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독립 심리상담 및 테라피 단체인 '핑크테라피' 의 이름으로 발표된, GSD (성소수자, LGBTAIQ+) 를 대상으로 한 심리상담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젠더 및 성적 다양성 테라피' 의 한국어 번역본을 배포합니다.

 

아직 성소수자의 심리상담 및 테라피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은 만큼, 관련 자료를 필요로 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자원해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심리상담에 관한 내용이지만 크게 어렵거나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고, 퀴어이슈의 다양한 측면과 개념의 정의/조작 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서 관련 이슈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해 봅니다.

 

이 링크 ( http://www.pinktherapy.com/en-gb/knowledge/translations.aspx) 를 클릭하시고 "Korean" 항목의 "Gender & Sexual Diversity" 를 다운로드 받으시면 됩니다. 같은 링크에서 영어 원본 및 다양한 언어 번역본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포멧과 저작권 표기를 지킨다면 배포는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 읽어봐 주시고, 가능하다면 홍보도 부탁드립니다!

 

어 그리고...번역이 참 그렇죠 오타도 있고... 누가 저렇게 해놨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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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1 03:59 2012/07/11 03:59
이것은 블로그 홍보용 블로그 포스트입니다(...)

 

아직 기능도 익숙하지 않지만 어쨌든 텀블러 블로그를 열었습니다. ( http://www.tumblr.com/blog/eve-ri) 블로깅도 떠돌아다니지 말고 진득하게 해야 할텐데...;;

 

여튼 텀블러는 아무래도 '미니블로그' 라서 진보넷 블로그와 병용할 듯 하지만, 글은 텀블러 쪽에 더 자주 올리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텀블러 블로그는 양성애에 관한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있다 보니까 앞으로도 관련 내용을 계속 올리게 될지도...(?) 해서, 해당 주제에 관련 있는 분들의 질문이나 맞팔 언제나 환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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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1 03:56 2012/07/11 03:56

 

* (수정) 서명은 이곳을 클릭해 주세요! >>>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사전피임약 전문의약품 지정에 반대한다.

 

현안대로 사전피임약 11종 모두를 일괄적으로 전문의약품으로 지정한다면 모든 종류의 사전피임약 구매에 처방전이 필요하게 됩니다.

전문가와 상담하고 환자 본인의 몸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숙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수도권과 이외 지역 거주 여성 간의 의료접근권 차이, 저소득층이나 십대 여성의 의료비 부담, 한국의 성인지 수준과 사회적 시선 등을 생각해 보면, 결국 기존의 성적 위계에서 하위에 위치하는 제도결혼 바깥의 관계에 피임약 접근권이 부당하게 제한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남성,여성 모두의) 육아휴직, 임신과 육아에 따른 고용과 승진의 차별을 시정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부족하고 사전피임약의 접근권은 저출산을 근거로 제한하는 것. ( 참고)결국 전체 맥락에서 보면, 사회적 재생산의 부담은 개인에게 돌리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보장해주지 않는 셈입니다.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사전피임약을 '모두'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정책에 반대합니다.

 

링크는 이에 대한 반대 연명이구요, 저도 서명했습니다.주민등록상의 이름이 아닌 ID나 닉네임등으로도 참여 가능하다고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일부 부작용 위험이 높은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지정하되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제품의 경우 약국판매하는 현 제도가 낫다고 생각하고요, 만일 모든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평등한 의료접근권과 한국의 성문화에 대한 고려를 하면서 천천히 진행되어야지 이렇게 단기간에 강행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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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7 16:37 2012/06/07 16:37

데이비드 하비의 새 책( Ravel Cities: From the Right to the City to the Urban Revolution http://www.versobooks.com/books/1116-rebel-cities ) 출간에 맞춰 살롱닷컴에서 인터뷰를 공개하였기에 노동절을 기념하여 학습노동을 좀 중지하고 번역해 보았다. (..?) 워낙 의역과 오역이 심한 번역이라 원문을 보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지만. 원문 주소는

여기http://www.salon.com/2012/04/28/urban_revolution_is_coming/singleton/

 

도시혁명이 다가온다 Urban revolution is Coming

 

오큐파이 운동은 도시기반 저항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기획했을지도 모른다. 왜, 어떻게인지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자.

 

 파리의 1871년에서 프라하의 1968년, 카이로의 2011년과 마침내 뉴욕시의 거리까지, 도시는 옛부터 급진적 운동의 온상이었다. 지난 십수년간 실업과 식량 부족에서부터 민영화와 부패까지, 모든 것이 도시의 시위에 박차를 가해 왔다. 그러나 도시 자체의 지리가 저항을 야기하기도 하였던가? 오큐파이 운동 측이 전미의 여러 도시에서 일련의 큰 노동절 시위를 준비하고 있기에, 이 질문은 이번주에 특히 큰 울림을 던진다.

 

 지리학자이며 사회학 이론가이자 City university New York 인류학과 대학원의 뛰어난 교수이며, 그리고 언제나 가장 많이 인용되는 20인의 인문학자 중 하나인 데이비드 하비는 어떻게 도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며, 언제 그렇게 하고, 그 성과가 무엇인지 탐구해 왔다. 그의 신간 "도시의 저항자들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도시혁명까지 Ravel Cities: From the Right to the City to the Urban Revolution" 는 자유시장 경제정책이 도시의 삶에 미치는 영향, 중간~하층 미국 가계의 심각한 빛과 난개발(runaway developement) 이 어떻게 모든 도시 거주자의 공공의 공간을 파괴했는지를 세밀하게 조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전체 도시를 구성하는가?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하비는 현재의 신용 위기가 어떤 방식으로 도시개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어떻게 이 개발이 미국 도시에서의 정치적 조직화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 살핀다. 하비는 시민들이 그들 도시의 개발과 구성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도시에 대한 권리" 운동의 최전선에 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파리 전체가 귀족정을 전복해 버렸던 1871년의 파리 코뮌에서 영감을 얻어, 하비는 도시가 구성된 곳, 또는 구성될 수 있는, 혹은 좀 더 정상적이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곳을 스케치한다

 

 살롱( www.salon.com ) 은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 운동에 대해서, 블룸버그의 뉴욕시 개발의 파괴성에 대해서, 그리고 도시를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구성하는 것에 대해 데이비드 하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하 인터뷰, 굵은 글씨는 인터뷰어인 Max Rivlin-Nadler]

 

  "도시에 관한 권리" 는 텅 빈 슬로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모든 사람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블룸버그도 도시에 대한 권리가 있지요. 그러나  도시의 서로 다른 계층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도시를 좀더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구성할 권리에 대해 말할 때, 그리고 우리가 지난 20-30년간 뉴욕 시에서 목격한 것은, 이 권리가 가진 자들이 바라는 욕구라는 겁니다. 70년대로 돌아가면 록펠러 형제들 같은 실세들이고, 지금 우리에겐 블룸버그 같은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도시를 자신과 자신들의 비즈니스에 편리한 방식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인구의 대다수는 이 도시개발 과정에 거의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요. 여기 뉴욕에는 일 년에 만 달러로 버텨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백만 명 가까이 됩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건설되고 있는 그런 종류의 도시에 대해서 무슨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하죠.  도시에 대한 권리에 대한 제 관심은 어딘가에  어떤 윤리적인 올바른 길이 있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게 분투해야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어떤 도시를 만들기 위한, 누구의 권리입니까? 제 관심사는 일 년에 만 달러로 연명하는 백만 명이 적어도 상위 1%와 같은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내 권리가 중요하지, 당신의 권리는 중요하지 않다" 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느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를 텅빈 기표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갈등이 일어나지요.                                                        

 

  

 

 

 

  1980년대 이후로, 전에 공공부문이었던 섹터들(교육, 철도, 수도) 에 대한 전세계적 민영화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이것이 도시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의 동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ㅣㅏㅓ어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제가  책에서 던지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왜 우리는 민영화에 대해서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68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도시지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왜 사람들은 더 동요하지 않을까? 거기에 대한 반응이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몇 가지 큰 징조가 보입니다. 칠레에서는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하고 있고, 우리는 과거 1960년대 당시 존재했던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징조를 보았습니다.

 

 

    왜 더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경찰 기구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끔찍한 돈의 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미국] 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 9/11 후 안보 조치에 따라 어떤 형태의 동요라도 테러로 취급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위스콘신과 함께 타흐릴 스퀘어 같은 곳이나 다른 도시 폭동에서 우리가 본 것은, 저항의 징조가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난 1930년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와 평행을 그리지요. 1929년 주식시장의 폭락이 일어났을 때 정말 큰 시위는 1933년까지 시작되지 않았고, 그 후에야 정말 대규모의 움직임이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지금 그 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불황, 경기 침체,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아직도 대량의 실업자가 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자기 집을 잃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속적인 조건입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우리가 대규모의 동요 발생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우리가 붕괴를 겪은 다음 몇년 내로 회복했던 1987년과는 다릅니다. 그런 일은 이 나라에 일어나고 있지 않아요.

 

  정치적 목적이 없는 즉자적인 분노의 분출과 우리가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서 보는 것처럼 더 계획된 반응은 같지 않습니다. 오큐파이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아젠다로 놓는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적어도 민주당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말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일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런 것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급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을 말하고 있고, 당신은 그 메시지가 일종의 레토릭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오바마의 선거 캠페인에 침투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의 운동에 1871년의 파리 코뮌이 중요한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역사 속의 위대한 반란 중 하나입니다. 그 자체로 연구되고 논의될 만 하지요. 다른 이유는, 그것이 좌파적 사유의 기념비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맑스,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가 파리 코뮌을 참조하고 어느 정도 따라야 할 선례로 생각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1905년의 페트로그라드와 러시아 혁명에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요. 파리 코뮌에 대해 질문하고 거기에서 배워야 합니다.

 

 

 자유시장이 주도하는 도시화는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삶의 공동체로서의 도시를 파괴했습니까?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도시가 무엇이었는지를 낭만화하지 않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기구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적 파워- 의 통치를 받는 비교적 촘촘하게 밀집한 도시 인구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외화로 인해 인구가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분산된 도시가 되었지요. "게토" 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곳으로 점점 더 분산되고, 따라서 더 이상저소득층의이 커뮤니티가 스스로 조직될정도로 고도로 밀집된 곳이 아니게 된 겁니다. LA 의 로드니 킹 사건 때처럼, 그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도시 인구의 분산, 교외지역과 게이트 커뮤니티의 생성은 일관적이고 통합된 정치적 삶의 가능성을 조각조각냅니다. [미국에는 백인 부촌 중 거주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주택단지 입구를 철문으로 지키는 곳이 많습니다. 리모콘이 있어야 진입할 수 있고 경비실이 있는 아파트 주차장의 훨씬 엄격한 형태? 이것을 gated community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추측] 이는 많은 NIMBY (Not In My Back Yard) 의 정치를 발생시킵니다. 사람들은 다르게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 근처에 살기 싫어하고, 이주민들이 주위를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는 거지요 - 따라서 사회성이 변화합니다. 저는 언제나 교외와 게이트 커뮤니티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 주관성을 생각하는데, 이는 물론 그 누구도 도시의 전체성과 이 걱정스러운 도시의 [개발] 과정의 총체를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의 파편화된 주관성입니다. 거주민들은 단지 자신의 파편만 걱정하지요. 이 자본화 과정의 폐허에서 정치의 본분을 재구축하는 것이 정치적 프로젝트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점거 운동에 관한 스토리에 계속 등장하는 용어가 '프레카리아트'(프리랜서나 노조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 인데요. 왜 프레카리아트들이 급진 운동에 중요할까요?

 

 저는 "프레카리아트" 란 용어를 그다지 많이 좋아하진 않습니다. 도시의 삶을 생산/재생산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조건을 불안정하다고 보고, 그중 많은 이가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은 항상 있어 왔던 일로, 그들은 공장 노동자와 다릅니다. 역사적으로, 변혁의 시기에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좌파는 언제나 운수노조와 공장 노동자들을 향해 왔습니다. 좌파는 점차 늘어나는 도시의 삶을 생산/재생산하는  사람들에 대해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이 제가 파리 코뮌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곳인데, 왜냐하면 누가 파리 코뮌을 만들었는지 실제로 살펴보면, 그 주체들은공장 노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장인 (artisan) 들이었고, 그 당시 파리의 많은 노동은 불안정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공장들이 사라짐에 따라 지금 우리가 대면한 상황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존재했던 노동계급과 동일한 규모와 중요성을 가진 산업 노동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좌파의 정치적 기반은 무엇인가? 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들은 자주 이주하고, 쉽게 조직되지 않으며, 노조를 결성하기가 어려운 유동인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엄청난 정치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항상 사용하는 예시인 2006년의 이주민 권리 운동. 수많은 이주노동 인구들이 하루 동안 일터로 가기를 거부하자, LA와 시카고가 문을 닫아야 했다는 점이 그들의 굉장한 파워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조직 노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공부문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민간부문의 조직노동자는 이제 인구의 9퍼센트로 하락했습니다. 불안정 노동은 엄청나지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들을 조직할 방법을 찾는다면, 어떻게 뉴욕, 시카고나 LA 등등의 도시에서 도시적 삶이 지속되고 구조화되는가에 대한 거대한 영향력으로서 이들을 동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혁명은 도시에서 일어나야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좌파들은 왜 그렇게 그 의견에 비판적일까요?

 

  파리 코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논쟁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도시의 사회운동이었고, 따라서 계급운동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혁명적 운동의 주체는 공장 노동자 뿐이라는 맑시스트/좌파적 견해에 기원합니다. 글쎄요, 만일 공장 노동자가 없다면, 혁명을 할 수 없다는 게 되지요. 말도 안됩니다.

 

 저는 도시를 계급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에는, 오늘날 도시를 생성하는 건 금융자본이에요, 자본이 오피스와 콘도미니엄을 짓고 도시를 만들어요. 우리가 그 방식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힘에 대항해 계급 투쟁을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어떻게 도시를 조직한다는 겁니까?' 와 같은 질문이 걱정됩니다. 좌파의 미래는 도시에 있습니다. ( The city is where our political future lies on the left)

 

 

 공공의 공간은 어떻게 좀 더 접근가능한 공간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뉴욕시에는 많은 공공 장소가 있지요, 그러나 당신이 공동행동에 참가할만한 공공장소는 아주 적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에는 아고라가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아고라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이것이 점거운동이 정하려 하던 것, 쥬코티 파크에 있던 사람들이 하려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정치적 대화(dialogue)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상 공공(public) 이 허락되지 않는 공공장소를 점거하고, 진짜 결정이 내려지는, 우리가 또 다른 건축 계획이, 콘도미니엄을 한 단지 더 짓는 게 좋은 생각인지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정치적 공유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요전 날 유니온 스퀘어 공원을 지나왔습니다. 지난날 많은 일이 일어나던 곳이지만 자주 꽃 무덤으로 변하죠. 그래서 지금은 튤립들이 공유지를 누리고 있고 우리에겐 공유지가 없지요. 그것이 더 이상 공유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공공 장소는 정치적 힘에 의해 더 이상 공유지가 아닌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는 겁니다.

 

 

블룸버그의 정책은 "제인 제이콥을 염두에 둔 모시스 같은 빌딩" 으로 묘사되는데요 (로버트 모시스(Moses) 는 자주 교외로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 이웃사회를 파괴하며 지난세기 중반의 뉴욕시를 무자비하게 개발했다. 그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중 하나였던 작가 제인 제이콥은 고속도로가 그리니치 빌리지를 통과하는 것을 막는 데 힘을 보탬), 블룸버그는 이 둘을 어떻게 중재할 생각인 걸까요?

 

 그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근대적인 스타일의 건축을 할 때, 그걸 아주 무자비하게 한다는 겁니다. 블룸버그 집행부는 1960년대의 모세보다 더 많은 초거대 프로젝트를 론치했지만, 그는 이것을 제인 제이콥처럼 미학적 커뮤니티가 되는 것으로 위장합니다. 이게 큰 프로젝트의 성질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환경주의적 느낌도 있죠. 블룸버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진짜 환경주의자입니다. 그린 빌딩을 만들 수 있으면 매우 좋아하죠. 우리는 그가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친화적인" 것으로 거리를 혁신하는 것을 보죠 - 물론, 자전거 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럼 블룸버그는 불행해 지겠죠.

 

 

 

 

당신은 이 자유시장 주도형 도시정책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충격적인 사실은, 만일 당신이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항의하는시위들을 전 세계의 지도로 본다면 엄청난 규모의 시위를 보게 될 거란 겁니다. 그 중 많은 부분이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이 난점이지요, 일례로, 오늘은 학생 대출과 그에 관한 시위들을 얘기하지만, 내일은 사람들이 주택저당 반환권 상실에 저항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또 다른 사람들은 병원 폐쇠나 공교육 때문에 시위하고 있을 지도 모르구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하기는 것이 난해하단 겁니다. "도시에 대한 권리 연합 The Right to the City Alliance" 과 "배제당한 노동자들의 회합" 처럼 연대체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건 아직 초기단계입니다. 만일 모두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그 누구의 진정한 요구나 욕망도 충족하지 못하는 이 시스템을 뿌리도 가지도 바꾸는 데 관심이 있는 거대한 대중이 될 겁니다.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는 당신이 말한 몇 가지 이슈가 연합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응집력 있는 메시지가 결여되어 있지요. 왜 좌파는 항상 리더쉽이나 위계에 이렇게 저항적인 걸까요?

 

 제 생각에 좌파는 항상 한 종류의 조직만이 특정한 프로젝트에 적합하다는, 조직에 대한 페티쉬랄까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혀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민주 집중제 모델을 따르는 공산주의 프로젝트에는 맞는 말이었습니다만. 민주집중제에는 장점이 몇 있지만 확고한 단점도 있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위계에도 반대하는 좌파의 요소입니디ㅏ. 그들은 모든 것이 수평적이어야 하고 열린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집행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지요.

 

 실제로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는 전위 운동[하나의 정치적 정당이 최전선에 서는] 으로 작동했습니다. 그들은 부인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99퍼센트를 위해 말하지만 그들 자신은 99퍼센트가 아닙니다. 그들은 99퍼센트를 향해서 말을 한 거지요. 서로 다른 조직 구조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좌파에게는 많은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저는 볼리비아의 El Alto 모델에 매우 감명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수평적 구조와 위계적 구조가 매우 강력한 정치조직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존하고 있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토론의 일정한 법칙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좋습니다.

 

 지금 현재 [오큐파이에서] 유행하는 토론의 법칙은 작은 집단에 매우 좋은데, 집회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뉴욕 시 전체를 포괄하는 집회를 기획한다고 생각해 보면,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당신은 지역별 집회를 할 것인지, 대규모 집회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는 조정 위원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 리더쉽을 가지고 조직하는 데 있어서 매우 긴장하고 있어요.

 

 성공적인 운동에는 언제나 수평적/위계적 질서가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마주친 것 중 가장 흥미로운 운동은 칠레 학생 운동인데, 리더 중 한명은 중앙위원회가 결정하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수평적이려고 노력하는 젊은 공산주의자 여성(Camila Vallejo) 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리더십이 필요한 순간에는 그게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좀더 유연한 좌파 조직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오큐파이에는 민주당이 오큐파이의 요구를 지지하도록 사인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려는, 그리고 그게 안 되면 독자적으로 후보를 출마시키려고 하는 그룹이 있어요. 그들은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리더십을 행사하는?] 무리이지만, 전혀 주류는 아니죠.

 

 

 책의 끝부분에서 많은 답을 주진 않으셨더군요. 하지만 어떻게 이 증가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다중의 위기에서 탈출할 것인지에 대한 대화를 열고 싶어하셨죠. 점거운동에서 이런 돌파구를 보십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노조 운동이 더 지리적인 형태의 조직을 향해 간다면, 그리고 단지 일터에만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시 사회 운동과 노조는 아주, 아주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으로 이런 합작의 성공적인 선례가 꽤 있다는 것이죠. 내 생각에, 씨앗을 심을 수만 있다면 거대한 변혁도 가능합니다.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가 노조 운동과 좀 더 협업하는 길을 지향한다면, 대단한 정치적 액션도 가능합니다. 내 책은 이런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는 기반이고, 우리가 어떤 것이 성공적인 조직이 될 지 아직 모르는 만큼 그 어떤 것도 기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정치 운동을 위한 거대한 공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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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은 차차 합니다.

인용은 출처를 밝히고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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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10:21 2012/05/01 10:21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

from 걷기 2012/03/18 07:20
올해의 여성의 날로부터 6일 후에, 나오미 울프가 가디언지에 이런 칼럼을 실었다.

 

* How we can connect with feminism's global future (패기 있는 제목일세...)

 

 

번역을 해볼까 했지만 시간이 도저히 나질 않는다. 어쨌든, 페미니즘의 미래라...

 

나는 최근에 예술을 공부하는 젊은 여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화가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제니 샤빌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본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의견은 제니 샤빌이 싫다는 것. 현대회화에서 (기존 사회의 기준으로)아름다운 몸을 그리는 것이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보면 쉽게 비판받는다는 걸 알지만, 샤빌의 그림이 직시하길 요구하는 그 끔찍하리만치 비대한, 방금 성형 수술을 한, 인터섹스의, 안드로진의 몸들보다 "남성들이 우리(여성)을 위해 만들어준 예쁜 이미지가 훨씬 좋다" 는 것이었다. 샤빌이 페미니즘 화가인가의 문제를 떠나서, 나는 이런 의견이 현대의 (서구) 페미니즘이 봉착한 곤란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위기' 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대한 울프의 파악과 진단이 이 위기를 돌파해 줄 실마리를 던져주는가?

요약하자면 울프의 주장은

 

1.오늘날의 페미니즘은 크게 두 가지의 전통에 기원하는데

1) 조세핀 버틀러와 같은 빅토리안 페미니즘

2) 보부아르-프리단으로 대표되는 2세대 페미니즘 이다.

 

2. 현재 페미니즘은 위기에 처해 있다.

 

3. 이 위기는 상당 부분 정당성 혹은 존재의의(현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왜 필요한가?)의 위기이다.

 

4.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1) 울스턴크래프트의 전통을 잇는 계몽주의 페미니즘(Enlightenment feminism 인데 편의상 이렇게 번역하겠다.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요구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처럼, 오로지 여성만이 아닌 모든 인간의 차별 없는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근대적 평등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으로의 전환

2) 개도국의 여성운동과 적극 연대(무슬림 페미니즘 혹은 분쟁, 위험지역의 여성운동 등등 - 그들의 절실하고 긴박한 필요와 요구에 주목하며 연대)

가 페미니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대략 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같다.

 

 

 

일단, 댓글 반응은?

 

 

... 어떠냐 하면, 사람들이 점잖고 교양 있는 말로 반페미니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몇개 예를 들자면, "더 이상 아무도 페미니즘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페미니스트들의 목표는 이미 오래 전에 달성되었고 현대의 페미니즘은 다른 집단을 억누르고 주류의 도덕과 정의에 반하는 것에서만 존재 의의를 찾는다" "우리가 '여성' 으로서 싸운다면 어떻게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건가?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남자든 여자든 트랜스젠더에게든 합당한 것일 텐데 말이다." ... 등등...

 

 

나는 기본적으로 울프가 이런 반응을 자초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 로 왜곡하면, 당연히 현대 (서구)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존재 의의를 찾기 힘들 수밖에 없다. 광범위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관점에 따라서는 법적/제도적으로 '성평등' 이 완전히 달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물론 이미 존재하는 반페미니즘 정서의 책임을 울프 한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단순히 '평등' 을 목적으로 두고, 이 평등의 기준은 무엇이며 어째서 이 기준이 합당한지, 혹은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고 이를 정하는 이들은 어떤 입장에 선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면 굳이 페미니즘 - 혹은 넓은 의미로 성에 관한, 혹은 '정체성'의 제 이론 - 을 고집할 필요 없이 리버테리안적 평등 안에 안주해도 충분하다. (혹은 엠마 골드만이나 린지 저먼과 같이 페미니즘을 사회주의의 하위항목으로 두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안티페미니스트가 되거나 바뎅테르같은 묘한 입장이 될지도.)

(실은, 좀 경솔하게 말하자면 웬디 브라운, 벨 훅스 등이 주장했던 바, 섹스-젠더의 개념을 다른 정체성과 경합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 가 필연적으로 다다르는 지점이 여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서 '계몽주의 페미니즘' 이란, 확실히 페미니즘의 위기 뿐 아니라 후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인 듯하다. 그리고 이 위기의 징후는 시작부터 항상 상수로 존재해왔던 폭넓은 반페미니즘 정서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특히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반감을 사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아닐까? 여성들 스스로가 페미니즘을 어렵고 따분하며 귀찮고, 심지어 남성을 적대하는 여성우월적 인종주의라는 마초적 비판을 그대로 담습하는 상황 말이다.

 

앞서 진술했듯이, 울프는 페미니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통과 거부해야 할 전통을 구분하는 것에서 상황 타파의 출발점을 찾는 듯하다. 빅토리안 페미니스트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의 원류, 참정권(투표권 운동)을 주도했던 울스턴크래프트를 계승하자는 것이다.

 

페미니즘 역사에 대한 이런 식의 서술은 주목해야 할 페미니스트를 백인으로 한정시키고 그 과정에서 비백인 페미니스트를 배제한다.(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단지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비판해야 할 지점이 아니다.) 사실 이 구도에서 사라지는 것은 '제3 세계' 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서구 내의 비백인 페미니즘이다. 울스턴크래프트 이전부터 이미 목소리를 내던 흑인 페미니즘, 혹은 우머니즘의 전통은 페미니즘의 원류로서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현재의 제3세대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을 생략하다시피 한다.(물론 지면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 아젠다나 정치적 신념이 없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카 발렌티는 여기에 대해서 트위터로 반응했는데 대략 '뭐?....ㅋ...." 정도의 반응을;;)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퀴어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와 연대했던 퀴어들이다.

 

사태가 이럴진데 갑자기 서구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로서 제3세계와의 연대를 들고 나오는 그 결론이 상당히 미심쩍을밖에. 물론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개도국 여성들의 열악한 현실은 여성주의 운동에 강력한 당위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손쉽게 페미니즘 자체의 존재의의를 지탱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서구 페미니즘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말하는 제3세계와의 연대가 과연 준비된 것인가? 비서구 페미니즘을 단순히 타자화하는 것을 넘어 진정한 연대가 가능한 조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한 것인가? 이 모든 것, 보편적 평등주의나 근대적 계몽주의, 제3세계와의 연대 등이 폭넓은 공감을 쉽게 얻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전략은 얼마나 유효적절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처방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가 서구에서 페미니즘의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결국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칼럼이긴 한데, 읽고 나서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글을 남긴다. =========================================================== 그런데, 결국 해법은 전혀 모르겠다는게 제일 씁쓸...-_-;그냥 투덜투덜이가 되는 기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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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8 07:20 2012/03/18 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