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윤소영, 공감

1강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로

 

1950년대 말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폭발할 조짐을 보인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56년에 소련공산당 서기장인 흐루시초프가 선임 서기장이던 스탈린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첫 번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내용은 두 가지인데, 먼저 스탈린이 개인숭배를 강제했다는 것이고, 덧붙여서 사회주의적 합법성을 침해했다는 것입니다.(15쪽)

 

스탈린 비판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이 분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분열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서 벌어진 중·소논쟁이었습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두 번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15~16쪽)

 

즉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스탈린주의의 위기라는 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대응이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좌파의 출현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신좌파를 급진주의와 혼동하고 있지요. 그러나 급진주의는 스탈린주의의 위기가 결국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위기이기 때문에 스탈린주의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도 폐기해야 한다는 그런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급진주의는 반마르크스주의는 아니라고 해도 비마르크스주의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급진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신사회운동인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는 노동자운동과 구별되는 것이지요. 신사회운동을 대표하는 것은 환경운동이나 생태운동, 또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가 신좌파의 가장 중요한 조류였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 마르크스주의로서 신좌파의 가장 큰 특징은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시켰다는 비판과 관련됩니다. 즉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가 아니라 레닌주의이기 때문에 레닌주의를 복원함으로써 스탈린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신좌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론적 시도와 정치적 시도가 그것입니다. 이론적 시도를 가리켜서 보통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고, 정치적 시도를 가리켜서 보통 유로 공산주의라고 부릅니다.(17쪽)

 

이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람이 다름 아닌 알튀세르였습니다. 그가 1977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아주 중요한 강연을 하는데, 제목이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폭발했다!」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원인이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지요. 알튀세르의 선언의 본질적인 측면은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스탈린주의의 위기나 레닌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하나의 계기에 불과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폭발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사멸한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결론이었습니다.(18~19쪽)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발전주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의 발전주의는 당시 세계적 추세와는 상당히 다른 특수성을 가졌습니다. 그 중 하나가 수출을 통한 발전, 즉 수출지향적 산업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본이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에 외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는 동시에 외자의존적 산업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시아도 그렇고 라틴 아메리카도 그렇고 대부분의 발전도상국들은 외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자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출이 아니라 내수를 중심으로 산업화를 추진했지요. 즉 박정희 정부의 외자의존적이고 수출지향적인 산업화는 내자동원적이고 내수지향적인 산업화라는 보편적인 유형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발전주의는 남한이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에 종속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 1960년대에 이런 특수한 발전주의를 택한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남한과 대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한과 대만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요. 남한에서는 1970년대가 되면서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이 육성되었습니다. 대만에도 물론 중화학공업이 존재했지만,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박정희 정부는 외자의존적·수출지향적 산업화와 별도로 재벌중심적 중화학공업을 추진했습니다.(25쪽)

그런데 1979년에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은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1979년은 박정희 정부의 발전주의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던 그런 해입니다. 우선 경제위기가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수익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적으로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윤율이 급락했다는 말이지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이윤율이 급락한 이유는 고정자본의 규모가 거대해졌기 때문입니다.(26쪽)

 

3고: 달러 가치, 이자율, 유가 상승

 

1979년에 들어와 박정희 정부도 이제까지의 발전주의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때까지 추진해 왔던 경제정책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1979년 4월에 실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라는 남한 최초의 정책개혁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박정희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의 이행을 시도했다는 것이지요.(27쪽)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거시경제적 측면과 미시경제적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거시경제적 측면이 바로 안정화라는 것인데,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물가안정입니다. … 그리고 미시경제적 측면에 바로 구조조정이고 구조조정의 가장 중요한 효과가 정리해고 또는 임금삭감이지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 나타나는 원인은 이윤율의 하락에 따른 미국경제의 구조적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금융화입니다. … 어쨌든 금융화 때문에 거시경제적 안정화가 나타나고, 그 효과가 바로 미시경제적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금융화나 안정화라는 원인을 그대로 놔둔 채 구조조정이라는 효과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본말을 전도시키는 셈이지요. (26~28쪽)

 

구좌파는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구좌파라고 해도 두 가지 태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당 관료들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기층 활동가들의 태도입니다. 정당 관료들의 태도는 스탈린주의가 됐든 레닌주의가 됐든 마르크스주의가 됐든 위기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르주아지의 기만적 술책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일 대중과 접촉하는 기층활동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침묵합니다. 언젠가 운동이 부활하면 위기도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 그런데 남한에서는 부정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특수한 구좌파적 태도가 등장했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이런저런 잘못을 했다’는 식의 고백이 그것인데, 쉽게 말해서 공개적인 전향이었지요. 최초의 고백은 요즘 뉴라이트 운동을 제기하고 있는 신지호 교수가 했던 것입니다. … 또 다른 구좌파적 태도도 역시 알튀세르가 예상치 못했던 것인데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알리바이였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주의의 위기이지 트로츠키주의의 위기는 아니고, 스탈린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트로츠키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기회라는 말입니다.(39쪽)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뭐니뭐니 해도 1995년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해체하고 민주노총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민노련 같은 운동권의 주류화와는 비교도 안 되는 노동자운동 자체의 주류화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전노협의 해체와 민주노총의 건설이라는 사건이야말로 남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앞으로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연구과제라고 생각합니다.(45쪽)

 

1980년대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은 1985년 구로 동파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구로 동파와 노동자대투쟁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 바로 1990년에 건설된 전노협이었지요. 그런데 전노협은 노조 연합체이면서도 상당 부분 사회운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노협이 19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전노협의 건설이 상징하는 남한의 노동자운동이 세계노동자운동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서구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한 대안을 모색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남한을 비롯해서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동자운동을 모델로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였습니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란 노동자운동을 쇄신하는 길은 노조가 실리주의적인 또는 코퍼러티(*협조주의)즘적인 성격을 탈각하고 사회운동적인 성격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뜻이지요.(45~46쪽)

 

산별노조를 지향하는 민주노총은 노동자운동의 핵심적인 주체를 대공장노동자로 설정합니다. … 그러나 대공장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총이 코퍼러티즘이나 실리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의 전투적 코퍼러티즘이나 실리주의에서 혁명정세의 도래를 예상했던 사람들은 정말이지 근시안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1997년 위기와 대선부터 민주노총의 위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민주노총이 이른바 노·사·정 합의를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민주노총의 코퍼러티즘적인 또는 실리주의적인 본질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었지요. … 민주노총의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주류화의 심화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민주노동당의 창당이었습니다. … 결국 민주노총의 건설이나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남한 노동자운동이 영국이나 미국의 노동자운동을 모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52~53쪽)

 

민주노총의 아킬레스건은 역시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대공장노동자를 중심으로 건설된 민주노총이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57쪽)

 

유로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은 알튀세르와 친화성을 갖는 이탈리아공산당의 잉그라오 좌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잉그라오 좌파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경제학자이면서 제1 노총 활동가인 트렌틴인데, 1970년대 초에 그는 평의회 노조주의를 제기하지요. 또 한 사람은 로산다인데, 당시 그녀는 마오주의를 매개로 해서 평의회 마르크스주의를 제기하지요. 그래서 잉그라오 좌파를 통해서 평의회 마르크스주의적인 계보를 복권시켜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물론 잉그라오 좌파의 기원이나 계보보다는 그 현재성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1990년대 초에 워터맨이 제기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트렌틴의 평의회 노조주의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훨씬 더 일반화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그것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의 하나가 잉그라오 좌파의 후예인 공산주의재건당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공산주의재건당이나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대안세계화운동에 기여하는 역할에 주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에 적합한 이념과 운동을 모색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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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9 17:11 2012/07/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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