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의문들

from 분류없음 2011/05/20 02:22

  1. 다른 곳에 올린 글을 지우셨더군요. 그렇지만 블로그의 글은 지우지 않으셨길래 제 블로그의 글을 그냥 두었습니다. 사실 덧글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서 이제 와서 제 마음대로 지우기도 곤란합니다.

 

  2. 이미 충분히 논쟁에 지치셨을거라 생각되고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지만 또 여쭤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하는 글의 길이 문제로 말을 줄이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엄격한 칸트적 입장에서 행위의 부도덕성의 정도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애초에 칸트는 'A는 B보다 악하다' 거나 '덜 악하다'  거나, 그런 논의에서 효용이 그다지 없는 포지션에 있다.  정언명령에 대입해보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돈을 목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둘 다 부도덕하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살인이 사기보다 더 큰 죄라고 느낀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부도덕한가에 대한 비교는 칸트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행위의 특수한 규칙(준칙)은 정언명령의 틀을 통과한 다음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토대로 행위에 옮겨질 때 도덕성을 갖는 것이지, 준칙이 그 자체로써 도덕적 명령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므로. 즉 그것은 도덕의 외연을 정해 줄 수는 있어도 도덕 아닌 것들의 부도덕함의 정도를 비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고용인을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 대하는 것과 돈을 주고 타인을 내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칸트를 잘못 이해하면 등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칸트적 정언명령은 그 둘을 등치시킨 적이 없다. 다만 '둘 다 악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악의 층위를 변별하는 것은 사실 칸트를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슈리님은 칸트적 정언명령에 따를 경우 일반적 고용관계와 성의 매수-매도는 등치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접근법에 따라 성매매의 부도덕성을 판단하려 들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학적 영역에서 언급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을 동원하여 성매매의 부도덕성을 입증하며 그것은 미미한 악이라고 말한다. (왜 미미한지는 논증되지 않았다.)  미미함의 정도는 대략 사랑 없는 성관계나 사랑 없는 결혼 만큼이라고 한다. (확실히 이 부분에서 논의는 칸트를 뛰어넘는다. 칸트는 모든 종류의 혼외정사를 반대했다. 칸트의 입장에서는 혼전 연인들의 성행위는 부도덕한 반면 부부끼리의 성관계는 모든 면에서 서로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행위로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슈리님의 이 정도비교는 무엇으로 뒷받침되는 논리일까?)

 

  칸트적 입장의 도덕성 판별이 부도덕함의 층위를 구분해 주지 못한다고 해서 명제적 도덕성을 아예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일단 명제적 도덕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충분히 논증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통감각이 도덕성의 기반이라 볼 수 있는가? 슈리님은 '우리의 공통감각이 단순히 가상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을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은 사실상 취미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당위성은 대체 어떻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취미판단이 개별 주체에게만 타당하지 않음은 도덕적 보편성과는 다른 영역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오해하고 있다면 오해를 지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슈리님은 첫 글중 두 번째 파트 [성과 도덕]에서  성매매(性賣買) 행위에 대한 도덕성을 판단하겠다고 해놓고 사실상 성매도자( 여성)의 도덕성을 판별한다. 그는 성매매 행위가 선택될 수도 있다고, 즉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은 성매매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혹 여기서 선택의 자유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본체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면, 99명과 1명 같은 이야기는 애초에 나와서는 안 된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녀를 동정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회가 평균적인 인민에게 어떤 경제적 현실로 작용하느냐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정량화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략)...앞에서 나는 성매매의 궁극적 동기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평균적인 여성에게 얼마만큼의 성매매 유혹을 느끼게 하는지 묻는 것은 유효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는 이런 양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같은 조건에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데, 1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면, 그 1명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물론 이런 사회는 유지될 수 없겠지만)에서, 같은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를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는 1명의 여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는 99명의 여성들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 세상은 아마 성적 억압이 사라진 세상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우리는 사실 부르주아적 매매혼을 통해서 합법적인 성매매를 늘 접하고 있다.

  노동이 젠더화되어 있고, 여성노동이 저평가받고, 노동 자체에 대한 여성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성적 억압이 존재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받거나 결혼을 통해 일정 부분 자신의 주체성을 '가족' 의 이름으로 포기하고 아내로서의 형식을 부여받는 것 사이의 선택지를 강요당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결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결합 중의 많은 사례가 경제적 성격을 배제하면 성립하지 못했을 성격의 계약이다. 오늘날 '듀오' 와 같은 기업은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결혼시장에서 개인의 '등급' 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남성에 대한 주된 평가 기준은 소유 자산과 가문이며, 여성에 대한 주된 평가 기준은 얼굴생김, 몸무게, 키이다.

 

  사실 여기서 슈리님이 설정한 '성매매에 대한 공통감각' 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은가? 성매매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이 돈을 받고 성을 거래하는 행위에 대한 혐오라고 볼 수 있는가? 듀오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만나서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꽃다발을 들고 다소곳이 식장에 들어서는 신부를 보는 우리의 기분은 우리가 성매매 여성에 대해서 가지는 꺼림칙함의  1/10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결혼 후의 상황은 어떤가? 남편의 폭력과 불륜 등등으로 인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이혼 후 생계가 막막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여성에 대해서 우리는 동정을 보낼 것이고, 비난할지언정 '창녀'라고 매도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차이라면 성매매 여성은 대체로 일회적인(지속성이 없는) 성관계 후 현물 화폐를 받았고 결혼한 여성은 현물 화폐 외에 다른 물질적, 정서적인 대가도 같이 받았으며 관계의 지속성을 서약한다는 것 뿐이다. 화폐/비화폐의 구분은 혐오의 감정에서 아마 고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혐오감의 실체는 사실 성매매 행위가 아니라 이성애 모노가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성행위에 대한 거부일 수는 없을까?

  

".전통적으로 좌파들은 거인의 요술장화를 신고, 윤리학의 영역을 자유주의적, 혹은 부르주아적이라고 조롱하며 가볍게 건너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이에 반하여 나의 생각은 모종의 윤리적 실체에 대한 고려 없이는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 같은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슈리님의 문제의식은 정확히 나의 그것과 같다. 좌파를 자칭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 체제라는 추상적 명제에서, 구체적인 자신의 행동에 모든 도덕 영역을 사상시켜도 된다는 이상한 정당화 논리를 발견한다. 즉 어차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덕적일 수가 없으니까 도덕판단 따위는 사회주의 도래 후에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은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 사안에 대한 합리적인 도덕판단을 통한 선택과 행위 대신에 개인 자아의 위상에 복무한다. 도덕성은 사안을 판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이나 훌륭하고 정당한 기준을 따르고 있으니까 나는 역시 위대하다는 사실을 지탱해주기 위해서, 개인 인격의 판별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당위로 존재를 규정했던 칸트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도덕 실천을 위한 여건이 열악하다는 것은 도덕성을 포기할 이유가 못 된다는 것이다. 도덕이란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이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이론적으로 논하는 것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하고, 따라서 슈리님이 선택하신 논거에 대한 정당화를 들려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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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0 02:22 2011/05/20 02:22

원문 : http://nightoftheworld.tistory.com/23
 
동의하기 때문에 퍼온 것은 아니다. 노동가치설과 노동자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닌데(그거야말로 내가 침묵해야 할 지점이고), 보편문제가 아닌 특수문제에침묵함으로서 정치적 진리가 드러난다, 는 부분에서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두고 읽어보며 다시 생각하려고 스크랩.
 

 슈리(aeongomdol)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 글은 매우 한정된 독자를 상대로 쓰였다. 이 글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성매매 문제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혼란들을 줄이는 데 일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이 글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가치 판단이나, 개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나는 이 글이 ‘여성’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관례상 성매매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성매매업의 사회적 성격을 다루는 글의 첫 부분에서는 어색하게 ‘성매매업자’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이것이 전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과거부터 페미니스트 진영 내부에서도 성매매에 관한 시각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다. 그것은 나에게 이 문제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아무튼 나의 의도와 다르게, 이 글의 내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더욱 명료하게 쓰지 못한 탓일 것이므로, 양해를 구한다.

 

 

1. 성노동이라는 것이 있는가?

 

   성매매에 관한 논쟁들은 성매매가 노동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노동’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나는 맑스의 견해를 참조할 것이다. 이는 신 존재 증명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안셀무스와 칸트를 참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며, 이 문제에 관하여 인식적 가치가 있는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이러한 현상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

   맑스는 성매매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혼과 매춘에 관한 『공산당선언』의 그 유명한 구절(부르주아적 결혼 제도 자체가 이미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매춘이라는 내용)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여기서는 그 구절을 일단 도외시하기로 하자. 『선언』은 문학성을 위하여 수사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애매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구절들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려고 하면 과거의 해체주의 학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끝없는 텍스트 해석 논쟁에 빠져들 수도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참조해야 할 것은 노동과 계급에 대한 맑스의 전반적인 생각들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맑스는 거의 모든 경우 ‘노동’이라는 말을 ‘임노동’의 준말로 쓴다. 임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것이며, 한 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점한 결과 다른 한 계급은 살기 위해 노동력밖에는 팔 것이 없어진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이로부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양대 계급이 나온다. 이것이 노동에 대한 맑스의 규정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맑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사회적 실재의 메커니즘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통해 어떤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직관에 잘 와 닿지 않으므로,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시점에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노동자들보다 약간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그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고 역겨운 망상이지만, 만약 그 자본가가 높은 교육수준 덕택에 언변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본가는 자기가 하고 있는 ‘노동’이 어째서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지, ‘노동’의 여러 속성들을 거론하며 신학적, 형이상학적 논변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노동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자본가의 망상, 더 정확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면, 맑스처럼 노동 개념을 규정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어떤 직업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직업 종사자들의 주관적 느낌에 근거한 자기 보고 따위가 아니라 해당 직업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다.

   성매매는 노동인가? 라는 질문은 성매매가 임노동의 일종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인식적 가치도 없다(그래서 주로 감정싸움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시 정확하게 물어보자. 성매매는 임노동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성매매업자는 노동력이 아니라 성이라는 상품을 판다. 간혹 논자들 중에 성매매업자도 노동력을 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노동과 노동력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성이라는 상품의 구매자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성은 필수품과 반대되는, 일종의 사치품(도대체 이 상품은 누가 생산한 것일까?)에 가깝다. 사치품의 구매는 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얻은 부르주아들과, 밑에서 그 잉여가치의 부스러기를 받아먹은 다른 계급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력 가치(노동자의 자기 재생산에 소요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만큼의 가치)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을 받는다면, 드물지만 노동자가 사치품의 구매자가 될 때도 있다. 성매매를 성노동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 중에 성매매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근거를 들고 나오는 이들은, 오히려 그 근거가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는 데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성매매업자의 계급적 성격이 어떤 것이며, 그들의 소득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 문제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함께 숙고해볼만한 충분한 자료들을 던져주고 있다. 맑스는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양대 계급을 제외한 사회의 다른 계급들을 다루는 몇몇 구절들에서 ‘창녀’를, 어떤 때는 극빈층, 거지, 범죄자와 같은 부류로, 어떤 때는 왕, 관료, 교수, 군인, 사제 같은 부류로 분류한다.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전자의 분류는 성매매업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후자의 분류는 이 직업이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 파생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후자의 분류가 이 글의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하다. 맑스가 보기에, 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노동자만이 본질적으로 사회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계급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계급이고, 나머지 모든 계급들은 이로부터 파생하여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다.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파악에 이런저런 토를 다른 사람은 많지만, 나는 이보다 더 합리적인 이해를 알지 못한다. 또, 맑스는 과거에 노동이 아니었던 많은 업무들(특히 서비스업에서)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되어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개탄스러워했다.

   물론 어떤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어떤 직종이 노동자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기도 하다. 가령 비정규직 시간강사를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학졸업장은 마치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품인 것처럼 나타나며, 기업화된 대학에 고용된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마치 노동자처럼 보인다. 비정규직 시간강사 노조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맑스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지 않는가? 물론이다. 무슨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그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지극히 높기 때문에 더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가 되어서 소외된 노동을 하며 시간을 빼앗기느니, 교수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다소간 낮은 생활수준을 감수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약간의 재능을 발휘하려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동기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각종 고시, 전문직에 매달리는 것도 역시 같은 심리라고 봐야 한다. 성매매업을 이끌어가는 추동력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무슨 노동자 계급의 순수성 같은 것을 역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는 엄밀히 말해 노동자 계급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많은 노동조합들(예를 들자면, 공무원 노조라든가, 전교조라든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단체를 만들고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지, 궁극적으로 그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 자체라는 것이다. 즉, 여기서 나는 실재론적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계급이 만든 ‘노조’가 진짜 노조와 일반적인 경우에 같은 수준의 동력과 강도로 경제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가 딛고 있는 물질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노동자와 연대한다면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다 여유로운 입장에 있는 그들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러므로 보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다. 노동자들은 지금 당사자 투쟁을 하기에도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성매매업의 문제로 돌아와 말하자면,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이 차원에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성매매업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2. 성과 도덕

 

   성매매업은 파생적(노동자 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 직종이며, 업무 형태상으로 분류하자면, 소규모 자영업자와 마피아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성매매 여성과 포주의 관계는 금주법 시대의 마피아 조직원들과 보스의 관계와 가장 유사하다. 그들은 고용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야합한 관계에 속한다. 공창제가 발달한 나라라면 준공무원 같은 약간 다른 성질이 부여되기도 할 것이다. 강제된 성매매 같은 것은 여기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상품 판매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반적인 성매매업 형태의 최소공통분모는 자영업적 성격이니 일단 그것을 중심에 놓고 보도록 하자. 이 점에서 성매매업자들의 궁극적인 요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비록 노동자는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 연명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도 다른 업자들과 똑같은 영업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가 파는 상품만 그렇게 부도덕한 것으로, 심지어 불법적인 것으로까지 낙인찍혀야 하는가? 그러니 성매매금지법 철폐하고 우리의 상품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 달라.”

   이에 추가로, 성매매를 합법화하기 위한 몇 가지 행정적 조치들도 함께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가 금지된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된다는 조건 하에서이므로, 이들의 핵심적 요구는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 달라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성매매는 부도덕한가?’로 집중된다. 어떤 행위를, 아무런 맥락 없이 그 자체로만 고찰하여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위험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일단은 성매매를 둘러싼 조건들이 우리의 공통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 있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시켜 보도록 하자.

   이 경우,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쪽이 사용할 무기가 훨씬 많기 때문에 공세를 취하기가 쉽다. 현재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도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전술은, 계보학적 방법을 이용한 문화연구와 자연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등이다. 이런 방법들에 발생의 오류나, 자연주의의 오류 등등의 딱지를 붙이고 무시하는 것은 너무도 손쉽다. 이런 ‘실증적’ 방법들에 맞서 나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우리는 왜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느끼는가? 다음과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을 주고 성을 산다는 것은, 목적으로 대해야 할 인간을 성욕 해소의 수단으로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 그리고 그 교환 과정에서 성을 파는 쪽 역시,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상의 과정은 사후적 정당화에 가깝다. 이겨서 흥미로운 점은, 위와 같이 판단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상품을 교환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악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사실상 다른 인간을 오로지 가치증식의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한 개인의 발전이 다른 개인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사회를 구상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 타인을 수단으로서 대하는 측면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부모-자식 관계조차 자식이 살기 위해 부모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글의 관심사인 성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연인들 간의 성관계조차 어떤 면에서는 상대를 자신의 성적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관계가 “살아 있는 파트너로 즐기는 자위행위”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를 수단으로서‘만’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서도 대한다는 점에서 상품 교환과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기는 하지만, 조금 불충분하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내가 성매매가 악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사실 성매매는 일부 사람들(예를 들면 특정 종교의 광신도들이라든가)에게 주관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상관없이, 객관적, 일반적으로 ‘악’이라는 강한 말을 쓰기에는 너무도 미미한 악이다. 어떤 도덕적 판단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기법들은 대체로 이처럼 미미한 악을 표적으로 삼으며, 그런 한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통상적인 상황에서의 살인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진지한 학문적 시도 따위는 애초에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있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아무튼 이처럼 적당히 애매한 영역(이것이 성적인 영역과 많이 겹친다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다)이 온갖 이데올로기들의 전장이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 근거 없음, 애매함을 좀 더 밀고나가 보자. 근친상간의 금기는 어떤가? 이 금기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불가사의하다. 근친상간이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금지되어야 할 어떤 윤리학적 근거가 있는가? 여기서는 칸트의 정언명법도 효력을 잃는다. 빈약한 유전학적 설명은 더욱 쓸모없다. 이 지점에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그는 이 불가사의한 금기의 이유를 찾는 대신, 이 근거 없는, 다시 말해 무의미한 형식이 인간 사회의 토대이며 실체라고 주장했다. 근친상간의 금기가 자연과 문화 사이의 간극 그 자체라고 본 것이다. 이 전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헤겔주의적이다.

이후, 일부 동물들에게서 근친상간의 금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있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금기는 근친상간 말고도 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성매매가 이러한 성격을 가진 특수한 부도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도덕의 근거를 도덕 바깥에서 찾으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봉착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 좋은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에 근접하게 된다.

   덧붙여서, 계보학적, 역사주의적 접근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해두어야겠다. 그런 방법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사회의 구성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변해옴에 따라, 이 특정한 요소(예를 들면 가족이라든가)의 의미도 변천을 겪어왔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며, 그러므로 이를 영원한 형태로 생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등등. 일견 맑스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접근법은 사실 의미심장하게도 자기-논박적이다. 우선 맑스주의적 접근에서는, 역사에 계급투쟁이라는 변하지 않는 좌표축 있다. 그런데 이는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 하에서는 소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반드시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단절의 시간이 도래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철학은 물론 기독교의 유산이며,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언’과도 관련이 있다. 반면에 역사주의적 접근은 정말로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역사주의 자체는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역사주의는 역사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은폐하는 한에서만 성립한다. 그렇다면 역사주의야말로 현존하는 체제를 영원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 아닌가? 마치 기존의 맑스주의적 역사철학보다 더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는 역사주의가 그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실은 훨씬 더 보수적이라는 데에는 무언가 심오한 것이 있다.

   결국 성매매를 순수하게 도덕적인 관점에서 고찰했을 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성매매는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가? 예. 성매매가 큰 부도덕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딱 사랑 없는 성관계나 결혼만큼 부도덕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매매가 부도덕하게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성매매와 도덕에 대하여 구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매매가 부도덕하게 인식된다는 것만으로 가치 판단이 내려질 수는 없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작동한다. 전통적으로 도덕에 대한 좌파의 접근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혹은 어떠한 것이었어야 했는가? 좌파가 지배 계급의 도덕가들을 비난하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어느 시대나 같다. 지배 계급은 구체적인 문제와 추상적인 문제를 혼동한다. 지배 계급은 인민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물질적 토대를 재생산하면서, 인민이 부도덕하다고 단죄하려 하기 때문에 위선적이다. 은행을 터는 것이 범죄라면, 은행을 새로 짓는 것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범죄다. 이러한 접근은 도덕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는 접근법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도 같은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문제는 오늘날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게 잘 판단하다가, 성매매의 문제(를 비롯한 몇몇 문제들)가 되면 분별을 잃는다는 데 있다. 성노동 같은 부적절한 개념들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일부이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녀를 동정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회가 평균적인 인민에게 어떤 경제적 현실로 작용하느냐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정량화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맑스의 개념도 그러한 정량적 접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앞에서 나는 성매매의 궁극적 동기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평균적인 여성에게 얼마만큼의 성매매 유혹을 느끼게 하는지 묻는 것은 유효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는 이런 양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같은 조건에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데, 1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면, 그 1명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물론 이런 사회는 유지될 수 없겠지만)에서, 같은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를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는 1명의 여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상의 길고 방어적인 논의에서 내가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성매매에 관해 취했던, 혹은 취해야 했을 접근을 다시 한 번 세공했을 뿐이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진정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처럼 나 자신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길고 지루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심히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좌파가 정세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계급투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분석 능력을 상실했을 때, 좌파들의 혼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난다. 사회에 어떤 갈등 상황이 나타난다. 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매우 적절한 사례가 있다. 한 편에는 성매매특별법을 바탕으로 집창촌을 폐지하고 종국에는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세력들이 있다. 다른 한 편에는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하며 노동으로까지 인정해달라는 세력들이 있다. 매스컴에서 전자는 전여옥 같은 혐오스러운 수구 여성 정치인과, 제 구실은 못하고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여성가족부 등등으로 표상되고, 후자는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로 표상된다. 좌파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서 누구 편을 들어야할지 약간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적의 적을 지지하게 된다. 평소에 전자가 명백한 적이었으니, 그들이 하는 일에는 일단 반대하고 보면 되겠지, 하고 말이다. 즉, 지성이 아니라 감성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뭐라고 했는가? 평범한 의식에게는 경제적 실재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전도되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면 과학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성매매를 둘러싼 수많은 입장차이들 사이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것은 거의 없다.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차이들, 다시 말해 사회적 적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입장의 차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금지해야 하는가, 합법화해야 하는가, 그것이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 등등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 내의 치안 문제일 뿐이다. 치안과 정치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치안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회 내의 질서와 관련된 문제이고, 정치란, 치안에 앞서서 어떤 사회가 주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의 투쟁 상황에서, 치안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경우는 많다. 운동의 과제는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정확하게 정세를 파악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치안과 정치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성매매 여성의 생존권 문제도 좌파에게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문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했다.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요소들은 그들이 파는 상품의 가격에 추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하는 성매매 여성은 거의 대부분이어도, 공창제에는 그 여성들 중 많은 수가 반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매매가 국가에 의해 완전히 투명하게 관리되는 경우, 그들이 일반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어두운 영역이 완전히 사라져, 성매매업의 매력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자인 남자들은 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환영할 것이다. 경제적 본능은 어떤 부분에서 이처럼 정확하고 무섭다. 성매매를 할 수 없게 된 여성들은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로 고통 받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동일한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좌파가 단언해야 할 것은, 모든 인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를 타도하자는 보편적인 명제들뿐이다. 다시 말해 성매매 같은 특수한 문제들은 정치적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정확히 침묵하는 것도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역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정확한 타이밍에 능동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맑스가 청년 시절에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적 힘을 가지지 못한 좌파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무기는 진리였다. 좋았던 옛 시절은 가고, 오늘날의 혁명적 정치 운동은 침체기에 빠진 듯하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선미 중에서 진은 다른 두 가치에 비해 우월성을 지닌다. 진정한 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말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도, 선한 진실, 아름다운 진실 같은 말들은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세계에 대한 불확실한 지식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초기 인류에게 참과 거짓의 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흔적이 아직도 우리의 언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맑스의 이론이 무슨 심각한 학문적 반박을 받고 몰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읽히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주류 학계는 맑스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가?) 주류 학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박한 일반인들은 학계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맑스는 자본가-노동자 관계에만 너무 배타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갈등들, 예를 들자면, 인종, 젠더, 성소수자 같은 갈등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등등. 자본주의가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체제라는 것은 맑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맑스가 왜 그 고생을 해 가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단순화한 형태에서 고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양한 변화들, 현상들은 이 기본 틀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지, 결코 이 기본 틀을 반박하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를 끝장낼 수 있는 핵심적인 세력은 노동자 계급이다. 이는 맑스의 이론적 분석의 논리적 귀결이다. 지난 세기말부터 최근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착취를 끝장내겠다는 근본적이고도 ‘큰’ 각오로 임하지 않는 운동은 ‘작은’ 성취마저 이루어내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설령 이루더라도 오래 지켜낼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따라서 현실의 노동자 계급이 좌파들이 생각하는 그런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는 작금의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이성적으로, 즉 현실적으로 끌어낼 유일한 결론은, 혁명적 정치가 선배들이 낙관했던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운동을, 부정확한 현실 파악으로 방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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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20:53 2011/05/16 20:53

강박과 짜증 이겨내기.

from ... 2011/05/15 23:04

다시 책을 파기로 한 다음부터 부쩍 짜증이 늘었다.

 

  요즘 책을 읽는 나는 며칠 굶은 사람이 밥을 우겨 넣듯 우악스럽다. 사실은 차라리 병적 폭식과 비슷하다.(특히 소화가 안 되어 속이 더부룩해 진다는 점이.) 읽기가 좀 강박적이 되어 가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아니 그랬던 적이 있었나?

  그동안 뒤처진 것을 벌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요즘 지적인 자극을 꽤 받고 있다는 사실도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전과 비교했을 때 텍스트에 대한 내 태도 자체가 달라졌단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는 독서란 취미이고 휴식이었기 때문에, 어떤 절박함 같은 게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책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었고 나는 안전한 장소에서 책을 관전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책읽기는 사실 스킬이어서, 어떤 포인트를 어떻게 잡아서 윤색하면 있어 보이나 하는 것만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텍스트를 존경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홀대하는 사람들은 나 말고도 흔하긴 하다. 

 

  절박하게 혹은 절망적으로 읽기를 시도하면서 생긴 나쁜 버릇은 책을 자꾸 사들인다는 것이다. 사들인 책을 읽는 속도에 비해서 새 책을 사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 책값도 책값이지만, 이것은 결국 공간의 문제다. (좁아터진 방에 책을 쌓을 자리가 없어! 그런 의미에서, 킨들을 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요즘 나는 사둔 책도 다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빌린책을 다 읽기 전에 다른 책에 예약을 걸어두는 멍청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일단 읽던 책을 버려두고 다른 책을 뒤적이는 근성 부족한 버릇부터 고치고 블로그를 독서장으로 활용하자는 애당초의 결심부터 지켜야 하겠다. 짧게라도 그때그때 읽은 만큼 기록해야. 한줄글이나 인상비평이라도 기록해 두면서 좀 성취감을 느끼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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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23:04 2011/05/15 23:04

오늘 부르주아적 내면성 가족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종영은 화폐를 얻음으로써 부르주아가 어떤 불안을 회피하고자 한다고 말하는데 그 불안의 정체를 가족에서의 가부장적 향유에서 찾습니다. 이 가부장적 향유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우선 근대 부르주아 핵가족의 구성원리로서의 '사랑'이 전근대적 가족들에 비해 가진 해방적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밑인용문이 왠지 이종영스러워 옮겨 놓아봤습니다.

"공동체는 부부의 공동체적 귀속성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한계화하고 탈가치화한다. 공동체적 연대성에 비하면 개인적 사랑은 사소하고 시시한 것에 불과하고, 그리하여 개인적 사랑은 언제나 공동체적 연대성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사랑 없이 결혼한 자들이 사랑으로 맺어진 자들에 대해 행하는 피학-가학적 복수의 일종임은 물론이다. 희생자들이 승리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질서에 짓눌려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고립된 사랑의 승리자들에 대해 행하는 피학-가학적 복수"(96~97쪽)



그리고 근대 핵가족의 성차별적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인용도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역시 이종영스러워서...

"에릭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정은 전쟁의 세계 속에 있는 평화의 오아시스, 다시 말하면 전사의 휴식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중심주의', 즉 주인공과 동일시하려는 감정이입을 피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전사'는 어떤 악한 침입자들과 대결하는 정의의 전사가 아니다. (...) 그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리인 경쟁을 자기화하고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는 전사이다. 그는 남들을 제거하고 살아남기 위해 야비한 일들을 하고,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도대체 가족은 어떻게 하여 그에게 사회와 똑같은 전쟁의 무대가 아닐 수 있을까? 사회에서 그처럼 전쟁을 치르는 그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처럼 변화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이리였던 그가 집에서는 양이 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집에서는 이미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처럼 이해하면 된다. 남자들이 이미 여자들을 제합해 놓고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인다고. (...) 사회나 가족 둘 중의 하나를 이상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회와는 달리 가족에서는 전투가 이미 끝났다는 것, 그래서 규칙으로서의 공공성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110~111쪽, 강조는 저자.) 



가부장적 향유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맨마지막 문장이 이종영스럽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의 그러한 접합구조가 부르주아 가부장들에게 중요한 존재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여성적 사랑을 행하는 한에서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다. 가족 내에서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에 바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치욕이 가족을 위해 감수되는가?"(112쪽)



이런 가부장적 향유가 사실 상품에 대한 욕망보다 근본적임이 강조되는데 모든 상품형식은 여성성 형식이라는 재밌어뵈는 주장이 나옵니다.

"'여성성 형식'은 어디까지나 상품형식의 '모델'이기 대문이다. 즉 최고의 상품형식은 적어도 남성게게는 여성의 형식(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성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존재는 창녀이다. 상품들이 여성성 형식을 취하려고 노력하지만, 창녀는 그 자체가 여성으로서의 상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녀야말로 모든 상품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녀는 상품형식의 이상형이 결코 아니다. (...) 창녀는 오히려 최악의 상품형식이다. 상품형식은 여성성 형식을 모델로 삼지만, 여성 자체로서의 상품인 창녀는 결코 최상의 상품형식이 아니라 최악의 상품형식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찾아서 창녀에게로 가는 돌아오는 것은 '상품'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프랑스에서 창녀를 뜻하는 '쀠뗑(putain)'은 한국에서처럼 대표적 욕설일 수밖에 없다. 좌절의 원한이 담겨있는 욕설."(128~131쪽)



막간에 본인이 왜 정치의 대상을 '선'이 아닌 '정의'로 보는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여기서 '선'을 정치의 대상으로는 담론들이 반도덕의 외양을 한 도덕주의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항상 결론이 "깨어나세요. 주체여..."식으로 간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11.5/24 내가 밑줄)

"나는 정치의 이념적 대상을 정의로 규정한다."(138쪽)

"현실적 정치는 이념으로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이념의 허구 아래서 부정의를 비호한다. 바디우와 라자뤼스는 정치의 대상으로서의 정의가 허구적 이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제 정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지향할것을 주장한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치의 대상이 선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은 개인적 선택의 대상이고,정치적으로는 부과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46쪽)



일단 이종영은 부르주아적 내면성이라는 게 부르주아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이 부르주아적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의 거의 일반적 심성이라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편성을 부인하고 "나는 부르주아 '이상'의 존재야. (그걸 부르주아라고 깜으로써 확인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놈들을 볼셰비키적 내면성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이를 현실의 운동권이랑 곧바로 비교하면 그냥 그저그런 흔한 짜증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 이종영 이야기가 결국 그런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여튼 우리는 정승같이 써먹을 수도 있음. 

"볼셰비즘은 타자를 분류하고 낙인찍는 기계이다. 여러 가지의 형태의 이단들이 존재한다. (...) 이러한 모든 형태의 낙인들은 최종적으로 귀착되는 한 중심을 갖는다. '부르주아'라는 중심이 그것이다. (...) 낙인찍기의 효력은 혁명 이전, 혁명기, 혁명 이후의 세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혁명 이전의 낙인찍기는 정파간의 권력투쟁을 반영하는 것이고 운동으로부터의 배제로 귀결되는 것이겠지만, 타자를 '악'으로 규정짓고 자신을 '선'에 위치시키는 '도덕적' 향유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한 '도덕적' 향유는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을 살리려는 위선의 극단적 형태이다."(187~8쪽)


여기서 이종영의 부르주아라는 말의 (반半)개념적 지위에 대한 코멘트를 참조해봅시다. 이 님은 부르주아라는 말이 순전히 낙인찍기용이라 보진 않습니다.

"부르주아가 점하고 있는 위치란 어떤 것일까? 부르주아란 어떤 자들일까? '부르주아'라는 용어의 일상적 용법이 단지본가계급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학적 노동은 일상적 언어 용법과의 거리두기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르주아라는 용어의 일상적 용법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 설정된 노동자계급의 '적'의 범주에 대한 일종의 전(前)개념적 일상감각을 표현해 준다는 것이다. (...) 그러한 전개념적 일상감각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반면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전개념적 일상감각과 구분되는 계급의 개념이 엄밀한 과학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서 문제가 성립한다."(32~33쪽)


심지어 지금 한국에도 유행하는 낙인 떡밥 "부르주아"에 관한 이야기.

"낙인의 대상이 되는 행위양태는 낙인찍는 자 자신의 행위유형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인찍은 자는 낙인찍히는 자들의 내면을 샅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탄압은 가혹해진다. (...) 애초부터 모두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심지어 노동자계급 출신들도 말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노동자들도 그 자생적 행위에 있어서 부르주아적이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들이 서로를 부르주아적이라고 낙인찍는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당신은 부르주아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처럼 낙인찍힌 자는 그 말에 결코 항거할 수 없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이처럼 모두가 '원죄'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낙인은 단지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다."(188~9쪽)

이래서 이런 류 개싸움에서는 선빵이 중요. 나중에 말하는 놈은 무조건 '변명'처럼 들린다. 

이행 대안 미래를 타자비판을 통한 자기구원이라는 추상적 종교적 주체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간적인(휴머니즘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실존조건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관점에서 생각해볼 것을 주문하는 대목. 역시 마지막 문장이 이종영스러움.

"물론 이행은 변화를 요청한다. 이행의 두 핵심적 장소는 가족과 생산단위(공장과 회사)이다. 볼셰비키는 이행을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는 어떤 비(非)인간적 괴물의 탄생으로부터 사고하려 한다. (...) 필요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볼셰비키적 '강철'도 칸트적 초월성도 아니다. 다만 인생의 보잘것없음과 쓸쓸함에 대한 공감, 자기파괴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에의 배려'로 충분하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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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22:27 2011/05/15 22:27

사노넷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인터뷰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641

 

 

 


[정치]새로운 형태의 학생운동이 필요하다
<청년 사회주의자 1만인 선언> 인터뷰    
   

지난 3월22일, 한 진보넷 블로그(http://blog.jinbo.net/wethesocialists)에 ‘1만 사회주의자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참여를 제안합 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린 이들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합당국면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활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노신>은 4월18일, 사회주의자 선언을 제안자들의 회의가 진행되는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으로 찾아가 <청년 사회주의자 1만인 선언>이 어떻게 기획되고 운영되고 있는지 활동가들을 만나 알아보았다.

 

<청년 사회주의자 1만인 선언>에 대해 소개 부탁드린다
김연(이하 ‘연’) : <청년 사회주의자 1만인 선언(이하 ‘선언’)>을 기획하게 된 김연이라고 한다. 예전에 <다함께>에서 활동했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선언>을 하게 된 계기는 일단 학생운동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실제로 파편화 된 개인들이 기존의 단위조직으로 결합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주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변화된 학생사회의 패러다임에 맞춰서 어떤 형태의 조직이 유효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시작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단위 조직들의 문제점이라든지 한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선언을 통해서 지금의 패러다임에 맞는 학생운동의 형태를 구상해보고 싶다.

<선언>은 어떻게 결성되었나
연 : 처음 시작은 나랑 예찬씨랑 같이 얘기했던 게 있다. 기본적으로 탈정파적 구성 하에서 진보적 외연을 넓혀나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원래는 <사회주의를 꿈꾸는 명랑한 부랑자>라고 트위터 모임이 있었다. 그렇게해서 처음 예찬씨랑 만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도(생활도서관)에 와서 우리가 1만 사회주의자 선언 같은 걸 해 보면 어떻겠냐고 내가 제안을 먼저 했다. 그래서 박가분씨가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동의를 많이 해서 선언문을 작성해주셨고 그렇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3월 중순부터 굴러가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화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사례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연: 기존의 학생운동이 전체 운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면 지금의 학생이 갖는 조건은 이전의 학생이 갖는 조건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학생사회를 구성하는 성원 자체도 달라졌고 학생들이 놓여있는 물질적 조건 역시 크게 변화했다. 동시에 운동권의 게토화가 굉장히 강하게 일어났다. 이에 대한 인식을 해결하는 것도 우리의 숙제이다. 근본적으로는 학생이 더 이상 부유하는 계급이 아니라는 거다. 학생사회라는 커뮤니티 역시 급속도로 붕괴해왔다. 그것은 비단 운동권뿐만이 아니다. 학내자치 자체가 무너진 지금의 상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선언문을 보면 기존 운동단위들이 청년을 ‘동원’한다든지 청년문제를 배타적으로 여긴다는 내용이 있다. 기존 운동조직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나
연 : 기본적으로는 학생대중이 처해져있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런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시설노동자 문제를 통해서 노학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던 행진의 움직임이나 생활등록금이라는 문제를 통해 등록금운동을 배가하고자 했던 연세대 총학생회의 사례를 보면 기존의 운동권들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는 거다. 청년들이 처해있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 여전히 부재한 편이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공론장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기인할 때 더 큰 외연확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언>을 기획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라는 명칭을 썼는데 사회주의가 무엇이며 사민주의와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기존 사회주의 운동조직들의 견해와 유사한가
김예찬(이하 ‘찬’) :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여타 다른 단체들의 사회주의와 다른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한 거라기보다는 이를테면 우리가 처해있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익히 이야기하고 있는 사회주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어떤 식으로 그 이념성을 표출해야 하는지, 어떤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했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하고 어떻게 구별되는가의 문제와는 다른 것 같다.
사회주의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여러가지 전제나 기본적으로 얘기되어야 할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직은 어떤 조직에 대해서 ‘너희는 진짜 사회주의가 아니다’이런 식으로 얘기한 경우도 굉장히 많다.
최근에 나도 재밌는 일을 많이 겪었는데 ‘너는 개량이다, 우리는 사회주의다, 너는 사민주의자에 불과하다, 너희는 자유주의자 아니냐’ 이런 식으로 서로 그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일단 이런저런 조직들 중에서 어떤 사회주의가 옳으냐를 떠나서 청년들의 조건에서 익히 이야기되고 있는 사회주의라는 것이 우리 청년의 현실하고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글을 쓸 때도 이런 문제의식이 많이 반영되었다.

선언문에 보면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조직과는 문제의식에 대한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조직과 논의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인가
찬 : 여기 오신 분들이 조직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기존 조직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조직에서 느꼈던 소통의 부재라든가 막혀있는 유리천장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같은 이념을 가지고 같이 활동을 하는데. 젊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런 얘기가 있다.
20년 전 20대 때 운동하면서 짱 먹었던 사람들이 지금도 짱 먹고 있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조직 내에서 성장을 할 때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있다. 이를테면 청년들은 열심히 해야되고, 패기가 넘쳐야 되고, 좀 참신한 생각을 가져야 하고. 근데 막상 참신한 생각을 가지고 얘기를 하면 그것이 조직의 기풍과 맞지 않다고 쳐 내는 부분도 있다.
기존의 조직활동했던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조직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겐 기존 운동조직이 평소에 청년문제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서 거리감을 느껴질 수밖에 없게 한다. 물론 거리감을 완전히 좁히는 건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그렇게 느끼게 되는 측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소통의 문제같은 것들이 얘기된 것 같다.

<선언>을 띄우게 된 계기와 진보정당의 합당국면이 연관돼 있는 것 같다. 진보정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연 : 진보정당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지금의 합당국면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통합파들이 더 오른쪽으로 간 통합을 요구하는 건 굉장히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독자파라고 해도 하나의 독자파가 아니다. 독자파 내에도 굉장히 다양한 결이 있다.
그 중에는 민주노동당을 배제한 민주당과의 통합만을 이야기하는 독자파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한 국면에서 대부분 청년 학생들이 갖는 조직재생산에 대한 부분을 담보로 해서 보다 더 왼쪽에 있는 합법정당을 지향하고자 하는 게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논의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찬 : 2012년(대선)이 앞에 와 있는 국면이고 합당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내가 봤을 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진단을 해 보자면, 대학에 있다 보면 굉장히 여기저기 단체들의 포스터가 많이 붙는다. 대부분 흔히 NL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계파의 학생단체들, 새로 엄청나게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진 단체들의 것들이 많이 붙는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 단체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는 건 존경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2012년 앞두고 학생회나 이런 곳에 이 사람들이 개입을 해서 특정한 목적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우리같은 경우, 내가 고려대 학생인데 고려대에 여러가지 학생 행사들이 있고 기조들이 나온다. (그런데) 기조들이 이를테면 나는 진보신당 당원인데 진보신당 당원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조가 나올 때가 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분명한 설명 없이, 지금 이 상황에서 옳은 것이라는 식으로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어떤 두려움이 있냐면, 2012년이 됐을 때 합당이 진행되고 새로운 정당이 (출현하거나) 갈라졌을 때 그 때 상대적으로 세력이 왕성한 그런 진영에서 진보라는 가치를 독점하면서 그것을 계속 재생산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진보가 아니라 왜 사회주의냐고 했을 때 사회주의가 가지는 명확한 이념성이나 사회주의적인 가치를 뭉뚱그려서 진보라고 이야기되는 그런 것 말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주의란 이념적인 가치를 선언을 함으로써 거기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지고, 이러한 진보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란 이념 자체가 존재한다는 걸 자체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제안을 할 때 개인뿐만 아니라 <전국학생행진>이나 <사노위> 같은 단체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기존 정치단위와 같이 할 생각이 있는지, 같이 한다면 어떤 정치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연 : 깔끔하게 범PD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NL도 되면 좋은데 거기까지는 손이 안 닿는지라 일단 염두에서 제외해놨는데 범PD 진영이랑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
박가분(이하 ‘분’) : 사회주의라는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조직을 떠나서 누구든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사회주의라는 가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은데 앞으로의 모임 속에서 마련해나가야 할 과제인가
분 : 사회주의라는 게 나는 어떻게 이해를 하냐면, 명확하게 까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노동의 분할이라든지 사람과 사람간의 위계질서라는 게 전혀 필연적이지 않고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국가가 폐지되어야 하고 자본이 사회화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본적인 부분에 있어 명확한 이념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이념이 구체적인 국면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대중한테 그 이념을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패러프레이즈 해야할 지를 고민하는 와중에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기존 조직의 관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이전에도 훌륭한 사회주의자들도 있고 사회주의 조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청년 사회주의자 선언을 개개인들이 모여서 하게 된 것이다.
찬 : 나는 그 동안 사회주의라는 게 억압돼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회주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합법정당 테두리 내에서 진보랑 뭉뚱그려서 되게 애매하게 민족주의적 가치도 들어가 있고 우파적인 자유주의적 가치도 들어가 있는 진보로 항상 이야기를 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결국 폐지되어야 한다 혹은 자본가, 자본주의적인 게 폐지되고 자본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힘든 부분이었다고 한다면 그걸 앞으로 좀 더 명확하고 공공연하게 계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에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민주주의적인 자기 권리에 대해 20대 대학생들, 청년들의 의식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학습모임을 꾸린다든지 이를 통해서 집회에 참여하고 스스로 저항의 주체가 되려는 노력이 많이 보인다. <선언>도 2008년 촛불시위 이후의 사회적인 흐름 속에서 이런 고민이 더 구체화된 것인가
연 : 나는 촛불을 평가하면서 몇 가지 갈리는 부분이 있다. 촛불의 대중동원력이나 연인원은 굉장히 괄목할 만한 것이었고 지역에서 자생적인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 낸 것 역시 촛불의 거대한 성과이고 동시에 촛불이 이루어 낸 의식의 급진적 변혁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촛불의 한계가 있다. 촛불 당시에 급진적인 좌파 조직들이 외연 확장을 정말 잘 못했다. 실제로 남은 부분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조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 문제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제로 수원촛불이나 강남촛불 같은 경우도 계속 보고 있는데 촛불 이후 일어난 자생적인 움직임이 반드시 사회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민란(문성근의 백만민란운동) 같은 조직의 성장세를 보면 촛불 이후로 능동성을 갖게 된 대중이 반드시 사회주의로 올 것이라고 단정지어서 얘기할 수 없고 그렇다면 우리가 변화해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외연을 넓혀나가야 될 것이냐, 지금 우리에게 명백히 한계와 문제점이 있고 이 한계와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위해서도 지금 구상을 하고 있다.
사회변혁운동에서 청년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분 : 청년이라고 해서 더 급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상 촛불시위라는 집단적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더 그런 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촛불시위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한 것은 아니다. 100만 명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고. 촛불을 보고 집단적인 방식에 대해서 더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수치화되거나 계량화되거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과도한 기대를 가지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결정적인 순간, 변혁의 결정적인 정세가 올 때 들고 일어날 수 있지만 거기서 청년이라고 해서 따로 청년이 변혁운동에 있어서 더 잘 나갈 수 있다라든가 더 앞으로 좌파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하지만 지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87년 민주화 이후에 90년대 들어오면서 좌파운동단체들, 조직이나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들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노령화된 것은 사실이다. 노조도 그렇고, 노조만 보더라도 40대, 50대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도부에 많고 이런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에는 20년 후에 30년 후에 여기에 지금 있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해야 된다는 건 자명한 일인데 그 때를 대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네트워크를 가지고. 옛날처럼 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내가 무슨 학생회에 있고, 아님 무슨 단체에 있고’이러면 ‘아, 이 놈이 그 놈이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아니다, 지금은. 워낙 파편화 돼 있고 연락도 잘 안 되고 서로 잘 모르고. 그런 걸 만들어 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찬 : 나도 딱히 청년에게 주어진 큰 사명 혹은 역할 같은 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옆에서 지켜보면 조직이든 뭐든 간에 재생산을, 현장에서 최전선에서 재생산의 역할을 떠맡는 사람들이 청년이란 생각을 한다. 사람들한테 지금은 어떤 이념이나 그런 것들이 많이 퇴색해가고 있는 시대이다. 청년들한테 이념이 가지고 있는 매력, 혹은 이념을 통해서 내가 주체화 될 수 있는 경험의 장들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고 심지어 남아있는 조직 내에서도 오히려 이념에 대한 환멸이나 불신같은 걸 경험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운 위험이 많이 있게 되었는데 그런 경향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청년들을 호명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 : 전통적으로 어떤 운동에서나 청년층이 제일 거리에 많이 나온다. 실제로 조직의 간부재생산을 위해서도 청년 단위에서의 기층조직을 꾸준하게 꾸리는 것이 안정적인 조직의 운영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그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거다. 전체 기간대오의 숫자도 굉장히 많이 줄어들었다. 실질적으로 조직들이 갖는 외연 역시도 이전에 비해서 굉장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원인이 학생사회의 붕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여전히 조직재생산을 위해서 유효한 단위이기 때문에 이들을 묶어낼 수 있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걸 다 같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앞으로 모임의 전망이나 활동계획은 어떠한가
찬 : 나는 조직을 또 만들거나 이런 건 불가능 할 거라고 본다. 왜냐면 각기 사실 활동하는 단위들이 또 따로 있으니까, 꼭 이제 좌파조직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네트워크 식으로 어떠한 생각이 있을 때 서로 연락 돌려가지고 이런 거 같이 해 보자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만 많이 만나더라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걸(선언) 논의하다가 곁다리는 아닌데 좀 이상하게 먼저 뭐 한 게 있다. 진보신당 당 대회 때 ‘청년학생당원 100인’이라고 해서 요구안을 만들어가지고 냈던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진보신당 안에 청년 당원들이 많고 좌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걸 100인 선언을 통해서 (확인했다).
현재 같은 당원이지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엄청 많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걸 또 어떤 조직으로 당장 만들기 보다는 서로 만나는 사람들의 접촉면이 많아질수록 여기서 또 다른 어떤 사회적인 기획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조직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그런 거다. 그런 걸 원하고 그걸 한 거다.
근데 여기에 대해서도 똑같이 많이 참여를 하고 이름을 알게 되고 얼굴을 알게 되고 다른 집회장소에 나가서도 만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그 때 그 사람하고 더 친해지고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또 다른 기획을 만들거나 아니면 조직을 만들고 싶으면 만들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식으로 하는 어떤 전(前)단계라는 것으로 의미를 두고 싶다.


인터뷰|김성렬 (tjdfuf@jinbo.net)
정지원 (jeewon@jinbo.net)
정리|김재영 (hedwig@jinbo.net)

 

 
1만 사회주의자 선언 까페 :  http://cafe.naver.com/wethesocia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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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22:20 2011/05/15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