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나아갈 길?

from 걷기 2012/03/18 07:20
올해의 여성의 날로부터 6일 후에, 나오미 울프가 가디언지에 이런 칼럼을 실었다.

 

* How we can connect with feminism's global future (패기 있는 제목일세...)

 

 

번역을 해볼까 했지만 시간이 도저히 나질 않는다. 어쨌든, 페미니즘의 미래라...

 

나는 최근에 예술을 공부하는 젊은 여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화가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제니 샤빌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본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의견은 제니 샤빌이 싫다는 것. 현대회화에서 (기존 사회의 기준으로)아름다운 몸을 그리는 것이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보면 쉽게 비판받는다는 걸 알지만, 샤빌의 그림이 직시하길 요구하는 그 끔찍하리만치 비대한, 방금 성형 수술을 한, 인터섹스의, 안드로진의 몸들보다 "남성들이 우리(여성)을 위해 만들어준 예쁜 이미지가 훨씬 좋다" 는 것이었다. 샤빌이 페미니즘 화가인가의 문제를 떠나서, 나는 이런 의견이 현대의 (서구) 페미니즘이 봉착한 곤란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위기' 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대한 울프의 파악과 진단이 이 위기를 돌파해 줄 실마리를 던져주는가?

요약하자면 울프의 주장은

 

1.오늘날의 페미니즘은 크게 두 가지의 전통에 기원하는데

1) 조세핀 버틀러와 같은 빅토리안 페미니즘

2) 보부아르-프리단으로 대표되는 2세대 페미니즘 이다.

 

2. 현재 페미니즘은 위기에 처해 있다.

 

3. 이 위기는 상당 부분 정당성 혹은 존재의의(현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왜 필요한가?)의 위기이다.

 

4.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1) 울스턴크래프트의 전통을 잇는 계몽주의 페미니즘(Enlightenment feminism 인데 편의상 이렇게 번역하겠다.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요구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처럼, 오로지 여성만이 아닌 모든 인간의 차별 없는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근대적 평등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으로의 전환

2) 개도국의 여성운동과 적극 연대(무슬림 페미니즘 혹은 분쟁, 위험지역의 여성운동 등등 - 그들의 절실하고 긴박한 필요와 요구에 주목하며 연대)

가 페미니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대략 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같다.

 

 

 

일단, 댓글 반응은?

 

 

... 어떠냐 하면, 사람들이 점잖고 교양 있는 말로 반페미니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몇개 예를 들자면, "더 이상 아무도 페미니즘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페미니스트들의 목표는 이미 오래 전에 달성되었고 현대의 페미니즘은 다른 집단을 억누르고 주류의 도덕과 정의에 반하는 것에서만 존재 의의를 찾는다" "우리가 '여성' 으로서 싸운다면 어떻게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건가?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남자든 여자든 트랜스젠더에게든 합당한 것일 텐데 말이다." ... 등등...

 

 

나는 기본적으로 울프가 이런 반응을 자초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 로 왜곡하면, 당연히 현대 (서구)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존재 의의를 찾기 힘들 수밖에 없다. 광범위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관점에 따라서는 법적/제도적으로 '성평등' 이 완전히 달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물론 이미 존재하는 반페미니즘 정서의 책임을 울프 한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단순히 '평등' 을 목적으로 두고, 이 평등의 기준은 무엇이며 어째서 이 기준이 합당한지, 혹은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고 이를 정하는 이들은 어떤 입장에 선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면 굳이 페미니즘 - 혹은 넓은 의미로 성에 관한, 혹은 '정체성'의 제 이론 - 을 고집할 필요 없이 리버테리안적 평등 안에 안주해도 충분하다. (혹은 엠마 골드만이나 린지 저먼과 같이 페미니즘을 사회주의의 하위항목으로 두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안티페미니스트가 되거나 바뎅테르같은 묘한 입장이 될지도.)

(실은, 좀 경솔하게 말하자면 웬디 브라운, 벨 훅스 등이 주장했던 바, 섹스-젠더의 개념을 다른 정체성과 경합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 가 필연적으로 다다르는 지점이 여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서 '계몽주의 페미니즘' 이란, 확실히 페미니즘의 위기 뿐 아니라 후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인 듯하다. 그리고 이 위기의 징후는 시작부터 항상 상수로 존재해왔던 폭넓은 반페미니즘 정서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특히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반감을 사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아닐까? 여성들 스스로가 페미니즘을 어렵고 따분하며 귀찮고, 심지어 남성을 적대하는 여성우월적 인종주의라는 마초적 비판을 그대로 담습하는 상황 말이다.

 

앞서 진술했듯이, 울프는 페미니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통과 거부해야 할 전통을 구분하는 것에서 상황 타파의 출발점을 찾는 듯하다. 빅토리안 페미니스트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의 원류, 참정권(투표권 운동)을 주도했던 울스턴크래프트를 계승하자는 것이다.

 

페미니즘 역사에 대한 이런 식의 서술은 주목해야 할 페미니스트를 백인으로 한정시키고 그 과정에서 비백인 페미니스트를 배제한다.(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단지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비판해야 할 지점이 아니다.) 사실 이 구도에서 사라지는 것은 '제3 세계' 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서구 내의 비백인 페미니즘이다. 울스턴크래프트 이전부터 이미 목소리를 내던 흑인 페미니즘, 혹은 우머니즘의 전통은 페미니즘의 원류로서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현재의 제3세대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을 생략하다시피 한다.(물론 지면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 아젠다나 정치적 신념이 없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카 발렌티는 여기에 대해서 트위터로 반응했는데 대략 '뭐?....ㅋ...." 정도의 반응을;;)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퀴어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와 연대했던 퀴어들이다.

 

사태가 이럴진데 갑자기 서구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로서 제3세계와의 연대를 들고 나오는 그 결론이 상당히 미심쩍을밖에. 물론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개도국 여성들의 열악한 현실은 여성주의 운동에 강력한 당위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손쉽게 페미니즘 자체의 존재의의를 지탱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서구 페미니즘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말하는 제3세계와의 연대가 과연 준비된 것인가? 비서구 페미니즘을 단순히 타자화하는 것을 넘어 진정한 연대가 가능한 조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한 것인가? 이 모든 것, 보편적 평등주의나 근대적 계몽주의, 제3세계와의 연대 등이 폭넓은 공감을 쉽게 얻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전략은 얼마나 유효적절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처방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가 서구에서 페미니즘의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결국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칼럼이긴 한데, 읽고 나서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글을 남긴다. =========================================================== 그런데, 결국 해법은 전혀 모르겠다는게 제일 씁쓸...-_-;그냥 투덜투덜이가 되는 기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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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8 07:20 2012/03/18 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