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운동과 3·1운동, 비슷하지도 않았다
                            ‘혁명의 나라’ 중국을 분석한다 - ⑦

“파리강화회담(1919.2)에서 각국은 모두가 자국의 권리를 중시했다. 공리니 영구평화니, 윌슨의 14개조 선언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한 문장도 가치가 없는 빈 얘기가 되었고...세계영구평화니 인류의 진정한 행복이니 하는 것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전 세계 인민이 모두 일어나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1919.5 <매주평론>)

위 글은 파리강화회의 두 달 후 중국의 시사평론지 <매주평론>에 실린 논평이다. <매주평론>은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이대교, 진독수가 편집을 맡은 주간지였다.

이대교(李大教)는 중국에 사회주의를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북경대학의 도서관 주임으로 있을 때 마오쩌둥에게... 자리를 주어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이대교가 없었더라면 마오쩌둥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진독수(陳獨秀)는 북경대학 문학부장이었고 중국 공산당의 초대 총서기(1919~1929)를 지낸 이력만으로도 그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진독수는 훗날 모호한 처신으로 마오쩌둥의 환멸을 산다.)

아무튼 두 사람은 중국의 거물급 사회주의자였고 중국혁명에 지대한 영양을 미쳤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인물됨이 아니다. 우리가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자들일수록 제국주의의 ‘똥속’을 일찍부터 간파하는 안목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직도 파리‘평화’회의라는 이름으로 치장되고 있는 파리강화회의는 사실 1차대전 전승국들의 나눠먹기 담합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기에 빈궁하기 짝이 없었던 한국의 상해임시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특사 김규식을 파견한 것은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차대전 참전국이었던 중국도 서구열강에 배신을 당해 전승국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식민지 한국의 임시정부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국의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북경의 각급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 앞에서 집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밖으로는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매국노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내결었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운동은 노동자들이 대거 가세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신해혁명 당시에는 산업노동자 수가 50만 명에 불과했는데 5·4운동 시기에는 200만 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하지만 5·4운동이 갖는 더욱 큰 의미는 중국 사회에 사회주의를 전면 부상시켰다는 점이다. 5·4 이전의 신문화운동이 내건 깃발은 자산계급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였다. 이들은 대체로 서양문명을 동경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똥속’을 간파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5·4운동을 거치면서 중국 사회에는 사회주의의 소개, 연구, 선전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형성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 2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창당되었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겨우 13명이었다. 그 중에는 마오쩌둥도 있었다. 당시 공산당 활동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가 모여 은밀히 회의를 진행했다. 그나마 집회가 경찰에게 들통이 나 그들은 집회 도중 서류를 싸들고 황급하게 도피해야 했다.

공산당 창당 이후 1922~1923년,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통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들은 1922년에 처음으로 대외선언을 채택하여 공산당의 존재를 정식으로 대외에 알렸다.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에도 가입하여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24년 국민당과의 합작(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공산당이 다져놓은 대중운동의 잠재력이 폭발함으로써 미래의 대혁명을 예고하는 징후를 뚜렷이 드러내었다.

한국의 ‘3·1운동’을 중국의 5·4운동과 대등하게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3·1운동이 5·4운동을 촉발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은 호사가들의 입담 수준으로 치부한다. 3·1운동의 지도자들에게는 5·4운동의 지도자들이 가진 정교한 이념과 치열한 인식이 부재했다. 3·1운동의 행동강령이었던 ‘공약3장’을 살펴보자.

-.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 生存(생존), 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이니, 오직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여기에는 도덕적 훈시와 비폭력의 당부가 들어 있을 뿐이다. 나는 도덕과 비폭력의 강조에는 지도자를 자처한 33인의 낮은 정세 인식수준과 보신주의가 얼크러져 있다고 본다. 그들이 강조한 비폭력은 8.000명에 달하는 인민을 무모한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이다. 도덕과 비폭력을 강조한 한국의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예외 없이 실패했다.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이 그런 부류였다.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와 군벌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낙후한 반식민지 상태였지만 5·4운동을 거치고 난 후 현저히 일신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5·4운동은 자산계급이 영도하는 민주주의혁명 대신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 근·현대사의 자주적인 장(章)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펌]  김갑수 선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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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5 14:48 2014/02/1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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