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나라

 

 

00학번을 달고 국립대 영문과에 진학한 적이 있었죠.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걸 가서 밤새 술도 먹고 훈남 동기와 살짝 눈빛도 맞추고 그랬습니다. 다들 입학식도 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인생의 반쪽을 찾아 헤매다녔죠. 저도 처음 경험하는 그 환상적인 유흥에 빠져 한창 부어라 마셔라 하던 그 당시, 내 귀를 스쳐지나간 외마디가 있었어요. “놀자 대학생 몰라? 걍 술 먹고 놀다가 시험 때만 좀 공부하면 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이런 말도 들었어요. ‘대학 4년간의 생활동안 만 명의 사람을 만나거나, 만 병의 술을 먹거나, 만 권의 책을 읽어라.’ 크~ 정말 대딩의 낭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마도 제가 그런 말들을 들은 거의 끝물 학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후, 02학번이 되어 지방대 연극 영화과에 진학했습니다. 무서운 선배님들께 90도로 인사를 하고 밤 11시에 강의실에 집합해 콘크리트 바닥에 대가리를 박는 빡 센 일정 속에서도 저는 틈틈이 학교 도서관을 찾았어요. 학기 중 학교 도서관은 참 한가했었어요.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그리고 시험 한 달 전부터 빈자리가 조금씩 조금씩 차더니 이내 도서관은 만원이 됐죠. 시험은 봐야하니까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는 학교를 6년 동안 다녔어요. 그 사이 세상은 또 시나브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눈치 채지 못 할 속도로 조금씩 도서관 자리는 차 갔어요. 드디어 제가 졸업할 무렵에는 방학 때도, 막 개강한 3월 달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로 바글바글 해졌죠. 이제 ‘놀자 대학생’은 옛말이 된 거에요. 공부 안 하고 맨날 술 먹고 놀러 다니기 바쁘기로 유명했던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싹 변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참 바람직한 학생 본연의 모습으로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들은 참 바쁩니다.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거든요. 기본적으로 토익과 영어 회화도 해야되구요. 가능한 한 많은 자격증도 따놔야 돼구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공무원 시험에도 살짝 한 다리 걸쳐놔야 합니다. 학점 관리를 위한 학과 공부도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취직할 때 성적표 제출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생활비라도 벌려면 법정 최저시급 남짓 주는 편의점 알바도 해야 해요. 어학연수라도 가려는 계획이라면 시급이 더 높은 더 힘든 일을 해야 하구요. 불안한 미래 속에서 그래도 자기는 이렇듯 열심히 공부하므로 월급 88만원받는다는 비정규직이 안 될 거라 수시로 자위하며 힘든 하루를 견뎌냅니다. 제가 막 4학년이 된 3월 달에 들어간 어느 교양 수업에서 만난 갓 입학한 20살짜리 신입생은, 지금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그녀에게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말 해 줄 수는 없었어요. 그녀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 결코 허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인생의 수순을 밟고 있다면 마땅히 지녀야 할 20대의 생기와 눈빛을 잃어가요. 아직 젊은 그들은 너무 지쳤답니다. 꿈이나 희망이나 이런 것들은 다 사치에 불과해요. 그들의 구세주는 오직 취직입니다. 7,80년대처럼 보릿고개가 있는 시대도 아닌데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해요. 각종 공부에 너무나 지친 그들은 뭔가를 생각하고 머리를 써야 하는 게 싫어요. 7% 경제 성장이라는 공약이 실현가능한 건지 불가능 한 건지에는 그런 것에도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해줄 것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상컨대, 악순환은 되풀이 되겠죠.

 

지금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의 도서관은 학생들로 넘쳐납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갖가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죠. 앞에서 제가 소개했던 말들을 08학번 새내기들은 이렇게 듣고 있을 겁니다. ‘만 권의 토익 책을 보고, 만 권의 자격증 책을 보고, 만 권의 공무원 시험 책을 봐라.’ 꿈도 희망도 잃은 젊은이들을 구해주세요. 그들 스스로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한 게 많아요. 생기없는 젊은이들의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당신들의 딸 아들들이에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