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년행진 Slut walk는 무엇?

슬럿워크 시위는 여성들이 야한 옷을 입고 거리행진시위를 하는 것으로, 올 초 캐나다의 한 경찰관 발언이 불씨가 됐다. “여성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경찰관의 말에 여성들이 분노했다. 슬럿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는 ‘헤픈 여성’ 등을 지칭하는데, 마치 여성들의 야한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말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현지 여성들이 일부러 속옷 차림 등 노출이 과도한 옷을 입고 ‘내 마음대로 입을 권리’, ‘성범죄의 책임은 가해자’ 등을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후 미국 보스턴과 영국 런던, 호주 시드니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잇따랐다.-세계일보.6.26

 

  얼마 한 교사가 등교하는 여고생의 짧은 치마를 지적하며 벗으라고 지시하여 물의를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었다.(기사 : http://news.nate.com/view/20110623n07729)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건전하고 상식적인 시민들 은 고생들의 '하의 실종' 패션에 눈살을 찌푸리며, '저러다가 성범죄의 타깃이 된다' 는 염려 섞인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수는 반라의 차림으로 섹시한 춤을 추는 걸 그룹의 순수한 '삼촌팬' 들이다. 성인들에 대해서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여성 자신들도 노골적으로 섹슈얼한 분위기를 드러낸 차림을 한 여성들을 '헤퍼 보인다' , '싸 보인다' 고 표현한다. 하지만 화장을 아예 하지 않거나 여성적 매력을 전혀 부각시키지 않는 의상을 선호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여기에도 '젊은 아가씨가 좀 멋도 내고 그러는게 좋지 않아?' , 'ㅇㅇ씨는 화장을 좀 하면 참 예쁠 텐데 말이야' 라는 친절하고 자상한 충고가 뒤따른다.

 

  한편에서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으로 가치를 가지고, 다른 편에서는 부정한 것, 가려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런 상황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성폭력을 남성의 본성으로 보면서, 야한 옷을 통해 남성의 욕구를 자극했기 때문에 성폭력이 일어난다는 시각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성폭력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전적으로 남녀간 물리적 힘의 우열관계 때문에 일어난다는 주장도 중요한 지점을 놓친다. 미치도록 더운 날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걸어가는 어린아이를 본 목마른 사람이 아이의 뺨을 때리고 주스를 뺐는 것은, 당연한 생리적 욕구와 육체적 우열관계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나 어린이에게 '너 그러게 왜 그 더운 날 밖에서 주스를 마시면서 걸어다녔냐'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여성에 대해서는? 여성의 옷차림에 따라 성폭력을 가해도 될 여성과 손대선 안될 여성을 구분하는 것은, 응시를 당하는 것은 여성이고 응시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남성이라는 생각에 기반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몇년 전까지 강간에 관한 재판에서 '창녀인줄 알았다' 라는 변명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측면이 있었다는데, 한국은 과연 어떨까? '창녀인줄 알고 실수했다' 는 말에는, 성노동자는 기본적인 인권도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 이 모든 관점은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점을 선포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 중에서 자신은 스스로의 몸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향유하는 주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헌법상의 권리를 완벽히 보장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보편적 인권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비슷한 정도로 나이브한 사람이다.

 

  슬럿워크 시위는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반격하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디어다. 일부러 경멸조의 슬럿Slut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름 붙이기의 정치성'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우다. 즉 오늘날 퀴어queer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모욕적 의미를 띄지 않고 당당한 커밍아웃이나 gay pride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슬럿slut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노동자가 아닌 여성이 자신을 slut 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정숙한 여자/ 헤픈 여자의 구분을 뒤흔든다. 가부장제(라고 부르든 남성중심사회든 뭐든) 는 여성을 타자로 삼아 남성 주체를 발명하며 동시에 여성들을 다시 구분하고 낙인찍어 여성의  쾌락을 통제한다. 여성을 성녀와 마녀, 걸레와 처녀, 된장녀와 개념녀로 나누는 것은 대상화하는 남성-대상화하는 여성 구도를 만들어 여성들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여성내부의 연대를 차단하는 데도 효과적인 전략이다. 슬럿워크는 이 지점을 직접적으로 타격한다.

 

    사실 처음 슬럿워크를 듣고 알게 되었을 때는 거부감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대상화에 저항하기 위한 몸짓이 폭력적인 시선에 의한 또 다른 대상화로 끝나고 마는 것이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체제가 부과하는 규범을 거부하고 마는 순간은 어떻게든 공포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소간 위악적이고 과정된 제스처라도 반향이 두려워서 침묵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참 지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필요할 테니, 좀더 유쾌하고 발랄한 방법이 좋지 않을까. 또한,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은 여성들의 옷차림이 현실의 권력관계와 차별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결국 피해자의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피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하며, 새로운 욕망을 발명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 자신의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그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잡년 행진' 이 필요하다.

 

  *참고

관련기사 :  ‘슬럿워크 시위’ 국내도 상륙한다 - 세계일보

Slut walk Korea 블로그 : http://slutwalkkorea.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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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신문기사 밑에 달린 대부분의 댓글들이 역설적으로 슬럿워크의 필요성을 웅변하고 있다.

++) 여성문제에 좀 집중해서 써 버렸지만, 슬럿워크는 여성 뿐 아니라 성별과 성지향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옷 입고/ 성폭력에서 안전할 권리를 지지한다고 한다. 남성 참가, 복장 도착, 페티쉬는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패션을 환영한다고 하니 사회가 부과하는 '섹시함' '야함' 의 기준에 꼭 맞춰서 참가해야 한다는 강박은 느낄 필요가 없을 듯. 행사의 취지를 지지하는 마음과 자기가 입고 싶은 옷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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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30 19:00 2011/06/30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