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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에 다녀왔어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얼굴 한 번 비추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제껏 한 번도 가질 못했습니다. 바쁘고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에도 거기까지 간다는게 좀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가지 말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륭에서 보자는 지인과의 약속을 이미 여러번 파토낸 까닭에 이번에는 꼭 가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약 두시간에 걸친 여정 끝에 그곳, 기륭에 도착했죠.

 

직접 와보니 농성장은 생각보다 작고 평범한, 그저 그런 골목길이었습니다. 컨테이너와 천막, 경비실 위의 철망 각종 단체의 깃발과 연대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들에는 4년이란 시간의 아련한 고단함들이 묻어났습니다. 94일간 단식을 하셨던 김소연 분회장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말이지 뼈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발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참 씩씩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요.

 

문화제는 시종일관 밝게 진행되었습니다. 조합원님들, 연대 방문한 사람들 모두는 작은 일에도 크게 웃고 떠들며 아주 즐거워합니다.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으면 이 힘든 싸움 버텨낼 수 없기에, 이 고단한 나날들을 견뎌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즐거움이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기륭 네티즌 연대 1기 운영진이 해산하고 2기 운영진이 출범한다고 인사를 합니다. 앞으로 고생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모한 아빠들이라는 그룹(?)이 나와 노래를 합니다. 두 분다 애아빠시라는데 오른쪽 분은 애아빠라는 사실이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 훈남입니다. 그 분 쳐다보는 사이 노래가 끝납니다.

 

문화제가 끝나고 막걸리를 한 잔씩들 합니다. 평소에는 입맛에 맞지않아 잘 안 먹던 홍어 무침이 너무나 맛있습니다. 당원들과 여러 얘기를 나눕니다. 당원들을 만나면 참 할 말이 많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에세이스트 김현진씨와 인권 운동가 박래군 아저씨가 보입니다. 수줍음 많은 저는 술기운을 빌려 김현진씨에게 다가가 당신 책도 샀다고. . . 글 잘 보고 있다고 한 마디 했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2차를 갔습니다. 노래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그뒤부턴 기억이 선명치 않습니다. 일군의 사람들이 맥주를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박래군 아저씨가 제 옆에 앉으시는군요. 이미 술에 기분좋게 취한 저는 래군 아저씨에게 술 주정 같은 걸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계속 자기는 노래 못 해서 안 할 거라고 말 하면서 연신 곡목록을 찾습니다.

 

노래방을 나와 좀 걸었습니다. 귀가하시려던 래군 아저씨가 잡혀 오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 . .

어제 끝까지 같이 있었던 여성 멤버 정주영씨가 인사를 하고 출근길에 오릅니다. 나는 지금 찜질방 여자 탈의실 375번 옷장 앞에서 찌그러져 자고 있습니다.

 

주위의 권유대로 수면실로 올라가 잠을 청합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제 같이 놀던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며 우산을 들고 오셨습니다. 기륭으로 가잡니다. 장투 사업장에 아침부터 술냄새 풍기며 가는게 너무 민망했지만 사양 못하고 따라나섭니다.

 

기륭 농성 천막 안에 누웠습니다. 천막의 반은 각종 투쟁 용품들이 쌓여있고 반은 전기 장판이 깔려있습니다. 한 쪽 벽에 10월 일정이 쓰여있는 화이트 보드가 걸려있습니다. 무슨 집회, 무슨 집회, 무슨 회의, 무슨 회의, 교섭 또 교섭. . .  이런 일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에 불과했던 이분들을 시위 전문가로 만든 세상이 슬펐습니다. 마침 비도 처량맞게 오는 천막안에서 주체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립니다.

 

한 여성 노동자가 94일간 단식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자본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4년간, 그분들 말대로 안 해 본 것이 없을 겁니다. 이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이렇게 고단한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걸까요. 4년 했으니 10년 마저 채울까요? 그러면 정규직화 쟁취할 수 있는걸까요? 너무 막막했습니다.

 

평범하고 허름한 어느 골목. 천막을 치고 컨테이너를 들여놓은 그곳에서, 김포 공항 착륙 항로이기에 쉴새없이 비행기 소음이 들리는 그곳에서, 오랜시간 싸워온 그 분들께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언론 보도를 통해 낯이 익은 한 조합원님께서 설거지를 하고 계십니다. 저를 보며 학생 밥먹고 가야돼지 않냐며 잡으십니다. 그 마음. 감사하게 받고 떠났습니다.

 

그저 건강하시기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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