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공 서적들을 보다 지칠 때면 틈틈이 보고 있는 책이, 정치학과 관련된 지젝의 글을 따로 모아 펴 낸 "The Universal Exception"(Continuum, 2006)이다. 일종의 선집인 셈이라, 곳곳에 이미 번역되었거나 읽어본 글들도 있어 구입을 망설이고 있었는데(구입을 망설였던 이유는 또 있다. 최소한 2000년대 중반 이후 지젝의 책들이 번역되어 나오는 속도가 꽤 빨라졌고 번역의 질도 한층 나아졌다는 것), 아는 선배 책꽂이에서 우연히 발견하곤 빌려서 즐겁게 읽고 있다.
지젝의 자기-복제야 이제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니 곳곳에서 어디선가 본듯한 예와 문장들이 난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따로 모아놓으니 쭉 읽어내려가면서 지젝의 정치학의 개요를 그리는 재미가 쏠쏠하다.(지젝의 정치학에 대해 따로 연구서를 쓴 적도 있는 편집자 Rex Butler의 공일 것이다. 이 책 편집자들의 서평은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제 3의 길") 마음같아서야 예전 지젝의 <300>평을 소개했을 때 달렸던 댓글들도 있고 해서 책 소개 포스팅과 함께 코멘트를 달고 싶지만, 나의 부족한 내공과 시간이 허락지 않아 지젝의 정치적 입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최근의 인터뷰를 번역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사실 인터뷰를 번역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최근 근무 시간에 이런 저런 단문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간 때우기로는 최고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책을 보거나 웹서핑을 하고 있으면 노는 것 같아 보이는지 이런 저런 일을 안겨주던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타이핑을 해대니, 열심히 일하는줄 알고 격려까지 해주더란 말씀:-) 자꾸 걸려오는 전화와 산만한 분위기에 차분히 포스팅을 하거나 어려운 글을 번역할 정신은 없어도 틈틈이 이런 짤막한 인터뷰 정도 번역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기회가 된다면 최근에 읽은 바디우나 랑시에르의 인터뷰 글들을 번역해 볼 수도.)
인터뷰의 출처는 지젝이 올해 초 Soft Targets란 저널과 행한 인터뷰이다.
원문은 http://www.softtargetsjournal.com/web/zizek.php를 참고하시길.(근무 시간에 틈틈이 한 번역이라 의역이 난무하고 오역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강조는 역자의 것이다.)
<신적 폭력과 해방구(Divine Violence and Liberated Territories)>
translated by 캐즘
Soft Targets: 일단 폭력의 문제부터 시작해보죠. 오늘날 폭력과 정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Zizek : 폭력의 문제는 특히 좌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칼 슈미트와 발터 벤야민, 두 사상가를 예로 들어보죠. 난 칼 슈미트에 특별한 감정이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슈미트의 “결정(decision)”이라던가 “예외(exception)”라는 개념은,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제기했던 중요한 구분, 즉 “신화적(mythical) 폭력”과 “신적(divine) 폭력” 간의 구분을 지워버리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슈미트에게는 신적 폭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탈법적 폭력, 즉 법을 세우는 예외의 폭력이 있을 뿐이지요.
오늘날 좌파들은 벤야민이 실제론 일어날 수 없는 “유령같은(spectral)” 폭력을 바라고 있다고 비웃거나, 아니면 아감벤처럼 어떤 마술적인 개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그가 신적 폭력으로 제시하는 예는, 군중이 부패한 지배자를 구타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구체적인 것이지요.
나는 지금 쓰고 있는 폭력에 관한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프란쯔 빠농도 벤야민과 유사한 운명을 겪어야 했어요. 그는 폭력의 역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고, 어떤 “초월적” 폭력이 아닌 살인이나 테러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그의 작업 중에서 이러한 부분은 오늘날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상당히 부드러워지고 “카페인이 제거된” 빠농과 벤야민을 만날 수 있을 뿐이지요.
ST : 벤야민이 소렐을 참조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죠! 사실 아감벤의 벤야민에게서는 이러한 부분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던군요. 당신은 최근 저서에서 신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반세계화 운동보다는 카라카스와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벌어진 폭동들을 그 예로 든 바 있습니다. 또 로베스삐에르에 대한 저서에서는, 1990년대 리오데자네이로 빈민가에서 벌어진 “식량 폭동”을 신적 폭력의 예로 들었지요. 이러한 투쟁들이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투쟁 주체들의 출현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런 주장 속에는, 당신이 다른 곳에서 비난했던 어떤 포퓰리즘적 유혹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Zizek : 식량 폭동이 있을 당시 전 브라질에 있었는데, 빈민가 인민들은 중간 계급들에게 좀 겁을 주고 약탈하기 위해 시내로 몰려들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나는 이 사건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더 충격을 받았어요. 우선,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인양, 마치 신적 파국(divine catastrophe)을 맞은 이들처럼 공포에 질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불탔던 가게 같은 것들은 마치 관광명소처럼 취급되더군요!
폭력은 복합적 현상으로서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폭력이 항상 구조적인 문제이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objective)” 특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쉽게 식별될 수 있는 행위자들에 의한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주체적(subjective)” 폭력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발리바르는 자본주의의 작동 그 자체에 내재한 구조적 폭력이라는 생각을 발전시켜 왔습니다.(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으로 맑스주의 전통 속에서 발견되지요.) 오늘날 주체적 폭력의 범람은 이러한 구조적·객관적 폭력을 배경으로 해서 읽어내야만 합니다. 주체적 차원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됩니다.
또한 폭력이 필연적으로 행위(action)인 것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능들이 저절로 굴러가며 그것을 바꾸려면 많은 폭력과 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물들을 지금 그대로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폭력이 사용되며, 때때로 진정한 폭력적 행위는 행동을 거부하는 것,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때도 있지요.
ST: 지금 총파업(general strike)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요?
Zizek: 예,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급진적 실천일 때가 있습니다. 관건은 항상 그렇듯이, 타이밍의 문제이지요.
하지만 좀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실재적 변혁(transformation)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폭력적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폭력적이되, 단지 무력한 행위로의 이행(passage a l'acte)에 해당하는 폭력을 피하는 것입니다. 종종, 가장 야만적인 폭력의 분출은 이러한 무력함의 반영이거나 실재적 행위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스탈린은 히틀러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습니다. 그의 집산화(collectivization)는 실재로 미친 짓이고,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난 꼭 집산화를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것은 사실이에요. 나는 레닌=혁명, 스탈린=반동이라는 트로츠키주의의 도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마 1933년이나 1934년에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전인 1928년에서 1929년에 우리는 상상가능한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농민들이 러시아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농민들을 없애길 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패했지만 진정한 폭력이었어요. 만약 폭력이 기본적인 사회 구조와 근본적인 사회적 관계를 바꾸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20세기에 분출된 모든 폭력들은,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원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렐과 대중 파업의 문제로 돌와와 보지요. 난 어느 정도 그의 문제의식에 동감합니다만, 문제는 이러한 입장이 내가 자유의 “미학주의적(aestheticst)” 분출이라고 부르는 입장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점입니다. 내게는 혁명의 진정한 문제는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혁명 이후에 무엇을 하는가, 어떻게 일상을 재조직하는가가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1934년에 이르자 아무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이 시기 스탈린은 반동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요.-역자]
ST: 그렇다면 프랑스 방리유에서의 폭력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앞서 당신은 빈민가의 폭동을 예로 든 바 있는데요...
Zizek: 그 사건은 프랑스 공화국에 대한 이슬람의 공격따위로 이해되어선 안됩니다. 알랭 핑켈크로(Alain Finkelkraut) 같은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겠지만요. 그들이 첫 번째 불태웠던 대상이 이슬람 모스크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폭동에 반대했지요. 방리유의 젊은이들은 단지, 바디우의 슬로건을 빌자면, “우리가 여기 있다. 우리는 원래부터 여기 있었어”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사실 이 구호는 미국의 동성애자 인권 그룹인 Act-Up이 외쳐서 유명해진 구호이다. 구호의 전문은 “우리가 여기 있다. 우리는 원래부터 여기 있었어. 이 사실에 익숙해져야 할 껄(We are here, We are from here, Get used to it)”이다. -역자] 이는 가시성(visibility)에 대한 순수한 요구이지요.
이 사건은 우리의 자랑거리인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 자신의 핵심적인 요구들이, 정치적 문제의 언어로 정식화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 언어의 “친교적(phatic) 기능”이라 말한 것에 해당합니다. 즉, 이들은 “나는 이것을 원한다”가 아니라 단지 “여기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ST: 당신은 계급 분석이라는 맑스주의적 범주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빈민가나 방리유의 문제를 보면, 여기서 우리는 맑스 범주의 한계를 보여주는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힘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전세계적 차원에서 정치의 파편화와 복잡화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계급과 계급투쟁이 최근의 흐름과 적대를 분석하는데 있어 여전히 유용한 범주일까요? 오히려 오늘날 이런 범주의 사용은 “구체적 상황”의 고유성을 포착하길 거부하는 것 아닙니까?
Zizek :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습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를 바디우나 랑시에르의 방식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보편적 단독성(unversal singularity)을 나타내는 이들입니다. 즉, 이들은 상황 내에 특정한 장소(place)를 갖지 않으면서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이, 포함되어 있지만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도 갖지 않은 이들입니다. 프롤레타리아 개념은 유동적인 범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정식화가 정치 경제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나로서는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동가치론을 폐기해야 할까요 혹은 그것을 다시 주장해야 할까요? 바디우나 제임슨 같은 이들은,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며, 진정한 문제는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창안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난 우리가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맑스주의는 착취 개념에 기반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글쎄요, 여기에도 저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 후기 산업사회라던가, 정보사회라던가, 위기 사회 같은 개념들은 모두 저널리스틱한 범주들일 뿐이지요.
ST: 하지만 당신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재정식화는, 생산의 문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고용과 실업 간의 범주 구분이 점차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다중(multitude)” 같은 용어는, 최소한 이러한 불안정성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Zizek: 이 부분이 저로선 좀 난감한 부분입니다. 당신이 제기한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슬럼가나 방리유에도 그들 만의 특유한 경제가 존재합니다. 어떤 규제도 갖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유동적이지는 않은 불법 시장(illegal market) 같은 것 말이지요....
ST: 순수한 신자유주의 상태라고 부를 수도 있겠군요?
Zizek: 예, 그럴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빈민가들이 직접적인 국가 통제 외부에 존재하긴 하지만, 여전히 경제 메커니즘 속에 통합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산성/비생산성 문제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어떻게 특정한 경제적 힘들이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한편으론 자본의 네트워크 속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해방된” 아프가니스탄 경제를 보세요. 결국에는 세계 경제 속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생산물은 아편이지만 말이죠.
이제 다중의 문제로 돌아가야겠네요. 그건 매우 불분명한 범주입니다. 내게는 오늘날 자본주의 자체가 네그리가 “다중”이라 부른 것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최근에 브라질에서 행한 강연에서, 네그리는 우리가 더 이상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거의 꾜뮤니즘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또한 국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는 좌파의 반-국가적 논리에 점점 더 회의가 듭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논리가 우파에서도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게다가, 나는 소위 “국가의 소멸”의 어떤 징후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미국을 예로 들어볼까요? 나는 시민사회와 국가 간에 갈등이 발생할 경우, 80%는 국가의 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예컨대 몇몇 지역 우파들이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기를 원한다거나 할 경우, 국가는 개입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좌파가 국가 기구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활용하고, 가능하면 이를 접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사실 나는 우리가 “탈주선(ligne de fuite)”이나 자기-조직(self-organization) 같은 개념보다는, 오늘날 좌파에서 터부시되고 있는 커다란 국가나 집합적인 결정이란 개념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우리가 “영토(territory)”라는 개념을 재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가 가르쳐준 것인데, 사실 우리 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갈등은, 영토의 문제를 둘러싸고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나는 좌파가 “해방구(liberated territories)”라 불릴 수 있는 용어를 통해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ST: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어떤 특수한 국면을 묘사하기 위해 탈영토화란 개념을 사용한 것 아닙니까? 즉,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그래서 착취의 장소가 더 이상 국지적이지 않고 사회 전반에 분산되어, 사회 전체가 정치화되는 그런 국면 말이지요.
Zizek : 네그리와 하트부터 시작해보지요. 이들이 쓴 <다중(Multitude)>에는, 바흐찐과 카니발에 대해 다룬 장이 있습니다. 나는 해방을 카니발과 비교하는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카니발은 모호한 용어이며, 오히려 반동들이 더 자주 사용합니다. 만약 당신이 카니발을 원한다면, 오늘날 자본주의가 바로 카니발입니다! KKK의 집단 린치도 카니발이구요. 제 친구인 문화비평가 보리스 그로이(Boris Groys)는, 1930년대에 바흐찐이 카니발에 대한 이론을 생산할 때, 스탈린의 숙청이 그 모델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오늘은 중앙 위위원회에 있다가 내일은....
현대 자본주의의 동학 속에서, 엄격한 국가 통제와 축제적 해방 간의 대립구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선언(Il Manifesto)>에 실린 바디우의 인터뷰에 동의합니다. 거기서 그는 “규율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내가 오늘날 스스로를 농담처럼 “좌파-파시스트”로 규정하는 이유지요! 오늘날, 위반(transgression)의 언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규율의 언어, 민중적 규율(popular discipline)과 희생정신에 대해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통해서든 규율을 “원-파시즘적(proto-fascist)”것으로 파악하는, 규율에 대한 자유주의적 공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무튼 네그리로 돌아가보지요. 알다시피, 좌파는 10년마다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20년 전에 어네스토 라클라우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사회변혁과 헤게모니>로 국역되었다 -역자]이 왜 그리 인기를 모았을까요? 그것은 이 책이 계급투쟁의 우선성이 약화되고 특수한 투쟁들의 연합에 그 자리를 내주는 시기에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라클라우는 그 이론을 차베스나 모랄레스로 대표되는 새로운 라틴 아메리카 포퓰리즘에 알맞은 형태로 고치려 하고 있지요.[라클라우는 최근 저서 "On Populist Reason"에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역자] 네그리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보기에 그는 포르투 알레그레나 여타의 반세계화 운동을 포착해낸 것 같습니다. 즉, 이 운동이 그의 기반이지요.
하지만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생산의 목적이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의 생산으로 변화하면서, “절대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그의 해석입니다. 나는 이러한 논리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건 정말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일 뿐입니다. <다중>의 마지막 장에서, 이 입장은 어느 정도 이론적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이 때 “탈주선”이나 저항의 수사학은, 제국의 “붕괴”라는 환상 위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낙관적인” 입장의 거울-이미지를 아감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딱히 비관주의라 하긴 그렇지만, 아무튼 서구 전통이 파국적 결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부정적” 신학에 기반해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유일한 해결책은 “신적 폭력”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벤야민이 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벤야민에 따르면, 혁명은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벤야민의 용어를 그대로 쓰자면) “군주의(sovereign)” 책임을 가질 때 발생합니다. 반면에 아감벤에게 폭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법과 함께 노는 것(playing with the law)”이라고 대답하는데, 천박한 경험주의자여서 미안하지만, 난 대체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ST: 당신은 “해방구”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당장 떠오르는 것이 레바논 남부지구와 베이루트 남쪽 주변부가 아닐까요? 헤즈볼라(Hezbollah)와 같은 현상을 공동체주의적 조직의 신학-정치적 형태로 뿐 아니라, 단순히 신학적 기반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저항 현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이 현상을 단순히 반계몽주의(obscurantist)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이것은 좌-우파 공히 그렇습니다), 이들이 제기하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우리의 이론적 과제가 아닐까요?
Zizek: 이건 정말 구체적인 판단의 문제인데요. 나는 당신에게 순진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당신이 말한 그러한 차원을 보고 있는 거지요? 그 부분을 확실히하고 싶군요. 자기-조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분명 멋진 일입니다. 예컨대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무장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서비스도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은 멋지지요. 하지만 모든 파시즘 체제 역시 동일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요.
나는 이란 혁명이 진정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정말 확실합니다. 물론 오늘날 이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석유를 판돈으로 민중을 매수하는 보수적 포퓰리즘 체제일 뿐이지만요. 나는 이슬람 그 자체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이란 혁명에서 이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건 좌파적 입장과 연결된 이슬람이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는 보수파가 다시 통제권을 되찾게 되었지요. 다시 한 번, 난 이슬람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야 겠군요. 나는 이슬람이 잠재적으로 굉장히 해방적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원래 이슬람교는 스스로를 비-가부장적인 종교로 내세우지요. 난 예전에 이에 대해 쓴 바 있습니다.
바디우는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국가와 당의 논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새로운 조직 형태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완전히 부정적인 현상으로, 사회적 공간의 근본적 폐쇄로 볼 순 없을까요? 대체 여기서 제안되는 사회적 공간이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본체없는 주체성(substanceless subjectivity)”이라는 맑스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정의로부터, 너무 멀리 나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핵심적입니다. 이러한 조직이 당에도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들이 일종의 전-근대적인 사회적 공간의 전체화에 기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ST: 이들이.... 국가에 대한 반-근대적 반응이란 말씀입니까?
Zizek: 그렇습니다. 어쨌든 난 사회적 서비스나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문제는 노동자나 여성 문제 등에 있어서, 당신이 어디에서 해방의 약속을 볼 수 있는가입니다. 이는 단지 레토릭이 아닙니다. 난 해방의 약속을 보고 싶지만, 잘 모르겠더군요. 내게 중요한 문제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해결은 단일하고 세속적인 국가 건설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여기서 나는 뻔뻔한 유럽중심주의자라고 말해야겠습니다) 헤즈볼라나 하마스의 목표가 단일한 세속국가의 건설입니까, 아닙니까? 난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지지하며, 심지어 그들의 테러도 지지합니다. 만약 그들이 단일한 세속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다면 말이지요. 하마스나 헤즈볼라가 제안하는 선택은 이러한 국가 건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바다로 몰아넣는” 것이지요. 나는 이러한 반-제국주의적 연대체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ST: 마지막 질문을 하지요. 당신은 “공동선의 생산은 항상 공포스럽다/테러에 기반한다(That which produces the general good is always terrible)”는 생-쥐스트의 정식화에 얼마만큼 동의하십니까?[지젝은 “Robespierre or the ‘Divine Violence’ of Terror”란 글에서 생-쥐스트의 이 문구를 강제적인 공동선 부과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아니라, 테러에 대한 생-쥐스트의 옹호로 읽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역자] (당신 용어를 빌자면) “테러의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발명이 현대의 해방적 정치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지요?
Zizek: 나는 프랑스 혁명에서 평등주의적 테러의 폭발적인 분출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 테러는 폭력을 분출하기는 하지만 이를 스스로 제어할 수는 없는 “군중”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닥치는 대로 죽이기만 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자코뱅 테러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지요.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이래로, 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과거 문화연구를 뒷받침한 문화-정치의 표상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문화-정치의 표상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과거 문화연구를 이끌었던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혹은 "일상이 정치적이다"라는 구호가 가진 급진성이 이제는 소진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구호는, 후하게 말하자면 변화한 지배 구조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며, 박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능적 부분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전복성 상실의 징후는, 과거 ‘고유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추구를 상징했던 이 구호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고유한 정치’에 대한 추구를 질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고유한 정치'란, 주어진 구조 속에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혹은 치안police)가 아니라, 우리가 참여하는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는, 구조화시키는 매커니즘 자체를 변화시키는 정치를 말한다.) 애초에는 공식적인 정치의 장을 넘어서는 고유한 정치의 추구를 상징했던 이 구호들은, 어쩌면 이제는 모든 정치를 질적 차이없이 파편화시켜, 정치를 "외부없는" 평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제제기가 거칠고 단순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려면 포스팅 수십 개로도 모자랄 것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이러한 평면적-폐쇄적-그람시주의적-포퓰리즘적 정치의 표상을 넘어서, 새로운 정치적 표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오히려 오늘날 다양성의 이데올로기는 핵심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지 않았는가? 획일성/다양성의 구도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뒷받침하는 허구적 대립틀은 아닌가?
오늘날 곳곳에 탈주선이 있다거나 저항이 있다는 선언으로 충분한가? 오히려 이러한 파편화된 저항들은, 암묵적으로 고유한 정치의 부재를 보여주는 징후는 아닐까, 아니 더 나아가 오늘날 지배 체제는 이러한 일반화된 저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가 저항과 불만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전에 잠시 언급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고유한 정치적 공간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 류의 일종의 복고주의로 빠지지 않으면서, 정치의 장을 확장시킨 문화연구의 성과를 이어받은채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장과 정치전략을 구축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이 지젝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다문화주의적 쾌락주의(multiculturalistic hedonism)에 대한 그의 비판과 어느 정도 접합되는 것일 게다. 사실 지젝은 이러한 고민을 진척시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며, 다만 이와 유사한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 중에 가장 유명하기에 가장 대중적인(?)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이게 내가 종종 지젝을 통해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지젝보다 이런 문제제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사회학/인류학적 저서들을 읽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위에 옮겨놓은 지젝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몇몇 부분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몇몇 부분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방어에서부터 동일한 논리 하에 이어지는 그의 텅 빈 보편성에 기반한 근대적 정치구조에 대한 옹호는(인터뷰에서는 단일한 세속 국가에 대한 그의 계속되는 강조에서 드러난다), 그 텅 빈 보편성이 야기했던 복잡한 문제들을 외면한 채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한 예전에도 밝혔듯이 그의 정치적 입장이 그의 이론 체계와 일관되게 접목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때로는 의심스러운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오늘날 위반의 언어가 지배이데올로가 되었다라거나 현대 자본주의 자체가 카니발이라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들만으로도, 현대 정치지형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젝의 말마따나, 이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제기이다. 당신이 그것을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