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1부 장애를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동정의 대상, 봉사해야 할 대상, 장애를 극복한  : 장애를 바라보는 3가지 시각

 

동정,봉사,극복이라는 3가지 키위드와 이미지가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주류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거꾸로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장애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강화하도록 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장애에 대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갖는 시각 역시 개인적인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장애에 대한 인식 역시 기본적으로 현 사회의 정치경제적 구조(특정한 종류의 노동력에 대한 자본의 기능적 필요)와 중심적 가치들(경쟁과 효율성, 개인주의)에 의해 구조화되고, 이 사회의 지배적 문화가 장애를 어떻게 투영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우리들의 장애에 대한 인식 역시 그러한 사회구조와 문화의 영향력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장애에 대한 주류 사희의 의학적 정의 : 손상이 곧 장애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장애에 대한 주류적 정의는 세계보건기구가 제시한 것을 따르고 있으며, 이는 손상, 기능제약, 불능, 그리고 사회적 불리라는 삼단계의 구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세가지 단어 모두 우리 말로는 '장애'라고 번역할 수 있다.

장애에 대한 대안적인 사회적 정의 : 손상은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장애로 된다.

장애란 사회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억합의 한 형태라는 것은 많은 장애 운동 활동가들에 의해 제기되고 주장되어 왔다.

우리의 관점에서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장애는 사회의 완전한 참여에서 불필요하게 고립되고 배제됨으로써 우리의 신체적 손상에 덧붙여 부과되는 것이다. 즉, 장애인은 사회 내에서 억압받는 집단인 것이다.

손상을 사지의 일부나 전부가 부재한 것, 또흔 신체의 일부나 그 기능의 불완전한 상태로 정의한다. 이것을 신체적 손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장애는 육체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사회조직이 불완전하거나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불리와 활동의 제약이며, 그것으로 인해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장애라고 불리는 '사회적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차이들 : 누가 누구를 정의하고 규정하는가?

 

비장애인의 몸을 기준으로 한 임의적 범주, 장애인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라고 규정한 범주 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장애인 내부의 차이는 비장애인과 장애인간의 차이보다도 크다. 장애인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따른 임의적인 범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 가진 다양한 차이들, 인간이 지닌 다중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장애인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로 장애인차별주의의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용 화장실에 붙어 있는 장애인 마크는 역설적이다. 장애인 마크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을 형상화해서 전체 장애인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휠체어를 이용하지 않는 무수한 많은 다른 장애이은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가? 맹인의 입장에선 흰색 지팡이인 케인이, 농인의 입장에서는 수화를 사용하는 손이, 자신을 표현하는 마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비장애인 중심에서는 장애인은 그냥 다같은 장애인일 뿐이다.

 

휠체어장애인, 농아인, 여성장애인

장애인 범주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 이외의 표헌들 중에 우리가 검토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용어들이다. 첫번째 우리가 가볍게 휠체어장애인, 목발장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 인간이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가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표현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표현해야 할 상황이라면 휠체어이용 장애인, 목발이용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청각장애는 크게 청력장애와 평형기능장애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청각기능의 손상으로 인한 자세 및 방향감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 장애가 있는 것을 말한다. 전자의 청력장애인은 농인과 난청으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농인을 농아인으로 부른다는 것이 잘못이다. 농은 듣지 못함을 아는 말하지 못함을 의미한는데 이것을 항상 연동시켜 표현하는 것이 음성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비장애인의 관습적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농인들은 수화를 제1언어로, 즉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즉 수화로 말을 한다. 따라서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농은 맞지만 언어를 사용하므로 아는 아니다. 그리고 난청인을 제외한 청력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 농인은 아닌데, 왜냐하면 상대방 입의 모양을 보고 말을 이해하고 말을 하기도 하는 구화인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로는 장애를 지닌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상을 여성장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그럼 장애인=남성장애인이라는 개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마치 인간=남성이라는 전제 아래 여교수, 여류작가, 여성노동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따라서 장애를 지니고 있는 여성을 지칭할 때는 장애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올바르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은 정상인이고 일반인인가

사람들은 보통 정상인이나 일반인이라는 용어를 무의식중에 더 많이 쓰곤 한다. 정상인이라는 용어의 대칭어는 비정상인이다. 곧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라는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비장애인 중심의 시각에서 장애인을 배제하려는 배타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 동성애, 흑인이라는 단어의 경우, 그 의미 자체에는 어떠한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부정적인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애라는 단어 그 자체는 신체상의 고장이거나 무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정한 가치 판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의미의 가치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여성이나 동성애, 흑인이라는 기표는 본래의 의미 이외에 다른 부정적인 기의가 2차적으로 결합하는 과정, 즉 낙인화의 과정이 수반되지만 장애인은 주어진 명칭 자체가 낙인이다. 즉 장애인은 낙인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짓기 자체에서 낙인이 찍혀진 거의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장애인을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을 중심으로 규정된 용어는 비장애인들을 불편하게 한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남녀라는 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여남이라는 말은 무언가 불편함을 준다. 더구나 장애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인 무엇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단지 부정적인 것의 아님으로 규정되는 것은 비장애인의 위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지정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불안감을 안겨 준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장애인 "있음"이 아니라 "없음"의 존재였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비장애인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아님으로의 어떤 집단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모순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발전과 장애 문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장애라는 개념 자체 또한 이렇게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노동자의 형성 과정과 장애인의 탄생

근대적 자본주의의 성립은 새로운 체제를 움직여 나갈 근대적 노동 주체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근대적 노동자는 크게 두 가지 계기를 통해 만들어 졌는데, 하나는 이전의 노동 현장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분리시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렇게 분리된 사람들을 새로운 노동 공간에 익숙하도록 훈육시키고 밀어 넣는 것이었다. 과거의 노동 환경과 근대적인 노동의 환경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근대적인 공장 내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고 부품이었다. 작업방식은 획일적이었고 기계의 속도에 사람이 맞춰야했다. 또한 모든 노동과정이 강제적으로 정해졌으며, 이러한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주가 정해놓은 노동 규율을 따라야 해다. 생산량은 사후가 아닌 사전에 목표치로 정해졌다. 개인의 노동은 대부분 전체 생산 과정의 극히 일부분만을 본질적으로 수행했고 그러한 각각의 노동을 전체로 통제하는 것은 별도의 관리자이거나 심지어 보이지 않는 손(시장)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농업 노동과 가내 수공업 노동과는 다른 새로운 노동 방식은 이전의 느리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직무 패턴을 전면적으로 깨뜨리게 된다.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공장 노동에 진입하지 못하고 부랑자로 떠돌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노동의 형태를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며, 어떤 면에서 부랑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저항 방식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인 방식의 저항자들 내에는 사지가 일부가 불완전한 사람, 농인, 맹인, 지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여 졌던 수 많은 사람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탈자들을 임노동 관계로 포섭하기 위한 국가의 강제 수용과 훈육이 진행된다. 서구의 역사에서 광범위하게 존해했던 구빈원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부랑자들을 수용했던 강제 노역장이었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을 효과적인 훈육과 나태의 방지를 위해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일을 할수 있는 몸을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수 없는 몸을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오늘날의 장애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즉 근대 사회에 들어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구분은 임노동 관계로의 포섭 가능 여부에 따라 '불인정 노동' 계층이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노동력의 상품화와 이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번째로는 상품은 팔려야만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되며, 상품이 팔릴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하나의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정해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되는가의 기준은 '자본을 위해 이윤을 창출하거나 그에 도움을 주는가'의 여부이다. 두번째로는 노동의 상품화는 노동 활동과 그에 따른 분배 모두의 개별화를 가져왔다.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 활동은 기본적으로 집단을 하나의 단위로 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 집단 활동에서는 집단 속 개인의 능력이 어떠한 것이든 노동 과정에 참여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방식과 속도로 일을 하는 것이 그 집단에 유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은 전혀 과거와 다르다.

표준과 정상 개념의 강화, 통계학과 우생학의 발달

통계학의 평균은 표준을 의미하며, 정상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국가가 인구를 정상, 비정상의 틀에서 보기 시작하면 그 다음 순서는 비표준을 제거하거나 표준화하는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적인 경쟁의 논리와 결합되어 우생학의 목표가 된다. 이러한 우생학의 논리는 저능아, 불구자, 병자들과 열등안 인종은 증식을 제한하는 식의 야만적인 행태를을 합리화시킨다.

황우석 사태는 우생학적 광기 코드를 갖고 있다. 황우석이 장애인을 마술사처럼 고치겠다고 했을 때, 절멸과 치료라는 서로 다른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같은 목표로 드러났던 장애라는 정체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거세당한 폐기물과 같은 삶 속에서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가족의 손을 빌린 존속 살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학살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진정으로 다시 한 번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2부 구체적 권리를 통해 본 장애 문제와 장애인 운동

인간은 동물이다 움직여야 한다.

이동권 : 비장애인들은 공기를 마시듯 누렸지만 인식할 수 없었던 권리

구체적으로 이동권(Rights of Mobility)이란 기본적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이동을 할 때, 출발지에서 목적지

까지 그 수단 및 동선을 확보함에 있어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권리란 "결필된 자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권리란 그렇게,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공기나 물이 없으면 장애인 또한 이동권이 보장되지 못한다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적

으로 죽임을 당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권은 곧 생존권이며,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애인이동권연대의 투쟁중 지하철 연착 투쟁이 일반 시민에게 피해를 준다는 비판에 대해 "우리의 행동

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30분 늦는 것을 비난한다면 달게 감수하겠다. 그러나 30분이 아닌 30년

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현실에 대해 장애인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국가는 왜 장애인의 교육을 방치하는가

자본주의 국가입장에서 보면 교육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교육 기관인 학교를 흔히 군대, 경찰과 같은 "억압적 국가 기구"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부른다.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 만큼 '건전한'생각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가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종교의 절대적 권리가 무너지고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확산되면서 학교 교육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둘째, 교육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본(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중앙 정부 부처 이름이 교육인적자원부란 사실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인적자원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 다른 물자와 마찬가지로 생산 자원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이에 중앙 

정부 부처가 상당히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 두가지 이유로 인해 국가는 교육을 교육을 권리

이자 의무로 규정하고 공교육 체계를 통해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왜  배제되고 방치되는가?

첫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무능력화 되어있는 장애인들은 교육을 통해 강제하지

않아도 체제에 위험이 될 만한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둘째, 교육을 시켜도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

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간단히 말해 국가가 굳이 장애인을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거나, 교육을 시켜도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 장애인들도 교육권을 보장받으려면 어떻게 하나? 인간의 자아실현과 보편적 시민권의 획득이라는 인권의 논리를 가지고 싸워서 강제하는 수 밖에,

장애인의 노동권, 무엇을 고민하고 얘기할 것인가

장애인이란 결국 근대 자본주의가 원하는 특정 형태의 노동으로부터 배제되어온 '불안정노동' 집단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며, 자본은 이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근본적 특징인 노동력의 상품화에 따라 '노동'이라는 활동을 특정한 형태로 한정하게 된다. 즉 얼마나

산출했는가 하는 산출량(생산성)을 기준으로, 자본을 위한 이윤을 창출하거나 이에 도움을 주는 행위만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으로서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과 제약을 뛰어넘어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정서적 풍요로움에 기여를 하는 모든 행위'가 노동으로서 정의되고 또한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하고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이윤의 창출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기여가 노동의

준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존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 게임의 규칙 안에서, 혹은 그 규칙의 일부를

바꾸어 살아남고자 하기 보다는 게임 자체(노동의 정의와 가치)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상상력과 전망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우리의 가치 기준을 의심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시설 : 주류사회가 건설한 내부의 식민지

장애인이 시설 수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장애인을 일탈자 혹은 비정상인으로 취급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러한 격리 수용은 주류 사회의 내부 식민지라고 할만하다. 인간으로서의 자율성

을 철저히 억압당하고 각종 폭력과 인권 유린이 일상화되어 있는 수용 시설에서, 장애인들은 점차 삶의 의미와 적극적인 욕구 자체를 상실해가는 소위 '시설 증후군'에 빠져들게 된다. 욕구와 꿈을 갖는 것이 고통인 삶,

아니 욕구와 꿈을 가질 수 있는 조건 자체가 박탈된 환경 속에서, 이들은 그 환경에 스스로를 적응시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의미와 가치

장애인 운동과 "진보적" 장애인 운동

장애인 운동이란 기본적으로 "장애인의 열악한 삶을 개선시키려는 제 활동을 말하며, 따라서 장애

해방을 그 목적으로 한다" 또한 장애해방 운동을 "장애인이 장애를 입었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온갖 차별과 소외에서 해방되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 즉 장애인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모든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상대적 진보성 : 시대와 권력이 제시하는 기준을 실제로 넘어서려 했는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고, 당대의 권력이 제시하는 기준에 타협하기보다는 저항하여 이를 넘어서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진보성 : 체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

진보적 장애인 운동에서 체제를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평등과 차별 철폐를 달성하려는 지향을 지닌다.

많은 경우에 현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 경제의 원칙, 경쟁과 효율성의 원리,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한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은 이러한 합리성의 다른 표현인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넘어, 상식 자체를 바꾸어나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상식의 실현을 추구하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지배적 관념과 정의 자체를 바꾸어내는 운동이며,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상식의 실현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평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합의를 이끌어 내는 운동이다.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진보적 장애인 운동

근대 정치의 핵심인 '소유'와 '공동체'의 문제, 그리고 장애(인)

장애라는 인간학적 분할에 근거한 모순의 해결은 노동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여 근대적 정치 관념의 근본적인 개조가 수행되지 않고는 해결되기 어려우며, 또한 이로 인해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근대적 자본주의 공동체의 이행에 변혁적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계급 모순으로의 환원성 대 보편적 모순의 복수성

노동자 계급 운동을 제외한 여타의 인간학적 차이와 보편적 적대에 기반을 둔 운동이 필요하고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운동 주체라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피억압 대중들을 저항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가장 지배적인 정체성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 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주체가 겪는 삶의 과정, 그리고 그 삶의 과정 속에서 저항의 주체로 나서게 되는 계기와 경로는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그리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혹은 환경 문제라는 보편적 적대를 '일차적' 계기로 하여 저항의 주체로 구성되며 구성될 수 있는 대중들이 존재 한다면 한국 사회의 변혁 운동은 그들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 자본주의 전선으로 함께 묶어세울 수 있어여 한다.

둘째, 이행이라는 문제에서 보자면 역사 속에서 드러났듯이 '혁명'이후에 모든 것을 구축한다는 방식으로 결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후에 선설될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지금 여기에서 함께 논의되고 그 대안적 방향과 주체들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이후에도 올바른 관점에서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그 사회를 발전시키고 제어해 나갈 수 있는 전반적인 대중적 의식 및 역량과 관계되는 문제라 할 것 이다.

셋째, 장애인 운동이라는 영역에 한정해서 보자면, 장애인 운동은 단진 혁명 운동의 한 동력으로 그 대중적 히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 매우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한계에 대한 비판과 영감을 제공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 주의와 경쟁의 원리에 대해 이 사회의 대중들이 포섭될 수 있는 것은 그 경쟁속에서 자신도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기도 하다. 장애인 운동은 매우 근본적인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적 장애인 운동은 왜 반자본 운동일 수 있는 가

노동의 상품화를 근본적 특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이 '불인정 노동 계층'으로서의 장애인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장애인 운동은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적 체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이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문명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자본주의 를 비판하고 반자본 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장애 문제의 근원이며 자본주의 이외의 사회에서는 장애 문제가 없었음을 주장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또한 자본주의가 극복되면 자동적으로 장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우리의 운동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의 상품화, 경쟁과 효율성, 개인주의라는 자본주의 사회 논리가 장애인에 대해 적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극복은 장애 해방을 위해 반드시 경과해야 할 필요조건임을 의미할 뿐이다.

운동의 기본은 '파괴'와 '건설'이며, 지나간 역사를 혹은 앞으로 도래할 미래를 파괴할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성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중증 장애인들은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며, 따라서 속성상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들의 실존자체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주체적 인식은 장애인들이 자본주의에서 배재 '당하고' 있다는 수동적, 객체적 인식과 그 질을 달리한다.

평등과 유대, 그리고 공동체성의 확장을 위해

우리 모두가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 또는 장애인 운동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장애인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과 억압은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에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장애인 문제라는 표현보다는 장애문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또한 여성의 문제가 여성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매개로 한 여성-남성간 관계의 문제이며, 노동의 문제가 노동자 일방의 문제가 아닌 노동력의 상품화를 매개로 한 노동자-자본가간 관계의 문제인 것처럼, 장애의 문제는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매개로 한 장애인-비장애인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장애인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한 척도일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진정 그러한데, 왜냐하면 장애인의 인권을 쟁취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파괴적인 자기 논리를 극복해가는 과정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운영되는데 기본 원칙인 경쟁과 효율성, 그리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인권을 확장시켜 나가는 활동은 바로 이러한 경쟁 및 효울성의 원칙과 대척점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권리를 확장하는 투쟁은 장애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러한 사회의 논리와 가치를 바꾸어 나가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즉 평등과 유대, 공동체성의 논리를 확장시켜 나가는 활동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단지 장애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은 보다 앞당겨 질 수 있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