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우리 시대에 기업은 단순히 고용계약에 의해 노동자가 자기의 능력과 시간의 일부를 투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단순한 거래의 상대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 또는 사회적 존재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지평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회사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하루 종일 노동하고 다시 기숙사에서 잠드는 노동자에게 기업은 더도 덜도 아니고 세계이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기업이 우리의 삶을 보다 본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일어난 하나의 필연적 결과이다. … 이런 사정은 현재 어떤 기업에 취업하고 있는 노동자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면 삼성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자격증을 우표 수집하듯 모아야 하는 대학생에게도, 아니 그런 대학생이 되기 위해 학원과 과외로 시들어가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기업은 그들의 삶을 본질에서 규정하는 지평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기업이야말로 철학자 후설이 말한 “생활세계(Lebenswelt)”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의 삶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우냐 아니면 얼마나 예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도 기업 내에서 노동하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우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1~33)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경제활동에서 이윤추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폐해를 교정하려 할 때, 그들은 경제 자체를 부도덕한 활동으로 매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윤이라 부르든 아니면 잉여가치라 부르든, 경제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 그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굳이 이를 두고 경제학적 차원에서 논란을 벌일 필요도 없이, 재화나 노동을 투입한 뒤에 그보다 더 큰 산출을 얻어냄으로써 어떤 잉여를 남기는 것도 일종의 창조로서 인간성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칙적으로 경제적 이윤추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지금과 같은 기업경영과는 다른 어떤 방식을 통해 기업에 의한 노동의 노예적 예속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를 내재적으로 탐구해야 할 것이다.(53)

 

이 경우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기업의 현행 지배구조 그 자체를 해체하여, 대대로 세습되는 왕국과도 같은 기업을 노동자들이 주인 되는 공화국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이 국가보다 더 크고 강한 공동체가 되어 국가가 기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그리고 기업이 독재적 조직이어서 거기 속한 노동자들의 자유가 억압받고 노예상태로 전락한다면, 기업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버리면 되는 것이다.(53~54)

 

이 기준을 지키기만 한다면, 노동자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누구를 사장으로 선출하든, 아니면 선거의 방식을 어떤 식으로 정하든, 그런 세세한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경영을 맡은 사장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의 노동자들의 위임에 의해 경영권을 행사하고, 그 경영의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이 아닌 노동자들에게 직접 책임을 진다는 사실이다. 자기들이 선출한 사장이 자기들이 원한 대로 회사를 운영하여 기업의 가치도 높아지고 노동자들의 삶도 향상된다면, 그들은 사장을 신임하여 사장직을 계속 맡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예상과는 달리 사장이 회사 경영에 서툴고 치명적인 손실을 입힌다면 노동자들은 언제라도 사장을 탄핵하여 해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식회사가 이렇게만 운영될 수 있다면, 기업경영에 대한 모든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결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회사는 노예들의 집단농장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들의 생산 공동체로서 하나의 공화국 또는 폴리스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57)

 

“기업을 노동자가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자… 현대자동차도 하나의 공화국으로 만들고 삼성전자도 하나의 공화국으로 만들고, 이런 식으로 모든 주식회사를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리면, 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노예적 예속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58)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 경영권의 분리.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을 별개의 일로 분리하여 주주에겐 배당금과 기업 자산에 대한 잔여청구권만을 주고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주자는 것이다. 이 제안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된다면,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75)

 

그가 돈으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더라도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을 사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식회사 기업에서 노동자를 지배하는 권력은 경영권의 장악에서 생겨나는데, 우리의 제안에 따르면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경영권은 주주 몫이 아니라 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에 대한 최종적인 주권자가 되어 자기의 생산활동을 (직접적인 방식으로든 간접적인 방식으로든) 스스로 통제하고 형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산출된 잉여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면, 더 이상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편에서 보자면 노동자 주권에 입각한 기업경영이란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76)

 

사람들은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사기업을 어떻게 공화국으로 만들 수 있냐는 반론을 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길게 보면 그 모든 의심과 비판이 아무것도 아니다. 수백 년 전 프랑스인들이 혁명을 통해 왕이 사사로이 소유하고 지배하던 국가를 모든 국민의 국가로 바꾸어버린 것에 비한다면 사실 쉽고도 가벼운 제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삼성이나 현대의 수십 개 기업집단이 모두 특정한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 무렵 유럽에서도 국가는 왕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4세는 ‘짐이 국가다’라고 말했다. 전해지거니와 이런 소리는 한갓 허세가 아니라 왕권신수설이라는 제법 심오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확고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말들을 지난 시대의 농담이라 치부하지만, 그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혁명에 의해 국가가 모든 국민의 나라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 주주들은 배당금만 받고 경영권은 노동자들이 행사하는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처럼... (58~59)

 

이렇게 해서 기업이 강제 노역장이 아니라 공화국이 되고 노동자들이 임금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시민이 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그것은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생산활동을 더불어 스스로 결정하고 규제할 수 있는 자유와 주체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생산활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잉여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의 것이 노동자 주권 기업의 정치적 효과라면 뒤의 것은 경제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기업은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 공동체인 동시에 노동자들을 위한 작지만 온전한 민주―공화국이 될 것이다.(60~61)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지게 될 때...

 

생산과 노동이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젊은 여성 노동자는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을 얻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고, 남성 노동자는 철강공장에서 쇳물을 벼리다가 피로에 못 이겨 끓는 쇳물에 빠져 죽도록 일을 해야 하며, 가난한 고학생은 방학 중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대형마트 청소를 하다 질식해서 죽을 정도로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노동자들이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잉여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주인이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자유로운 이윤추구의 극한은 생명의 소진이다. …·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런 균형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무한정한 이윤추구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그 경제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이윤추구의 도구로 삼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죽든 말든 자본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더 내기 위해 그들을 착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노동자들이 관리한다는 것은 그런 타자적 착취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생산활동과 일상의 삶 사이에 그리고 이윤과 노동 사이에 균형이 형성될 것이다. (66~67)

 

노동자 경영권이 확립된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기업에 의한 자연파괴과 서서히 줄어들어 자연과 인간의 생산활동 사이에 끝내 어떤 화해가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 땅에서 스스로 농사를 짓는 농부는 자연으로부터 언제나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애쓰면서도 자연과의 화해와 균형이 없이는 농사를 계속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 한에서 농업과 자연 생태 사이에는 조화로운 균형이 지속될 수 있다. (67) … 가끔 우리는 노동해방의 문제나 자본주의 극복의 문제와 생태문제가 별개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내 편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극복하지 않고서 생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망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태 위기의 뿌리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있다는 것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 생태를 보호하고 죽어가는 인간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맹목적인 이윤추구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69)

 

더 나아가 노동자 경영권의 원칙이 지켜진다면 기업활동의 세계화는 더 이상 착취의 세계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노동자 경영권이 확립되어도 생산기지를 세계화하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그때 기업은 다른 나라에서 저임금의 노예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의 동료 시민으로서 노동자를 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노동자는 똑같이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시민이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노동자 경영권의 원리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껍질을 부수고 온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는 만남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70)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크스주의자 행세를 하게 되고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적 상상력의 한계에 갇히게 된다. 그 협소한 상상력의 한쪽 끝은 대규모 공황에 따른 자본주의 붕괴의 시나리오이며, 다른 끝은 국유화된 계획경제의 유토피아이다. 머지않아 닥칠 대공황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나면 그 폐허 위에다 국유화된 계획경제를 통해 새로운 공산주의적 경제 질서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시나리오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붕괴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이다. 길은 붕괴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끊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길을 걷는 사람이 있는 한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는 있어도 길이 완전히 끊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한 인간이 걷는 역사의 길이 끊어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지금 우리가 걷는 역사의 길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가는 것이지, 막연하게 자본주의의 붕괴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84)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특수하게 규정된 부정인 까닭에,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부정하느냐에 따라 똑같이 자본주의의 지옥을 벗어나는 길도 여러 갈래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강변하는 것은 특정한 종교를 믿음으로써만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독단적 아집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과학자나 철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85)

 

나 역시 국가 경제에서 일정한 부분은 국유화와 계획경제의 원리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기업을 국가가 경영할 수는 없으며, 경제활동 전체를 국가가 속속들이 계획할 수도 없다. 그것은 국가가 모든 시민의 가정생활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경제 전체를 계획하고 운영하려 할 때, 과거 소련에서처럼 국가 자체가 더도 덜도 아니고 국민을 착취하는 자본가 노릇을 하게 된다. (99~100)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소유관계를 바꿈으로써,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업의 주인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유혹에 빠지는 까닭은 내가 보건대 인간의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유가 소유에 근거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기 Eoansd)

생각하면 이처럼 자유와 소유를 뗄 수 없이 결합된 것으로 보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아무 차이가 없다. … 같은 기업을 두고도 신자유주의자들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를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에 의한 공동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양족이 모두 소유에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01)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유를 통해서만 자유를 확보하려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크에서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다른 면에서는 그리도 불화하던 철학자들이 소유권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치 담합한 것처럼 일치를 이룬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지만, 그 속사정이 어떻든 그것은 근대 철학에서 가장 유감스런 화해였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자유가 재산권에 존립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낳은 모든 속물적 욕망에 철학적 위엄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103)

 

하지만 정말로 자유는 소유에 기초하는가? 아니다. 이 점에서 로크도 칸트도 헤겔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데 존립한다. 물론 인간은 자기를 형성하기 위해 반드시 외부적인 재료를 필요로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 그리고 종종 그 외적 대상들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거나 소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유가 자유이며, 소유의 확장이 자유의 확장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근거 없는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책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사적으로 소유하고 밑줄을 그으면서 읽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도서관을 사적으로 소유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경우라면 그 활동은 생산활동이다. (104~105)

 

노동자의 자유는 오직 기업에서의 생산활동의 자발성과 주체성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기업 내에서 피할 수 없는 협업에서의 ‘서로주체성’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생산활동을 근본에서 스스로 더불어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자유는 실현되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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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7 17:51 2012/07/2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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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자본주의 극복, 노동자 경영권으로”

    Tracked from 어떤 말 2012/07/30 21:23  delete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꾸리에, 2012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논리적 도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동행할 가치가 있는 여정이다. 차근차근 따라가 볼까. 저자는 자본주의를 지양하기 위해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 시대에 기업은 단순히 고용계약에 의해 노동자가 자기의 능력과 시간의 일부를 투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단순한 거래의 상대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