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2007년 12월에 열린 No Way out - Von Postoperaismus bis Wertkritik 회의를 위해, 대중적으로는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Einleitung, 이론적으로는 Die Wissenschaft vom Wert로 독일 최고의 신진 맑스주의 이론가로 부상하고 있는 미하일 하인리히(Michael Heinrich)가 쓴 글을 번역한 것이다.

 

* 회의에 대해서는 .. 쏘세지(Wurst) 먹은 것밖에 기억이 안나기 때문에, http://ugkongress.blogsport.de 를 참조할 것. 원문은 http://jungle-world.com/seiten/2007/46/10994.php#top_page (Jungle World. Nummer 46 vom 15. November 2007)에 실려있다. 외래어 표기는 내 마음대로 했고, 색도 내가 넣은 것이다. (이동금지, 수시수정)

 

 

개입하라, 그러나 가르치지는 말아라!

(Eingreifen, aber nicht belehren! - Übersetzung vom Deutschen ins Koreanische)

 

특유한 자본주의 분석의 전제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그러나 그 비판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미하일 하인리히(Michael Heinrich) (번역: cheiskra at hanmail.net)

 

 

단순한 도덕적 유죄 판결 이상인 자본주의 비판은, 분석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은 자본주의로는, 사람들은 그것의 파괴적 결과만을 불평할 수 있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함께 나타나는 이러한 파괴를 (파괴적 결과들의 하나로) 비판하는 것은, 이 생산방식의 기능에 대한 통찰의 최소한도를 전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분석은 자명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옳은 다양한 전제들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완전히 다른 계기들을 중심에 세울 수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각 분석의 방법과 방식에 대한 논쟁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 논쟁을 처음부터 “세미나 마악시스무스”로 비난하고 실제적 “투쟁들”에 대립시킨 사람은, 다만 각 비판적 논의의 특유한 전제들과 분석들을 봉쇄할 뿐이다.

 

 

12월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서로 다른 자본주의 분석들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들이 해방적 실천을 위해 무엇을 실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몰두한다면, 이는 우선 환영될 수 있다. 환영하지 않는 것은 “상품비판”과 “(포스트) 오페라이스무스”(자율주의 - 역자)를 다만 서로 대립시키고, 가까이 놓여 지도록 다만 이 양 조류들을 옳게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정도로, (하나는 객관적인 면에서 시작하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면에서 시작한다는)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특징화화는 개최자의 제한된 관점이다. 

 

“상품비판”이라는 라벨은 무엇보다 Robert Kurz와 잡지 Krisis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 입장은 가치의 사물적 지배의 강조를, 의문의 여지가 있는 기술결정론과 연결시킨다: “극소전자혁명”이 자본에게서 “가치실체”가 떨어지도록 이끈다. 그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붕괴위기가 이미 진행 중이다. 이 붕괴가 다른 요소들을 통해 항상 다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사람들이 그것을 옳게 볼 수 없을지라도 그러하다.

 

“포스트 오페리아스무스”로는 무엇보다 Michael Hardt와 Toni Negri로 연결되는 경향이 의미된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고 결국 코무니스무스를 가져올 것은, 기술이 아니라 애매한 “다중”이다. 그 때에 (상품비판적 붕괴위기와 완전히 비슷하게) 코무니스무스가 원래 이미 여기에 있으나, 아직 옳게 보여질 수 없다.

 

양 경향들은 이론적 성공작들로 우쭐댄다. 그러나 그것들에서 분석적 소득은 오히려 제한적으로 남아있다. 이 특유한 주장들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경험적 사실성과의 대조는 모면된다. 양 경향들이 해방적 실천을 위해 특별히 필요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대해서 단지 참여자들이 개최자의 극도로 제한된 관점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만을 희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들이 존재하고 따라서 계급투쟁들 역시 발생한다는 것은 옳기는 하나, 특별히 심오한 통찰은 아니다. 단지 “사회적 시장경제”와 “수평화된 중산층”의 독일에서만 그런 판단은 의혹에 빠질 수 있고, 이미 좌파적이다. 마악스가 처음으로 “계급들”과 “계급투쟁”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적 역사가들과 경제학자들이 마악스 오래 전에 이것을 말했다. 계급들의 존재가 분석의 직접적 출발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마악스 역시 우선 배워야 했다. 계급들과 그들의 투쟁에서 시작하는 역시 오늘날 자주 인용되는 『코무니스티쉐스 마니페스트』에서, 그 저자는 결코 부르주아적 계급이론 너머에 있지 않다. 그러나 꼭 20년 후에 『자본』에서, 3권의 끝에서야 비로소 계급들에 대한 체계적 다룸이 의도적으로 계획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특수한 형태결정들이 서술될 때야 비로소, 계급들의 구성에 대해, 계급행위과 계급의식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다.

 

모든 전자본주의적 생산방식들과 달리, 사회를 구조하는 것은 인격적 지배관계들이 아니라 비인격적 지배관계들, 가치와 자본의 “사물적” 지배이다. 비인격적 지배관계들은 부르주아적 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을 형성한다. 사물적 지배관계들과 더불어 나타나는 물신형태들과 기만들(신비화들)은 즉흥적 의식형태들의 배경을 형성하고, 그것들은 마악스가 (그 다음에 계급들의 체계적 분석이 비로소 뒤따를 것이었던) “삼위일체 공식”이라는 표제에서 다룬, 각 “일상생활의 종교”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이 구조적 조건들의 분석을 약화시켜 없앤다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들과 지배와 착취에서 공통적이었다는 것으로 환원시키고, 자본주의적 지배와 착취의 특성에 대해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분석적 공백은 곧잘 노동자계급(혹은 다중)과 그들의 투쟁들에 대한 관념적 참고를 통해 채워진다. 항상 노동자계급이 투쟁할 때, - 그리고 계급투쟁의 이론가에게 노동자계급은 더 높은 임금을 위한 투쟁에서뿐만 아니라, 병가 혹은 노동템포의 늦춤에서 본래 끊임없이 투쟁한다. - 혁명적 의식으로의 길 역시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단지 나쁜 노조관료들과 개량적 당 전략들이 노동자계급을 항상 다시 이 혁명적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이미 노동임금의 형태는 노동자 및 자본가에게 실행된 노동의 가치가 지불되어서, “정당한” 임금에 대해 훌륭히 투쟁될 수 있고 사회적 “정당성 균열들”이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노동자 및 자본가의 모든 법관념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모든 기만들(신비화들), 모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자유환상들은” 노동임금의 형태에 “근거한다”고 마악스는 『자본』에서 고수한다.  

 

이 법관념들과 자유환상들은, 그 속에서 계급투쟁들이 우선 발생하는 틀을 형성한다. 이것은 사회적 투쟁들이 영원히 이 틀에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틀을 넘어서고 “모든 것을 위해”(회의 주최조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 역자) 투쟁하는 것은 가능하고, 역사에서 역시 항상 다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런 넘어섬을 위한 어떤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층 더, 그런 넘어섬 후에 다시 후퇴가 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어떤 보증도 없다. 많은 계급투쟁이론가들에게 유포된, (그의 일상의 투쟁들에서 다소 자동적으로 획득될 스스로에 대한 옳은 의식이, 단지 아직 그에게 결핍된 것일 뿐인) 이미 존재하는 혁명적 주체라는 관념은 헤겔주의적 역사철학의 후진 모조품이다.

 

인간들이 그들의 삶관계들과 대결한다면, 그들이 자본주의의 무리한 요구들에 반대한다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역시 호기심이 있고, 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것을 배우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탐식자들”과 “투기자들”에서 모든 사악함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믿는, 제한된 자본주의 비판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지배와 착취의 인격(인간)에 결합되지 않은 자본주의적 형태에 대한 더 많은 통찰을 이끌 수 있다.

 

급진적 좌파의 다양한 그룹들과 소그룹들은 자주 무엇보다 서로 투쟁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그 동안에, 그 때 단지 가르치는 행동을 하는 것 없이, 또한 이 투쟁들의 관념화에서 소실되는 것 없이, 혹은 심지어 어떤 “연합 상대들”에게 기회주의적으로 뻐기는 것 없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특유한 분석과 비판과 더불어 사회적 투쟁에 개입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합당할 것이다. (끝)

 

 

* 하인리히는 추상적 노동, 추상적 지배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잘 설명하지만, 자본주의 내의 변화(가치법칙의 형해화[形骸化] 등)을 쉽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고(하인리히가 ‘자본주의 내에서의 실업의 항상성’을 근거로 노동사회소멸론을 가차없이 거부하는 것도 그의 현실 둔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계급투쟁이 구조를 변경하는 과정 즉 계급투쟁, 노동자 계급의 우선성(오페라이스무스의 합리적 핵심)을 고려치 못한다. 반면 기대를 모았던 포스톤(Postone)은 병으로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다. 포스톤의 경우, 자본주의를 추상적 지배체제로 파악하면서도 가치법칙의 형해화라는 새로운 현실을 잘 고려하지만, 계급투쟁을 이론의 중심 구성요소로 위치짓지 못함으로써, 비판이론의 선배들처럼 비관주의로 기운 바 있다.

 

 



 

 

 

 

Eingreifen, aber nicht belehren!

 

Die Kritik an den Voraussetzungen der eigenen Kapitalismusanalyse ist die Voraussetzung aller Kritik. Es kommt aber auch darauf an, die Kritik in die Tat umzusetzen.

 

von Michael Heinrich

 

Kapitalismuskritik, die mehr sein will als ein bloß moralisches Verurteilen, kommt ohne Analyse nicht aus. Am unbegriffenen Kapitalismus kann man dessen zerstörerische Folgen lediglich beklagen. Diese Destruktion als eine zu kritisieren, die notwendigerweise mit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einhergeht, setzt ein Mindestmaß an Einsicht in das Funktionieren dieser Produktionsweise voraus. Kapitalismus­analyse ist aber keine Angelegenheit, die sich von selbst versteht. Sie kann von recht unterschiedlichen Voraussetzungen ausgehen und ganz verschiede­ne Momente ins Zentrum stellen. Daher kommt man um den Streit über die Art und Weise der jeweiligen Analyse nicht herum. Wer solchen Streit von vornherein als »Seminarmarxismus« de­nun­ziert und den wirklichen »Kämpfen«(pl.D) entgegenstellt, schottet lediglich die eigenen Voraussetzungen und Analysen von jeder kritischen Dis­kussion ab.

 

Wenn im Dezember in Frankfurt ein Kongress über verschiedene Kapitalismusanalysen dis­ku­tieren und der Frage nachgehen will, was sie für eine emanzipatorische Praxis leisten können, so ist dies zunächst einmal zu begrüßen. Nicht zu begrüßen ist die eingeschränkte Perspektive der Veranstalter, die lediglich »Wertkritik« und »(Post-) Operaismus« einander gegenüberstellen und sie derart unkritisch charakterisieren – die eine setzt an der objektiven, der andere an der subjektiven Seite an –, dass damit nahe gelegt wird, es käme nur darauf an, diese beiden Ansätze richtig zu verbinden.

 

Das Label »Wertkritik« wurde vor allem von Ro­bert Kurz und der Zeitschrift Krisis benutzt. Die­se Position schließt die Betonung der sachlichen Herrschaft des Werts mit einem fragwür­digen Tech­nikdeterminismus zusammen: Die »mi­kro­elektronische Revolution« führe dazu, dass dem Kapital die »Wertsubstanz« ausgehe. Daher sei die unvermeidliche Zusammenbruchskrise schon in vollem Gange, auch wenn man das nicht so richtig sehen könne, da dieser Zusammenbruch immer wieder durch andere Faktoren verdeckt werde.

 

Mit »(Post)Operaismus« sind vor allem die an Michael Hardt und Toni Negri anschließenden Strömungen gemeint. Dort ist es nicht die Technik, sondern die nebulöse »Multitude«, welche die Entwicklung des Kapitalismus vorantreibt und am Ende auch den Kommunismus bringen soll. Wobei dieser eigentlich schon da, aber – ganz ähn­lich wie die wertkritische Zusammenbruchs­krise – noch nicht so richtig sichtbar ist.

 

Beide Richtungen gefallen sich in großen theo­­retischen Würfen(pl.D), bei denen der analytische Ertrag aber eher begrenzt bleibt. Den eigenen Be­haup­tungen wird die Konfrontation mit der empirischen Wirklichkeit des gegenwärtigen Kapitalismus gerne erspart. Für eine emanzipatorische Praxis sind beide Richtungen nicht sonderlich gut zu gebrauchen, sodass man für den Frankfur­ter Kongress nur hoffen kann, dass die Teilnehmer nicht an der allzu eingeschränkten Perspektive der Veranstalter kleben bleiben.

 

Dass in d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Klassen existieren und somit auch Klassenkämpfe stattfinden, ist zwar richtig, aber noch keine besonders tiefschürfende Einsicht. Nur im Deutsch­land der »sozialen Marktwirtschaft« und »nivellierten Mit­telschicht« kann ein solcher Befund in den Verdacht geraten, er sei bereits links. Auch Marx hat keineswegs als erster von »Klassen« und »Klassenkampf« gesprochen. Bürgerliche His­toriker und Ökonomen taten dies lange vor ihm. Dass die Existenz von Klassen nicht der unmittel­bare Ausgangspunkt der Analyse sein kann, muss­te auch Marx erst lernen. Im auch heute noch gern zitierten »Kommunistischen Manifest«, das mit den Klassen und ihrem Kampf anfängt, ist der Autor über die bürgerliche Klassentheorie noch längst nicht hinaus. Nicht zufällig ist aber knapp 20 Jahre später, im »Kapital«, die systematische Behandlung der Klassen erst am Ende des dritten Bandes vorgesehen: Über die Kons­titution der Klassen, über Klassenhandeln, Klassenbewusstsein lässt sich erst sinnvoll reden, wenn die spezifischen Formbestimmungen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dargestellt sind.

 

Im Unterschied zu allen vor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n sind es nicht persönliche, sondern unpersönliche Herrschaftsverhältnisse, die »sachliche« Herrschaft von Wert und Kapital, welche die Gesellschaft strukturieren. Sie machen das historisch Spezifische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aus. Die mit den sachlichen Herrschafts­verhältnissen einhergehenden Fetischformen und Mystifikationen bilden den Hintergrund der spontanen Bewusstseinsformen, sie bilden jene »Religion des Alltagslebens«, die Marx unter dem Titel »Trinitarische Formel« abhandelt, auf die dann erst die systematische Analyse der Klassen folgen soll. Blendet man die Analyse dieser »struk­turellen« Bedingungen aus, dann hat man die kapitalistische Gesellschaft auf das reduziert, was sie mit allen bisherigen Gesellschaften gemeinsam hat, auf Herrschaft und Ausbeutung, hat aber von der Spezifik kapitalistischer Herrschaft und Ausbeutung noch nichts begriffen.

 

Diese analytische Leerstelle wird gerne durch eine idealisierende Bezugnahme auf die Arbeiter­klasse (oder die Multitude) und ihre Kämpfe gefüllt. Wann immer die Arbeiterklasse kämpft – und das tut sie für den Theoretiker des Klassenkampfs ja eigentlich dauernd, nicht nur beim Streik für höhere Löhne, sondern auch beim Krank­feiern oder bei der Verlangsamung des Arbeitstempos –, ist auch der Weg zum revolu­tionären Bewusstsein nicht mehr weit. Lediglich böse Gewerkschaftsfunktionäre und reformis­tische Parteistrategen bringen die Arbeiterklasse immer wieder von diesem revolutionären Weg ab.

 

Doch das Problem liegt tiefer. Bereits die Form des Arbeitslohns suggeriert, und zwar sowohl dem Arbeiter wie dem Kapitalisten, es werde der Wert der geleisteten Arbeit bezahlt, sodass sich trefflich über einen »gerechten« Lohn streiten lässt und gesellschaftliche »Gerechtigkeitslücken« festgestellt werden können. Auf der Form des Arbeitslohns »beruhen alle Rechtsvorstellungen des Arbeiters wie des Kapitalisten, alle Mystifikationen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alle ihre Freiheitsillusionen«, hält Marx im »Kapital« fest.

 

Diese Rechtsvorstellungen und Freiheitsillusionen bilden den Rahmen, in dem die Klassenkämpfe zunächst einmal stattfinden. Das heißt nicht, dass die gesellschaftlichen Kämpfe auf ewig in diesem Rahmen eingespannt bleiben müssen. Ihn zu überschreiten und »ums Ganze« zu kämpfen, ist möglich und wurde in der Geschichte auch im­mer wieder versucht. Irgendeine Notwendigkeit für eine solche Überschreitung existiert jedoch nicht. Und erst recht gibt es keine Gewähr dafür, dass es nach einer solchen Überschreitung nicht doch wieder zu einer Regression kommt. Die bei vielen Klassenkampf­theoretikern verbreitete Vor­stellung eines bereits existierenden revolutionären Subjekts, dem bloß noch das richtige Bewusst­sein über sich selbst fehlt, das es aber in seinen täglichen Kämpfen mehr oder weniger automatisch gewinnen würde, ist ein schlechter Abklatsch Hegelscher Geschichtsphilosophie.

 

Wenn Menschen sich mit ihren Lebensverhältnissen auseinandersetzen, wenn sie anfangen, den Zumutungen des Kapitalismus Widerstand entgegenzusetzen, dann sind sie im Allgemeinen auch wissbegierig, dann wollen sie etwas über diese Verhältnisse lernen. Das kann zu einer verkürzten Kapitalismuskritik führen, die in »Heuschrecken« und »Spekulanten« die Ursache allen Übels zu erkennen glaubt. Es kann aber auch zu einem Mehr an Einsicht in die gerade nicht an Personen gebundene kapitalistische Form von Herrschaft und Ausbeutung führen.

 

Die verschiedenen Gruppen und Grüppchen der radikalen Linken haben häufig die Tendenz, sich vor allem untereinander zu streiten. Inzwischen wäre aber eine Debatte darüber angebracht, wie mit der eigenen Analyse und Kritik des Kapitalismus in gesellschaftliche Kämpfe interveniert werden kann, ohne dabei bloß belehrend aufzutreten, aber auch ohne sich in Idealisierungen dieser Kämpfe zu verlieren oder sich gar irgendwelchen »Bündnispartnern« opportunistisch an die Brust zu wer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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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02:15 2008/02/04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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