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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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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 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 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정호승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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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온전한 충전의 시간은 왜 이리 오지 않는 걸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피로감을 하루 쯤은 털어냈으면.

 

내일 할 일을 걱정하지 않고 잘 수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해가 뜨고 해가 짐을 음미할 수 있는

그런 오늘 하루를 제발 갖고 싶다.

 

일상은 자신을, 현재를, 미래를 잊게 만드는 최면.

안주하고 싶지 않아도 그 자리에 계속 머루를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일상의 즐거움이란 말, 무시무시한 함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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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무게

항상 1월이 지나면 겨울에 지쳐간다.

어깨 위로 걸쳐진 코트의 무게에 어깨가 축축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마음도 참 추워진다.

 

여름을 기다린다. 추워지는 마음, 쓰러지는 육체를 차라리 증발시켜 여기저기 유유히 떠다닐 수 있게 하는 그 뜨거움이 그립다.

 

Photo by Rolfe H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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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사람들

새벽 두 시, 세 시, 또는 네 시가 넘도록

잠 못 이루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간다면,

만일 백 명, 천 명,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물결처럼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예를 들어 잠자다가 죽을까봐 잠들지 못하는 노인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와

따로 연애하는 남편

성적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자식과

생활비가 걱정되는 아버지

사업에 문제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운이 없는 여자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만일 그들 모두가 하나의 물결처럼

자신들의 집을 나온다면,

달빛이 그들의 발길을 비추고

그래서 그들이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그렇게 되면 인류는 더 살기 힘들어질까.

세상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될까.

사람들은 더 멋진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더 외로워질까.

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만일 그들 모두가 공원으로 와서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태양이 다른 날보다 더 찬란해 보일까.

또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그들이 서로를 껴안을까.

 

- 로렌스 티르노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잠 못 이루는 밤에 공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아마도 온 마음으로 서로를 포옹해줄 듯.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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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참은 눈물

我有數行淚  내게도 몇 줄기 눈물이 있지만

不落十餘年  10여 년 동안 흘린 적 없네

今日爲君盡  오늘 그대를 위해 모두 흘려

幷灑秋風前  함께 가을 바람에 날려보내리.

 

- 도홍경(陶弘景)

 

10년을 넘게 수련한 도가 사상가의 가슴에도 넘쳐 흐르는 감정이 있나보다.

결국 인간임을 잊고 살 수는 없는 거겠지.

단지 억누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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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대신해

그 나이였다.

 

시가 나를 찾아왔다.

 

모른다.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다.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 파블로 네루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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