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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다. 시계의 분침은 30분을 향해가고 있고 지하철 출구에서 회사의 거리는 분침과 30분의 거리보다 더 멀리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걸음을 재촉해보지만 어제 회식의 후유증인지 힘이 빠진다. 어느덧 회사 앞이다. 하지만 운명의 30분은 지난 듯 하다. 직원 과장이 박달나무 몽둥이를 뒤꿈치에 퉁퉁 튀기고 있고 그 좌우로 소위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는 남자 직원들과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는 여자 직원들이 줄 지어 있으니까. 아.
"이 짜-식이 대리까지 달고 빠져가지고. 너 머리 길이는 왜 이래? 니가 양아치야?"
직원 과장-지난 수년동안 수많은 직원들이 그의 몽둥이 아래 인간이 되었다고 하여 인간 제조기로 불리우며 회사의 업무 분위기 조성과 실적 향상에 기여한 바 작년 표창장까지 수상한 바 있는 바로 그 직원 과장-의 몽둥이가 가볍게 내 정수리를 통통 두들기고 있다. 아슬아슬한 것은 머리 길이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의 손에 가위가 들려있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야 너 신입. 너 치마 길이가 왜 이래? 니가 회사원이야 연예인이야? 머리는 이거 참. 염색도 하냐? 너 당담 사수 누구냐?"
"저.. 원래 머리 색깔이 갈색인데요.."
"누가 변명하래? 너 이따가 들어가면 너랑 니네 사수랑 직원과로 튀어와."
총무과 신입에게도 사수 김대리에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만 내 팔이 저린 게 더 급해서인지 그렇게까지 안쓰럽지는 않았다.
결국 9시가 다 되어서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럭키. 과장님이 자리에 없다. 과장에게 쿠사리 먹을 일은 줄었으니 2중 과세는 면한 셈이다. 하지만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기묘할 정도의 정적. 옆 자리 정대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디갔어?"
"...부장실에. 월간보고 회의잖아."
"...썅."
죽음과 같은 정적은 다가올 죽음을 대비한 의식이었는가. 마침내 벗겨진 이마 한 가운데 병뚜껑 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진 과장이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한 올의 완충막도 없이 중력과 싸운 그의 머리에 경의를. 과장은 뚜벅뚜벅 갓 수습을 면한 사원의 뒤통수를 강타하며 가라사대,
"야 얘 위로 내 밑으로, 지금 당장 탕비실 앞으로 집합이야. 면담 좀 하자."
탕비실 앞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떼 같은 줄이 늘어서 있다. 간간히 비명, 그리고 둔탁한 소리가 그보다는 덜 간간히 새어나온다. 사실 그 소리보다 더 듣기 짜증나는 소리는 넌실적이왜이모양이냐 너이따위로일하면서월차쓸용기는어디서나오냐 너업무중에누가쇼핑몰접속하래모를줄알았냐 누가업무외용무로휴대폰쓰래창문밖으로던져줘 이런 종류들이다. 이윽고 입사 동기 정대리가 허벅지를 문지르며 절룩절룩 걸어나온다. 그리고 나에게 손짓한다. 다음 너니까 들어가라고.
"...야 넌 맞을 가치도 없어. 그냥 넌 사표 써라."
항상 듣는 소리지만 가끔은 맞을 가치가 없어지고 싶긴하다가도 사표 쓸 생각하니 오싹해지는 오묘한 울림이다. 전셋집 융자 반도 안갚은 상황에서는 더욱. 예의 온갖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결재판이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따귀가 귓등에서 춤을 춘다.
"너네 부모가 회사에서 이 따위로 일하라고 가르치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다. 과장도 이 미묘한 변화를 느꼈는지 일순 말을 멈춘다. 묘한 정적이 흐른다.
"...야 내가 니가 미워서 그러는거 아닌거 알지?"
"...압니다."
"다 너 잘 되라고 안잘리고 임원까지 달고 정년 다 채우라고 하는 거 알잖아."
"...네"
그리고 마침내 마대자루에 손이 닿는다.
"몇 대 맞으면 정신차릴 거 같애? 니가 말해봐."
내 허벅지는 한대를 외치고 있지만 날카로운 이성, 역사적 경험에서 나오는 이성은 10대를 속삭인다. 사실 이미 충분히 맞은 거 같기도 하고 이미 정신은 차린 거 같거나 혹은 더 맞는다고 정신이 돌아올 거 같지는 않다는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는 듯 하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는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고 그가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의 사랑은 격노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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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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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런 일이...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