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공부가 생각보다 진척이 안 될 때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중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 한 권을 골라 속독으로 읽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집중력도 회복되고 어느 정도 자극도 되어서 공부할 마음이 다시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선택받는 책들은 예전에 제목에 혹해서 충동구매를 했지만 미처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한, 그래서 그렇게 책장 한 켠에서 잊혀져 가던 책들인 경우가 많다. 

 

오늘도 주말인데다가 날씨까지 흐린 마당에, 어려운 책 붙들고 싸움할 기분이 도저히 생기지 않아 책꽂이에서 예전에 사놓았던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예전에 제목에 혹해서 사놓았던 권인숙 씨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책(청년사, 2005).

 

사실 책 자체의 내용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예측가능했던 바, 딱히 애초의 예상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데군데에서 흥미로운 분석들이 발견되지만, 1980년대 학생운동의 전반적인 군사적-남성중심적 성격을 분석한 책 내용 전체는 (이제는) 우리에게 꽤 친숙한 내용들이다. 임지현 씨를 필두로 한 일상적 파시즘론 진영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박노자 씨의 한국사회 분석 등을 통해서 이미 많이 봐온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는 일상적 파시즘론과 권인숙 씨가 전개한 군사주의 비판을 묶어서 다룰 것이다. 이 둘이 기반하는 지적 배경은 다를지 몰라도 이 둘은 공통적 문제를 가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일상적 파시즘론 혹은 군사주의 비판이라는 분석틀을 사용해 과거 한국 사회를 평가하는 것에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다.

 

그건 내가 이들 비판 담론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들의 논의가 가지는 뚜렷한 한계, 그리고 그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담론적 효과 때문이다 

 

여기서 일상적 파시즘론 혹은 군사주의 비판을 통한 현대사 분석이 가지는 한계란, 그 담론들 속에는 한국 현대 사회의 사회 변동에 대한 거시적 분석틀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다. 대개 이들의 담론 속에서는 분석 대상인 군사주의 문화가 팽배했던 과거 상황과 분석자가 서 있는 현재, 즉 대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하게 된 현재 간에 맺고 있는 "관계"는 생략되어 버린다. 

 

권인숙 씨는 이 책에서  왜 1980년대 학생운동 속에서는 비주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란 질문을 던진다.(69) 하지만 내 생각에 일상적 파시즘론이나 군사주의 비판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질문은, 과거에 왜 군사주의적 문화가 문제시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너무 많이 봐 왔다), 왜 지금은 군사주의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하게 되었는가란 질문이다. 즉, "어떠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혹은 물적 조건 때문에)" 과거에는 하나의 문제로서 사고되지 않았던 것이 현재에는 하나의 문제로 가시화되는가? 이 질문이 삭제되는 순간 혹은 고민되지 않는 순간, 일상적 파시즘론이 암묵적으로 손을 들어주는 답변은, 과거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지만 (그 간의 노력을 통해) 지금은 이런 인식이 가능하고 중요해지게 되었다는 식의 진보적(그것도 관념론적인) 역사인식일 뿐이다.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한 거시적 분석틀의 부재가 가져오는 결과는 종종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상적 파시즘론 혹은 군사주의 비판의 공백은 이들 담론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류의 통속적 회고담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민주화라는 이데올로기"라는 글에서도 비판한 적이 있지만, 이러한 식의 담론은 "말해져야 하는" 어두운 과거와 "말할 수 있는" 현재를 단절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적어도 우리사회에 팽배한 "진보"(혹은 "민주화")의 신화를 강화시켜주는 것으로 혹은 최악의 경우 현재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정당화로 귀결될 수 있다.(과거 사회에 대한 저널리즘적인 반성과 비판들이 때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는" 현재에 대한 간접적 긍정처럼 들리는 것은 과연 나뿐일까?)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상적 파시즘 담론이 가시화하는 문제들이 더 "근본적인(혹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시화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비판이 아니다. 혹은 이러한 과거 운동의 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그 시대를 살아온 주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식의 엉뚱한 비판도 아니다.(실제로 몇 년 전 김진석 교수는 이러한 요지의 비판을 박노자에게 가한 적이 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상적 파시즘론이나 군사주의 비판 담론이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지형은, 그리 간단하게 진보나 발전의 결과로 정리될 수 만은 없다는 것이다. 혹시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날 과거의 "반공-훈육적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이미 이러한 "반공-훈육적 체제"가 붕괴했다는 혹은 적어도 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그 실효성이 다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일상적 파시즘론자들은 권위주의적-훈육적 권력 매커니즘이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인 것처럼 비판하지만, 오히려 지배계급은 발빠르게 그 자리를 비워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지배이데올로기는 권위주의나 군사주의라기보다는 (종종 이들과 대립되는 형태로서 묘사되는) 이를테면 혁신적 자유주의가 아닐까? 이러한 자유주의적 담론들을 통해 창출된 반공-훈육 사회와의 허구화된 전선의 강화와 일상적 파시즘론 혹은 군사주의 비판이 전개하고 있는 작업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비록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서로를 은밀히 강화시켜 주고 있지는 않은가?

 

푸코의 지적처럼, 한 사회에서 특정한 문제들이 가시화되는 것은, 특정한 사회체제적-물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언제나 권력과 뒤엉켜 작동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담론들이 어떻게 그러한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권력 작동 양식의 변화와 연결되는지를 부단히 검토하는 자기-반성(self-reflexivity)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반성을 위해서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담론이 서 있는 사회적 조건과 그것의 변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거시적 설명틀이 필수적이다.

 

일상적 파시즘론 혹은 군사문화 비판이 한국사회에 대한 한 발 늦은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더 급진적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해 주고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거시적 분석틀이 필수적이다. 과거 반공-훈육 사회를 지탱했던 사회적-물적 조건은 무엇인가? 90년대 들어 이루어진 반공-훈육 사회의 해체 이후 등장한 새로운 사회 통치 형태의 특징은 무엇인가? 군사주의 비판 담론과 이러한 새로운 사회통치 형태의 등장 간에 맺고 있는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새로운 통치 양식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저항이 가능할 것인가? 일상적 파시즘 비판은 이러한 새로운 저항 양식과 어떤 연관을 맺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내가 아는 한계 내에서는, 지금까지 일상적 파시즘론이나 군사주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사실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는 일상적 파시즘론이나 군사주의 비판이 한국 사회에서 겉보기보다 그리 근본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담론으로 머무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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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00:22 2007/03/12 0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