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nightoftheworld.tistory.com/23
동의하기 때문에 퍼온 것은 아니다. 노동가치설과 노동자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닌데(그거야말로 내가 침묵해야 할 지점이고), 보편문제가 아닌 특수문제에침묵함으로서 정치적 진리가 드러난다, 는 부분에서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두고 읽어보며 다시 생각하려고 스크랩.
슈리(aeongomdol)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 글은 매우 한정된 독자를 상대로 쓰였다. 이 글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성매매 문제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혼란들을 줄이는 데 일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이 글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가치 판단이나, 개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나는 이 글이 ‘여성’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관례상 성매매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성매매업의 사회적 성격을 다루는 글의 첫 부분에서는 어색하게 ‘성매매업자’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이것이 전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과거부터 페미니스트 진영 내부에서도 성매매에 관한 시각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다. 그것은 나에게 이 문제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아무튼 나의 의도와 다르게, 이 글의 내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더욱 명료하게 쓰지 못한 탓일 것이므로, 양해를 구한다.
1. 성노동이라는 것이 있는가?
성매매에 관한 논쟁들은 성매매가 노동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노동’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나는 맑스의 견해를 참조할 것이다. 이는 신 존재 증명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안셀무스와 칸트를 참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며, 이 문제에 관하여 인식적 가치가 있는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이러한 현상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
맑스는 성매매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혼과 매춘에 관한 『공산당선언』의 그 유명한 구절(부르주아적 결혼 제도 자체가 이미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매춘이라는 내용)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여기서는 그 구절을 일단 도외시하기로 하자. 『선언』은 문학성을 위하여 수사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애매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구절들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려고 하면 과거의 해체주의 학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끝없는 텍스트 해석 논쟁에 빠져들 수도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참조해야 할 것은 노동과 계급에 대한 맑스의 전반적인 생각들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맑스는 거의 모든 경우 ‘노동’이라는 말을 ‘임노동’의 준말로 쓴다. 임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것이며, 한 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점한 결과 다른 한 계급은 살기 위해 노동력밖에는 팔 것이 없어진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이로부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양대 계급이 나온다. 이것이 노동에 대한 맑스의 규정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맑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사회적 실재의 메커니즘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통해 어떤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직관에 잘 와 닿지 않으므로,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시점에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노동자들보다 약간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그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고 역겨운 망상이지만, 만약 그 자본가가 높은 교육수준 덕택에 언변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본가는 자기가 하고 있는 ‘노동’이 어째서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지, ‘노동’의 여러 속성들을 거론하며 신학적, 형이상학적 논변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노동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자본가의 망상, 더 정확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면, 맑스처럼 노동 개념을 규정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어떤 직업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직업 종사자들의 주관적 느낌에 근거한 자기 보고 따위가 아니라 해당 직업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다.
성매매는 노동인가? 라는 질문은 성매매가 임노동의 일종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인식적 가치도 없다(그래서 주로 감정싸움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시 정확하게 물어보자. 성매매는 임노동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성매매업자는 노동력이 아니라 성이라는 상품을 판다. 간혹 논자들 중에 성매매업자도 노동력을 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노동과 노동력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성이라는 상품의 구매자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성은 필수품과 반대되는, 일종의 사치품(도대체 이 상품은 누가 생산한 것일까?)에 가깝다. 사치품의 구매는 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얻은 부르주아들과, 밑에서 그 잉여가치의 부스러기를 받아먹은 다른 계급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력 가치(노동자의 자기 재생산에 소요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만큼의 가치)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을 받는다면, 드물지만 노동자가 사치품의 구매자가 될 때도 있다. 성매매를 성노동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 중에 성매매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근거를 들고 나오는 이들은, 오히려 그 근거가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는 데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성매매업자의 계급적 성격이 어떤 것이며, 그들의 소득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 문제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함께 숙고해볼만한 충분한 자료들을 던져주고 있다. 맑스는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양대 계급을 제외한 사회의 다른 계급들을 다루는 몇몇 구절들에서 ‘창녀’를, 어떤 때는 극빈층, 거지, 범죄자와 같은 부류로, 어떤 때는 왕, 관료, 교수, 군인, 사제 같은 부류로 분류한다.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전자의 분류는 성매매업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후자의 분류는 이 직업이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 파생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후자의 분류가 이 글의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하다. 맑스가 보기에, 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노동자만이 본질적으로 사회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계급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계급이고, 나머지 모든 계급들은 이로부터 파생하여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다.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파악에 이런저런 토를 다른 사람은 많지만, 나는 이보다 더 합리적인 이해를 알지 못한다. 또, 맑스는 과거에 노동이 아니었던 많은 업무들(특히 서비스업에서)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되어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개탄스러워했다.
물론 어떤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어떤 직종이 노동자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기도 하다. 가령 비정규직 시간강사를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학졸업장은 마치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품인 것처럼 나타나며, 기업화된 대학에 고용된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마치 노동자처럼 보인다. 비정규직 시간강사 노조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맑스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지 않는가? 물론이다. 무슨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그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지극히 높기 때문에 더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가 되어서 소외된 노동을 하며 시간을 빼앗기느니, 교수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다소간 낮은 생활수준을 감수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약간의 재능을 발휘하려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동기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각종 고시, 전문직에 매달리는 것도 역시 같은 심리라고 봐야 한다. 성매매업을 이끌어가는 추동력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무슨 노동자 계급의 순수성 같은 것을 역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는 엄밀히 말해 노동자 계급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많은 노동조합들(예를 들자면, 공무원 노조라든가, 전교조라든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단체를 만들고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지, 궁극적으로 그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 자체라는 것이다. 즉, 여기서 나는 실재론적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계급이 만든 ‘노조’가 진짜 노조와 일반적인 경우에 같은 수준의 동력과 강도로 경제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가 딛고 있는 물질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노동자와 연대한다면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다 여유로운 입장에 있는 그들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러므로 보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다. 노동자들은 지금 당사자 투쟁을 하기에도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성매매업의 문제로 돌아와 말하자면,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이 차원에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성매매업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2. 성과 도덕
성매매업은 파생적(노동자 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 직종이며, 업무 형태상으로 분류하자면, 소규모 자영업자와 마피아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성매매 여성과 포주의 관계는 금주법 시대의 마피아 조직원들과 보스의 관계와 가장 유사하다. 그들은 고용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야합한 관계에 속한다. 공창제가 발달한 나라라면 준공무원 같은 약간 다른 성질이 부여되기도 할 것이다. 강제된 성매매 같은 것은 여기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상품 판매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반적인 성매매업 형태의 최소공통분모는 자영업적 성격이니 일단 그것을 중심에 놓고 보도록 하자. 이 점에서 성매매업자들의 궁극적인 요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비록 노동자는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 연명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도 다른 업자들과 똑같은 영업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가 파는 상품만 그렇게 부도덕한 것으로, 심지어 불법적인 것으로까지 낙인찍혀야 하는가? 그러니 성매매금지법 철폐하고 우리의 상품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 달라.”
이에 추가로, 성매매를 합법화하기 위한 몇 가지 행정적 조치들도 함께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가 금지된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된다는 조건 하에서이므로, 이들의 핵심적 요구는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 달라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성매매는 부도덕한가?’로 집중된다. 어떤 행위를, 아무런 맥락 없이 그 자체로만 고찰하여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위험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일단은 성매매를 둘러싼 조건들이 우리의 공통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 있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시켜 보도록 하자.
이 경우,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쪽이 사용할 무기가 훨씬 많기 때문에 공세를 취하기가 쉽다. 현재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도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전술은, 계보학적 방법을 이용한 문화연구와 자연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등이다. 이런 방법들에 발생의 오류나, 자연주의의 오류 등등의 딱지를 붙이고 무시하는 것은 너무도 손쉽다. 이런 ‘실증적’ 방법들에 맞서 나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우리는 왜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느끼는가? 다음과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을 주고 성을 산다는 것은, 목적으로 대해야 할 인간을 성욕 해소의 수단으로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 그리고 그 교환 과정에서 성을 파는 쪽 역시,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상의 과정은 사후적 정당화에 가깝다. 이겨서 흥미로운 점은, 위와 같이 판단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상품을 교환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악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사실상 다른 인간을 오로지 가치증식의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한 개인의 발전이 다른 개인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사회를 구상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 타인을 수단으로서 대하는 측면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부모-자식 관계조차 자식이 살기 위해 부모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글의 관심사인 성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연인들 간의 성관계조차 어떤 면에서는 상대를 자신의 성적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관계가 “살아 있는 파트너로 즐기는 자위행위”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를 수단으로서‘만’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서도 대한다는 점에서 상품 교환과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기는 하지만, 조금 불충분하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내가 성매매가 악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사실 성매매는 일부 사람들(예를 들면 특정 종교의 광신도들이라든가)에게 주관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상관없이, 객관적, 일반적으로 ‘악’이라는 강한 말을 쓰기에는 너무도 미미한 악이다. 어떤 도덕적 판단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기법들은 대체로 이처럼 미미한 악을 표적으로 삼으며, 그런 한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통상적인 상황에서의 살인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진지한 학문적 시도 따위는 애초에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있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아무튼 이처럼 적당히 애매한 영역(이것이 성적인 영역과 많이 겹친다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다)이 온갖 이데올로기들의 전장이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 근거 없음, 애매함을 좀 더 밀고나가 보자. 근친상간의 금기는 어떤가? 이 금기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불가사의하다. 근친상간이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금지되어야 할 어떤 윤리학적 근거가 있는가? 여기서는 칸트의 정언명법도 효력을 잃는다. 빈약한 유전학적 설명은 더욱 쓸모없다. 이 지점에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그는 이 불가사의한 금기의 이유를 찾는 대신, 이 근거 없는, 다시 말해 무의미한 형식이 인간 사회의 토대이며 실체라고 주장했다. 근친상간의 금기가 자연과 문화 사이의 간극 그 자체라고 본 것이다. 이 전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헤겔주의적이다.
이후, 일부 동물들에게서 근친상간의 금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있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금기는 근친상간 말고도 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성매매가 이러한 성격을 가진 특수한 부도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도덕의 근거를 도덕 바깥에서 찾으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봉착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 좋은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에 근접하게 된다.
덧붙여서, 계보학적, 역사주의적 접근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해두어야겠다. 그런 방법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사회의 구성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변해옴에 따라, 이 특정한 요소(예를 들면 가족이라든가)의 의미도 변천을 겪어왔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며, 그러므로 이를 영원한 형태로 생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등등. 일견 맑스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접근법은 사실 의미심장하게도 자기-논박적이다. 우선 맑스주의적 접근에서는, 역사에 계급투쟁이라는 변하지 않는 좌표축 있다. 그런데 이는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 하에서는 소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반드시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단절의 시간이 도래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철학은 물론 기독교의 유산이며,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언’과도 관련이 있다. 반면에 역사주의적 접근은 정말로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역사주의 자체는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역사주의는 역사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은폐하는 한에서만 성립한다. 그렇다면 역사주의야말로 현존하는 체제를 영원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 아닌가? 마치 기존의 맑스주의적 역사철학보다 더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는 역사주의가 그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실은 훨씬 더 보수적이라는 데에는 무언가 심오한 것이 있다.
결국 성매매를 순수하게 도덕적인 관점에서 고찰했을 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성매매는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가? 예. 성매매가 큰 부도덕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딱 사랑 없는 성관계나 결혼만큼 부도덕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매매가 부도덕하게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성매매와 도덕에 대하여 구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매매가 부도덕하게 인식된다는 것만으로 가치 판단이 내려질 수는 없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작동한다. 전통적으로 도덕에 대한 좌파의 접근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혹은 어떠한 것이었어야 했는가? 좌파가 지배 계급의 도덕가들을 비난하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어느 시대나 같다. 지배 계급은 구체적인 문제와 추상적인 문제를 혼동한다. 지배 계급은 인민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물질적 토대를 재생산하면서, 인민이 부도덕하다고 단죄하려 하기 때문에 위선적이다. 은행을 터는 것이 범죄라면, 은행을 새로 짓는 것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범죄다. 이러한 접근은 도덕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는 접근법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도 같은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문제는 오늘날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게 잘 판단하다가, 성매매의 문제(를 비롯한 몇몇 문제들)가 되면 분별을 잃는다는 데 있다. 성노동 같은 부적절한 개념들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일부이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녀를 동정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회가 평균적인 인민에게 어떤 경제적 현실로 작용하느냐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정량화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맑스의 개념도 그러한 정량적 접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앞에서 나는 성매매의 궁극적 동기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평균적인 여성에게 얼마만큼의 성매매 유혹을 느끼게 하는지 묻는 것은 유효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는 이런 양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같은 조건에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데, 1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면, 그 1명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물론 이런 사회는 유지될 수 없겠지만)에서, 같은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를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는 1명의 여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상의 길고 방어적인 논의에서 내가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성매매에 관해 취했던, 혹은 취해야 했을 접근을 다시 한 번 세공했을 뿐이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진정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처럼 나 자신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길고 지루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심히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좌파가 정세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계급투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분석 능력을 상실했을 때, 좌파들의 혼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난다. 사회에 어떤 갈등 상황이 나타난다. 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매우 적절한 사례가 있다. 한 편에는 성매매특별법을 바탕으로 집창촌을 폐지하고 종국에는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세력들이 있다. 다른 한 편에는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하며 노동으로까지 인정해달라는 세력들이 있다. 매스컴에서 전자는 전여옥 같은 혐오스러운 수구 여성 정치인과, 제 구실은 못하고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여성가족부 등등으로 표상되고, 후자는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로 표상된다. 좌파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서 누구 편을 들어야할지 약간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적의 적을 지지하게 된다. 평소에 전자가 명백한 적이었으니, 그들이 하는 일에는 일단 반대하고 보면 되겠지, 하고 말이다. 즉, 지성이 아니라 감성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뭐라고 했는가? 평범한 의식에게는 경제적 실재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전도되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면 과학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성매매를 둘러싼 수많은 입장차이들 사이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것은 거의 없다.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차이들, 다시 말해 사회적 적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입장의 차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금지해야 하는가, 합법화해야 하는가, 그것이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 등등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 내의 치안 문제일 뿐이다. 치안과 정치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치안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회 내의 질서와 관련된 문제이고, 정치란, 치안에 앞서서 어떤 사회가 주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의 투쟁 상황에서, 치안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경우는 많다. 운동의 과제는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정확하게 정세를 파악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치안과 정치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성매매 여성의 생존권 문제도 좌파에게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문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했다.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요소들은 그들이 파는 상품의 가격에 추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하는 성매매 여성은 거의 대부분이어도, 공창제에는 그 여성들 중 많은 수가 반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매매가 국가에 의해 완전히 투명하게 관리되는 경우, 그들이 일반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어두운 영역이 완전히 사라져, 성매매업의 매력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자인 남자들은 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환영할 것이다. 경제적 본능은 어떤 부분에서 이처럼 정확하고 무섭다. 성매매를 할 수 없게 된 여성들은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로 고통 받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동일한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좌파가 단언해야 할 것은, 모든 인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를 타도하자는 보편적인 명제들뿐이다. 다시 말해 성매매 같은 특수한 문제들은 정치적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정확히 침묵하는 것도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역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정확한 타이밍에 능동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맑스가 청년 시절에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적 힘을 가지지 못한 좌파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무기는 진리였다. 좋았던 옛 시절은 가고, 오늘날의 혁명적 정치 운동은 침체기에 빠진 듯하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선미 중에서 진은 다른 두 가치에 비해 우월성을 지닌다. 진정한 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말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도, 선한 진실, 아름다운 진실 같은 말들은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세계에 대한 불확실한 지식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초기 인류에게 참과 거짓의 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흔적이 아직도 우리의 언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맑스의 이론이 무슨 심각한 학문적 반박을 받고 몰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읽히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주류 학계는 맑스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가?) 주류 학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박한 일반인들은 학계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맑스는 자본가-노동자 관계에만 너무 배타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갈등들, 예를 들자면, 인종, 젠더, 성소수자 같은 갈등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등등. 자본주의가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체제라는 것은 맑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맑스가 왜 그 고생을 해 가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단순화한 형태에서 고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양한 변화들, 현상들은 이 기본 틀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지, 결코 이 기본 틀을 반박하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를 끝장낼 수 있는 핵심적인 세력은 노동자 계급이다. 이는 맑스의 이론적 분석의 논리적 귀결이다. 지난 세기말부터 최근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착취를 끝장내겠다는 근본적이고도 ‘큰’ 각오로 임하지 않는 운동은 ‘작은’ 성취마저 이루어내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설령 이루더라도 오래 지켜낼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따라서 현실의 노동자 계급이 좌파들이 생각하는 그런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는 작금의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이성적으로, 즉 현실적으로 끌어낼 유일한 결론은, 혁명적 정치가 선배들이 낙관했던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운동을, 부정확한 현실 파악으로 방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돌봄노동의 경제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 필요.
끔찍한 글이군요.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 성매매 논의의 쟁점(제가 생각하는)에 대한 무지, 법제화에 대한 불신, 노동운동(또는 [경제적] 계급투쟁)에 대한 잘못된 맹목 등이 합쳐지면 이런 글이 나오나 보다 싶습니다.
덧) 제가 이런 불쾌함을 갖는 것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적어야 할 테지만, 당장은 시간이 없고, 또 아침에 출근해 이 글을 보는데 너무 기분이 나빠 이렇게 짧게만 남기고 갑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길.
저야 퍼온 사람일 뿐이니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지요. 원글에 트랙백을 걸어 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원글자에게 질문해야할텐데...
음.. 우선 1번에서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한데,
'마르크스가 언급한 노동'=임노동 -> 생산노동 이외는 임노동이 아니다
로 뛰어넘어 버리네요. 그리고 마르크스를 들먹이자면 유통자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도 임노동 관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말이죠.. 생산부문이냐 생산노동이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분배해가는 부문이냐의 구분은 필요하겠지만,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만 노동자라는 주장은 섬찟하네요..
그리고, 1번에서는 노동과 노동아닌 것을 구분하며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논증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하면서, 2번에서는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논증을 하고 있네요. 결국 결론은 성매매를 하지 않는 여성을 존경해야 한다가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운운하면서 부르주아 도덕을 자기 근거로 삼는 건 무슨 궤변인지... 같은 논리라면 100명 중 99명이 임노동관계에서 착취당할 때 1명이 그 관계에서 자유롭다면 그 1명을 존경해야 한다가 되겠네요. 개인을 사회와 분리시키는 자유주의적 접근인데다가, 애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전제하는 형이상학은 부르주아 철학의 표본이겠죠..
그리고 역사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근거도 궁금해지네요.. 통념적인 근대에 더 가까운 것은 역사의 종언이지 않나 싶은데요..
3번에 가서는, 선한 진실, 아름다운 진실.. 언어의 뉘앙스를 가지고 자기 논리를 증명하려고 하는군요. 헛웃음이 나오네요. 이 사회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뭔가 어색하게 받아들여지니 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겠군요. 거 참..
애초 전제부터가 엉망이니 뒤에 가서는 뭐라 더 이야기할 것도 없지만, 한심합니다.. 이런 사람이 스스로를 좌파라 칭하면서 다른 좌파를 계도하려 들다니..
저는 경제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무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다만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관점에 대한 불편함은 청 님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칸트를 언급하다가 성매매가 큰 부도덕이 아니다-로 넘어가는 지점이 지나치게 거칠기도 하고요.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데, 성매매를 여성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돌리려는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99명과 1명 을 언급하는 부분은, 좌파적 관점에서 개인의 도덕성을 판별할 때 사회 구조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애초에 성매매가 별로 큰 부도덕도 아니라면 왜 성매매를 거부한 여자를 존경씩이나 해야 하는 건가; 라는 지엽적인 딴지는 걸 만 하지만;) 하지만 임노동관계에서 착취당하는 건 사실상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성매매는 여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실존적 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면이 있어서 저도 불편하긴 합니다.
저 역시 원글자에게 질문 내지는 항의하고 싶습니다만, 여성주의 진영에서 성매매에 대한 견해가 갈린다고 그것이 성매매가 전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신호가, 도대체, 어째서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글쓴이의 생각에 '여성'이라는 것이 타자로서라도 존재가 가능한지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이 글이야말로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하는 '현상에 대한 기술'과 가장 닮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글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인과의 운동을 밝혀야 하지 않던가요? 오히려 "이들[성매매 여성]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했다."와 같은 현상 진술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가 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하나만 덧붙이자면 성매매 여성들이 공창제에 반대하는 이유는 전혀 그런 '수입 감소' 때문이 아닙니다. 애초에 공창제를 한다고, '투명화'가 된다고 수입이 감소한다는 것조차, 오늘날 성매매에 대한 단속이 더욱 강화되어 성매매 여성들이 음지에서 불안정한 수입에 의존해야 하고, 그마저도 포주에게 빼앗기는 실정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전제입니다.
성매매가 여성주의 의제라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고, 성매매 여성들이 대다수 공창제에 반대하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일단 성매매 여성들이 공창제에 반대한다는 전제 자체가 크게 맞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었을 당시 공창제를 요구하던 성매매 여성들의 집단행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실정은 아니고 성매매를 금지하는 나라에서 흔히 있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이 숫자가 원글 작성자의 주장대로 '많은 수'가 아닌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창제에 반대하는 성매매 여성들이 있으며, 거기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공창제가 실행될 경우 자신들이 성매매를 했다는 기록이 공적으로 남을까봐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맑스는 자본 제1권 제6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동력이 아닌 다른 상품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예컨대 원료, 노동도구 등]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가죽 없이는 장화를 만들 수 없다. 그 외에도 그는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노동력과는 달리 성이라는 상품은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다른 원료나 노동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이라는 상품의 소유자의 경우에는 원료(육체)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화폐소유자가 구매하는 상품은 이미 죽은 노동이며, 타인의 노동의 응고물입니다. 그러나 성을 구매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일정시간 동안의 판매자의 성에 대한 점유권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력의 실질적 소유자는 노동자이지만 자본가가 그의 노동력을 점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매매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포주가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포주는 성판매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판매자의 수입의 일부를 갈취하는 것입니다. 임대료나 사용료의 명목으로. 원래 포주를 의미하는 pimp란 말은 알선하다, 뚜쟁이, 가로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제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글입니다. 진보블로그에도 게시가 되었네요... 저는 이 글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보고 판단해야할지 정말 잘 모르겠어서 의견 가지신 분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비판을 개진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막상 원글에는 댓글하나 달리지 않으니 참 기이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원글에 댓글달려 보니 로그인을 해야하더라구요.. 음
그랬군요. 그것도 하나의 문턱인듯;
제가 조금 더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저는 다른 분들의 비판도 상당부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슈리님의 글이 오히려 성매매보다 더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150년 전의 맑스의 관점으로 지금의 사회를 본다면 어떤 분석이 가능할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무형의 상품들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이에 따라 부수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입니다. 그래서 돌봄노동이나 감정노동과 같은 신종용어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사실 저는 불만입니다. 이를테면 돌봄노동이나 백화점 직원, 항공기 승무원들이 하는 감정노동이라는 용어를 들으면 마치 구매자와 판매자가 직거래를 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육아를 위해 타인을 부르고 시간당 봉사료를 지불한다고 했을 때, 절대 이 두사람은 직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광고를 통하거나 하는 식으로 업체를 선정하고 상품을 고른 뒤 업체에 연락을 하면 노동자가 옵니다. 그랬을 때 이 누군가가 구매하는 상품은 돌봄노동보다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노동이 집약된 상품입니다. 감정노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사든, 비행기안에서 주스를 달라고 하든, 이 누군가는 감정노동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상품을 구매하는겁니다. 감정노동은 판매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혹은 판매의 촉진을 위해 수행하는 부수적 노동일 뿐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은 화장품 구매나 항공권 구입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노동때문에 엄청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실증적 영미학문에서는 감정노동이 전면에 나오고 소비자들은 감정노동을 구매하는 것처럼 포장합니다. 그렇게 보이니까. 하지만 직원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거나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처럼 무형의 상품 판매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서 성노동이라는 개념도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성매매여성은 성노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강남역의 어느 한 카페 사장도 건물 소유주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토지 소유자가 임대료를 가져가는겁니다.
명쾌한 말씀이네요. 저는 그러한 포괄적인 질문이 '성매매'라는 매우 다루기 어려운, 또 다루는데 있어 극도의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주제를 경유해서 던져진 것에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해 모종의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저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쩌면 당연하기까지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제 제가 트위터에서 소위 제기된 '비판'이라는 것들은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인신공격이나 인상비평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건질게 별로 없었거든요.
그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아냥만 거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글의 형태로 누가 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 감각하고 있으려니까 답답합니다. 물론 여기 진보블로거 분들은 위에서도 어느정도 자신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개진하신바 그 답답함이 조금 풀리네요.
조금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T.T 이 글이 트위터에서 엄청난 비판을 당했다면, 거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냥 제 짐작으로는 성매매여성의 생존권 문제까지 결코 방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저도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매매여성의 생존권을 지킨다고 성매매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도대체 성매매의 해결이 무엇인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보입니다.
가장 많이 제기되는 반론은 노동력을 파는 것은 자유인데 왜 자신의 성을 자신의 자유로 처분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현실에서도 타인에게 노동을 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아무나 붙잡고 레포트를 대신 쓰라고 한다거나, 나 대신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오라고 하면 제 지시를 따르기는커녕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임금을 목적으로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성은 이토록 문제인가.
슈리님의 글은 성에 대한 분석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성이라는 상품, 인간의 필요와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 상품에 대한 분석이 거의 없습니다. 성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마지막 보루에 속합니다. 모두가 섹스에 대해 관심이 많고, 섹스를 좋아하지만, 강제나 폭력에 의한 섹스는 여전히 한 인간을 파탄내고도 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임노동으로는 충분한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성을 팔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성에 대해서 취약하지 않느냐, 저도 여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단지 심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여성의 성기는 매우 연약하다는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매매 문제가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합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성매매의 효과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될 때 성매매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든가, 아니면 정당한 생계활동의 한 형태로 인정하든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의견 감사합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reverie님으로 하여금 뭔가를 더 말씀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ㅠ 그만큼 말씀을 더 들을 수 있어서 좋았네요.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인식은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쓴이의 입장을 밀고나가자면,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성매매와 일반 임노동 간의 예상소득 격차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 (일단 이것이 맞는 이야기인가는 제쳐두고) 그냥 그 이야기를 솔직히 하면 될 것을 어설프게 여러 사상가들을 참고하다가 변죽만 울리고 마네요. 입장의 빈약함을 설익은 이론의 나열로 메꾸는 좋지 않은 글을 대표적 예인 것 같습니다.
답글 달아 주신 분들 덕분에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원글에 답글 달기가 힘들어서 여기로 답글이 몰린 부분은 좀 아쉽군요. 지금 해당 블로그에 새로운 관련글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슈리님의 글에 대해 비판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상당히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 글이 주장하는 것이 구구절절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더 폭넓은 토론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슈리님은 성매매가 부도덕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칸트의 답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칸트의 답변은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칸트가 살고 있을 때는 지금처럼 상품교환이 전면적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칸트의 비판은 현재에는 매우 고루하게 느껴집니다. 현실에서는 칸트의 말처럼 살지 못합니다. 칸트의 눈으로 보면 지금의 사회는 매우 부도덕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어떤 이들은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계속 주장하는가. 저는 여기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자본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맑스는 상품편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인용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환은 동일성 없이는 있을 수 없고, 동일성은 측량의 공통성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감각적으로 다른 물건들은 본질상의 동일성 없이는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한 것에 대해 천재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맑스는 "상품가치의 형태에서는 일체의 노동은 동등한 인간노동, 따라서 동등한 질의 노동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 형태의 분석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했다“고 하면서 ”동등하며 동일하다는 가치표현의 비밀은, 인간의 동등성이라는 개념이 대중의 선입관으로 확립되었을 때“, ”상품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 형태며, 따라서 상품소유자로서의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사회관계로 되는 사회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화폐와 비누를 교환했을 때 이것은 나의 노동시간과 타인의 노동시간을 교환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그 돈을 남에게 빌렸든, 누군가가 준 돈이든, 노동시간과 노동시간이 교환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하나의 동등관계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화폐와 성이 교환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의 가치 척도는 무엇이냐는 겁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성은 화폐와 교환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고루하고 ‘도덕적’으로 느껴진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고가의 선물을 주면서 구애하는 행위, 거짓말을 하고서 돈으로 얼버무리려고 하는 행위, 자동차 사고로 사람을 죽여 놓고서 위자료를 지불한 뒤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행위. 사랑, 잘못, 범죄 등은 돈과 교환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은 돈과 교환될 수 없는 범주에 속하는것인가.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개의 상품을 구매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상품의 가치형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등한 노동시간이 교환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수많은 상품들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고 브랜드를 개발하는데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산업 종사자들이 외모를 가꾸는데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 저는 노동가치설을 방어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http://socialandmaterial.net/?p=989
바깥블로그에 있는 EM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현재 골이 띵합니다. EM님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야하지만, 기왕에 여기에 댓글을 달았으니 이 곳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여기 적습니다.
본문을 직접 읽으시길 바라며 간단하게 제 생각을 정리하겠습니다. EM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즉 무엇이 ‘섹스워커’를 그와 유사한 성격의 다른 노동자들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느냐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회에서 ‘섹스워커’가 자영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전자본주의적 잔재일 뿐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섹스산업’의 영세성과 낙후성을 증명할 뿐이란 얘기다"
현재 섹스워커는 성매매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성산업 종사자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성매매여성과 다른 섹스워커들을 구분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매매여성은 성을 판매하는데 비해 다른 섹스워커들은 일정하게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것입니다. 노동력은 인간의 자연력의 한 형태이지만, 자연력이 모두 노동력인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매혈, 대리임신 등은 기업화된다고 해도 매혈노동자, 대리임신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한다면 닭은 알 낳는 노동닭이 됩니다.
현재 노동자란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매매여성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매매여성은 성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 즉 섹스를 할 수 있고 섹스를 할 때 쾌감을 느끼고, 몸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매혈이나 대리임신이 기업화된다면, 매혈이나 대리임신이 노동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매혈, 대리임신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주체가 자본이 되는 것뿐입니다.
이 얘긴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지금 이러는 것이 옳은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EM님의 글 중 이 부분.
"'섹스워커’가 파는 상품을 생산하는 이른바 ‘생산수단’을 오직 몸 자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 대리운전의 예가 적절치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경우에 결부되는 ‘생산수단’은 ‘장소’와 각종 ‘집기들’ 등등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몸’은 여기서 생산수단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섹스워커를 성매매여성에 한정한다면, 도대체 어떤 성매매여성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집결지에 있는 성매매여성들의 경우 이 분들이 사용하는 건물은 생산수단에 포함이 됩니다. 몸만 가지고는 영업을 할 수 없습니다. 호객행위를 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른바 보호비도 지불해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붙박이식 성매매말고 이동식 성매매가 있습니다. 이른바 콜걸이라든가, 인터넷을 통해 호객을 해서 손님의 집으로 가거나 모텔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성매매는 본질적으로 생산수단에 장소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집결지의 경우에는 건물은 포주, 혹은 업주의 소유고 따라서 생산수단은 이 사람들에게 속합니다. 따라서 성매매여성은 팔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에는 속하지만, 타인의 노동도구를 가지고 타인을 위해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 생각했을 때 그렇다는겁니다.
물론 제 견해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이 노동력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심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이 문제에 관해 설득력있는 주장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맑스는 자본 제1권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용해보겠습니다.
“사용가치 또는 재화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과정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여기서는 최초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노동형태들을 문제로 삼지 않는다.“
이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읽어보면 저는 성이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즉, 노동 그 자체]이며,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섹스는 무엇보다도 둘이서 하는 행위이며 한편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며 노동수단을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적 활동입니다.
(과제해야하므로...) 저도 머 대충 답글 달면... 어제 이 글을 보았는데... 뭐랄까요...
다른거 보다도, 왕 vs. 거지 구도를 옮겨서 임노동자의 개념을 '사회적 위치?'로 구분짓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슈리님 본문에 언급 되어 있는 예시 중에, 비정규직 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부분이 있습니다만서도...)
이 부분 저는 좀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도 성매매가 (여하튼) 노동력을 파는 쪽이라고 인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슈리님 글은 좀 비약이지 않을까? 하는 글을 다른 분께 하긴 했는데... 본문에 글 썼어야하나? 트랙백을 날릴까? 하다가 역시 과제 때문에...
아... 퇴근 하고 난 노동자는 뭔가 하기 참 힘든거 같습니다. (저만 그러려나요?)
덧) 이거 뭐 논의랑 아무 상관없는 댓글 달고 가는 느낌;
사실 성 노동(?)자, 비생산 노동(?) 자에 대한 규정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그들이 임노동자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들의 경제투쟁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가 판가름나게 되는데...reverie 님, thehole님, EM님의 글들을 보면 그게 사실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아직 완벽하게 합의하지 못한 문제로 보입니다.
덧) 저도 퇴근 후에 뭘 좀 할 수 있는 체력이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