 희망인 우리들. . . .

 

하지만 한 편으론 마음 한구석에 짐을 들여놓았습니다.

나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한마디로 무능한 나는 어떻게 생존을 유지할 것인가.

언제까지 부모님께 빌붙어 살아야하나.

언제까지 마음 둘 곳 없이 거리를 떠돌아다녀야 하나.

 

이 사회는, 자신의 미래인 젊은이들에게 언제까지 이렇게 가혹할 것인가.

젊은이들은 언제까지 이런 고문을 견디고만 있을것인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88만원세대'라는 책을  근 반년에 걸쳐(^^;) 엊그제 다 떼었습니다.

몹시 우울했지요. 이놈의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 우울하게 만든다고 애꿎은 책 탓을 해댔지만,

사실은 그것이 진짜 현실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망가득한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만나고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에 저는 그다지도 현장들을 쫓아다니나 봅니다.  추석연휴가 끝나면 기륭에 갈 생각입니다.

 

어느 가난한 20대는 희망을 만나기위해 언제까지 거리를 방랑해야만 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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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4

8월 2일 오후 5시 20분, 청계광장엔 이미 백여명의 성난 군중이 모여있다. 백골단을 풀고 최루액을 쏘고 인도로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가 잡아내겠다고 한껏 엄포를 놓았음에도 이들의 분노는 식을줄 모른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린다. 전운이 감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왜 여기에 있는가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 어김없이 전경들이 청계광장을 막았다.  이제 나도 시위현장에 좀 익숙해진 듯하다. 전에는 무서워서 전경들근처에 가는 것도 꺼렸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그들 곁에서 그들의 표정을 보고 대화를 듣는다. 

 

시위대는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다. 한 전경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진짜 폭력이 뭔지를 보여줘야겠구만. " 이 무서운 정서에 몸이 후드득 떨린다. 어느새 그들은 이토록 폭력에 무감해진걸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세상에 살고있다.

 

가두행진을 시작한다. 전경들이 막은 까닭에 난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혼자 서울시내를 걸었다.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전경들이 무리를 지어 나를 스쳐지나간다. 나는 혼자인데 무장한 그들은 떼를 지어 뛰며 고함을 지른다. 무슨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패를 사용하는 듯한 '퍽퍽' 하는 소리도 들린다.

 

오랫동안 걷고 길을 물어 드디어 본대와 합류한다. 아는 얼굴이 보인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우리는 계속 걷는다. 어디로 가는건지, 언제까지 걷는건지, 모른다. 이미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홀로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한다. 정권이 이 사회를 어디까지 몰고갈건지, 이명박 정권이 언제까지 버틸건지, 이명박 이후에는 어떻게 될런지.  혹, 박정희 이후가 그랬던 것처럼, 전두환 이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바람보다 못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건 아닌지.   이미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그 후퇴한 민주주의가 다시 진보하려면 또다시 기나긴 시간을 고통속에 보내야하는건 아닌지 , 우려스럽다.

 

명동이다. 앞뒤로 경찰이 포위했고 우린 그저 퇴로를 머릿속에 그리며 진압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난 또 겁에 질려 표정관리가 안 된다. 주위에서 그만 들어가라고 권하고 바로 옆에 있는 명동역 간판이 유난히 빛나보이지만 역시 여기서 물러나긴 싫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으로써 가진 오직 하나뿐인 자존심이다. 

 

시위대는 걷기 시작한다. 명동성당 앞이다.  멜로디언과 리코더 등 소박한 악기들로 구성된 악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한다. 눈물이 난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는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내고있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가진자들이 그 천박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비무장한 시민들을 방패와 몽둥이로 공격하고  갖가지 싸구려 수단들을 동원해 탄압하는 이 만행을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보아왔던 그 수많은 어르신들처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다. 

힘들고 고단한 길이지만 어쩔수 없다. 내 마음속 깊숙이 소소하게 간직해두었던 작은 꿈인

자유를 위해 나는,  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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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8월 1일 저녁 7시 KBS 본관앞. 침탈 의지가 없는 시민들로부터 KBS를 지키기 위해 전경들이 몇 겹으로 에워쌌다. 우리는 KBS를 공격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손에 초 하나 든 우리를 폭도로 규정하고 시위대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전경들을 배치시켰다. 오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공안정국이 실감난다.

 

일단 퇴로를 확보한다. 내 뒤쪽에 드넓은 여의도 공원이 있으니 여차하면 무조건, 아주 열심히 뛰면된다. 겁이 많은 나는 언제나 집회의 후미, 혹은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선두에서 고생하시는 분들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난 아직 그분들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오늘 집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겁에 질려 일찌감치 집회 참가 포기까지 생각해보았다. 오늘은 정말로 맞을 것 같다. 나 혼자와서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더 두려웠다.

 

시위대의 수도 너무 적었다. 아니 전경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정말 쫄아서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긴 싫다. 무섭다고 이대로 물러나면 이 정권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알겠는가.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 이것이 국민 주권주의 이고 헌법 1조 1항의 정신이다.  참내, 이 정권은 시계롤 거꾸로 돌리고 돌려 나마저도 중학교 사회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네모난 교실에서 단편적으로 습득한 지식을 이제 온몸으로 체득한다.

 

암튼 이렇게 떨고있던 차에 하늘색 단체티를 맞춰입은 범청학련 통선대가 등장한다. 평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직인데 이럴때 보니 너무 반가워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문화제가 시작된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여의도 공원내 잔디밭에 앉아있다가 KBS 본관앞 본대로 자리를 옮긴다. 문화제가 차질없이 진행되며 긴장이 좀 풀렸다.

 

TV에서 보았던 다인 아빠가 보인다. 저녁식사를 하지못해 라면이라도 얻어먹어야지 했는데 오늘은 음료수만 나누어준다. 아쉬운 마음에 음료수라도 한 컵 얻어먹는다. 박봉인 시민단체 간사가 휴가를 가니 밥 한끼 사먹을 돈도 아깝다.

 

문화제가 반이상 진행되었을 때 칼라 TV가 나타났다.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다가 칼라 TV를 보니 반갑다. 어디갔다 이제 왔는지 하여간 반갑다.

 

10시, 문화제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한다. KBS가 청와대라도 되는냥 전경들이 꽁꽁 싸맸다. 이제 곧 낙하산 투하할 요충지이니 소중히 지켜줄만도 하다. 안 쳐들어간다, 이놈들아. 욕이 절로 나온다.

 

난 이쯤에서 빠져나온다. 여의도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를 봤다. 사실 우리 초면은 아닌데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달 시사인 거리 편집국에 잠깐 들러서 얼굴도장 찍었었다. 그리고 공짜로 시사인 한 권 받아들었었지 ^^

 

그에게 다가가 시사인 잘 보고 있다고 열심히 잘 하시라고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숫기없는 나는 그냥 돌아선다. 그는 내가 시사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까? 맘 같애서는 지금 메고있는 배낭속에 있는 시사인 46호 고재열 기자 기사에 사인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음~ 역시 못하겠다.

 

시사인 기자들 중에 내가 얼굴 아는 기자는 주진우, 고재열 정도인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잘 생겼으면서 말도 재밌게 잘 한다는 것이다. 난 정말 그들이 좋다.

 

역시 후회된다. 고재열 기자와 몇마디라도 대화 나눠보는건데 . .  . . . .

 

경찰쪽 주장에 의하면 채증 사진이 많이 확보돼 있다고 한다. 그걸 기초로 대량으로 지명수배를 내리겠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집회 참여시 마스크를 착용해야겠다.  내가 지명수배자가 되면? 나야 상관없는데 연로하신 부모님이 걱정이다.

 

경찰이 내 글도 보고 있으려나? 나도 2년쯤 후엔 인터넷 신뢰저해 사범이 되려나? 그럼 민주화 투사 되는건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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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집회 후기(?)

최근들어 이명박 정부의 공안 탄압이 날로 수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집회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시민들이 못 모이게 청계광장을  닭장차로 채우고, (세상에, 그 작은 수표교에 닭장차가 들어가도 안 무너지고 버티더군요.) 전경들은 바리케이트를 쳐 광장안에  우리를 가두었습니다. 시작부터 선공(?)이 들어온거죠.

 

때마침 화장실 용무가 급했던 저는 시민들이 출입을 못 하게 막아놓은 청계광장 인근 빌딩에 차마 들어가지 못 하고(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사람들도 우리 때문에 수도요금이 많이 나와서 골치아플 것 같애서요) 청계천으로 빠져나와 오랫동안 걸은 뒤 통로로 올라와서 그 인근 상가의 화장실을 이용해야했어요.

 

화장실 가는길에 보았던,  청계광장이 봉쇄됐다는 소식을 듣고 구호를 외치며 우회해서  합류하는 유모차 부대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는지요. ^^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뚫었는지,아니면 다들 저같이 청계천을 오랫동안 걸어 빠져나왔는지 암튼 화장실 다녀온 사이 모두가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행진이 시작됐죠.

 

요즘은 문화제를 오래하지 않습니다. 참가자들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앉아있는걸 원치 않거든요. 왜냐면 너무 열받으니까, 화가나서 몸에서 에너지가 마구마구 생깁니다. 그래서  행진이라도 하면서, 정말 뭐라도 하면서 에너지를 해소하길 원해요. 저도 그렇구요.

 

어쨋든 그렇게 행진은 시작됐고, 전경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우린 정말 행진도 아니고, 뭣도 아닌 정말 우스꽝스러운 걸했어요. 직선으로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만 한 겁니다. 앞으로 전진했다, 막히면 후진하고, 좀 지나서 괜찮다 싶으면 전진했다, 아니다 싶으면 후진하고, 저도 집회참가 3년차인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어요. 우리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듯한,  경찰에 의해서 집회가 조종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죠.

 

10시쯤 어느 방향에선가(제가 서울 안 살아서 거기가 어딘지 잘 몰라요) 전경이랑 붙었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그쪽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전 너무 무서웠어요. 집회 시작부터 정말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거든요.

 

게다가 저랑 같이 다니던 진보 강남 당원들이 어느샌가 깃발을 내렸고 저만 낙오돼 혼자 있었어요. 전 정말 당황했답니다. 족히 만오천은 되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열명정도 되는 진보강남 당원들은 찾을수도 없었습니다. 당원들 전화번호도 몰랐구요.

 

이 살벌한 분위기의 집회에서 저는 달랑 혼자 남겨졌습니다.  

그래서. . . .           천안행 마지막 전철을 타고 집에 내려왔습니다.

 

으~ 저에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도 집회 무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울 촛불 참석하는 날은 늦게까지 남아있다 외박도 많이 했어요. 근데 그때는 항상 제옆에 의지할 누군가가 있어줬어요. 그래서 무서워도 참고 버틸 수 있었구요. 근데 그 날은 정말 아무도 없었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뉴스를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가고, 다치고, 심지어 어떤 술취한 놈이 차로 들이박고 그랬더군요. 지난 밤에 만났던 사람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치진 않았는지, 혹 짐 집이 아니라 서에 있는 건 아닌지,  이제 막 입당한 27살의 정치 초보 그 아가씨는 너무 놀라 울지나 않았는지. . . . .

 

그렇지 않아도  전 요즘 나름대로 갈등이 많답니다. 제가 겁이 너무 많거든요. 저는요. 정말. 공포나 스릴러 영화는 물론이고 액션 영화도 19세 이상 등급은 못 본답니다.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라서요. 무섭단 말이에요. 영화를 보다가 그런 장면이 나오면  전 정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답니다.

 

그런데 또 무섭다고 집회에 참여 안 하거나, 진압들어오기 전에 빠지는 건 어청수의 강경 진압 목표에 부합하는 행위잖아요. 그러니 참여 안 할 수도 없고, 가자니 무섭고, 정말 고민이에요. 이럴때 든든한 남친이라도 있으면 훨씬 나을텐데. . . 손 꼭 붙잡고 도망다니고, 혹시나 맞게 되면 같이 맞고.. . .  ㅋㅋ  

 

생각해보니 저도 집회 참가 3년차인데 요즘처럼 무서웠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FTA 반대 , 비정규직 철폐, 노동절, 민주노총 총파업 등 각종 집회에 참석해봤지만 이렇게 무자비하게 살수하고 진압들어온 적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8월1일부터 5일까지 휴가입니다. 저는 이번 휴가를 서울 촛불에서 보낼 계획이랍니다. 촛불때마다 막차시간되면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할 것 없이 그냥 밤이 하얗게 새도록 눌러있을 겁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무서워요. ㅡㅜ

 

저의 이 무서움증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오늘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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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독재

정말로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불과 30년전, 독재자 박정희는 살해되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죽임당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피속에 독재는 막을 내렸습니다.

 

80년 서울의 봄이 찾아들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군부독재는 오랜시간 지속되었지만,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피로 막을 내리고 문민 정부가 들어섰죠.

 

대한민국 국민들의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 기억속에는 독재의 비극이 아직도 가슴아프게 남아있습니다. (혹시 나만 그런건가요?)

 

그런데 어떻게, 또, 이런, 독재 권력을, 그것도 국민들 손으로 직접 만들어주게 된 걸까요?

지금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아무런 장치가 없습니다. 독재입니다.

그들이 공기업 민영화를 하든, 영어 몰입 교육을 하든, 땅파서 운하를 만들든, 값싸고 질좋은 미국산 쇠고기를  단체급식으로 초등학생들한테 먹이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마땅한 세력이 없습니다.

그저 착한 시민들이 손에 촛불 하나들고 거리로 나서는 방법밖에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더더군다나 안타까운 것은 국민들 스스로가 선거라는 아주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이 독재권력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캐캐묵은 얘기지만 지난 대선당시, 이명박은 전과 14범이고, 현대 건설 부회장으로 재직당시 회사가 부도난 된 무능력한 CEO이고, BBK  사건으로 알 수 있듯 도덕성도 현저히 떨어지는 인물이고,  이외에도 기타 등등 그에대한 수많은 반대 주장을 한나라당을 제외한 모든 당에서 열심히 국민들에게 알렸지만, 국민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저 막연히, 정말이지 그저 막연히, 빈민에서 대기업의  CEO까지 계급 상승한 그의 성공 신화에 매료되어 그저 현대건설 부회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지 생각했어요. 자기도 고생했던 사람이니까 서민들 마음 알아주겠지. . . . . .

 

정말 수많은 지식인들, 언론인들이 747 경제 공약은 달성할 수 없는 허구다,  대운하는  말도 안되는 사업이다. 이명박은 사기꾼이다. 아무리 열심히 외쳐도 국민들은 이런 주장과 경고들을 다 외면했습니다.

 

게다가 4.9총선 당시까지도 꺼지지 않은 경제 발전의 열망에 힘입어 거대 여당이 조직되었고 결국은 독재 타도 이후 불과 30년만에 지금과 같은 독재권력이 생산되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이명박의 남은 임기 동안 그 댓가를 그야말로 혹독하게 치루게 될 것입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기본 정책은 모든 공기업의 민영화입니다. 시멘트 공사입니다. 복지정책의 축소입니다. 부자들의 감세입니다.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전기, 수도, 가스, 의료보험, 철도등  많은 공기업이 민영화되어  요금이 폭등할 것입니다. 이런저런 시멘트 공사를 진행하여 생태를 파괴하고 일부 건설회사들의 배만 채워줄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금을 줄이고 복지 예산을 줄여  서민과 빈민층의 삶은 더욱 황폐화될 것입니다.

 

앞으로 5년동안 국민들은 쉼없이 서울 광장에 집결해 촛불을 켜는 힘들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힘없는 국민들이 아무리 촛불을 쉼없이 켜고, 전경에게 맞아 구타 당해도, 이번 쇠고기 수입 장관 고시에소 보듯이 그 효과는 미미할 것입니다. 그들은 거대권력을 지녔거든요. 바로 국민들이 스스로 그들에게 이런 거대권력을 쥐어줬습니다.

 

우리는, 군부독재에만 당해봤기 때문에 민주주의 독재(민주주의를 악용한, 정통성 있는 독재)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나 봅니다. 지난 두번의 선거를 이렇듯 허무하게 떠나보낸 88만원세대와  30대(특별히 규정할만한 세대론이 없네요;), 386세대는 요즘 뉴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전 참 억울하답니다. 전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을 지지한 적도 없는데 왜 나까지 이런 고생을 해야하냔 말입니다.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촛불 집회참여하느라 돈도 많이 쓰고 한 번 다녀오면 무지 피곤하답니다.  물론 촛불집회의 즐거움도 크게 누렸습니다. 참 재밌더군요. 맨날 그밥에 그나물인 멤버들이 모여 뒤지게 욕먹으면서 가두행진 하다가 정말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에너지로 가두행진하는 그 틈새에 끼어보니 엄청 감동적이더군요.

 

하지만 한 편으로 너무 억울하답니다. 선거만 제대로 했으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됐을텐데 ~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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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나라

 

 

00학번을 달고 국립대 영문과에 진학한 적이 있었죠.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걸 가서 밤새 술도 먹고 훈남 동기와 살짝 눈빛도 맞추고 그랬습니다. 다들 입학식도 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인생의 반쪽을 찾아 헤매다녔죠. 저도 처음 경험하는 그 환상적인 유흥에 빠져 한창 부어라 마셔라 하던 그 당시, 내 귀를 스쳐지나간 외마디가 있었어요. “놀자 대학생 몰라? 걍 술 먹고 놀다가 시험 때만 좀 공부하면 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이런 말도 들었어요. ‘대학 4년간의 생활동안 만 명의 사람을 만나거나, 만 병의 술을 먹거나, 만 권의 책을 읽어라.’ 크~ 정말 대딩의 낭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마도 제가 그런 말들을 들은 거의 끝물 학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후, 02학번이 되어 지방대 연극 영화과에 진학했습니다. 무서운 선배님들께 90도로 인사를 하고 밤 11시에 강의실에 집합해 콘크리트 바닥에 대가리를 박는 빡 센 일정 속에서도 저는 틈틈이 학교 도서관을 찾았어요. 학기 중 학교 도서관은 참 한가했었어요.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그리고 시험 한 달 전부터 빈자리가 조금씩 조금씩 차더니 이내 도서관은 만원이 됐죠. 시험은 봐야하니까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는 학교를 6년 동안 다녔어요. 그 사이 세상은 또 시나브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눈치 채지 못 할 속도로 조금씩 도서관 자리는 차 갔어요. 드디어 제가 졸업할 무렵에는 방학 때도, 막 개강한 3월 달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로 바글바글 해졌죠. 이제 ‘놀자 대학생’은 옛말이 된 거에요. 공부 안 하고 맨날 술 먹고 놀러 다니기 바쁘기로 유명했던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싹 변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참 바람직한 학생 본연의 모습으로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들은 참 바쁩니다.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거든요. 기본적으로 토익과 영어 회화도 해야되구요. 가능한 한 많은 자격증도 따놔야 돼구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공무원 시험에도 살짝 한 다리 걸쳐놔야 합니다. 학점 관리를 위한 학과 공부도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취직할 때 성적표 제출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생활비라도 벌려면 법정 최저시급 남짓 주는 편의점 알바도 해야 해요. 어학연수라도 가려는 계획이라면 시급이 더 높은 더 힘든 일을 해야 하구요. 불안한 미래 속에서 그래도 자기는 이렇듯 열심히 공부하므로 월급 88만원받는다는 비정규직이 안 될 거라 수시로 자위하며 힘든 하루를 견뎌냅니다. 제가 막 4학년이 된 3월 달에 들어간 어느 교양 수업에서 만난 갓 입학한 20살짜리 신입생은, 지금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그녀에게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말 해 줄 수는 없었어요. 그녀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 결코 허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인생의 수순을 밟고 있다면 마땅히 지녀야 할 20대의 생기와 눈빛을 잃어가요. 아직 젊은 그들은 너무 지쳤답니다. 꿈이나 희망이나 이런 것들은 다 사치에 불과해요. 그들의 구세주는 오직 취직입니다. 7,80년대처럼 보릿고개가 있는 시대도 아닌데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해요. 각종 공부에 너무나 지친 그들은 뭔가를 생각하고 머리를 써야 하는 게 싫어요. 7% 경제 성장이라는 공약이 실현가능한 건지 불가능 한 건지에는 그런 것에도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해줄 것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상컨대, 악순환은 되풀이 되겠죠.

 

지금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의 도서관은 학생들로 넘쳐납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갖가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죠. 앞에서 제가 소개했던 말들을 08학번 새내기들은 이렇게 듣고 있을 겁니다. ‘만 권의 토익 책을 보고, 만 권의 자격증 책을 보고, 만 권의 공무원 시험 책을 봐라.’ 꿈도 희망도 잃은 젊은이들을 구해주세요. 그들 스스로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한 게 많아요. 생기없는 젊은이들의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당신들의 딸 아들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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