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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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상반기 종료. 올해는 나에게 특별한 해다. 올해 전의 나와 올해부터의 나로 내인생을 나눌 수 있을 정도. 벌써 7월 말이지만 올해의 나를 정리하는 일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벌써 무언가 정리된 느낌.

1월 이전- 그냥 열정같은건 있었던것 같다. 사회주의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몰랐다.

1월- 많이 보았다. 느꼈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다. 무언가 되게 급박하게 돌아갔다.. 집회현장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것이 좋았다. (6일:김지도님 크레인올라가신날. 15일:내가 트위터시작한날. 24일: 진보신당 입당.)

2월~5월- 글쎄.. 이때는 의미있는 무언가를 한 기억이 없다. 지젝의 책을 읽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4/30 사노위 정치대회 참석. 이런 분파가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열심히 뛰는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은 꽤나 든든했다. 그러나 '무기력함'이라는 괴물을 만났다. 이 못된 녀석이 점점 나를 좀먹었던 나날들. 스스로가 미웠던, 가끔은 가슴시리기도 했던.)

6월~7월- 탐색기. 고민했던 시기. 답답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왜냐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내린 하나의 결론. 지금 위치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없다. 청소년운동하시는 분들 물론 존중하지만 고등학교 내의 청소년의 위치란 좌파적 운동주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라고 판단. 그래서 하나를 정했다. 나는 '커서' 어느 길로 가야할까. 여러 동지들, 아니 활동가들을 만났다. 여러 성향과 이념들.. 그 동지들을 보고 길을 정했다. 확실히 정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정의내렸다. 나의 기초적인 생각과 본능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 모두를 거기 틀에 맞추기로 결단내렸다. 내 내밀한 꿈들, 소박한 꿈들과 그 이념적 대의를 일치시키고 싶다. 그 대의가 옳다고 확신하기에 나는 우선 전진하기로 결심했다. 그 과정에서 심지어 동지들끼리도 많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진정으로 상대를 존중한다면, 상대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지점에 있어서 상대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동지들이 있어서 좋다.

음... 진로...이대로라면 지역 국립대에 가게 될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가슴벅차도록 든든한 지역 동지들과 함께 지역 비정당/비제도권 좌파운동을 제대로 한번 꾸려보리라고 결심. 서울지역 운동권에 비해 규모가 조금(아니, 많이...) 작은것은 사실. 체계적 학습을 거친 경험많은 선배들은 거진 다 서울에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많이 배우고도 싶지만.. 음.. 누가 그랬다. '학습은 혼자 하는것'이란다. 지역에 남게 된다면 아마 혼자, 열씸히 해야 할 것 같다.

아쉬운 점 하나. 나는 공감하는 능력을 약간 잃어버린 것 같다. 물론 이 쓰레기같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려버리겠다는 1월 전의 열정은 지금도 내 심장에 남아 활활 불타고 있다. 하지만 몇몇 동지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면, 비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속으로 '웃기고 있네, 사랑 따위론 뭣도 못한다, 중요한건 이념' 이러면서.. 어떤 동지의 눈물을 볼때면 '저 눈물 진심일까' 하며 생각하기도 한다. 그럴때면 내 스스로가 징그럽기도, 때론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세계를 뒤엎으려 한다면, 노예에서 주인으로 가는 수레바퀴를 굴리려 한다면 우리는 휴머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 그 사실은 명확하니까 괜찮다.

음 쓰면서 느낀건데 꽤나 생각할 지점들이 많은것 같다.. 요새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이론적으로, 또는 실천적으로 훌륭한 동지-선배들이 많다. 그 동지들을 보면서 똑똑해지고 싶다는 열등감을 느끼지만서도..

그것보다도 나는 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말랑말랑한 것은 싫다. 기울어지고 편향된 사람이 될 것이다. 과격하게, 최대한 급진적으로. 그리고 옳은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나의 운동을 지속하게 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도, 동지들에 대한 믿음도 아닐 것이다. 혁명적 대의에 대한 믿음, 그 한 길로 올곧게 나가야 한다는 굳센 다짐이다. 나는 지금 출발선에 서 있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새날이 오든 안오든 간에.(201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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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상반기때를 정리한 글을 보니까 굉장히 부끄럽다. 지금보다 더 솔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무언가 수정하고 싶은 부분들도 있지만. 청소년 운동에 대한 관점이라던가, '비정당'이라는 표현이라던가.(비 의회정당, 아니 사회주의정당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어쨌든 나는 지역 국립대가 아니라 수도권 사립대로 진학했다. 조금은 부끄러운 사실인데, 그 결정의 배경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제일 컸다.

지금은 각 월별로 무엇을 했는지, 나에게 무슨 중요한 사건이 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작년 7월에는 어떻게 1월의 일을 기억했었는지 신기하다. 그건 그만큼 나에게 2011년이 특별한 해였고, 오로지 1월부터의 각성만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소잿거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망각하기 전에 2011년을 진작에 정리했어야 하는데 내 방만함이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야 몇가지 사건을 간추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철저히 나와 관련되거나, 나에게 감명을 준 것들만이 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2011년 하반기 7~8월 ~ 12월.

 

7~8월: 학교 내에서 학생신문을 만드려고 했다. 기존 사회주의학생연합 멤버 3명이서 간략하게 사업을 구상하고, 정독실 루트를 통해 여학생들과 접촉했다. 아무래도 여학생들과는 같이 생활하지 않았기에 우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여학생들 특유의 정치에 대한 관심, 언론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될 거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남학생도 더 모집하려고 했는데, 이미 여학생을 많이 모집해 수가 지나치게 많아진 상태라 애매했다. 그래서 남학생 3명, 여학생 7명 총 10명이 모였는데 주2회정도 모였다. 토론을 하기도 하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을 말했다. 아이들이 굉장한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정치 자체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정치를 말하는 나에 대한 흥미였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기존 연합 멤버들은 학내 운동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신문부를 꾸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 신문이었다.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속한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너무 역겨웠다. 다른 동지들은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겠지만, 어쨌든 그들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내가 속한 고등학교에서 운동의 씨앗이라도 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정치적 목적과는 별개로 당면 과제로 우리가 하고자 했던 건 학생자치언론이었다. 방송부의 마이크는 교사들에게만 허용되었고, 신문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학생이 학생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학교와 맞서는 신문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급하게 구상하다보니 재정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도 예측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서둘렀다. 매점의 물가조사를 하려고 설문지를 돌렸는데, 그게 교감 귀에 들어가서 몇번이고 호출되서 설득,회유,위협,꾸지람을 들었다. 명백히 대립해야 했지만 그러면 재정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러지도 못하고, 적당히 반항했다. 그러자 지도교사를 한명 모셔오면 신문부를 허용하겠다, 정도로 타협을 보았지만(실제로는 타협이 아니라 위협과 공갈이었다) 교사들은 학교와의 갈등을 우려한 탓에 아무도 지도교사를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삐라 형식으로 뿌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부원들이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여름방학이 왔고, 우리는 실패했다. 지금 돌아간다면 결코 그러한 방식을 취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9월에도 한번의 모임과 상호작용이 있었지만, 이건 이걸로 끝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는 것과, 모임안의 구성원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이 좋았다. 전망이 보이지 않아 내가 다소 침체되어 있을때 학생들은 오히려 더욱 과격해지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다들 고3이었는데 어떻게 그 정도로 높은 참여도를 보였을까 생각해보면 놀랍고 재밌다. 우리에게 그 한달간의 소동이 단순한 하나의 추억에 그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8월에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9월: 딱히 기억나는 사건이 없다. 희망버스가 있었나? 글쎄.. 있었다고 해도 내가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이 나에게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때부터 공부를 좀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7월부터의 고민이었지만, 서울로 갈 것인가, 부산에 남을 것인가의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은 결국 서울로 와버렸다. 앞에서 말했던 그 이유와 운동에 대한 고민이 충돌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도 서울의 대학에 간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달에는 야자시간이 끝나고 지하철을 타는 내내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기억이 난다. 아무런 전망도 없었고 계획도 목표도 없었지만 마냥 설렜던 시간들이다. 책은 거의 읽지 못하고, 운동에 대한 고민도 잠시 접어두었다. 그때의 내 트위터는 정치적인 트윗 일색이었지만, 지금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실제로 내가 활동을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난다. 대학가면 사회주의운동을 할 것이다. 라는 추상적인 생각만을 했던 것 같다. 짧게 정리하자면, 해방을 향한 열정, 인간애, 진리를 설파하는 것에 대한 두근거림, 이런 것들은 날 지배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기력함과 외로움이 다시 찾아왔다.

 

10월: 공부를 좀 신경써서 했고, 어떤 이유 때문에 서울에 왔다갔다 했다. 아마도 이 달에 4차 희망버스가 있었는데 다음날이 기말고사라서 참석하지 못했다. 공부가 잘 안돼서 답답하기도 했던 시간들이다. 대략 9월 말쯤이었나, 서울에 가야겠다. 이렇게 목표를 좀 정했던것 같다. 다 결정되고 나니 속이 조금 후련하기도 했지만 그러면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두렵기 시작했다. 모의고사에서 성적은 그대로 나오는데 무언가 불안했다.

대학에 들어간다면 내가 할 활동의 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운동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이때 쯤에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이 있고 조직간에 어떤 차이가 있나를 조금 깨우쳤던 것 같다. 그곳에서 인정해준다면 사회주의 학생조직의 조직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좀 했었던 것 같다. 아마 부산 사노위 동지들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희망버스 때 보고 얘기를 나누었던 사노위 학생동지들의 면면이 나에게 호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었는데,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다. 의회주의에 대한 반감과 우경성, 대중정당의 당원규정의 모호함, 당원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불만, 당기구에 속해 활동을 하며 실천-검증 구조를 거치는 '활동가'라는 개념의 부재 때문이었다. 당원의 실천이 곧 당의 실천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대중정당 모델은 그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전위활동가가 모이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거기서 활동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혁명전위정당이 혁명대중정당이 되더라도 그 대중정당 안에도 전위는 있고, 철저한 규율과 토론, 실천과 검증 구조는 있다. 의회주의 대중정당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속한 당이기에 내가 바꾸려고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노력을 하지도 않고 불만이라서 나간다, 이건 되게 무책임한 거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대중정당의 태생적 한계다. 헌신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원하고, 그러면서도 그 활동이 전체 계급의 변혁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매개고리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구조는 나와 좌파들의 노력으로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진보정당의 길과 내가 가야할 길은 너무나도 달랐다. 진보정당 내 사회주의자들이 아무리 뼈빠지게 노력한다고 해도 사민주의정당이 사회주의정당으로 될 수는 없는 일이고, 의회주의정당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강령에 쓸 수도 없는 일이다. 적어도 6월인가 7월 쯤에는 머릿 속으로 탈당 결심을 했다. 인터넷 당원이 아니라 오프라인 당원이었기에 직접 가서 탈당계를 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고, 막상 탈당을 하려고 하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해서 탈당을 확실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건 속한 곳이 없어진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막상 그때도 정말 소속감을 가진 곳은 아무데도 없었으면서. 지금은 조직원은 아니지만, 소속감은 명확하기에 차라리 지금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11월: 이때부터는 정말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수능이 11월 10일이었나,, 아님 12월이었나. 생각해보니 11월 10일이네. 수능을 잘 보진 못했지만, 후련한 마음이었다. 많이 외로워했다. 힘든 시간들을 버티어냈다. 이런 내 마음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에게 굉장히 나쁘게 굴었던 것 같다. 아마 그건 올해까지도.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마 이론적인 학습도 전혀 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트위터나 했기 때문일까. 아무런 정치도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대학에 가면 활동하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수능 끝나고 서울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있었다. 노동자대회도 참석했는데 정말 그렇게 재미없을 줄이야. 부르주아들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민주노총 위원장이 노동해방을 입에 담는 것이 정말 기만적이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때부터 큰 노동자집회에는 어째서 현장 노동자도, 노동자계급에 복종하는 지식인도 마이크를 잡지 않는가. 왜 계급의 배신자나 의회주의정당 대표자들, 각종 '관료'들에게 마이크를 주는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동지들이 다들 좋았다는 평을 내리던 변혁운동 결의대회를 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12월: 그 활동의 상은 위에서도 적었듯이 매우 바뀌었긴 했지만, 어쨋든 사회주의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은 지금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보다도 혁명이라는 단어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체제를 갈아엎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다시 불꽃처럼 타올랐던 게 이때부터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을 정말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이 우선이다, 라는 말이 어떨 때는 감상적인 사람들과 연대라는 이름의 자기만족만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되기도 하지만 사회주의자에게는 정말로 사람이 우선이어야 한다. 이론과 논쟁, 그리고 실천은 치열하게 하되 사람을 보는 시선을 잃어버린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끝장이다, 그냥 패배한다는 의미에서의 끝장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운동에 대한 희망을 놓게 되어버려서 끝장날 거다, 라는 생각을 했다.

 

2011년 상반기가 보고 듣는 시기였다면, 하반기는 결정을 많이 해야 했던 시기인 것 같다. 그 결정들이 지금 와서 보면 꽤 마음에 든다. 그 결정의 배경이 되어준 동지들의 말이 매우 소중했다. 그런 경험들이 없었으면, 나는 결국 내가 보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규정짓고, 현실의 틀을 제멋대로 정해서 안주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떠어떠한 이유 때문에 '아직은' '지금은' 진보정당에 남아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대열에 가담하겠다.-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변명을 했을 테지. 심지어 나는 올해 총선에서 야권연대를 거친 민주당 후보 캠프에서 통진당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진보정당 당원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나의 지향과 목적에 입각해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체성을 숨기는 것은 결국 남을 속이는 것이다. 남을 속이면, 결국 스스로도 속게 된다. 각종 혁명적 언사를 드러내는 것이 유치한 것이 아니라(그건 유치하다기보다는 미숙한 것이고 때때로는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드러내는 사회주의자들을 비꼬며,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니다, 시기상조다' 하면서 달팽이껍질 속으로 숨는 것이 진정으로 유치한 것이며 비겁한 것이다. 어쨌든 이제 2012년이다. 민중주의와 과학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제는 단 한가지밖에 보이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목적은 결국 사회주의혁명이다. 2011년은 결국 내 정치의 길을 찾게 해준 1년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만 하다보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들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도 만들어 준 사람의 얘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사실 그사람이 없었더라면 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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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4 11:36 2012/03/0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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