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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박 포스트 3

소위되기 참 힘들다.

훈련병, 사병들 걸을 때 뛰고 뛸 때는 기어가는 이 생활, 끝이 올까 싶었지만 벌써 8주가 지났다.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 훈련받은 얘기를 부모님께 말씀드리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생각해보면 사실 이 눈물은 고생한 게 억울하거나 당시의 고통이 생각나 나온 게 아니었다.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소외감 때문이었고 돌연히 바뀌어버린 내 처지에 억울하고 불쌍하고 짜증나는 여러가지 심정이 뒤섞여버린 탓이었다.

 

직접 마주대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던 답답함은 한동안 나를 옥죌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답답함만 더해졌다. 감정은 애초에 비언어의 영역에 있는바, 말이나 글로 감정의 실체를 보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잊겠다" 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잊어야할 대상의 한계는 연기처럼 불투명할 뿐이다. 그렇다면 답답함을 없애겠다고 자꾸 내 안으로 파고들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는 것은 내 기준에서 새로운 판타지만 계속 만들어낼 것 같다. 이래서 편지를 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답답함을 없애려 편지를 보내지만 글을 쓰는 내내 혹은 글쓰기를 마치고 편지 봉투를 풀로 봉하는 순간부터 답답함은 더 더해져버린다. 나도 나를 잘 설명하기 힘들고 상대방도 자신을 명확히 묘사하기 힘든 이 난관에서 의사소통은 가능한 것일까.

 

선택은 두 가지. '체념'과 '끝까지 알아내는 것'이다. 체념한다면 연기는 바람을 따라 조금씩 사라져갈 것이며 답답함의 정체는 영원한 미결로 남아 하나의 단편적인 추억으로만 기억될 것이다. 꿈만 같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절실함이 달랑 사진 하나, 편지 몇 개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건 현재로서는 너무나 아쉽고 슬픈 일이지만 답답함은 분명 사라질 것이다. '끝까지 알아내는 것'은 하나의 선택항으로서 가능할 뿐 실제로 이루어지긴 힘들 거다. 나도 나를, 상대도 상대를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상황에서 뭔가 알아낸다는 건 힘든 일이다. 정말로 노력한다 하더라도 근사치를 짚어내거나 아니면 아예 먼 소설을 하나 뚝딱 만들지도 모른다.

 

체념해버리자니, 켜켜이 쌓였던 기억과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조금만 뭔가를 더 하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흩어져버린 연기를 다시 예전의 연기로 돌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 이러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미워하게 되는 거지. 이런 건 이제 알만큼 나이도 들었고 경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내 인생 가장 중요한 3년이 될지 모르고 가장 중요한 8주가 될지도 모른다. 이 때의 경험과 감정, 생각은 나를 바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야겠다. 하나하나 나의 눈과 발을 넓혀주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직접 정면으로 대하고 절대 피하지 않겠다. 23살, 클 때가 됐고 반드시 크고 말 것이다. 겁먹지 말고 숨지 말고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자.

 

힘내자 세안아. 짧디 짧았던 2박 3일의 특박, 참 뜻깊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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