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연초부터 굵직굵직한 책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소문만 무성하던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출판됐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서점에 깔렸다. 랑시에르의 책도 속속 번역되고 있고, 얼마 전에는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도 번역됐다. 덕분에 진작에 읽으려고 뽑아둔 몇몇 전공 서적들과 함께, 봐야 할 책들을 책상에 가득 쌓아놓고 지내고 있는데, 마치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해나가듯이 꾸역꾸역 한 두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기회가 된다면, 대부분의 책들에 서평을 남기고 싶지만, 아마도 읽어야될 책이 많아질수록 포스팅은 줄어들었던 지금까지의 전례를 생각해보면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자주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방만한 블로그 운영에 대한 양해를..:-))

 

그 중에서 이번 주에 뒤적거린 책은 바디우의 바울론인 <사도 바울>(현성환 역, 새물결, 2008)과 지젝의 레닌론인 <혁명이 다가온다>(이서원 역, 길, 2006)다. 사실 지젝의 책은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바디우의 책을 산 김에 같이 보고 있다. 지젝 스스로가 자신의 레닌론이 바디우의 바울론과 비교될 수 있음을 공공연히 밝혀온 바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같이 읽는 건 그리 낯선 시도는 아니고, 사실 읽어보면 논의가 서로 중첩되고 분기하면서 상당히 흥미롭게 읽힌다. 혹시 앞으로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보려는 분이 있다면,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를 옆에 두고 번갈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물론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지젝의 크리스트교에 대한 저작들, 예컨대 <믿음에 대하여> 등과 같이 읽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두 책에서 바디우와 지젝이 각각 바울과 레닌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모델로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거의 유사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레닌에 대한 지젝의 애착이야 그렇다고 치고, 사도 바울에 대한 바디우의 애착은 놀랍다.(니체의 바울에 대한 저주를 알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 레닌을 들먹인다는 게 더 놀랍겠지만..)) 대체 이들이 바울과 레닌이라는 半-유령을 오늘날 다시 소환해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의 첫머리에서 바디우가 요약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적 배치는, 바울(혹은 레닌) 읽기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세계가 이러한 상태로 영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만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심지어 크게 보자면 아주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선 마르크스의 놀라운 예언, 즉 세계는 마침내 시장으로 다시 말해 세계=시장으로 짜여질 것이라는 예언을 완성하기로다 하듯 자본의 자동운동들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다른 한편 폐쇄적 정체성들로의 파편화 과정이 존재하고 이러한 파편화 과정에 동반된 문화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과정은 철저하게 뒤얽혀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체성 확인(정체성의 창조나 조잡한 조합)은 시장에 의한 투자를 위한 소재가 되는 하나의 형상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투자와 관련된 한 공동체 그리고 그것의 영토 또는 영토들보다 화폐적 동질성의 새로운 형상들의 창안에 더 매력적이며, 그것보다 더 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24-26)

 

요컨대 바디우(그리고 지젝)이 포착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은 이렇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상품형태를 통해 추동되는 추상적인 보편성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적 관용을 외치는 담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둘은 (표면적인 대립 구도와는 달리) “서로를 지탱해주는 거울 관계 속에 있다.”(30) 오늘날 차이를 말하는 포스트모던 정치들은 차이의 게임을 아래에서부터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으로 추상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동력은 이러한 차이의 게임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이 둘의 공모관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오늘날 국지적 실천들에 반대하면서 보편적 진리와 총체적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곧장 "전체주의" 혹은 "근본주의"의 함의가 덧씌워진다. 상대주의적-자유주의적 좌파들은 총체성과 보편성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며,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전략은 각종 국지적 영역에서의 저항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바디우와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주장의 숨겨진 뒷면은, 자본주의적 상품 형태에 기반한 추상적 보편성만이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보편성이며, 세계 자본주의라는 체제만이 진정한 총체적 현실이라는 주장에 대한 암묵적 승인이다. 이번에 <사도 바울>과 함께 번역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는 이러한 공모관계에 대한 좀 더 정치한 분석을 담고 있다.)  

 

보편과 특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대립적 공모의 지형은 추상적 보편성과 상대주의적 특수성 간의 대립적 공모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바디우와 지젝이 각각 바울과 레닌을 소환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구도의 한복판이다. 바디우와 지젝에게 공히, 바울과 레닌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추상적 보편성과 상대주의적 특수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보편성의 정초를 위해 투쟁했던 투사였다. 바울이 특수한 정체성의 예외에 기반한 유대교 담론과 내재적 총체성에 기반한 그리스적 담론을 횡단하여(이러한 차이에 대해 무심하게 "이 둘은 같다"라고 선언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검증되는 새로운 보편적 담론을 추구했다면, 레닌의 경우에는 제국주의와 애국적 사민주의의 대립구도 속에서, 계급적 당파성에 기반한 "혁명적 패배주의"를 진리로 주장함으로써 민족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보편성의 영역을 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결국 바디우와 지젝(그리고 바울과 레닌)을 함께 묶어주고 있는 것은, (둘 모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발리바르가 맑스의 사상을 평하며 이름붙인 일종의 제3항의 사유이다. 오래 전에 읽어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발리바르는 "조우커 맑스 혹은 동봉된 제 3항"이란 논문에서 맑스의 사상을 포커판에서의 조커에 비유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게임의 구성요소임과 동시에 일종의 예외적 존재로서 조우커 맑스는, "노동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초월적 국가와 내재적 시민사회"라는 부르주아적 대립관계 속에 은폐된 정치의 장을 가시화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이 노동의 정치는 "부르주아 체제라는 독수리의 두 머리"인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의 장을 구성하고 결정짓는 요소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둘을 근본적으로 횡단하면서 이 두 동일성 간의 대립의 외부를 지칭하는 말그대로 제3항적인 요소이다.   

 

(여담이지만, 최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역시 이러한 제3항의 요소를 좀 더 구체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가라타니에게는 초월적인 국가와 내재적인 자본 간의 운동을 연결시켜주는 매개항으로서 '네이션'이 존재하고, 따라서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x는 "국가=네이션=자본"에 대립하는 제4항으로 기입된다. 하지만 기존의 요소들을 결정지으면서도 이것을 횡단하여 외부로 향하는 어떤 요소가 존재한다는 기본논리는, 제3항의 사유와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가라타니는  어소시에이션의 예로 보편종교를 꼽는데, 이는 크리스트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시장이라는 추상적 보편성-공동체라는 상대적 특수성과 이중적으로 대립하면서 등장한 종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가라타니의 논지는,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를 극복하려 했던 바울에 대한 바디우의 논지와 상당부분 겹쳐진다.)

 

물론 바디우와 지젝이 공유하는 이러한 제3항의 사유는, 이 둘이 공통적으로 라캉의 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사실 바디우와 지젝의 주장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상징계와 상상계 간의 대립적 공모관계를 넘어서 "실재"의 강조로 나아갔던 후기-라캉의 테제들을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확대-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그리고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바로 이 점이 후기-라캉의 사유가 post-68 이데올로기 비판에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68정신의 핵심이, 초월적인 권위적 아버지에 "아버지 없이도 우리끼리 잘할 수 있다"라는 상상계적 내재성의 가능성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면, 이 구도에서 빠져있는 것은 언제나 제3항, 즉 실재의 지점이다. 오늘날 68정신에 기반해 권위적-억압적-동질적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 우리의 핵심 과제라는 순진한(?) 좌파의 주장이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이미 죽은 아버지를 살아있는 듯 다룸으로써, 결국에는 새로운 초월적 법을 재구성하려는 우파의 시도와 대립적 공모관계에 있음을 폭로하여야 한다. 이렇게 대립적으로 공모하는 담론들 속에 좌파의 입장은 없다. 일반화하자면, 좌파의 입장은 언제나 제3항에서 나온다...)     

 

각설하고 다시 책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제3항의 사유라는 공통점 외에도 바울과 레닌 간의 흥미로운 공통점들을 몇가지 더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둘 모두 큰 타자의 보증을 구하려하지 않고 그것의 결여를 감추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러한 결여와 보증없음은 그리스도교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의 아들의 죽음과 그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로 상징되고, 레닌의 경우에는 일반적 정세분석을 넘어선 4월 테제의 무모함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둘 모두 특수한 공동체의 진리에 가까웠던 교리들을 보편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바울은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간주되었던 그리스도의 교리를 "부활" 개념을 도입해 비유대인으로 확장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레닌은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이론으로 간주되었던 맑스주의 이론을 "약한 고리" 개념을 도입해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론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들은 제3항의 사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대립구도가 큰타자에 의해 보장된 폐쇄적인 구도가 아닌 항상 어떤 '결여'의 지점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만 새로운 제3항의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 제3항은 기존의 대립구도를 횡단하면서 그것을 무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두 책을 동시에 보다보면 우리는 바디우의 바울과 지젝의 레닌 간의 유사성 뿐아니라 둘 사이에 드러나는 미묘한(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차이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둘 간의 유사성보다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 표면적으로 유사해보이는 이 두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 진짜 재미일 것이다.:-)) 이 차이란 다름아닌, 부활의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선언하는 사도 바울과 언제나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강조했던 유연한 혁명가 레닌 간의 차이다. 이 둘의 유사성이 제3항의 사유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발견된다면, 그러한 진리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경로를 택한다. 

 

아마도 이러한 바울과 레닌의 차이는, 바디우와 지젝간 입장 차이의 반영일 것이다. <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지젝은 바디우의 사상이 "순수 정치학"이라고 비판한다. 바디우가 바울을 이야기할 때, 그는 바울의 "사건" 혹은 진정한 "정치"가  구체적인 현실의 질서나 권력에 연루되어있지 않으며 연루되어서도 안된다고 규정함으로써, 실상 비정치적 정치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바디우(그리고 바울)에게 주체와 사건은 항상 현실적인 "조건"과 "규정성"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조건"과 "규정성"을 초월한 레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레닌의 저작들이 때로는 너무나 "현실적 조건에 밀착되어" 쓰여지는 바람에, 때로는 불필요한 비판까지 받아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그 유명한 '외부 주입' 테제를 둘러싼 논의들...) 지젝이 바디우의 바울에 맞서 레닌을 내세우는 것은 그저 단순한 심통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좀 더 밀고나가면, 이 차이는 주체에 대한 라캉(혹은 지젝)과 바디우의 이론적 차이까지 연결될 수 있다. 라캉(혹은 지젝)에게서 주체는 현존하는 질서에 "내재하는" 불가능의 지점(혹은 그 불가능성 자체)이라면, 바디우에게 주체는 사건에 대한 무차별적 충실성 속에서 "도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에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현존하는 조건들을 "부정하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반면(혹은 부정성 그 자체인 반면), 바디우의 주체는 현실적 조건을 초월하면서 등장한다. (이러한 지젝(혹은 라캉)과 바디우의 주체 개념에 대한 차이는 예전에 한 번 소개했던 <트랜스토리아> 6호에 실려있는 "상-파피에 운동"에 대한 서용순씨와 박대진씨의 논쟁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지젝과 바디우의 주체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가, 오늘날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각각 바울과 레닌이라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른 인물에 주목하게 만든 이유일 것이고, 이러한 차이가 가져오는 정치전략의 상이함은 둘의 정세인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좀 더 정치하게 논의되어야할 부분일 것이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Nicholas Brown은 이 두 책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지젝의 레닌과 바디우의 바울 간의 이러한 차이가 사실은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혁명이 다가온다>의 말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것은 레닌의 이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문제의식이라고 한 발 물러날 때, 이미 지젝은 바울화된 레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Brown에 따르면, 지젝은 바디우와 함께 결국에는 레닌과 바울 중 바울의 편이다. 따라서 브라운은 오늘날 오히려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주체는, 실제로 구체적인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전개하는 '진짜' 레닌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두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 하나.

2008년 초에 우리에게 도래한 일련의 정치철학 책들은 과연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1990년 라클라우와 무페의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의 출판은, 한국사회 좌파 이론가들과 운동권들에게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출판 이후, 장기적으로 어떤 정치적 입장도,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들의 주장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제기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의 20년 가까이 지나 찾아온 바디우와 지젝의 책들이, 그들이 개입하고자 하는 정치적 현실에 이런 효과를 낳을 수 있을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이들이 지적하는 오늘날의 정치 구도의 한계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한 좀 더 집합적인 검토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검토와 논의 그리고 논쟁의 필요성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2008/02/27 23:25 2008/02/27 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