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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3176(210101)호] 혁명승리를 향해 당의 비약을 : 혁공동 의장 시미즈 타케오 의장에게 듣는다 청년·학생의 궐기가 역사를 움직인다

주간『전진(前進)』 3176호(2021년 1월 1일자)

혁명승리를 향해 당의 비약을 : 혁공동 의장 시미즈 타케오 의장에게 듣는다

청년·학생의 궐기가 역사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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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학련 활동가인 이시다 마유미씨(왼쪽)와 시미즈 타케오 혁공동의장.

지난해 9월 6일 혁공동 정치집회에서 51년만에 연단에 서 공연(公然)활동에 복귀한 혁공동 의장·시미즈 타케오(清水 丈夫)동지에게 2021년 결전의 전망과 혁명당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인터뷰어는 전진채널 캐스터이자 전학련 활동가인 이시다 마유미(石田 真弓)씨. (편집국)

 
 

시대의 요청에 응하는 결의

-먼저, 약 반세기만의 공연활동 복귀에 있어서의 결의, 그리고 2021년을 맞은 혁공동 의장으로서의 고민을 들려주세요.

=지금 〈코로나×대공황〉정세는 끝없이 수렁으로 빠지고 있고, 코로나 대응을 구실로 한 미증유의 대합리화 공격이 전개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해고철회, 저임금 분쇄, 총 비정규직화 저지 투쟁이 직장 생산점에서의 계급적 노동운동의 재생을 위한 투쟁으로 조직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노동자집회에서는 3개 노조의 투쟁, 의료·복지 노동자들의 투쟁을 선두로 역사적 전진이 시작되고 있음이 선명히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2015년 혁공동 7차대회의 「좌익공론주의」의 오류, 그 뿌리에 있는 계급적 기회주의에 대해 구 정치국 지도부(의장)으로서 자기 자신의 문제로 삼아 정면에서 자기비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명의 공산주의자로서 자본과 권력, 자본가계급에 대한 근본적 분노를 폭발시켜 직장 생산점에서 자본·권력과 싸우는 동지들, 계급적 단결과 노동조합적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전력으로 투쟁하는 혁명적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번 공연화 노선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 하나의 이유는 오늘날의 〈코로나×대공황〉정세의 역사적 중대성의 문제입니다. 코로나도 대공황도 제국주의의 절망적 연명형태인 신자유주의의 한계와 파탄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신자유주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확실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대공황 정세에 대해서는 2008년 리먼쇼크로 폭발한 공황은 1929년식 세계적 금융대공황입니다. 이 이후 미 제국주의는 재무성과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막대한 재정투입, 초저금리 정책을 끝없이 전개해 경제의 금융버블화를 반복하며 연명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말할 것도 없이 대공황은 불가피한 「과잉자본·과잉생산력」이 기본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즉, 끝없는 버블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대공황 정세의 이러한 국면에서 코로나·팬데믹이 발생한 것입니다. 버블의 반복으로 연명해온 미 제국주의 경제는 경제 봉쇄적 위기에 빠졌고, 1929년 공황을 뛰어넘는 연율환산 마이너스 30여 퍼센트라는 GDP(국내 총생산)의 하락을 강제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버블 붕괴에서 발생하는 위기가 먼저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거대 팬데믹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해 코로나가 세계화되었으며, 변이를 계속하며 수년 이상 계속될 것입니다.

 코로나를 해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아래에선 절대 불가능하고, 신자유주의 아래서 경제를 바로잡으려 할수록 코로나는 더욱 만연해질 것입니다. 미국의 상황이 그러한데요, 부르주아지는 신자유주의 아래서 코로나를 격퇴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지 못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러니 하루 20만명이 감염되는 사태가 되었고, 그것이 다시 경제로 되돌아갔습니다. 코로나와 신자유주의는 상호간에 영향을 주며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체가 노동자계급 인민에게 떠밀어졌습니다. 이것이 전세계에서 거대한 분노의 폭발과 계급적 격돌을 만들어냈고 혁명적 정세를 본격적으로 성숙시켜간 것입니다.

 이러한 정세인만큼, 나 자신도 현장에서 싸우는 동지들과 굳게 단결해 일상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당의 비약을 위해 함께 분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공연활동의 복귀를 결단한 이유입니다.

 
 

혁명적 정세가 도래

 이처럼 오늘날 코로나·팬데믹으로 2008년 이후의 대공황의 전개로 인해 국가 채무가 한없이 높아졌고, “100년에 한번 꼴”을 넘는 경제적, 사회적 위기와 파탄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 사태에 질려버린 적 계급은 일체의 모순을 한편으론 감염확대로, 다른 한편으론 대량해고, 임금삭감, 총 비정규직화라는 형태로 노동자계급에게 떠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신자유주의의 성장을 가만둘 수는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끝내고, 자본주의 그 자체를 타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물러설 수 없는 혁명적 정세가 도래한 것입니다.

 혁명적 정세를 진짜 혁명으로 전화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혁명적 정세가 도래했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혁명밖에 없음을 모든 노동자계급, 모든 인민에게 호소해 전력적으로 계급의식의 선명화를 쟁취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뿐만이 아니라 혁명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이 자본과 권력에 대한 직장 생산점에서의 투쟁에 일어서고 혁명당이 그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 당과 노동자계급의 끊어지지 않는 결합을 만드는 것, 그리고 계급적 노동운동의 강화를 쟁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서 말한 7차 대회문제의 총화의 핵심은 「공론주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정세를 혁명으로 전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결정적 임무로 계급적 노동운동의 강대화를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11월 노동자집회에서 확인하였듯 3개 노조의 공동투쟁을 주축으로 계급적 노동운동의 불을 전국에 만들어내 커다란 힘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투쟁은 의료·복지, 합동노조를 비롯한 모든 산별에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의 선두에 서는 것은 역시 마르크스주의청년노동자동맹[이하 마르청노동]의 동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청노동은 1970년 결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청년 노동자의 궐기가 계급적 노동운동의 귀추를 정할 것입니다.

 

 

1960~70년 대격동기의 투쟁

-여기서 시미즈씨가 걸어온 길, 특히 1969년 비공연활동에 들어갈 때까지의 투쟁에 대해 들려주세요.

=1960년 안보투쟁은 전학련 서기장으로, 그리고 공산주의자동맹(분트) 전학련 그룹의 일원으로 투쟁했습니다만, 1960년 5월 20일의 국회·수상관저 데모 건으로 6월 4일 체포되었고, 8월에 출옥했을 당시엔 이미 분트는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구 분트의 멤버 다수가 혁공동에 들어갔습니다만 저는 혁공동 합류에 끝까지 강경하게 반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웃음).

 혁공동 가맹 결단까지는 계속 괴로워했습니다. 1960년 안보투쟁에 전력으로 임했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분트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적 경향은 옳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 당건설의 입장이 없다는 혁공동의 비판은 타당하다 생각했습니다. 뜻을 정하고 가맹서를 썼고, 혼다 노부요시(本多 延嘉)(당시) 서기장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혼다 동지는 [가맹서를] 한번 읽고선 “알았다”며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그러고서 “바로 정치국에 들어와 달라”고 말해 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한 조직력이었습니다.

 그 후, 학생 전선에서 도쿄 북부지구위원회로 이동했습니다. 1965년 일한투쟁 당시 북부지구반전청년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만 그 거점인 도시마 우체국엔 하시모토 쇼지로(橋本 秀次郎)씨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도쿄대부속병원 간호사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오리진전기노조에선 청년부 활동가 대부분이 반전청년위에 결집했습니다. 지구활동은 매우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1967년 10.8 하네다투쟁의 직전 무렵엔 학생전선으로 돌아간 듯한 상태였습니다. 일한투쟁 당시엔 도쿄의 학생 데모도 100명정도로 기동대에 일방적으로 밀렸습니다만 이를 뒤집은 것이 10.8투쟁이었습니다. 베트남 반전투쟁의 일환으로 당시의 사토 에이사쿠(佐藤 栄作)수상의 남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하네다 데모였지만 계획적·의식적으로 무장데모를 준비, 실행했고, 곤봉과 돌로 기동대를 물리치고 장갑차 탈취까지 철저히 수행했습니다. 그때 교토대 1학년 야마자키 히로아키(山崎 博昭)군이 기동대에게 학살된 것도 거대한 분노의 폭발을 만들었습니다.

 이어 1968년 1월, 나가사키현의 사세보(佐世保)에서 미국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입항저지 투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직전에 현장에 들어갔고, 일본 방송노조 나가사키분회장이었던 스즈키 타츠오(鈴木 達夫)동지에게 사세보투쟁의 구상을 말했고, 데모 코스를 함께 답사하며 “기지에 돌입하려면 저기가 좋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미츠비시나가사키조선 사회주의연구회 사람들이 전면적으로 협력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학련 위원장이었던 아키야마 카츠유키(秋山 勝行)동지가 현지에서 모든 책임을 져주었습니다. 사세보 투쟁을 그정도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학생동지들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니혼대·도쿄대 투쟁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1968년 11월에 도쿄대 혼고캠퍼스의 은행나무길에서 니혼대와 도쿄대의 공동집회를 열었습니다. 그 준비과정에서 도쿄대 전공투 의장인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 義隆)군과 다방에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니혼대투쟁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지라 니혼대 중핵파를 대표하는 형식으로 이야기했고, 집회를 개최할 것을 확인했습니다. 도쿄대의 투쟁은 거기서 한순간에 전국화되었습니다. 당시 운동의 동력이 니혼대·도쿄대의 합류를 실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파방법1에 의한 비공연활동으로

-그런 투쟁을 거치고 1969년 4월부터 비공연활동에 들어가셨는데 당시의 상황이나 결의는 무엇이었나요?

=오키나와투쟁에 대한 파방법 탄압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엔 베트남전쟁의 출격 거점이 된 오키나와에서 본토복귀·기지철거를 내걸고 투쟁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10.8 이후의 투쟁을 전력으로 해온 저희도 오키나와투쟁에서의 입장이 요구되었습니다. 다른 당파는 ‘오키나와 해방’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오키나와의 사람들이 본토복귀를 요구하며 총력으로 궐기하고 있는 시기에 본토의 구호가 그렇게 추상적이고 어중간해서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혁공동은 오키나와의 본토복귀투쟁에 온힘으로 연대해 함께 싸워 오키나와를 탈환하자는 의미로 ‘오키나와 탈환, 안보분쇄·일제타도’를 내걸어 과감한 실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것이 본토에서도 오키나와에서도 한번에 확대되었습니다.

 그 돌파구가 된 4.28투쟁의 직전에 혼다씨가 파방법 탄압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혁공동을 파괴하고 안보·오키나와투쟁을 압살하려는 국가권력의 의사가 명확해진 상황 속에서 이대로 지도를 모두 드러낼 수는 없다, 파방법탄압 하에서도 단호히 투쟁을 계속하기 위한 당의 비공연지도부를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잠행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70년투쟁 후에도 비공연 지도부를 견지해 대 혁마르파 전쟁이나 80년대의 산리즈카결전, 국철결전, 천황교체의식을 직격한 90년 천황결전까지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지원·지지를 받아 끝까지 투쟁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권력은 몇 번이나 파방법의 혁공동 단체적용을 노렸습니다만 그러면 더욱 투쟁이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해 결국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승리 위에서 1991년, 5월테제를 발표했습니다. 지금까지의 투쟁의 단순한 연장이 아닌 노동전선의 투쟁에 압도적으로 중심을 두고 노동운동·대중운동의 전개와 노동자 세포조직의 건설에 전력을 다할 것을 확인했습니다.

 
 

스가 타도의 거대한 학생운동을

-그러면 마지막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기대하는 점, 학생운동에 요구되는 것을 말씀해주세요.

=앞서 말했듯, 혁명적 정세의 본격적 도래를 진정한 혁명으로 전화하기 위해선 계급적 노동운동의 재생과 발전, 특히 직장에서의 투쟁을 조직하는 것에 당의 전력을 집중해야만 합니다.

 〈코로나×대공황〉 속에서 노동자계급을 향한 대량해고, 대폭의 임금삭감, 총 비정규직화, 그리고 노동조합의 근절이라는 극한적인 신자유주의 공격이 덮쳐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지난해 11.1 집회에서 특히 풍부하게 나타났듯, 계급적 노동운동을 직장의 생산점에서부터 맹렬히 만들어 [신자유주의 공격에] 반격하며, 당이 그 선두에 서서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혁명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 일부가 아닌 노동자계급 전체의 인식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혁명정세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에 걸맞는 행동을 수반해야만 하며, 이를 위한 역량을 우리가 쌓아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당의 기본노선 아래서 학생전선은 어떤 임무를 맡아야 하는가, 단순히 ‘학생도 노동자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학생이 학생다운 투쟁을 철저히 해나가며 강력한 운동을 만들어내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향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생운동이 그러한 형태로 거대하게 사회적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노동자에게 환영받을 것이고 노동자에게도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학생운동에 요구되는 것은 정치투쟁을 철저히 하는 것, 정치투쟁의 본격적 발전을 선두에서 열어젖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교토대학 투쟁의 의의는 매우 큰데, 이 지평을 발판삼아 전진하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동시에 2021년 결전의 전망으로는 일본의 학생들이 스가정권의 무수한 잘못된 정치와 개헌·전쟁정책에 거대한 학생운동으로 맞서는 것[이 요구됩니다]. 1960-1970년대의 것이 하찮게 보일 정도의 학생운동의 폭발로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쟁취하는 것, 이러한 장대한 전망을 갖고 투쟁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생각합니다.

 노동전선에서도 지금 마르청노동의 동지들을 선두로 청년노동자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정말 피부로 혁명정세를 느끼는 해였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10여년간 활동해온 사이 경험해본 적 없는 스피드로 새로운 동료가 전학련운동·마르크스주의 학생동맹에 결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에너지를 끌어내고, 힘있는 운동을 형성할 수 있는 당으로 비약할 수 있게끔 의장을 비롯한 모든 당의 동지들과 단결해 저도 온 힘으로 싸우겠다고 결의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시미즈 타케오동지의 프로필

1937년 카나가와현 출생. 고등학생 시절 혁명가를 꿈꿔 도쿄대 재학중 일본공산당에 입당, 1958년 탈당해 공산주의자동맹에 참가.

1959~60년 전학련 서기장으로서 안보투쟁을 지도. 1961년 혁공동에 결집. 혼다 노부요시 서기장과 함께 정치국원으로 지도적 역할을 담당, 1966년 제3차대회에서 제2보고를 담당. 1969년 4월 비공연활동 시작. 1997년 제20회 전국위원회총회에서 혁공동의장에 취임. 2020년 혁공동 정치집회에서 특별보고를 진행, 공연활동으로 복귀. 저서 『시미즈 타케오 선집』전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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