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디 한 둘일까. 우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사람이다.  중국이 오늘날의 통일국가로 존재할 수 있게 천하통일을 이룬 왕이다. 중국인들은 오늘 날 중국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모택동과 함께 진시황을 꼽는다고 한다. 진시황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아방궁, 만리장성, 분서갱유, 여산릉, 불로초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들 단어가 거론될 때마다 중국역사가 요동치고 그에 관련된 인물들의 생사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명멸한다. 이 뿐만 아니다. 진시황의 탄생비화는 워낙 흥미진진해서 오늘날 방송에서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는 뺨칠 정도로 극과 극을 오가는 이야기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그의 탄생비화는 이렇다. 진나라 왕족인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진나라 상인 여불위가 자초를 방문했다가 자초에게서 투자하고 싶은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1단계는 자초가 적적하게 지내는 것을 알고는 자기의 애첩을 자초에게 보내 인연을 맺게 한다. 한편 자초의 품위 유지를 위해 돈과 선물을 제공하고 체면을 세워준다. 이렇게 여불위는 자초의 생활을 돌보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서 진나라 공자들 중에서 왕위 계승이 유력한 안국군을 눈여겨 보고는 그가 총애하는 부인에게 혈육이 없음을 알고 비싼 선물을 보내서 환심을 산다음에 자초를 그 부인의 양자로 삼게 한다.

그런데 안국군(효문왕)은 여불위가 예측한대로 왕이 된다. 하지만 불과 3일만에 죽는다. 당연히 효문왕이 제일 아끼는 부인의 양자인 자초가 진나라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런데 진시황(양정)의 아버지인 자초(장양왕)도 명이 짧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왕이 된지 3년 만에 죽게 됐던 것이다. 이에 양정이 13세 때 자초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정이는 과연 누구의 씨를 받은 사람일가? 자초인가 아니면 여불위인가. 사기에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진시황 정이는 진나라 상인 여불위의 자식이라고 한다.

정이의 어머니는 여불위가 아끼는 이름난 무희였고 자초에게 가기 전에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었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런 전후 사정을 다 알면서도 자신의 애첩을 적적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초에게 보내어 마음을 사로잡게끔 일을 추진한다. 여불위의 예측은 맞아떨어져서 자초가 왕이 됐을 때는 어려울 때 자초를 돌봐준 은인으로서 실권을 쥐고 어린 정이가 13세에 왕위에 올랐을 때는 정이의 후견인으로서 전권을 휘두르는 실력자가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이도 어느덧 왕으로서의 틍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편 모후는 여불위를 놓아주지 않으면서 옛정을 상기시키며 위험한 관계를 계속 요구한다. 여불위는 황제의 모후와 정을 통하다가는 머지 않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그래서 그녀의 요구를 직접 들어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구해서 관계를 맺도록 주선한다. 모후는 이내 여불위가 주선해준 '노애'라는 사내에게 흠뻑 빠지게 되고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

이 사실을 어느 날 황제가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선수를 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반란에 실패한 노애와 아이들은 처형당하고 모후의 목숨은 차마 죽이지 못하겠던지 유폐를 시키는 것으로 끝낸다. 이러한 사건의 한복판에서 여불위는 모든 화살이 자기한테 돌아올 것을 알고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진시황은 모든 정사를 손수 처리하면서 친정체재를 굳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내 정치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마침내는 천하를 통일한다.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황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전국을 일체 군현으로 나누고는 그동안과는 달리 모든 지방관리를 중앙에서 임명하고 파견해서 관리한다. 일체의 세습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이는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최초의 중앙집권이었다.

혁명적 조치였던 만큼 반발도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기록상 두드러진 반발은 봉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통일’, 즉 자유 언론과 사상 탄압을 촉발하는데, 진시황 최대의 악행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분서갱유가 말 그대로 “기술서적 외에 모든 경전과 역사서를 불태우고, 모든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 많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은 경전 사서도 많으며, 유학 역시 죽지 않고 머잖아 중국의 지배 이념이 된다.

그럼 현대판 분서갱유는 없는가. 왜 없을까. 군력울 쥔 자들은 자신의 통치행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나타나면 하나같이 제거하려는 속성이 있다. 모 재벌도 자신을 비판하는 서적이 나오면 인력과 자금을 총 동원하여 책을 수거한 적이 있다. 책이 시중에 풀리기 전에 모조리 사들이는 것이다. 분서갱위는 바꾸어서 말하면 언론탄압일 수 있고, 정권의 방송장악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현대판 분서갱유에 속한다,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이 탄생하면 제일 먼저 손대는 일이 방송장악이었다. 그리고 언론탄압이었고, 정권에 비협조적인 언론인들의 목을 치는 일이었다. 이같은 일은 최근에 이명박정권 하에서 어김없이 벌어졌고, 지금 박근혜정권 또한 여전히 친 정부적인 인물들로 언론을 장악하게 하여 정권에 불리한 기사를 알아서 내보내지 않는 방법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 박근혜정권은 방송장악의 덕을 제일 많이 보는 중이라고 한다. 정권과 권력에 순치된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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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31 07:47 2013/07/31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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