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주년,,,‘홍암 나철과 대종교’-②
-두 번의 독립선언과 대종교의 독립운동
대종교의 3대 경전 중 하나인 『삼일신고』를 백봉신사는 또 어떻게 해서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요? 몽고침입 이후 700년간이나 끊겨 있었다는 단군교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으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 아무도 원본을 본 사람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 접할 수 없어 애를 태우며 기다리고만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비원과 노력이 하늘보좌를 뒤흔들어 감읍시킬 만큼 간절하고도 처절했든가 봅니다.
백봉신사는 이를 위해 백두산에서 수도를 하며 염원합니다. 10년 기도 끝에 드디어 하늘로부터 묵계를 받았고 이로 인해 석함에 묻혀있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백두신사 일행은 이런 ‘삼일신고’를 백전 두암을 통해 홍암에게 전달합니다. 홍암은 이를 해설한 『신리대전』을 저술하는 등 대종교의 근간을 밝혀 토대를 세우고 선포하게 되죠. 여기까지 삼일신고가 전해진 경위입니다.
그렇다면 백두산의 백봉신형은 어째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철에게 이 비결서를 전했을까요? 궁금한 부분입니다. 백봉신사는 나철에게 전해야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가 차질없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한민족에 대한 기개와 충정으로 가득 찬 인간 나철을 단군교 중광자로 점찍은 백두신사의 선경지명과 신안(神眼)은 탁월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삼일신고는 366자의 한자로 쓰여졌으며 종교적인 우주관과 절대성의 개념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어, 신도(神道)의 거침없고 거리낌 없는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한 절대성과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는 달통무애함을 설명하고 있는 경전입니다.
1906년 1월 24일 오후 11쯤에 전해 받은 책이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면 홍암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08년 4차방일 시기에 숙소인 도쿄 청광관에 자신을 미도 두일백(69)이라고 소개한 백두산 측 은자(隱者)를 또 만나게 됩니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단군교포명서』 등을 전달하고 이튿날엔 숙소 개평관에 다시 나타나 영계식(靈戒式)을 거행합니다.
신교의 경전을 2년 전인 1904년에 전해 받은 나철입니다. 나철은 2년 동안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접하면서 용맹정진 한 결과 영안이 열리고 신도(神道)의 광재무변성과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우주원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거기다 조선 독립과 민족부흥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백두신사 측에서는 “이만하면 단군의 신령을 전해줄 영계식을 거행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선 모양입니다. 이에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메신저로 두일백이라는 노인이 나타났고 나철은 영계식을 받게 됩니다.
단군교포명서에서 백봉신사는 “본교는 4천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본래 있던 종교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본교가 흥하면 천지가 다시 새롭고 산천이 다시 빛나며 인민이 번창할 것이고, 본교가 쇠하면 상하의 지위가 바뀌고 음양의 질서가 어그러져 만물이 흥왕치 못한다”고 설파해 놓았습니다.
[단군교포명서]를 받은 나철은 이듬해인 1909년(기유년)인 단기 4366년 정월 15일 자시를 기해서 한성 북부 제동 취윤정 아래 8통 10호 육간 초옥 북벽(北壁)에 ‘단군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祭天)의 대례(大禮)를 거행합니다. 동지 오기호, 강우, 최전, 류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 인과 함께 행하며 단군교 중광을 공포하기에 이른 거지요.
교주로 추대된 나철은 교리를 정비하고 교세를 넓혀 1910년 2만 1,539명의 교인을 확보했으며 이름도 대종교로 바꾸며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대종교는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초까지 무장 독립 투쟁에 활발히 참여합니다. 1910년대 후반에는 교단의 중앙 본부를 만주로 옮기고 1911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했고, 군관 학교를 세워 무장 항일 세력 양성에 힘쓰게 됩니다.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실제로 조직하고 일본군을 물리친 핵심 장병들은 거의가 대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철종사는 대종교를 개창한지 8년 만인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결의 방법은 숨을 참아 사망에 이르는 폐기법(閉氣法)이었다 합니다. 수행의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가능한 방법으로서 숨을 멈춰서 죽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단군교 선포식을 같이 한 동지 해학 이기도 제자 백포 서일도 나철과 같은 방법으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죠.
왜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스스로 중단하여 자결에 이르렀을까요? 그 이유가 뭘까.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고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나철선사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고귀한 결실은 순교의 피 값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가 작은 단체 하나만 결성하려 해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아야만 가능하고, 헛소리하는 방해꾼들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민족중흥과 겨레의 독립을 위해 결사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순분자나 밀정은 독극물보다 더 해가 되는 존재입니다. 해당 결사체 구성원들은 죽음에 이를 뿐만 아니라 추구하고 있던 대사마저 그르치게 됩니다. 조그만 조직이라면 몰라도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위해 일하는 곳이라면 조그만 실수도 큰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겠기에 이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도무지 드러낼 수도 없고 만방에 알릴 수도 없었습니다. 대종교가 왜 박해받고 1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순교당하고 1942년엔 지도자급들이 싸그리 잡혀 고문, 투옥, 참살을 당하는 임오교변을 겪었겠습니까? 일제의 만행과 보복 때문이었습니다.
3.1독립선언서 보다 먼저 나온 독립선언서가 있었습니다. 1917년에는 윤세복,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홍명희, 조소앙 등 대종교 핵심인물 14명 명의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1918년 대한(무오)독립선언 또한 대종교가 주도를 했습니다. 대종교도인 백포 서일이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 신채호․김동삼 등과 함께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은 활기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의 3.1독립선언서는 무오년의 독립선언서에서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홍암 대종사의 순교가 피워낸 꽃은 이처럼 찬란했으며 그 꽃 중의 꽃은 청산리전투였습니다.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인 대한군정서 총재인 백포 서일은 1911년 중광단(重光團)으로 출발해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부를 거쳐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북로군정서)를 지휘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들을 결집하여 단일대오를 이루게 합니다.
이로 인한 대종교인들과 독립군들을 향해 가해진 일제의 보복과 참살은 가혹하고도 끈질겼습니다. 소련으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은 일(日)공사 요시자와의 위협 사주를 받은 소련으로부터 무장해제를 강요당하는 소위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는 직격탄을 맞았고 토비(土匪)들의 습격까지 겹쳐 급격히 힘을 잃고 파괴 됩니다. 동포들의 희생과 수많은 청년독립군들의 희생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거지요.
이 같은 피해를 지켜보던 백포 서일은 1921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8일)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자살합니다. 서일의 자결 방법도 스승 나철과 같은 페기절식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1만세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당시 의정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에서 11명이 대종교였다고 합니다. 3분의 2이상인거죠.
예컨대 대종교인들에게는 늘 박해와 살해위험이 뒤따랐습니다. 대부분이 지도자급들인데다가 하는 일도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국어보존운동과 역사바로세우기 아니면 무장투쟁을 선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잊혀진 대종교인들의 순국과 희생을 다시 한 번 기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참혹한 박해와 간난신고와 자결의 길 아니면 참살을 당해 고혼으로 떠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때 가신 영령들에게 최소한의 감사와 진혼곡을 올려야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