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nightoftheworld.tistory.com/23
 
동의하기 때문에 퍼온 것은 아니다. 노동가치설과 노동자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닌데(그거야말로 내가 침묵해야 할 지점이고), 보편문제가 아닌 특수문제에침묵함으로서 정치적 진리가 드러난다, 는 부분에서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두고 읽어보며 다시 생각하려고 스크랩.
 

 슈리(aeongomdol)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 글은 매우 한정된 독자를 상대로 쓰였다. 이 글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성매매 문제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혼란들을 줄이는 데 일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이 글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가치 판단이나, 개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나는 이 글이 ‘여성’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관례상 성매매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성매매업의 사회적 성격을 다루는 글의 첫 부분에서는 어색하게 ‘성매매업자’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이것이 전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과거부터 페미니스트 진영 내부에서도 성매매에 관한 시각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다. 그것은 나에게 이 문제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아무튼 나의 의도와 다르게, 이 글의 내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더욱 명료하게 쓰지 못한 탓일 것이므로, 양해를 구한다.

 

 

1. 성노동이라는 것이 있는가?

 

   성매매에 관한 논쟁들은 성매매가 노동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노동’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나는 맑스의 견해를 참조할 것이다. 이는 신 존재 증명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안셀무스와 칸트를 참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며, 이 문제에 관하여 인식적 가치가 있는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이러한 현상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

   맑스는 성매매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혼과 매춘에 관한 『공산당선언』의 그 유명한 구절(부르주아적 결혼 제도 자체가 이미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매춘이라는 내용)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여기서는 그 구절을 일단 도외시하기로 하자. 『선언』은 문학성을 위하여 수사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애매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구절들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려고 하면 과거의 해체주의 학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끝없는 텍스트 해석 논쟁에 빠져들 수도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참조해야 할 것은 노동과 계급에 대한 맑스의 전반적인 생각들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맑스는 거의 모든 경우 ‘노동’이라는 말을 ‘임노동’의 준말로 쓴다. 임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것이며, 한 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점한 결과 다른 한 계급은 살기 위해 노동력밖에는 팔 것이 없어진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이로부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양대 계급이 나온다. 이것이 노동에 대한 맑스의 규정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맑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사회적 실재의 메커니즘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통해 어떤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직관에 잘 와 닿지 않으므로,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시점에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노동자들보다 약간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그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고 역겨운 망상이지만, 만약 그 자본가가 높은 교육수준 덕택에 언변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본가는 자기가 하고 있는 ‘노동’이 어째서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지, ‘노동’의 여러 속성들을 거론하며 신학적, 형이상학적 논변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노동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자본가의 망상, 더 정확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면, 맑스처럼 노동 개념을 규정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어떤 직업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직업 종사자들의 주관적 느낌에 근거한 자기 보고 따위가 아니라 해당 직업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다.

   성매매는 노동인가? 라는 질문은 성매매가 임노동의 일종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인식적 가치도 없다(그래서 주로 감정싸움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시 정확하게 물어보자. 성매매는 임노동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성매매업자는 노동력이 아니라 성이라는 상품을 판다. 간혹 논자들 중에 성매매업자도 노동력을 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노동과 노동력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성이라는 상품의 구매자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성은 필수품과 반대되는, 일종의 사치품(도대체 이 상품은 누가 생산한 것일까?)에 가깝다. 사치품의 구매는 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얻은 부르주아들과, 밑에서 그 잉여가치의 부스러기를 받아먹은 다른 계급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력 가치(노동자의 자기 재생산에 소요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만큼의 가치)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을 받는다면, 드물지만 노동자가 사치품의 구매자가 될 때도 있다. 성매매를 성노동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 중에 성매매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근거를 들고 나오는 이들은, 오히려 그 근거가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는 데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성매매업자의 계급적 성격이 어떤 것이며, 그들의 소득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 문제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함께 숙고해볼만한 충분한 자료들을 던져주고 있다. 맑스는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양대 계급을 제외한 사회의 다른 계급들을 다루는 몇몇 구절들에서 ‘창녀’를, 어떤 때는 극빈층, 거지, 범죄자와 같은 부류로, 어떤 때는 왕, 관료, 교수, 군인, 사제 같은 부류로 분류한다.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전자의 분류는 성매매업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후자의 분류는 이 직업이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 파생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후자의 분류가 이 글의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하다. 맑스가 보기에, 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노동자만이 본질적으로 사회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계급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계급이고, 나머지 모든 계급들은 이로부터 파생하여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다.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파악에 이런저런 토를 다른 사람은 많지만, 나는 이보다 더 합리적인 이해를 알지 못한다. 또, 맑스는 과거에 노동이 아니었던 많은 업무들(특히 서비스업에서)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되어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개탄스러워했다.

   물론 어떤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어떤 직종이 노동자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기도 하다. 가령 비정규직 시간강사를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학졸업장은 마치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품인 것처럼 나타나며, 기업화된 대학에 고용된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마치 노동자처럼 보인다. 비정규직 시간강사 노조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맑스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지 않는가? 물론이다. 무슨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그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지극히 높기 때문에 더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가 되어서 소외된 노동을 하며 시간을 빼앗기느니, 교수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다소간 낮은 생활수준을 감수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약간의 재능을 발휘하려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동기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각종 고시, 전문직에 매달리는 것도 역시 같은 심리라고 봐야 한다. 성매매업을 이끌어가는 추동력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무슨 노동자 계급의 순수성 같은 것을 역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는 엄밀히 말해 노동자 계급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많은 노동조합들(예를 들자면, 공무원 노조라든가, 전교조라든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단체를 만들고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지, 궁극적으로 그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 자체라는 것이다. 즉, 여기서 나는 실재론적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계급이 만든 ‘노조’가 진짜 노조와 일반적인 경우에 같은 수준의 동력과 강도로 경제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가 딛고 있는 물질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노동자와 연대한다면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다 여유로운 입장에 있는 그들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러므로 보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다. 노동자들은 지금 당사자 투쟁을 하기에도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성매매업의 문제로 돌아와 말하자면,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이 차원에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성매매업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2. 성과 도덕

 

   성매매업은 파생적(노동자 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 직종이며, 업무 형태상으로 분류하자면, 소규모 자영업자와 마피아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성매매 여성과 포주의 관계는 금주법 시대의 마피아 조직원들과 보스의 관계와 가장 유사하다. 그들은 고용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야합한 관계에 속한다. 공창제가 발달한 나라라면 준공무원 같은 약간 다른 성질이 부여되기도 할 것이다. 강제된 성매매 같은 것은 여기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상품 판매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반적인 성매매업 형태의 최소공통분모는 자영업적 성격이니 일단 그것을 중심에 놓고 보도록 하자. 이 점에서 성매매업자들의 궁극적인 요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비록 노동자는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 연명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도 다른 업자들과 똑같은 영업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가 파는 상품만 그렇게 부도덕한 것으로, 심지어 불법적인 것으로까지 낙인찍혀야 하는가? 그러니 성매매금지법 철폐하고 우리의 상품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 달라.”

   이에 추가로, 성매매를 합법화하기 위한 몇 가지 행정적 조치들도 함께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가 금지된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된다는 조건 하에서이므로, 이들의 핵심적 요구는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 달라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성매매는 부도덕한가?’로 집중된다. 어떤 행위를, 아무런 맥락 없이 그 자체로만 고찰하여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위험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일단은 성매매를 둘러싼 조건들이 우리의 공통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 있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시켜 보도록 하자.

   이 경우,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쪽이 사용할 무기가 훨씬 많기 때문에 공세를 취하기가 쉽다. 현재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도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전술은, 계보학적 방법을 이용한 문화연구와 자연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등이다. 이런 방법들에 발생의 오류나, 자연주의의 오류 등등의 딱지를 붙이고 무시하는 것은 너무도 손쉽다. 이런 ‘실증적’ 방법들에 맞서 나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우리는 왜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느끼는가? 다음과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을 주고 성을 산다는 것은, 목적으로 대해야 할 인간을 성욕 해소의 수단으로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 그리고 그 교환 과정에서 성을 파는 쪽 역시,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상의 과정은 사후적 정당화에 가깝다. 이겨서 흥미로운 점은, 위와 같이 판단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상품을 교환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악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사실상 다른 인간을 오로지 가치증식의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한 개인의 발전이 다른 개인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사회를 구상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 타인을 수단으로서 대하는 측면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부모-자식 관계조차 자식이 살기 위해 부모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글의 관심사인 성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연인들 간의 성관계조차 어떤 면에서는 상대를 자신의 성적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관계가 “살아 있는 파트너로 즐기는 자위행위”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를 수단으로서‘만’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서도 대한다는 점에서 상품 교환과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기는 하지만, 조금 불충분하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내가 성매매가 악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사실 성매매는 일부 사람들(예를 들면 특정 종교의 광신도들이라든가)에게 주관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상관없이, 객관적, 일반적으로 ‘악’이라는 강한 말을 쓰기에는 너무도 미미한 악이다. 어떤 도덕적 판단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기법들은 대체로 이처럼 미미한 악을 표적으로 삼으며, 그런 한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통상적인 상황에서의 살인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진지한 학문적 시도 따위는 애초에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있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아무튼 이처럼 적당히 애매한 영역(이것이 성적인 영역과 많이 겹친다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다)이 온갖 이데올로기들의 전장이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 근거 없음, 애매함을 좀 더 밀고나가 보자. 근친상간의 금기는 어떤가? 이 금기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불가사의하다. 근친상간이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금지되어야 할 어떤 윤리학적 근거가 있는가? 여기서는 칸트의 정언명법도 효력을 잃는다. 빈약한 유전학적 설명은 더욱 쓸모없다. 이 지점에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그는 이 불가사의한 금기의 이유를 찾는 대신, 이 근거 없는, 다시 말해 무의미한 형식이 인간 사회의 토대이며 실체라고 주장했다. 근친상간의 금기가 자연과 문화 사이의 간극 그 자체라고 본 것이다. 이 전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헤겔주의적이다.

이후, 일부 동물들에게서 근친상간의 금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있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금기는 근친상간 말고도 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성매매가 이러한 성격을 가진 특수한 부도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도덕의 근거를 도덕 바깥에서 찾으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봉착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 좋은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에 근접하게 된다.

   덧붙여서, 계보학적, 역사주의적 접근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해두어야겠다. 그런 방법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사회의 구성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변해옴에 따라, 이 특정한 요소(예를 들면 가족이라든가)의 의미도 변천을 겪어왔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며, 그러므로 이를 영원한 형태로 생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등등. 일견 맑스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접근법은 사실 의미심장하게도 자기-논박적이다. 우선 맑스주의적 접근에서는, 역사에 계급투쟁이라는 변하지 않는 좌표축 있다. 그런데 이는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 하에서는 소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반드시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단절의 시간이 도래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철학은 물론 기독교의 유산이며,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언’과도 관련이 있다. 반면에 역사주의적 접근은 정말로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역사주의 자체는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역사주의는 역사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은폐하는 한에서만 성립한다. 그렇다면 역사주의야말로 현존하는 체제를 영원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 아닌가? 마치 기존의 맑스주의적 역사철학보다 더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는 역사주의가 그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실은 훨씬 더 보수적이라는 데에는 무언가 심오한 것이 있다.

   결국 성매매를 순수하게 도덕적인 관점에서 고찰했을 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성매매는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가? 예. 성매매가 큰 부도덕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딱 사랑 없는 성관계나 결혼만큼 부도덕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매매가 부도덕하게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성매매와 도덕에 대하여 구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매매가 부도덕하게 인식된다는 것만으로 가치 판단이 내려질 수는 없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작동한다. 전통적으로 도덕에 대한 좌파의 접근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혹은 어떠한 것이었어야 했는가? 좌파가 지배 계급의 도덕가들을 비난하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어느 시대나 같다. 지배 계급은 구체적인 문제와 추상적인 문제를 혼동한다. 지배 계급은 인민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물질적 토대를 재생산하면서, 인민이 부도덕하다고 단죄하려 하기 때문에 위선적이다. 은행을 터는 것이 범죄라면, 은행을 새로 짓는 것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범죄다. 이러한 접근은 도덕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는 접근법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도 같은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문제는 오늘날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게 잘 판단하다가, 성매매의 문제(를 비롯한 몇몇 문제들)가 되면 분별을 잃는다는 데 있다. 성노동 같은 부적절한 개념들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일부이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녀를 동정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회가 평균적인 인민에게 어떤 경제적 현실로 작용하느냐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정량화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맑스의 개념도 그러한 정량적 접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앞에서 나는 성매매의 궁극적 동기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평균적인 여성에게 얼마만큼의 성매매 유혹을 느끼게 하는지 묻는 것은 유효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는 이런 양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같은 조건에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데, 1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면, 그 1명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물론 이런 사회는 유지될 수 없겠지만)에서, 같은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를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는 1명의 여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상의 길고 방어적인 논의에서 내가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성매매에 관해 취했던, 혹은 취해야 했을 접근을 다시 한 번 세공했을 뿐이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진정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처럼 나 자신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길고 지루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심히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좌파가 정세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계급투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분석 능력을 상실했을 때, 좌파들의 혼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난다. 사회에 어떤 갈등 상황이 나타난다. 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매우 적절한 사례가 있다. 한 편에는 성매매특별법을 바탕으로 집창촌을 폐지하고 종국에는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세력들이 있다. 다른 한 편에는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하며 노동으로까지 인정해달라는 세력들이 있다. 매스컴에서 전자는 전여옥 같은 혐오스러운 수구 여성 정치인과, 제 구실은 못하고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여성가족부 등등으로 표상되고, 후자는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로 표상된다. 좌파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서 누구 편을 들어야할지 약간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적의 적을 지지하게 된다. 평소에 전자가 명백한 적이었으니, 그들이 하는 일에는 일단 반대하고 보면 되겠지, 하고 말이다. 즉, 지성이 아니라 감성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뭐라고 했는가? 평범한 의식에게는 경제적 실재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전도되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면 과학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성매매를 둘러싼 수많은 입장차이들 사이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것은 거의 없다.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차이들, 다시 말해 사회적 적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입장의 차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금지해야 하는가, 합법화해야 하는가, 그것이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 등등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 내의 치안 문제일 뿐이다. 치안과 정치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치안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회 내의 질서와 관련된 문제이고, 정치란, 치안에 앞서서 어떤 사회가 주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의 투쟁 상황에서, 치안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경우는 많다. 운동의 과제는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정확하게 정세를 파악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치안과 정치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성매매 여성의 생존권 문제도 좌파에게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문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했다.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요소들은 그들이 파는 상품의 가격에 추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하는 성매매 여성은 거의 대부분이어도, 공창제에는 그 여성들 중 많은 수가 반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매매가 국가에 의해 완전히 투명하게 관리되는 경우, 그들이 일반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어두운 영역이 완전히 사라져, 성매매업의 매력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자인 남자들은 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환영할 것이다. 경제적 본능은 어떤 부분에서 이처럼 정확하고 무섭다. 성매매를 할 수 없게 된 여성들은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로 고통 받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동일한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좌파가 단언해야 할 것은, 모든 인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를 타도하자는 보편적인 명제들뿐이다. 다시 말해 성매매 같은 특수한 문제들은 정치적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정확히 침묵하는 것도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역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정확한 타이밍에 능동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맑스가 청년 시절에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적 힘을 가지지 못한 좌파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무기는 진리였다. 좋았던 옛 시절은 가고, 오늘날의 혁명적 정치 운동은 침체기에 빠진 듯하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선미 중에서 진은 다른 두 가치에 비해 우월성을 지닌다. 진정한 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말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도, 선한 진실, 아름다운 진실 같은 말들은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세계에 대한 불확실한 지식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초기 인류에게 참과 거짓의 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흔적이 아직도 우리의 언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맑스의 이론이 무슨 심각한 학문적 반박을 받고 몰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읽히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주류 학계는 맑스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가?) 주류 학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박한 일반인들은 학계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맑스는 자본가-노동자 관계에만 너무 배타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갈등들, 예를 들자면, 인종, 젠더, 성소수자 같은 갈등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등등. 자본주의가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체제라는 것은 맑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맑스가 왜 그 고생을 해 가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단순화한 형태에서 고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양한 변화들, 현상들은 이 기본 틀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지, 결코 이 기본 틀을 반박하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를 끝장낼 수 있는 핵심적인 세력은 노동자 계급이다. 이는 맑스의 이론적 분석의 논리적 귀결이다. 지난 세기말부터 최근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착취를 끝장내겠다는 근본적이고도 ‘큰’ 각오로 임하지 않는 운동은 ‘작은’ 성취마저 이루어내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설령 이루더라도 오래 지켜낼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따라서 현실의 노동자 계급이 좌파들이 생각하는 그런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는 작금의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이성적으로, 즉 현실적으로 끌어낼 유일한 결론은, 혁명적 정치가 선배들이 낙관했던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운동을, 부정확한 현실 파악으로 방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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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20:53 2011/05/16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