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조각들.

from ... 2012/02/01 03:48
최근 시끄러웠던 일에 대해서 글을 쓸까 했지만 역시 영 내키지 않는다. 괜히 우연히 검색에 걸렸다가 블로그를 난장판으로 엎는 것도 유쾌하지 못한 일이고(물론 글 자체가 유쾌하진 않다). 역시 간단히 몇 가지 생각만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성토하거나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물음표 투성이의 글임을 감안해 주시고 다른 곳에 링크하지 말아주시길. 그리고 가볍고 즐거운 글이 아님은 미리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슬럿워크와 마찬가지로 주체적 선택을 한 것이다' '노출할 자유가 있고 주체적 행동이다' 라는 논거를 들어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당혹스럽다. 그 여성의 자유를 옹호하겠다는 말은, 그 여성이 어떤 옷차림과 행동을 하더라도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옹호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실제로 각오했거나,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한 사람이 불특정 다수에게 그런 식으로 소비당해도 될까? 혹은 본인이 동의했다고 해서 어떤 폭력이든 정당화될까? 그 때문에 방송에서 나온 성희롱적 멘트와 그에 못지 않은 댓글들을 비난할 수 없는 건가.

나는 기본적으로는 슬럿워크 참가자들이 여러 가지 성폭력적 대상화와 시선을 예상치 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대해 가해지는 여러 가지 성희롱들을 비판에서 면제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건 '여자가 야한 옷을 입었으니 나를 유혹한 것이고 따라서 나는 무죄이다' 라고 주장하는 강간범의 자기변호와 뭐가 다를까.)

 

 

-혹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쌍방의 합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지점이(그리고 그 여성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여성혐오는 한참 전에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숱하게 던져진 마초적 농담에서, 세상물정을 모르던 20대 여성들이 우리 덕분에 정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누군가 주장했을 때, 여성은 남성과 달리 후보의 용모에 끌려서 투표를 한다고 방송에서 이야길 했을 때 이미. 그리고 갇혀 있는 사람의 '욕정' 을 해소해야 한다는 농담같은 방식으로 여배우를 동원하자고 주장하고 여성 청취자 전반에게 사진의 형태로 성 상납을 요구했을 때 이미.(물론 그들은 여성혐오같은 건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성을 얼마나 사랑스러워 하고 좋아하는지 열심히 설명할지도 모른다. ) 여기에서 누군가가 사진을 정말로 보냈는지 아닌지, 그 사진에서 신체노출의 정도가 얼마만큼이었는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구분짓기에 대한 강박과 혐오의 표현은 많은 경우 크게 다르지 않고, 한국은 그 둘 다 유독 심하다. 젠더 규범을 강요하고, 거기에 순종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된다.(어느 기준이 누구에게 먼저 강요되었을까.) 예를 들어서, (내뱉기 싫은 비유이지만 스스로를 이해시킬 만한 다른 비유가 없으니 이렇게 말해보자.) 흑인에게 당신네 인종은 체구가 좋으니 힘쓰는 일을 더 많이 해달라는 요청은 인종 차별인가 아닌가. 이 발언이 혐오발언인지 판단하는 데 실제로 인종별 체구와 근력을 판단할 필요가 있는가. 꼼꼼하니까, 섬세하니까, 역시 여자들이 이런 걸 잘 하니까 일터와 가정에서 여성에게 부과되는 감정 노동, 돌봄 노동, 재생산 노동이 차별이라는 것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인식조차 않고 산다. 어느 순간 인지하더라도 몸에 배인 습속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청취자가 듣는 방송에서 여성 전반을 향해 저 남성의 욕정을 풀어달라며 성적 위무를 요청하는 어떤 발화는 혐오 발화가 아닐까? 성욕구는 남성의 본능이니까? 낙화유수가 인간의 본성이니까? (나아가서 여성에게 보조자, 들러리, 꽃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 많은 이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를 내재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산다. 그것이 너무 일상적이라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은 대체로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발화를 절제하는 가식조차도 참 인색한 분위기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성애적 욕망과 여성에 대한 혐오는 종종,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데 혐오에 있어서는 심지어 이성애자 여성들도 전부 예외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종종 이성애자 여성이 성정체성이 굉장히 애매한 위치라고 생각한다. 분명 지배의 위치라고는 볼 수 없는데 적지 않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지배규범에 따라 성적 타자에 대한 혐오를, 심지어 여성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아주 잘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혹은, 나도?)

 

 

-가부장제든 뭐든, 어떤 체제도 피억압자의 주체성을 전부 말살하고 유지되지는 않는다. 체제는 그 존속의 책임을 구성원들에게 돌릴 수 있는 그만큼의 주체성을 언제나 담보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자발적인' 의사표현 중 일부만이 세상에 나오도록 허락받는다는 것이다. 어떤 자발성들은 투명하게 사라진다. 예를 들어 이런 -자발성은 어떤가. 남자 뒤에 서는 대신 폭력에 노출되고 연행되더라도 시위대의 앞에 서고 싶은 자발성, 정치적 이슈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싶은 자발성은 연약하고 순진한, 혹은 그래야 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무시당한다. 거기에 대한 항의에는 누구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그들은 투명하게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다가 어떤 여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남성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고 싶다고 말하는(것처럼 보이는), 오로지 그 순간에만 그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에 대해 보내는 열렬한 지지와 환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저 글은 (사실관계 서술에 문제가 없지 않으나) 그 투명해진 자들의 분노를 보여준다. 그것은 새롭지 않다. 여성주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좀 전형적인 이야기라고 느낄 것이다. 혹은 여성주의에 관심이 없는 여성도 익숙한 상황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건 진영의 차이보다 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보 정당이나 단체에서는 적어도 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선 다른 곳에서라면 넘어가 버릴 성폭력 사건도 수면 위로 많이 올라온다. 그건 분명 선배 여성주의자-활동가들의 투쟁에 힘입어 쟁취한 성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당원이나 활동가가 소외된다고 느끼는 어떤 방식은 비슷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미 구성된 시민-주체의 개념이 여성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성정치의 저 오래된/첨예한 이슈를 기각하고 오직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어떤 여성이 대표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언제나 '일부의 의견을 여성 전체의 것처럼 호도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 중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여성성 전체를 대표하는지 선택하는 것은 단지 숫자인가? 혹은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트위터에서 누군가 신문 기사 두 개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ㅎㄱㄹ신문

ㄱㅎ신문

 

 

첫 번째 기사의 경우, 인터뷰의 교묘한 배치를 통해 어떤 종류의 여성성을 전형적 여성성으로 만든다.(이 지점을 깨닫게 해준 것은 어느 트위터러였다. 그분께 감사.) 작가, 지식인, 예술인(먹물들?)의 부정적인 시선과, '평범한 '2-30대 직장인 여성들의 문제될 것 없다는 시선. 물론 정말 문제없고 불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배치를 통해서 언론이, 여론이, 공적 권위가 특정 의견을 여성 다수의 의견으로, 정상성으로 추인하고 나면 불쾌감을 느낀 이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탓하며 입을 다물 것이다. 항의하기로 한 이들은 '과격하고 예민한 소수' 가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의견을 여성 전체의 것으로 호도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왜 또 다른 종류의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제시하고 싶어하는가. 누가 대표성을 얻어 발언하고 누가 소수가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어디의 누가 가지는가.

 

 

-마지막 조각. 여성이 권력을 차용하는 혹은 공적 발언에 힘을 싣는 방법은 여성성을 최대한 억누르고 남성화 전략을 택하거나, 유혹적인 성적 대상으로서의 매력을 이용하거나, 최대한 가련한 피해자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이다. 더이상 여성이 사적 공간에 유폐되지 않는, 하지만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때때로 셋 중 하나를, 때때로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휘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을 택하든 그 과정에서 그러한 전략들을 선점하지 못한/선택할 수 없는/거부하는 여성들의 발화를 억압한다.

이것을 넘어서 여성주의를 말하고, 또 여성주의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그러니까 첨예하면서도 다른 타자를(다른, 타자, 들이다.) 억압하지 않는 말하기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걸 좀더 생각해 보겠다.

 

 

-이건 그냥 일기다. 그리고 질문은 설득이 아니라 정말로 질문이다. 혹은 실패다.

 

 

-내 언어는 언제나 타협의 언어고, 그래서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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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03:48 2012/02/01 0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