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헌책이나 도서관 책을 읽다가 책이 흘렀을 길을 상상하곤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어디선가 초판본 구텐베르크 성서를 갖는 것이 여생의 소망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서양에는 이런 식의 초판본이나 희귀본 수집벽이 꽤 두터운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고 나름의 시장도 형성되어 있는 듯 하다. 이런 수집가들 입장에서는 설령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과 내용이 완전히 같고 활자의 오탈자까지도 하나하나 동일한 책이 있더라도 본래 초판본이 가지는 독보적인 의미가를 훼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활판 인쇄술이 서구 지성사를 내리찍었던 그 순간에다  부여하는 의미는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게 만든다. 텍스트의 운명 아닌 책의 운명이란 것도 있다.

 

  텍스트엔 좀 관심이 있지만 책의 운명에는 별 관심도 알 능력도 없는 나는 요즘 킨들에 열중해 있다. 사실 기계치라 기능 익히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서 독서는 오히려 별로 못했... 그러다가 지적 권위라는 것에 대해 영양가 없는 생각도 막 한다. 책의 권위나 저자의 권위에 대한.

 

    내가 애서가나 장서가로 분류될 만한 인간형은 아닌 게, 독서량이 적기도 하지만 도무지 책이 갖는 물리적 형질에 대한 의미부여를 잘 이해하질 못하겠다. 뭔가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직관적으로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달까, 초판본의 내용을 그대로 볼 수 있음에도 경매로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낡디 낡은 책을 손에 넣어야 되겠다는 그런 정서. 나는 범우사 전집이 삼천원이라는 이유로 좋아했고 무겁고 값만 비싼 하드커버 책에 짜증을 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지적 권위에 상당히 취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건 내가 권위자를 만나보지도, 그렇다고 권위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약점일 게다. 뭐 이런 얘기다. 열의가 없지 않으면서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를 망설였던 것은 공부가 아닌 학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 것이, 내가 대학을 경험하면서 가장 제대로 배운 것은 공부도 연애도 낭만도 운동도 술도 아닌 어떤 집단에서 여성 일반이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일이(심지어 여성이 다수일 때조차)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다. (물론 내가 게을렀던 탓이 크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교수·선배들은 훌륭한 스승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그들의 가르침에 감사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 안에서 그 사람들에 대한 어떤 경멸이 자라는 것을 막아 내기는 힘들다. 그런데 위계서열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을 경멸하면서 사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특히 위계서열이 드러나는 형식이 상당히 강압적일 때는 더 그렇다.

 

   그 와중에 나도 모르는 새에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 선배, 스승의 상을 갈구하게 된 것 같은데, 아마 내가 존경의 태도를 보여줘야만 하는 사람이 실제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뭐 그런, 결국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서 그랬던 거다. 하지만 그런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 스스로 어떤 권위를 구성해야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런 걸 현실에서 가져본 적이 없다 보니 어떤 비빌 언덕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기원으로서의 아버지, 나의 권위로 소될 수 있는 아버지를 찾기에 이르렀는데, 현실에서 교수든 선배든 족보든 국가든 민족이든 내가 권위를 인정하고 거기에 기대어 나의 권위를 구성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아버지를 만족스럽게 찾아내는 것이 당연히 불가능하다.

 

   거기서 책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된 것 같은데, 편한 대로 맥락을 잘라서 빌려올 수 있는 책이란 결국 말에 권위를 더해 준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해결 방법일 수는 있는데, 문제는 그런 짓을 자꾸 하게 되면 어디서 권위를 빌려오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내용을 소화해서 저자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욕심인데 이건 결국 권위를 가진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동경이다. 다시 학생이 되기로 했더니 이런 찌질한 생각만...


   그런데, 그 책이란 것의 형질이 변하는 거다. 그럼 아마 책의 권위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하겠지. 움베르토 에코는 톨스토이를 전자파일로 읽는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라고 묻지만 사실 시간을 헤쳐와 누렇게 변한 책을 손에 쥐고 황홀해할 수 있는 그런 감성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건 아니잖은가.  이런 호사스런 부르주아 취미... eBook파일은 편리하게도 색이 변하지 않고 찢어지거나 책등이 닳아서 책이 낱장으로 떨어져버리는 일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전자책의 경우, (시드니대의 사서 대량해고에서 드러나듯이) 출판이나 유통, 혹은 검색이 혁신적으로 간소해진 것도 있지만 책 보관의 방법에 가장 큰 혁신이 있지 않나 한다. 종이책을 소장하려면 어떻게든 공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장서가가 되려면 상당히 넓고 고정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집이 딱 한 몸 누일 방 하나거나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에게는 요원한 꿈이 장서가다. 그러나 킨들 단말기는 약 3500권의 책을 한 손에 들고 다니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집 없는 독서가들을 물리적 공간의 제약에서 사실상 자유롭게 해준다.

 

 그에 비하면 작은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전자책 단말기는 소셜 네트워크로 하이라이팅한 부분을 공유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거기에서 누군가 끄적인 낙서나 밑줄을 발견했을 때 대체로 짜증을 내는 편이다. 그런 책을 읽으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감상이 무엇인지가 상당 부분 남의 눈을 통해 규정되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파일로 만들어진 책에는 남의 하이라이팅을 공유할지 말지, 언제 공유할지 여부를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책에 흔적도 남지 않으며, 하이라이팅을 공유하고 싶은 동료 독자(?)를 내키는 대로 지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하이라이팅을 통해 내가 이 책을 어떤 식으로 읽고 파악하는지 남들에게 알리면서 해석에 대한 어떤 권위를 주장할 수 있되 타인의 독서를 무례하게 방해할 일은 없다.

 

  지금 당장은 전자책 파일에서 직접 쪽수를 인용할 수가 없지만(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 전자책 파일 판본의 쪽수를 직접 인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아마 더 많은 변화가 생길지도. 각주나 미주를 몇번 클릭하는 것으로 그 '책' 자체를 사 버릴 수 있다면(혹은 전자책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다면) 아마 인용의 방식도 지금과는 같지 않겠지. 책들이 서로 굉장히 긴밀하고 유연하게 링크되는 거니까. 그리고 질러댄 책값으로 잉문학도들의 파산율은 더욱 늘...

 

  쓰다 보니 어쩐지 예찬론처럼 되어 버렸는데, 사실 나는 그냥 변화를 알고 보고 싶다, 고 생각한다. 인쇄술이 그랬듯, 전자책은 확실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술이다. 말 혹은 텍스트의 권위란 것이 어쩐지 소스락소스락대는 시점에 살고 있다는 것. 전자책의 경우, 워드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자기 생산물을 그냥 출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로고스피어의 등장 이후 우리는 문단이나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들의 글을 블로그 출판물을 통해 책으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자책이 일반화된다면 번거롭게(?) 출판사와 컨택할 필요도 없이 개인 블로그나 특정 커뮤니티 게시판을 어엿한 책으로 발행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종이책의 경우, 출판되는 것 자체로 어떤 권위를 획득한다. 즉 누군가가 인쇄기를 돌리고 잉크와 종이를 그리고 노동력을 소모해서 이 책을 보급할 만한 것이라고 어떤 측면에서든 인정을 했다는 얘기고, 자비 출판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의 사람에게 상당한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책을 사는 사람으로서도 집안 한구석을 실제로 이 책으로 점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자책의 생산이나 유통 판매 방식은 그런 부담을 사실상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결국 책이 갖는 권위와 의미가 상당히 변화하는 거고, 프로 저자의 책과 아마추어가 자기 블로그 게시물을 모아놓은 책이 똑같은 포멧으로 출판되어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는 이런 현상을 다양한 책들이 플랫flat 해진다고 표현을 하던데. 아마존 같은 대형 서점은 요즘 책 자체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 정도의 전자책 가격을 유지하려 노력한다고 들었지만, 이미 셀프 퍼블리싱 북들이 기존 프로 작가들의 책들과 경쟁하고 있는 가운데 상당 부분 시장 독점에 기대는 이런 노력이 언제까지 통용될지는 미지수. 이런 변화는 한국의 '나는 작가다' 같은 기획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 기술발전이 뭔가 소비자와 생산지의 경계가 무화되는 유토피아적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먼 얘기고, 일단 기본적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는 게 당위적인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얘기.

 

  변화는 무조건 진보일까? 사실 권위의 유통 양상이 변한다고 해서 지적 체계가 위계화되고 그것이 재생산되는 현상 자체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런 식의 위계가 없어지는 거야말로 심각한 문제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권위에 취약하니까 지금 당장 나도 킨들로 블로그 구독 정도는 할 생각이 있지만, 셀프 퍼블리싱 북을 프로 작가의 책과 똑같은 돈 내고 살 생각은  없다. 지금으로선 백일몽에 가깝지만 만약 정말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무화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북소믈리에가 유망한 직업이 될지도...

 

  어쨌든 요새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바 대로, 전자책이 보편화된다면 독자의 감성 자체가 변화하기도 할 거다. 잉크에 펜을 담궈 한자 한자 공들여 쓴 가죽 양장의 채색 필사본을 넘기는 사람과 활판 인쇄술의 은혜를 입은 책을 읽는 사람이 텍스트를 대하는 정서가 다르듯이.   그리고 아마도 최초의 전자책은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이 갖는 의미의 1/1000도 얻지 못할 거고 지금처럼 고가의 수집의 대상이 되진 못할 거다.  그냥 기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언제든 완전 동일한 복사본이 존재할 뿐.  지적 권위가 유통되고 정립되는 방식 역시 지금의 그것과는 좀 달라질 거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권위를 고민해야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책을 파먹고 살 수가 있나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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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1 00:45 2011/06/11 0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