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잉오 엘베의 “맑스 이론의 독해방식들”에 관한 강연 소개문과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동금지, 수시수정) 굵은 글씨 강조는 저자의 것이고, 논문의 소제목은 논문의 확장판에서 따온 것이며, 색은 역자가 넣은 것이다. 원문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강연소개문) http://www.rote-ruhr-uni.com/cms/III-Zwischen-Marx-Marxismus-und.html

(논문) http://www.oekonomiekritik.de/ElbeLesarten.htm 

(논문 확장판) http://www.rote-ruhr-uni.com/cms/IMG/pdf/Elbe_Lesarten_erweitert.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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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오 엘베: 맑스, 맑스주의, 맑스주의들 사이에서 - 맑스 이론의 독해방식들 (강연 소개문)

(Ingo Elbe: Zwischen Marx, Marxismus und Marxismen - Lesarten der Marxschen Theorie

- Übersetzung vom Deutschen ins Koreani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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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cheiskra at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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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퇴보로서 전통적 맑스주의. 당의 공식적 맑스주의, 후에는 국가의 공식적 맑스주의 및 “서구의” 반공주의의 보충적 담론들은 오랜 기간 계속해서, 일반적으로 “맑스적 사회주의” 혹은 “과학적 사회주의”로 간주된 것에 대해 거의 제한되지 않은 정의(定義)를 내리는 힘을 요구할 수 있었다. 당의 준공식적인 대표자 및 부르주아적 비판가 모두는, -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엥엘스의 해석을 통해 매개되어서 - 바로 맑스의 저서에 있는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부르주아적 역사철학에 구속된 잔여물들로부터, 역사적 진보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과제”의 “철의 필연성들”의 심오한 체제를 맞혀 붙였다. 그 전체는 대안적 국민경제학설로 타락된 ‘정치경제학 비판의 해석’을 통해 지지된다. 그리고 그 해석은 경제학적 고전의 장의 결함, 즉 인류학주의, 경험주의, 초역사주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근본적으로 공유한다.

 

이단적 맑스주의들 형태의 학습과정들

 

바로 맑스 저작에서 과학적 혁명의 계기들을 재구성하고, 맑스의 저작들의 체계적 의도들(계획들)을 발굴하기 위해서, 비판적 독해의 과제는 이 수용쓰레기를 제거하는 데에서 명백해야 한다. 두 가지 이단적 이론적 구성들, 즉 1920년대 이래의 소위 “서구” 맑스주의와 1970년대 이래의 새로운 맑스-독해 역시, 이것을 요구한다. 이들에게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형태들(상품, 화폐, 자본, 법, 국가 등)과의 범주적, 실천적 단절이 - 물론 완전히 다양한 반성수준에서 - 중요하다. 또한 단지 “형용사적 사회주의”(R. 쿠어쯔)로 표현되는, (“사회주의적 상품생산”, “프롤레타리아적 국가” 등) 해방의 역설적 자립화(Automatismus)가 아니라, 비합리적 사회화 방식의 자립화로부터의 해방(맑스가 자본을 “자립적 주체”로 명명하듯이, 자립적 주체로부터의 해방)이 훨씬 맑스와 결합하는 이론형성의 혁명적 지향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맑스의 분석들은 자본주의적 사회구성들에 대한 비판과 탁월하고 일관된 해독으로, 포괄적이고 사회적인 - 그러나 해방의 실현에 대한 각 역사형이상학적 보증은 없는 - 해방의 객관-현실적 가능성들에 대한 반성으로 이해된다.

 

물론 새로운 맑스-독해는, 맑스 이론의 재구성 시도가 결코 분명하고 내포적이며 통일성 있게 논증하는 저작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독해에 의하면, 맑스 저작 자체에 있는 “고전적 전통과 과학적 혁명”(M. 하인리히) 사이의 모순들과 양가성(이중성)에 맞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강연은 세 가지 맑스주의들(전통적 맑스주의, 서구 맑스주의, 새로운 맑스-독해)의 이론적 핵심관념들에 대한 거친 조망을 전달하고, 그와 더불어 맑스의 텍스트들 자체에 대한 차별화된 접근을 위해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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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오 엘베는 보쿰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독일에서의 새로운 맑스-독해” 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맑스, 맑스주의, 맑스주의들 사이에서 - 맑스 이론의 독해방식들

(Zwischen Marx, Marxismus und Marxismen - Lesarten der Marxschen Theorie

 - Übersetzung vom Deutschen ins Koreani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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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오 엘베(Ingo Elbe) (번역: cheiskra at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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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2월 13일 현재 오역이 너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곧 재번역하겠습니다..

 

 

I.

 

다음 소견의 의도는 맑스 이론의 중심적 독해방식들에 대한 거친 조망을 하는 것이다. 이 독해 방식들은 몇몇의 선택된 주제영역에 따라 상대적으로 분명히 서로 경계 지어질 수 있는 맑스주의들로 서술될 것이고, 그것들의 영향의 역사 및 상식적으로 맑스 이론“의” 아래에서 이해되는 것에 관한 폭에서 평가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데올로기비판적 의도에서, 지금까지 지배적인 당의 공식적 맑스-해석(전통적 맑스주의, 이렇게 표시하기를 원한다면, 단수의 맑스주의)과, “맑스로 돌아가자”는 당시의 요구를 지닌 맑스 수용의 이단적 비판적 형태들(복수의 맑스주의들)사이의 구별이 착수된다.

 

전자는 부분적으로 ‘국민경제학, 역사이론, 철학의 전통적 패러다임들이 발전한 것인’, ‘엥엘스, 카우츠키 등에 의해 체계화되고 교조화되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신비화들에 굴복한’ 맑스 저작의 “통속적” 층들에 의거해, 결국은 맑스주의-레닌주의의 공인과학으로 끝난 제한되고 일그러진 맑스-독해의 과정이자 생산물로 이해된다.

 

후자들로 명명되는 것은 서구 맑스주의와 새로운 맑스-독해이며, - 대부분 제도화되고 누적적인 연구 과정들을 넘어서, “토대-맑스주의”(Labica. 1986. S. 113.) 스타일의 고립된 행위자들을 넘어서 수행된 - 맑스의 사회분석과 비판의 “심원한”(난해한) 내용들을 강조한다.

 

동시에 여기에서 양 독해방식의 특성에 대해서는 몇몇의 강하게 요약되고 소수의 면들로 국한된 테제들이 충분할 것이다. 특히 우선 칼 코르쉬 측으로부터 공식화되고 강하게 요구된, (순수한 이념사적 서술 및 이론내재적 비판을 수행하고, 역사적 실천형태들과 이론적 맑스주의 구성들의 관계를 이데올로기비판적으로 다루는) “유물론적 역사이해를 유물론적 역사이해 자체에 대해 적용하려는”(Korsch. 1993. S. 375.) 계획은 여기서 완전히 단념될 것이다. 일반적인 맑스비판적, 맑스주의비판적 독해방식들의 탐색적 취급도, 그것의 맑스-상(象)이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의 그것과 대부분 완전히 일치하는 한에서, 여기서는 포기될 수 있다(주: 그들의 증오대상의 원문은 한 번도 문제가 될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완전히 급진적 변종들에 대한 단념. 여기서 가장 최근의 예로 ‘Stephane Courtois의 - Ernst Nolte와 Francois Furet로 부터 - 차용된 나찌[NS]에 대한 모범적인 섬멸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에 관한 테제’가 적당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Schmid[1998]을 보라.).

 

또한 나는 전통적 맑스주의의 헤게모니적 해석견본으로 시작하고, 나의 설명의 끝에서야 비로소, 내가 맑스 저작 자체의 체계적 기본적 의도(계획)들로 간주하는 것의 몇몇의 긍정적 결정들을 따르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서구 맑스주의와 새로운 맑스-독해의 학습과정을 통한 통로를 통해서야 비로소 맑스 저작의 차별화된 독해방식이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Ⅱ. 맑스주의

 

맑스의 이론에 대한 표시로 “맑스주의”라는 개념은 아마도 우선 독일 사회민주당원 프란쯔 메링(Franz Mehring)에 의해 1879년에 사용되고(Walther. 1982. S. 948f.를 참조), 1880년대 말에서야 비로소 “맑스 교의”의 방어자들 및 비판가들의 투쟁개념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긴 한다(Walther. 1982. S. 944.를 참조). 그러나 “맑스 학파”(카우츠키)의 출생 시각은 만장일치로 1878년 프리드리히 엥엘스의 『반(反)-뒤링』의 출간과 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등의 측에서의, 이 저작의 그것을 잇는 수용에서 유래된다(특히 Walther. 1982. S. 947.를 참조; Steinberg. 1979. S. 22f.; Stedman Jones. 1988. S. 234.; Liedman. 1997, Sp. 384.). 엥엘스의 저작들은 - 그것들에서 “맑스주의”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 전통적 독해방식들의 스스로의 레테르들이 아직 부상하지 않았을지라도 - 전 시대의 독자들, 맑스주의자들 및 반(反)맑스주의자들, (그것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맑스 저작이 인지되는) 해석견본들을 인도한다. 특히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 후기저작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고전 독일 철학의 종말』(엥엘스, 1886) 혹은 『자본』 3권을 위한 보유(엥엘스, 1894/95)에 대한 수용은 거의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 영향사를 이룬다. 그러나 특히 『반(反)-뒤링』은 맑스 이론의 교과서 및 “맑스주의적 세계관”의 긍정적 묘사를 위해 양식화된다. 카우츠키에게 “이 책처럼 맑스주의의 이해를 위해 그렇게 많이 복무할 어떤 책도 없다. 맑스의 『자본』이 아마 더 대단하다. 그러나 우선 『반(反)-뒤링』을 통해 우리는 『자본』을 옳게 읽고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Stedman Jones. 1988. S. 234f.에서의 카우츠키 인용.) 그리고 레닌에게 그 책은 “각 계급의식적 노동자의 안내서들”의 하나이다(Lenin. 1965. S. 4.).

 

그와 동시에 맑스주의“의” 역사에 대해 일반적으로 특징적일 것이 완성된다. 이론의 몸통의 창시자들은 “스스로 이름 부여자로서 나타나는 것을 유용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 그 이름의 시조들은 실제적 대표자들이 아니다.”(Labica. 1986. S. 17. 맑스주의에서 엥엘스는 맑스 뒤로 사라지고, 레닌주의에서 스탈린은 레닌 뒤로 사라진다.) 맑스주의는 여러 가지와 관련해서 엥엘스의 작품이며, 그 때문에 본디 엥엘스주의이다. 여기서는 이데올로기화된 맑스-수용과 제한된 맑스-수용이 연결될 수 있는 두 가지 점이 언급된다.

 

Ⅱ. 1. 존재론적-결정론적 경향

 

과학적 사회주의는 존재론적 체제, “총체적 관계의 과학”으로 인식된다(Engels. 1975b. S. 307.) 여기서 유물론적 변증법은 “자연, 인간사회, 사상의 보편적 운동법칙들과 발전법칙들에 대한 과학”으로 복무한다(Engels. 1975a. S. 132., S. 11. 등을 참조.). 동시에 엥엘스에게 자연은 “변증법에 대한 시험대”로 복무한다(Engels. 1975a. S. 22.). 자연현상들로 역사적-사회적 과정의 잘못 유추하는 것은, 다만 변증법의 특성에 대한 엥엘스적 설명에서 바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변증법의 특성에 대한) 설명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시작된다. “부정의 부정” 혹은 “양질전화”는 물의 3가지 상태(고체, 액체, 기체 - 역자)의 변화에서 혹은 보리 낟알의 성장에서 형성되었다. 변증법은 고정된 관찰방식에 대항해 모든 존재의 “되기(Werden), 무상함”을 보여야 한다(Engels. 1984. S. 267. 참조.). 만약 그것이 “법칙들의 두 가지 층들”(Engels. 1984. S. 293.)로, “객관적” 변증법과 “주관적” 변증법으로 떨어지면, - 그 때 주관적 변증법은 객관적 변증법의 수동적 이미지로 이해된다(Engels. 1975b. S. 481). - 그것은 전통적 의식철학의 이분법들 및 “사고와 존재”의 관계에서 우위가 이것 혹은 저것에게 조응하는지 하는 철학의 소위 “근본 질문”에 재구속될 것이다(Engels. 1984. S. 274. 참조.). 소박한 실재론, 곧 ‘역사적으로 결정된 인간의 행위관계를 통해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즉자적 존재의 물신주의에 그리고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에 대한 직접성의 사물화된 외관에 빠진, 후에 레닌(주: 『반(反)-뒤링』과 나란히 맑스레닌주의[ML]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의 고전적 교과서로 양식화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여기서 맑스주의는 엄격한 맑스적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로 된다. 즉 사물화된 일상적 이해력의 습관적 사고형태들의 체계화로 된다. 물론 레닌은 “인간의 의식이 객관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를 창조한다”고 인식함으로써, 그의 헤겔-독해의 틀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조적 배치의 영역을 부분적으로 다시 버린다[Lenin. 1973. S. 203.].) 등에 의해 체계화된 반영이론(Widerspiegelungstheorie)이 바로 여기서 토대지어진다. 그래서 실천의 개념, 객체의 주체적 매개성의 개념이 “사물들로부터 의식으로, 의식으로부터 사물들로 지시”(Sohn-Rethel. 1978. S. 114.)되어 지고, 이데올로기비판적 고려 역시 이 패러다임에 거의 놓여질 수 없다. 또한 아직 후기 엥엘스의 저작들에서 에피고넨(모방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제거된 실천철학적 동기(주: 예를 들어 Engels. 1984. S. 296f.; 1975a. S. 264. 혹은 슈미트, 블로흐, 메링과 브리기우스의 편지들에서 그러하다.)와 양가성(이중성)이 명백히 존재한다. 그러나 엥엘스는 사회적 실천의 이론으로부터 관조적인-반영이론적인 발전 교의로의 강조이동, 역사적 유물론의 기계적이고 숙명론적인 이해로의 길을 통해, 그의 시대의 자연주의(주: 엥엘스에게 영향을 미친 자연주의는 여기서 사회적 과정을 소박하게 자연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생물학주의의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엥엘스 스스로가 문제화 했다. 특히 Engels. 1975b. S. 565.를 참조.] 결정론 및 자연적 사회적 과정들의 잘못된 유추의 의미에서 이해된다.)와 과학주의를 묶어서 접합한다.

 

통속적 진화론은 19세기 유럽 사회민주주의(당)에서 거의 편재하는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주: 이에 대해 Steinberg. 1979. 특히 S.45. 이하와 63. 이하의 유익한 연구를 참조. 물신주의비판을 넘어서는, 이에 대한 사회역사적 설명은 145-50; Groh. 1974. S. 58-63.; Negt. 1974.; Gramsci. 1995. S. 1386f.). 그 때문에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베벨에게서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숙명적 과제라는 혁명형이상학과 결정론적 발전개념이 맑스 교의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다(주: 이에 대해 Mohl[1978], Sieferle[1979], Elbe[2002]를 비판적으로 참고하라.). 그것에 따라서 인류는 해방의 “자연과학적으로 확립될 수 있는” 자립화에 굴복한다. 여기서 법칙물신주의의 근대 과학주의적 모습에서 나타나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적 부호를 가진 전통적 역사형이상학, ‘맑스에 의해 비판된 주체와 객체의 전도’의 긍정에 다름 아니다. 도덕적으로 자격부여된 목표가 행위자 뒤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귀속된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에서 이런 혁명적 대기주의(Attentismus)(Groh. 1974. S. 36. 참조.)는 마침내 모순 없는 맑스주의로 당의 공식적 지평으로 성문화된다. 당의 과업은 역시 당 없이 “자연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을 위해 무장하고 있는 것, “혁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이용하는 것”이다(Steinberg. 1979. S. 61.의 카우츠키 인용.).

 

엥엘스적 고려의 백과사전식(enzyklopädisch) 특성과 존재론적 성향은 역시 포괄적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으로서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해석경향을 촉진한다. 결국 레닌은 “맑스의 학설”을 “프롤레타리아적 이데올로기”와 종교대체물로, “인간에게 통일적 세계관을 주는” “전능하고” “내포적이며 헤게모니적인” 교의로 표현한다(Lenin. 1965. S. 3f.). 그에 조응해서 부정적 이데올로기 개념 역시 의식의 존재결정을 위한 범주로 중립화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론적 후퇴의 성격을 띠는 모든 이러한 발전들은 결국 데보린(Deborin)과 스탈린에 의해 완성된 맑스레닌주의(ML)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레닌에게 정치적인 것의 모든 강조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가 자연과 사회에서의 단절과 균열(비약)에 대한 주의 또한 환기시키는 “내용적으로 더 풍부한 발전교의”로 간주된다면(Lenin. 1960. S. 43.), 맑스레닌주의(ML)의 이러한 자연주의적인-객관주의적인 장애는 국가교리로 격상된다. 그 점에서 중심적 주장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자연에 대해 타당한 것은 역시 역사에도 타당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은 비약하며, 따라서 역사 역시 그러하다.” 이 때 정치적 실천은 철의 역사적 법칙들의 집행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적절한” 논리학은 수십 년에 걸쳐 동구권의 맑스주의적 이론형성에 대해 결정적인 저작인 요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대하여』에서 완성된다. 여기서 역사적 유물론은, 인식론적(epistemologisch) 본질주의(변증법적 유물론[DiaMat]으로서 “존재”와 “의식”을 실천개념과 독립적으로 주체화한 모사이론[Abbildtheorie])와 사회이론적 자연주의(최고의 사회과학기술자로서의 당에 의해 “의식적으로 적용”되거나 “촉진”되는, 인간의 행위와 독립적인 발전논리[주: 주의주의와 결정론의 이러한 결합의 역설에 대해서, Taylor. 1997. S. 729-731.를 참고.])를 내포하는, 사회에 대한 존재론적 원칙들의 “적용”과 “확장”의 의미에서의 세계관적 체계의 “역사적 부분”을 보증한다(주: 맑스레닌주의[ML]에 대항해 맑스의 유물론의 비존재론적 성격을 강조하는 서구 맑스주의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Horkheimer. 1988. S. 174.를 참고. 즉 “우리에게 의미들을 가져오는 현실[Tatsachen]은 이중적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미리 형성된다. 인지된 대상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그리고 인지하는 기관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두 가지 모두는 자연적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통해 형성된다.” Schmidt. 1993. S. 10-59.도 참고할 것. 스탈린[Stalin, 1979]을 통한 맑스 이론의 결정에 대한 소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변증법: 모든 것이 되기[Werden]와 경과[Vergehen]에서 이해된다고 우리를 가르치는, 단절들을 강조하는 보편적 발전논리. ② 유물론: 의식은 단지 독립적으로 그리고 의식 외부에 실존하는 존재의 모사를 나타낸다고 가르치는 관조적 존재론. ③ 역사적 유물론: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DiaMat]의 적용. ④ 보편역사적 법칙들은 계급투쟁, 생산력발전[자기원인causa-sui인 생산력의 개념]의 우위에 기초를 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마지막으로 일련의 사회구성들의 진보법칙이다.).

 

Ⅱ. 2. 형태발생적(formgenetisch) 접근의 역사주의적 해석

 

반세기 이래로 “어떤 맑스주의자도 맑스를 이해하지 않았다”(Lenin. 1973. S. 170.)는 (이 경우 물론 그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레닌의 말이 그 상황에 대해 완전한 타당하다면,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해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임금노동관계에서 극에 달하는 “단순 상품교환”의 역사적 설명으로서의 맑스의 가치형태분석에 대한 해석에서, 엥엘스는 “단지 역사적 형태와 방해하는 우연성들에서 벗어나서”(Engels. 1990. S. 475.) 의심의 여지없이 맑스주의적 정통에 대한 가장 깊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여기 역사적 유물론의 객관주의적 파악에서, 맑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더 강하게 엥엘스주의(주: 맑스의 경제학 비판에 대한 엥엘스의 독해방식에 관한 비판은 특히 Brentel. 1989. IV.2 장과 VII.11 장을 참고.)이며, 맑스의 경제학 비판은 경제학적 고전과 그것의 실체주의적 가치이론적 전제들의 발전된 형태로 해석이 바뀐다. 또한 이 경향이 사회적 부의 자본주의적 형태들을 역사적-특수적인 것으로 해독하는 것은 결코 “역사주의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생산물들에서 대상화되는, 준-생리학적 크기로 이해되는 추상적 노동’이 가치실체에서 시작되는, 이 형태들의 자연주의적 설명을 내포한다. 이미 카우츠키는 엥엘스의 입장을 명백히 대변한다. 그에게 맑스의 『자본』은 사료적(historiographisch) 저작이다. “자본을 역사적 범주로 인식하는 것과 그것의 발생을 머리로 구성하는 대신 역사의 힘으로 증명하는 것이 맑스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 졌다.”(Hecker[1997]로 부터의 인용. 강조는 인용자.) 20세기의 60년대까지 이 독해방식은 거의 반박되지 않은 채 전승되었고, ‘필연성에 대한 통찰로서의 자유’에 대한 엥엘스의 (다시 헤겔을 끌어내는) 공식과 그것의 자연법칙들과 사회적 과정들의 병행화과 관련해서, 그것의 핵심주장이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사회-과학기술적 해방개념과 관련해서 양분을 제공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무정부적이고 통제 없이 작동하는 사회적 필연성(가치법칙)은 ‘자연과 사회에서의 객관적 법칙성에 대한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에 의하여, 사회주의에서 계획적으로 변화되고 의식적으로 관리 된다”는 주장. 자본주의적 형태결정들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의 대안적 이용은, 이런 “형용사적 사회주의”(R. 쿠어쯔)와 그것의 “사회주의적 정치경제학”을 표시한다(주: 이러한 틀에서 코뮤니즘은 “다만 ‘자본주의적 상품경제와 같은 인간의 노동생산물의 사회적 형태결정’의 혁명화된 계산방식에서” 존재한다[Grigat. 1997. S. 20.]. 그 때에 소위 맑스의 코뮤니즘은 푸르동주의적 시간증서의 방식으로 퇴보한다. Behrens/Hafner[1991. S. 226.]는 다음과 같이 이를 인지한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관념들은 직접적 노동가치계산과 유용계산의 모델에 의지한다.” 특히 비판적 의도에서 다음의 저자들은, ‘엥엘스가 맑스주의적 당들의 사회주의관/코뮤니즘관을 위해 이를 대변한 것과 같은, 전화폐적[prämonetär] 가치이론’의 과대평가하지 않는 결과들을 지시한다. Heinrich. 1999a. S. 385-392.; Kittsteiner. 1977. S. 40-47.; Rakowitz[2000]).

 

이런 (단지 거칠게 스케치된) 수용사를 고려해, 여기서 표현된 형태의 맑스주의가 맑스의 이론에 대한 소문, 대부분 “맑스”-비판가들에 의해 기꺼이 수용되고 단지 부정적 부호가 부여된 소문이라는 것이 말해질 수 있다. 너무 단순하게도 그러한 주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들로 이해되는, 지배적 교리에 대한 특정한 경계 설정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또한 잘못된 해석들을 일반적으로 맑스의 이론으로 완전히 피상적으로 간주하며, 맑스 자신에서의 가능한 모순들, 이론-이데올로기-양가성(이중성)들을 처음부터 배제함으로써, 그러한 주장은 자신이 또한 전체적으로 적절한 것 같이 보인다. 이 문제의 설명을 위해, 맑스 텍스트들에 대한 ‘소위 재구성 논쟁에서 완성된 차별화된 독해방식’에 대한 참조가 유용할 것이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 전통적 맑스주의는, 선취적인, 오히려 맑스의 저작에 있는 이데올로기내용의 - 엥엘스와 에피고넨(모방자들) 측에서의 수용의 틀에서 - 지배화(Dominantwerden), 체계화, 완성으로 이해될 것이다.

 

어쨌든 실제적 영향은, 역사결정론 혹은 프롤레타리아적 정치경제학과 같은 ‘맑스 이론의 이 제한되고 이데올로기화된 설명들’에 지금까지 거의 배타적으로 주어졌다.

 

Ⅲ. 서구 맑스주의

 

서구 맑스주의”(주: 이 개념은 아마도 우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레닌주의적 반론에서 떠오르긴 했으나[Walther. 1982. S. 968. 참고.], 투쟁개념으로서도 아니고, [루카치, 코르쉬, 블로흐,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람시, 르페브르 등과 같은] 일반적으로 그 아래로 포함되는 이론가들의 동시대적 자기표시로서도 아닌, 더 큰 의미를 획득한다. 여기서는 포괄적으로 패리 앤더슨[Perry Anderson, 1978]의 용어 사용을 따른다. 발견적 모델로서 서구 맑스주의 개념이 가능성이 풍부한 것이라면, 그것의 경계들이 분명하게 지적되어야만 한다. 하욱[Haug, 1987]과 크랱케[Krätke. 1996. S. 77.]의 앤더슨 비판을 참고하라. 앤더슨은 그가 정확히 그것을 정밀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될 수 있다.)의 형성은 1차 세계대전의 결과(“조국방어”의 정치에서 2차 인터내셔널의 붕괴, 중-남유럽에서의 혁명들의 실패, 파시즘 세력의 등장 등)로서의 사회주의적 노동자운동의 위기에서 출현한다. 여기에 바로, 그들의 1923년에 출판된 저작들이 패러다임적 성격을 지녔던 게오르그 루카치와 칼 코르쉬가 있다. 루카치는 사회이론적-방법론적 지평에서, 맑스의 이론과 엥엘스의 이론의 동일성에 대한 그 때까지 진정으로 자명한 수용에 문제를 제기한, 첫 번째 맑스주의적 이론가로 간주된다(H. Mehringer/G. Mergner. 1973. S. 189. 혹은 Stedman Jones. 1988. S. 232. 참고.). 그의 비판의 중심에는, 엥엘스의 주체-객체-관계의 소실 및 2차 인터내셔널 맑스주의의 숙명론이 향해 있는 자연의 변증법에 대한 엥엘스의 개념(Lukacs. 1988. S. 61f.)이 있다. 관조적 세계관으로의 역사적 유물론의 그의 존재론화에 대항해, 루카치는 서구 맑스주의 전체와 같이, 맑스의 접근을 사회적 실천에 대한 비판적-혁명적 이론으로 이해한다. 역사적 진보의 “객관적 발전법칙들”에 대한 과학주의적 주장에 대항해, 사물화된 의식에 대한 이데올로기비판, “제2의 자연”으로 응고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사회적 실천의 역사적-특수적 형태로 해독하는 것, 혁명을 실천적 주체성의 비판적 행위로 강조하는 것이 제시된다(주: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의  메티[‘Me-ti, 1967]에서 “과학적으로” 치장된 혁명이론적 숙명론에 대한 비판의 특별히 뛰어난 예를 제공한다. “마이스터 Hü-jeh[헤겔]과  Ka-meh[맑스]가  가르쳤던 위대한 방법[변증법]에 근거해, 모든 사물의 무상함에 대해 너무 많이 헛소리가 말해진다고 메티가 탄식하며 말한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매우 전복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가 그것은 위대한 방법[변증법]을 천박하게 적용한 것을 말한다. 위대한 방법[변증법]은 사람들이 ‘어떤 사물들이 어떻게 흐름[Vergehen]으로 도달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요구한다.” 기초이론적 지평에서 “전투적 낙관주의”의 에른스트 블로흐의 개념이 레닌주의적 객관주의에 대항한다. 이 낙관주의는 가능한 사회주의적 미래 이전의 “태도”를, “비결정적인 것, 그러나 노동과 구체적-매개적 행동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의 태도로 나타낸다. Bloch. 1990. S. 229.). “실천철학”(그람시) 혹은 “사회비판이론”(호르크하이머) 같은 자기표시는 이 때문에 단순한 위장단어 혹은 당공식적 교리를 위한 개념적 등가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행위를 지향하는 맑스적 기원의 사상이 새롭게 기인된” 학습과정을 명료화한다(주: Haug. 1996. S. 8.; 그람시 저작과 관련해 “위장단어테제”에 대한 비판은 Haug. 1995. S. 1195-1209. 참고.). 서구 맑스주의가 우선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행동주의적 자극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의 가장 중요한 대변인들은 이미 일찍부터 레닌주의의 교리, 그것의 사회이론적 자연주의의 갱신, 그것의 러시아 혁명의 경험들에 대한 잘못된 보편화에 대항한다(특히 Lukacs[1974], Korsch[1993], Gramsci[1967] 참고.). 첫 번째 것에 대해, 부하린의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에 대한 게오르그 루카치의 비판이 예로 도움이 된다. 이 비판에서 그는, ‘생산력발전의 우위’와 ‘사회에 대한 자연과학적 방법의 단절 없는 적용가능성’에 대한 부하린의 개념들과 더불어, 부하린의 이론은 물신주의적인 것이 되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대상영역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며, “잘못된 ‘객관성’의 강조”를 유지하고, 맑스의 방법의 핵심관념 즉, “경제의 전체 현상들을 (...)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들로” 소급하는 것을 오해한다고 부하린을 비난한다(주: Lukacs. 1974. S. 289, 284. 또한 이 실천철학적 중심사상은 코플러[Kofler]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설명된다. Kofler. 2000. S. 90f.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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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는 그의 『옥중수고』에서 10월 혁명의 길로의 혁명전략적 결정을 본보기로 비판한다. 그람시는 억압적 국가장치에 대한 정면공격의 “기동전”을 근대 서구 자본주의들에 무용한 혁명전략으로 거절하는 그의 헤게모니 이론으로, 3차 인터내셔널의 국가주의에 대처한다. 그람시에 의하면 시민사회는, 사고모델과 행동모델이 그 속에서 발생하고, 거대 정치행동들로는 부서지지 않는 지배능력을 지시하는 이런 사회형태들에서, 장치들의 복잡한 구조를 표현한다. 러시아 혁명모델은 서구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중앙집권제적-독재적 짜르체제와 더불어 볼셰비키의 경험의 보편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시민사회적 장치들, 그것들의 효과, 자발성의 형태의 복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사회화의 중요성을 소실시키는 것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비이성적 사회”(전체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 태도의 형태)의 재생산의 충동구조적 토대들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물론 프랑크푸르트의 비판이론이 먼저, 서구 맑스주의의 다른 대표자들과 경향들에 의해 성취되지 못한 반성수준을 성취했다(이에 대해 Jay[1976], Rensmann[1998] 등을 참고.). 왜냐하면 본능(충동)의 사회적 차원과 같은, 사회적 실천의 “비합리적”이고 감성적 차원이 이 접근들에서 주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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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사회주의의 선전, 서구 공산당들(KPen)의 볼셰비키화, 1920년대 중반 이래로 3차 인터내셔널의 지도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레닌주의(LM)의 지명과 더불어, 서구 맑스주의에 특징적인 그 대표자들의 고립이 시작된다. 즉 아마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영향도 정상과학적(normalwissenschaftlich) 실천에 대한 제도적 토대들도 주어지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이 구성을 지적 학습과정으로 특징짓는 것(“서구”에서의 혁명의 실패 원인에 대한 질문과 관련해, 사회심리학적이고 문화적인 현상들에 대한 민감한 반응, 방법론적 정향, 맑스 이론에서 비판적-인간주의적 잠재성과 헤겔의 후계자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이 배치의 틀에서 제한된 맑스-해석의 새로운 유형의 원천이 된다(주: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더 나아간 특징들로 앤더슨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방법의 해명을 위한 전[前]맑스적 철학으로의 후퇴를 언급한다. 즉 동시대적 “부르주아적” 이론들의 편입. 난해한 글쓰기 스타일. 맑스레닌주의[ML] 같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승리주의적 어법과 분명히 다른, 역사적 발전에 대한 오히려 비관주의적인 평가. 미학의 문제들에 대한 편향.). 이것은 정치이론적이고 국가이론적인 문제들을 소실시키는 것을 통해(주: 유명한 예외는 파시즘 감옥에서 쓰여진 그람시의 저작들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질문들에서 “숨겨진 정통”(Habermas. 1993. S. 235.)의 지배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그 때문에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맑스이해에 대한 자신의 논쟁을 가치이론의 영역으로 종결한 서구 맑스주의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주: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은 아마도 우선, 1965년 출판된 저작집인 『‘자본’을 읽는다』를 위한 루이 알튀세르의 기고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포괄적으로 순수히 인식론적 지평에서 머물러 있다. 독일어 판 Althusser. 1972. S. 59-93. 참고.). 결국 -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는 것 없이 - “인간주의적 문화비판가 맑스”를 “경제학자 맑스”와 대조시키거나(예를 들어 Fromm. 1988. S. 9.), 경제학 비판 없는 “맑스주의”를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주: 위르겐 하버마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 대한 초기 시도가 이에 해당된다.) 입장들이 숨겨진 정통으로 계속 나아간다. 

  

IV. 새로운 맑스- 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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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960년대 중후반 이래로 “새로운 맑스-독해”(주: 이 개념의 시험적이고 사회사적이고 이념사적 재고에 고대하는 성격이 서구 맑스주의에서 보다 더 분명히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으로 서구 맑스주의에 맞선 상대적으로 분명한 단절 및 학습과정이 이해될 수 있다.)의 틀에서 맑스레닌주의(ML) 밖의 국가이론적이고 경제이론적 문제들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맑스 이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수용의 물결은 또한 (m.o.w.) 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 측에서 분명하고, 거의 전적으로 “서구” 국가들에 정착되었다. 그것의 기원은 학생운동, 지속적이고 정치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전후 번영에 대한 믿음의 첫 번째 동요, 베트남 전쟁의 틀에서 반공주의적 합의의 파열과 같은 현상들과 때를 같이한다. 그리고 그것의 급진적 해방요구에도 불구하고 포괄적으로 학술적 장으로 제한되어졌다. 여기서 더 넓은 의미에서 이 새로운 맑스-독해에 대해(주: Heinrich. 1999b. S.207. 이하와 Jaeggi. 1977. S. 146.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것은 또한 “네오 맑스주의”의 라벨로 이해된다.), 좁은 의미의 새로운 맑스-독해(주: Backhaus[1997]에 의해 정의된 것처럼. 또한 Heinrich. 1999b. S. 211. 이하 참고.)가 구별되어야만 한다. 전자가 국제적 현상이라면, 후자는 우선 포괄적으로 독일로 제한된다. 전자가 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해 엥엘스의 교리에 압도적으로 구속되어 있다면, 후자는 국가비판(주: 1970년대에 소위 “국가도출논쟁”의 틀에서 - 전통 맑스주의의 국가실체주의와 조종이론들[Manipulationstheorien]에 대한 분명한 반대에서 - 근대 국가에 대한 물신비판과 형태분석에 관한 접근들이 공식화된다. 이에 대해 특히 Kostede[1976] 참고.)과 경제학비판에 대한 그것의 논쟁에서 맑스의 형태분석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독해방식의 교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의 이론적 노력들은 동시에, 맑스 이론의 재구성의 형태로 새로운 독해방식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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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패러다임과 엥엘스의 패러다임이 동일하다는 고전적 신화에 대항해,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해서, 엥엘스의 설명은 맑스의 저작에 포괄적으로 부적당한 것으로 비판되고, 순수히 “대중적인” 지평에서,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영구화하는 지평에서 논증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따라서 한스-게오르그 바크하우스는 가치이론과 관련해, 비판이 “요즘까지 맑스주의적 문헌의 거의 논쟁되지 않은 구성요소들을 계산에 넣고, 확실히 맑스의 가치이론의 수용방식(즉 엥엘스의 의해 야기되어,『자본』의 첫 세 장을 그에 의해 명명(세례)된 ‘단순 상품생산’의 가치이론과 화폐이론으로 오독하는 것)을 구조화한, 해석의 전제”에 관계된다고 강조한다(Backhaus. 1997. S.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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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하우스는 “이 근본적 오류로부터 맑스주의적 가치이론이 맑스의 가치이론에 대한 이해를 차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Backhaus. 1997. S.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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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평에서 또한 먼저 맑스 이론과 맑스주의 이론이 구별되면, 더 나아간 논증과정에서 맑스의 메타이론적 자기이해가 문제시된다. 이미 루이 알튀세르에게서 “징후적” 독해, 주체에 중심을 맞춘-의도주의적(intentionalistisch) 해석학에 대항한 독해의 도움으로, 우리가 맑스의 저작에서 (메타이론적 지평에서 이 문제에 부적당한 담론에 의해 혼선되게 된) ‘이론적 실천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 실행된 과학적 혁명’과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 확립된다(Althusser. 1972. S. 38-51, 65-67. 참고.). 알튀세르는 동시에 재구성의 과제들을 부적절한 메타담론의 제거와 (자본분석의 실제적 방법에 타당한 자기반성의 부재에 대한 징후로서 개념상 읽혀지는) 메타담론에 지배적인 은유들의 변형으로 정의한다. 알튀세르와 그의 실제대상과 인식대상의 관계에 대한 이중적 이해와 달리(주: Althusser. 1972. S. 52-55. 참고. 구조주의적 독해방식과 비판적-재구성적 독해방식 사이의 차이는 이 점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전자가 곧 헤겔주의를 부적절한 메타담론들로 폭로하고자 하는 반면, 후자에게 헤겔에 대한 방법적 관계는 곧 맑스 저작의 이해를 위한 왕도(王道)이다. 비판적-재구성적 독해방식이 물론 결코 “헤겔 맑스주의”에서 싹이트지 않았다는 것은 위르겐 리체르트와 미하일 하인리히의 저작이 보여준다.), 재구성 논쟁의 이 상황은 맑스의 이데올로기비판의 이론적 틀에서 공식화된다. 즉 맑스는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저작들에서 “심원한”(난해한) 지평을 “대중적” 지평으로부터 구별한다. 전자의 통찰에서 부르주아적 생산방식의 사회적 매개관계를 이해한다면, 그래서 후자의 통찰이 행위자들의 일상적 이해의 객관적 사고형태들의 체계화와 직접적 서술로 만족한다면, 실제로 사회적으로 매개된 현상들은 직접성의 사물화된 외관에서 사로잡혀 머물러 있다. “대중적” 논증들은 또한 주체적 부족함 혹은 이론가의 심지어 의식적 곡해의도로 심리학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특정한 사고형태에 기인하는데, (알튀세르는 그것이 담론에 의해 투입된 관점을 나타낸다고 말 할 것이다. Althusser. 1972. S. 28.) 그 특정한 사고형태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교통형태들의 체계적이고 무엇보다 무의식적인 생산물이다. (필연적으로 거짓 의식. 여기서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더 이상 말할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다. 담론의 발생이 그에게는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재구성 논쟁은 또한 이제, 그 구별을 심원(난해)하게/대중적으로 맑스 저작 자체에 적용한다.

 

결국 또한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재구성의 이전의 단계에 대해 상처입지 않은 “심원한(난해한)” 시각으로 간주하는 이론적 실천에서, “대중적” 내용들, “과학적 혁명과 고전적 전통 사이의”(주: 이것은 미하일 하인리히의 저작 『가치의 학』의 부제이다. 특히 S. 16-18.을 보라. 또한 바크하우스의 “Materialien”의 1, 2부에서의 그 자신의 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바크하우스의 자기비판을 참고. Backhaus. 1997. S. 132. 이하.) 개념적 양가성(이중성)들이 나타난다. 『자본』에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술에 대한 불가침성의 교리는 결정적으로 거부된다. 맑스의 단선적인 인식진보에 대한 전설의 자리에, 경제학비판의 연구입장과 서술방법에서의 진보와 후퇴의 복잡한 병렬과 융합에 대한 인식이 들어선다. 결국 『요강』으로부터 『자본』의 2판에 이르기까지 가치형태분석에 대한 서술의 점증하는 대중화에 대해 지시된다. 그 대중화는 그것이 형태발생적 방법을 점점 더 은폐함으로써, 역시 역사화하는 그리고 실체주의적인 독해방식들에 근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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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맑스주의내부의 학습과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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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과학적 혁명의 면들, 내적 학습과정의 면들, 그러나 역시 맑스 저작에서 전통적인 경제학적이고 역사철학적 입장들로의 복귀를 설명할 충분한 공간이 이 글의 틀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두 개의 위에서 언급한 맑스주의 내부의 학습과정들에 의해 제시된 점들이 짧게 언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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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 이론은 해방의 그 어떤 자립화를 설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합리적 사회화방식의 자립화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매개된 작업의 이론적 존재로 훨씬 더 이해될 수 있다. 맑스주의자들 및 반(反)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임의의 가장 높은 과학성 혹은 비과학적 예언으로 내세워진 (그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Marx. 1993. S. 16.]으로 이해한다는) 맑스의 주장은 (오히려) 비판적 언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연” 및 “자연성”(Naturwüchsigkeit)은 사회화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결정된 범주들이며, 그 사회화관계는 그것의 사적-분업적 체제(Verfasstheit)에 근거해 행위자들에 맞서, 추상적 노동의 가차 없는 이용기계장치(Vernutzungsmaschinerie)로, 추상적 노동의 집합적이고 개별적인 통제가 빼앗기고 추상적 노동의 행위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재생산되는 “가치의 운명”으로 간주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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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이론은 “인간들이 그것의 눈에 띠지 않게 작동하는 경제적 역동성의 대상들로 품위를 떨어뜨리도록 했던,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한 유일한 비판적 판단”이다(Schmidt. 1993. S. 35.). 맑스가 그의 저작들의 선언적 부분들에서 항상 다시 역사철학으로 급변하는(umkippend) 역사적 낙관주의에 빠지긴 하나, 이것은 역사철학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의 과학적 비판에 의해 근본적으로 방해되는 찌꺼기에 다름 아니다(주: 역사철학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위해 다음을 참고하라. Kittsteiner[1980], Fleischer[1975], Haug[1994],  Beiträge zur Marx-Engels-Forschung NF[1996], Arndt. 1985. S. 50-76. 아른트는 간결하고 옳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통용되고 있는 교과서들에서 역사적 유물론으로 팔리는 ... ‘역사적 과정의 주체’와 더불은 ‘세계역사의 객관적 논리’는, 맑스에 의해 비판된 것에 다름 아니다. 맑스는 똑같은 정도로, 역사를 결국 임의로 배열할 수 있는 자료와 사건들의 그러모음으로 용해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S. 65]). 그러나 이 전당물로부터, ‘2차, 3차 인터네셔널 맑스주의’ 및 ‘맑스-경멸자들 하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인간 종의 진보의 일반적인 역사적 필연적 경향”을 결정하는 “사회구성들의 순서의 법칙”(주: Jaeggi. 1977. S. 153.에 따른 G. 스틸러 인용. 이러한 것을 진정한 맑스의 입장으로 파는 “맑스”-비판에 대해서는 단지 칼 R. 포퍼의 관련 저작들을 참고.)에 이르기까지, 철의 역사적 필연성의 심오한 체제를 맞춰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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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의 후기 저작의 형태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강령적 설명의 내재적 요구와의 비교를”, 즉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을 그것의 총체성에서 서술하는 것(Marx/Engels.  1983. S. 37, 38.)을 “피할 수 없는”(Reichelt. 1970. S. 73.) 정치경제학 비판은, 4중의 비판과정으로 서술될 수 있다. 그것은 ① 그것의 해방적 지양의 ‘그것 자체를 통해 생산되는 객관적-현실적 가능성’의 배경 하의, 부르주아 사회와 그것의 파괴적-자연적 진행형태에 대한 비판이고(이에 대해 특히 Haug[1973] 참고.), ② 이 관계들 자체에 의해 체계적으로 생산된 물신화되고 전도된 행위자들의 일상적 이해에 대한 비판이며, ③ 정치경제학의 총체적인 장, 이런 습관적인 사고형태들을 무비판적으로 체계화하는 장, 이론적인 장에 대한 비판이고(이에 대해 특히 Heinrich[1999a] 참고.), ④ 사회적 해방의 모델을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체제에 간단히 명제적으로 대조시키거나, 개별적 경제적 형태들을 체제의 전체관계에 맞서 주장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하는, 유토피아적 사회비판에 대한 비판이다(이에 대해 특히 Brentel[1989] 5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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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비판의 방법은 “형태발전” 혹은 “형태분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마찬가지로 몇몇의 잠정적 언급들이 있다. 즉 형태분석은 역사적으로 상이한 생산방식들의 특수한 사회성의 이해를 목표로 한다. “부르주아적” 접근들이 잘해봐야 사회의 재생산에 대한 과학을 특정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들에서 수행하는 반면, 정치학 비판처럼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 형태들에 대한 과학으로 인식된다.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 주어진 관계들 하에서 어떻게 생산하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 관계 자체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것이다.”(Marx. 1990a. S. 126.) 혹은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같은 것(사적 소유 자체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 역자)을 설명하지 못한다.”(Marx. 1990b. S. 510.) 정치경제학은 이미 구성된 경제적 대상들의 지평 위에서 작동하고, 이 경험주의적인 것을 주어진 것으로 취하고, 이것을 순환적으로 근거 지을 수 있다. 그것의 체계적 구성과정을 개념적으로 관통하는 것 없이 말이다. 이에 반해 형태분석은 (가치, 화폐, 자본 같은 그리나 법과 국가 역시) 형태들의 발전을 노동의 모순적인 사회화조건으로부터 추적하고, “그것을 설명하며, 그것의 발생, 그것의 필연성을 이해한다.”(Marx. 1961a. S.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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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외관상으로 자립적이고, 외관상으로 모순적으로 토대 지어진 ‘사회적 부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정치적 강제의 형태들’을 역사적-특수적 실천형태들로 해독한다. 형태-발전은 동시에 대상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이해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훨씬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내재적 구조관계의 개념적 해독을 의미한다. 맑스의 형태분석은 결국 항상 동시에 노동의 형태이론이고(그것은 왜 이러한 내용[노동]이 저러한 형태[가치]를 취하는지를 묻는다.), 부르주아적 의식의 물신이론이다(그것은 서술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일상실천의 형태들에서 어떻게 [형태들로서] 이런 형태들에 대한 오인이 체계적으로 생산되는지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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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경제학비판적인 칼 맑스의 “후기”저작은 타율적 사회화의 체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초를 놓는 것으로 인식된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제도적 토대구조와 경제적 핵심구조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그 같은 것이 그것의 총체성에서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단지 기초를 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과 그것의 무언의 강제들(특히 Marx. 1993. S. 765. 참고.)의 억압적 체계성의 구성을 나타내는 것과 더불어, 이것이 (정치경제학에서처럼, 인간의 공동생활의 자연형태들로서의 그것의 자기신비화들에, 혹은 되돌릴 수 없는 진화적 보편성에 굴복하는 대신) 사회적 형태들로 해독되기 때문에, 나는 과학적 분석이라고 말한다. 이론전통에 따라서, 여기서 즉 사회화의 역사적-특수적 형태들(맑스가 부르주아적 생산방식에 대한 그의 서술의 틀에서 보이고자 요구한 것)은 더 넓은 의미에서 물질적(stofflich) 존재조건들과 뒤섞여지고(주: 가치의 구성요소 이론의 맑스의 소위 “삼위일체 공식”에서의 완결된 형태에 대해서는 특히 Marx. 1989. S. 822-839. 참고. 근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해서는 Heinrich. 1999a. S. 62-85. 참고. 하인리히에 의하면, 고전파 경제학뿐만 아니라 신고전파 경제학은 경험주의, 인류학주의, 개인주의, 초역사주의로 특징지어진다.), 그와 더불어 인간의 형성능력과 변화능력이 원리적으로 빼앗긴 것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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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부르주아적 사회화 그 자체의 형태들을 - 형태이론, 동시에 물신이론으로서 - 주제화하고 문제화하고, 그것을 ‘그것과의 단절의 현실적 가능성의 배경 하에’ 계획한다(이에 대해 역시 Demirovic. 1997. S. 37f. 참고.).

 

자신을 혁명운동에 대한 직접적 행동지도서로 이해하는 대신, 맑스 이론은 오히려, 입장들(상황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망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관계, 부르주아적 “근대”의 이런 저런 형태에 대한 해결 혹은 최소한 지속적인 “문명화” 등을 토대 짓는다. 자본주의적 종합의 역설적 효과들의 울타리가 예상된다. 국가의 주문이나 시장의 주문 혹은 심지어 - 요즘 다시 유행되는 - 소외된 사회화권력들인 국가, 자본, 시민사회를 기본적으로 긍정하고, 기원에 따라 그것들의 작용의 이런저런 결과를 불평하며, 선택적으로 통화주의적, 국가주의적 혹은 도덕주의적 처방들을 추천하는 “시민도덕들”과 “공공심”에 대한 호소도, 맑스에 따르면 부르주아적 사회구성의 체제성격을 진지하게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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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시장옹호자의 역사철학적 약속을 탈신비화하고, 동시에 ‘그것의 사적-분업적 체제에 의거하여 편재적인 낯선 결정(타율성)의 자기재생산적 총체성으로, “자립적 주체”로서의 자본의 “제2의 본성”으로 구성되는 행위관계’에 대한 분석의 배경 하에, “모든 정치”와 순수한 도덕(주: 맑스 저작에서 도덕주의적 사회개혁가들의 강력한 개악들을 참고.)의 “경계”(Marx. 1961c. S. 403.)를 결정한다. 그는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테러적 “자기비판”(주: 프랑스 혁명의 테러에 대한[Marx/Engels. 1990. S. 129.; Marx. 1961b. S. 357.], 푸르동의 교환은행-비전에 대한[Marx. 1983. S. 103ff, 174.], 바우어의 반유대주의에 대한[Marx. 1961b. S. 347. 이하.; Marx/Engels. 1990. S. 100.] 혹은 금욕적-노동물신주의적인 코뮤니즘 관념들에 대한[Marx. 1990b. S. 534f.] 이런 비판들은 부분적으로 정당화목적들로 맑스를 증거로 끌어내는 현실사회주의와 마주친다. 맑스에 의해 비판된 조야한 코뮤니즘과 사회의 초정치화[Überpolitisierung][이런 사회들의 후진성과 고립성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거의 놀랄 수 없는, ‘시장의 폐지 대신 계획의 비합리적 시도와 부분적으로 테러적인 국가과다’]의 경향들은 바로 여기서 극단적 방식으로 명백하게 존재한다.)에 이르기까지 추상적 부정(Marx. 1968. S. 257.) 혹은 불합리한 부정의 유토피아적 시도를 논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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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9 11:38 2008/02/1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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