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불빛>(정혜주, 소명출판, 2003)

 

 

7월에 읽은 소설 중 최고는 정혜주의 <내 안의 불빛>(소명출판, 2003)이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한 좋은 성찰은 때늦게 그리고 조용히 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도 그러한 운명에서 자유롭지는 않다.(2003년에 80년대 운동권의 이야기라니.. 조용히 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게다.) 

 

한 때 후일담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초중반, 이제는 386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80년대 학번 사람들이 자신들의 20대를 돌아보며 썼던 소설들. 

 

이러한 후일담 소설의 등장인물의 구조를 대충 일반화시켜보면 이렇다.

80년대 운동권이었던 '나'는 변절의 죄책감과 부담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90년대의 지리멸렬한 공간을 살아 가고 있고, 이런 '나'를 둘러싼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은 시대에 발빠르게 적응한, 그리고 그 결과 90년대에 공간 속에서 "잘 나가고 있는" 한 인물,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여전히 나에게 부채감을 가지게 만드는 지금도 운동을 하고 있거나 혹은 이미 과거에 죽어 유령으로 존재하는 인물...이 삼각 구도 속에서 '나'는 두 인물을 거리를 둔 채 관조하고(하지만 이 관조는 비대칭적인데, 대부분의 경우 현재 잘 나가고 있는 친구에 대한 묘사는 자세히 이루어지는 반면,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의 사정은 그저 암시될 뿐이거나 소식을 전해들은 정도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된다), 그 둘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동요가 소설 속에서 서술된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후일담 소설 작가로 꼽히는 공지영이나 김영현, 김영하의 소설 대부분은 이러한 인물 구도 속에서 전개되고, 가장 최근에 나온 후일담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에서도 이러한 인물 구도는 반복된다.(비록 방현석은 자신의 소설이 공지영 등과 함께 '후일담'으로 묶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할테고 나 역시 이들을 나란히 묶고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러한 후일담 소설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듯이 "상처로 얼룩진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시간이 지난 후 자신들의 삶을 성찰적으로 돌이켜 본"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혹은 이 소설들은 그 자체로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의 공간 속에서 급격히 소비사회로 이행해 간 90년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아니면 평론가들의 말처럼 "80년대의 시체들을 직시할 용기를 갖지 못했던, 실패한 망각의 제스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개인적인 성찰이나 시대의 반영보다 더 은밀하고 반동적인 욕망이 이 후일담 소설들 속에는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싶다. 혹시 이 후일담 소설들은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의 나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전면화되는 것을 막아버리려는 부인(disavowal)의 행위는 아니었을까? 그것이 개인적인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든 전사회적인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든, 현재라는 시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적대와 모순의 목소리들을 전치시키고 그것을 이제는 낡아버린 어떤 것으로 유령화시키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앞에서 언급했던 후일담 소설의 인물 구도 속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구도 속에서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거나 혹은 "아직도" 80년대의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소식은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거나(공지영, <무엇을 할 것인가>), 대화 속에서 사정이 암시될 뿐이거나(김영하, <전태일과 쇼걸>), 혹은 이미 죽어버려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 공지영의 <고등어>에서 80년대를 상징하는 은림은 마음 속에 담아둔 말을 하는 순간 죽어버리며,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에서 우리는 베트남에서 번역가로 살아가는 "재우"의 목소리와 이제는 잘나가는 변호사가 된 "문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공장에서 팔이 잘린 채 여전히 외곽단체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창은"의 목소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은림은 명우의 시점에서 재현되며, 창은 역시 재우나 문태에 의해 재현되는 실체없는 존재일 뿐이다. 

 

거칠게 말해 나는 후일담 소설을 하나의 "적극적인" 기획, 즉 여전히(!) 존재하는 80년대의 흔적들을 급속하게 과거화하고 유령화하고 그 산 유령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들을 망각하기 위한 기획(혹은 그러하고자 했던 80년대 학번의 욕망을 반영하는 기획)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80년대에 대한 부채의식과 90년대에 대한 환멸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후일담 소설들 속에서 산화되어 버리는 것은, 여전히 힘겨운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민중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이고, 여전히 지속되는 사회의 적대와 모순에 대해 발언하는 정치적인 목소리들이다.(80년대의 현장 유입과 90년대 탈현장 분위기라는 공식적 내러티브와는 달리 나는 90년대 중반 이후에 노동현장에 들어간 그리고 지금도 그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와 동기들을 알고 있다. 후일담과 변화에 대한 담론들 속에서 무화되는 또 한가지는, 바로 이들의 삶일 것이다.)

 

그렇다면 후일담 소설에서 동시대에 공존하는 삶의 형태로 제시되는 세 명의 인물들 간의 관계는 사실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라는 통시적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결국 후일담 소설은 "현재의 나"가 "미래의 나"로 변신하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 즉 과거에 대한 "애도"의 몸짓인 것은 아니었을까?(후일담 소설 속에서 80년대가 아름답게 묘사되면 묘사될수록 더더욱 그 속에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 미심쩍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예컨대 김영하의 소설보다는 공지영의 소설 속에서 80년대의 사람들은 더 "순수하게" 묘사되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난 공지영이 김영하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정혜주의 <내안의 불빛> 이야기를 하면서 후일담 소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서론이 긴 나쁜 습관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정혜주의 이 소설이 가진 가치가 이러한 후일담 소설의 구도를 넘어선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단. 이 소설 속에서는 후일담 소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발빠르게 적응한 어떤 인물이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즉 "현재의 나"가 망설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미래의 나"는 애초에 삭제되어 있다) 대신 이 소설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대립과 내면의 변화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한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현재의 나" 속에서 끊임없이 억압된 것의 귀환을 반복하는 과거는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민중 그 자체이다. 여기서 정혜주의 소설이 가진 거칠지만 대담한 기획의 핵심이 있다.(이는 아마도 소설의 서두에 나오듯이, 스무살 시절 정혜주 본인이 "강물에 살짝 발을 디뎌 보고 물이 너무 차갑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계집애이고 싶지 않았"(9)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녀가 20대를 돌아보면서 당시 자신의 열정의 대상을 함께 운동에 투신한 지식인 동지들이 아니라 민중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임진영이 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내 안의 불꽃>에 실린 정혜주의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작가 자신과 민중과의 연애담으로 이해될 수 있다. 80년대 민중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현재의 나"가 실연의 상처를 충분히 삭힌 이제서야 뒤돌아보는 과거의 연애담. 물론 그 사랑이 뜨거웠던 만큼 그 상처를 삭히는 시간도 길고 고통스러웠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시대라는 2000년대가 되어서야 소설을 통해 정혜주는 과거의 연인을 진정 사랑했었다고, 그 때 왜 더 안아주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지금도 만나고 싶다고 조용히 고백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러한 사랑에 대한 자각이 -실제로 종종 그렇듯이- 이별 후 그녀가 겪은 삶의 경로를 통해서 뒤늦게 획득된다는 것이다. 노동 현장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애 하나를 둔 가정 주부로서 생계의 어려움으로 두 평반 도서대여점을 운영하면서 근근히 먹고사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궁핍함과 변화없음 속에서 지리하게 지속되었던 그녀의 삶은 그녀에게 옛 사랑이었던 민중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우리가 흔히 경험하듯이 헤어진 뒤에야 그 혹은 그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녀는 운동시절 함께했던 하지만 "나는 버러지같어야"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난, 그래서 그녀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여공 미례를 그 때서야 떠올리게 된다. 

 

 

"내가 미례를 떠올린 것은 그 슬픔의 밑바닥에서였다. 한없이 밑바닥까지 가라앉으면서, 나는 가슴을 휘젓는 누군가의 서글픈 웅얼거림을 들었다. 나는 꼭 버러지 같어야...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미례를 삼켜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버러지의 기억이 어느 순간 또다시 그녀의 발목을 낚아챘으리라는 걸, 그리고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미례는 쿨쩍이고 있는 조그만 내 옆에 쪼그린, 내 어린 시절의 친구였다는 걸.

 

한때 내게는 삶도 역사도 일직선으로 보였던 적이 있었다. 훌쩍 건너뛰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인간도 밑이 훤히 보이는 물웅덩이쯤으로 생각했었다. 스무 살의 내 이마를 서늘하고 명징하게 내리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공룡의 뼈다귀같은 것이었다. 자본과 노동, 신식민지, 분단사회..... 나는 그것을 감싼 만만찮은 외피와 오묘한 실핏줄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파충류 같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했던 자리마다 사실은 가파른 벼랑이 숨어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벼랑의 가파름만큼이나 깊은 골짜기에는 완강하게 똬리 틀고 결코 변치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던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제, 나는 버러지처럼 배로 밑바닥을 밀면서 세상을 느낀다...."(88)

 

 

따라서 기존의 후일담 소설들 속의 애도의 분위기와는 달리, 정혜주의 "나"가 느끼는 감정은 멜랑콜리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대상과의 뒤늦은 동일시. 역설적이게도 "나"의 미례와의 이별은, 돌고돌아 나와 미례의 동일시를 가져온다.(물론 이 소설에서도 역시 "미례"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그녀는 "나"에 의해 재현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재현은 사랑하는 이가 내뱉은 말에 담긴 의미를 조심스레 추적해가는 연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이해는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하게 된다.)

 

물론 고통속에 씌여졌음이 분명해보이는 이 소설이 과거와 현재의 나의 어설픈 화해 혹은 민중과 지금의 나의 감격스런 재회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강,섬,배>의 나는 결국 미례를 찾지 못하고, <영만이>의 임진자는 영만에게 전화하지만 메세지는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 속의 정혜주는 끝내 구름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그녀는 단지 조심스레 다리의 중간까지 가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점은 오히려 이 소설의 미덕이다. 과연 누가 과거에서 미래로 건네주는 구름다리를 건널 수 있단 말인가?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혹은 건너와 안정된 땅을 밟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함정은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위태롭게 그저 조심스레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끝없이 이어진 벼랑 위 다리를 조심스레 매달려 걸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금의 "나"는 당연히 과거의 "미례"를 만날 수 없으며, 만난다 하더라도 그 "미례"는 전연 다른 인물일 것이다.(혹은 나와 미례의 만남은 감동적이기보다는 어색한 분위기만 낳을지도 모른다. 혹은 미례는 나와의 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만나려는 시도 그 자체이다. 중요한 것은 구름다리를 건너는 게 아니라 건너려는 시도 자체이다.  

 

그래서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다리 중간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은 작가 본인의 모습이자 이 소설 자체의 형상화이기도 하다. 구름다리를 다 건넌 후 안정된 땅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위태로움에 한발짝도 못내디딜 것 같은 아찔함 속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그 때서야 제대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음이, 정혜주가 말하는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인 것이다.

 

 

 

p.s. 1.   

정혜주씨는 이 작품집 이후로 새로운 소설을 발표하지는 않고 있다. 어쩌면 "운동을 떠난 뒤 남을 설득할 말의 힘을 잃어버렸던" 그녀에게 (비록 <내안의 불빛>으로 다시금 발을 내딛었다 할지라도) 글쓰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작년 이 맘 때쯤 그녀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 에는 그녀가 겪었던 힘겨움과 이후의 희망이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80년대를 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80년대의 가치를 2000년대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발견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 작업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스스로 '진화'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믿으면서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다.

 

난 조금은 순진하게도 어떤 시대를 더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더 맹렬히 한 시대를 증오하거나 사랑했던 혹은 더 아파했던 사람들이 더 많은 기억과 발언의 권리를 가진다고 믿는다. 물론 현실의 이치는 그 반대이고, 치열하게 시대를 통과했던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기억은 종종 더 큰 아픔일 뿐이다. 때론 그런 부당함이 나를 분노케(혹은 서럽게) 한다.

 

 

p.s. 2.

사실 문학에 대한 글들은 비밀글로 등록해두는 경향이 있다. 감상적인 글에는 영 서툰 편이어서 문학에 대한 글들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며(내 주변의 어떤 이들은 내가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 자체를 놀라워하기도 한다;;), 또 그런 글들의 대부분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읽으면 민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글도 한 동안 비밀글로 해두었다가 밤기운+술기운을 빌어서 슬쩍 공개로 바꾸어놓는다. 한 작가의 고통스러웠을 고백에, 그에는 훨씬 못미치지만 유사한 고통을 체험했던(혹은 했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공개적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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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5 01:26 2007/08/05 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