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르주아적 내면성 가족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종영은 화폐를 얻음으로써 부르주아가 어떤 불안을 회피하고자 한다고 말하는데 그 불안의 정체를 가족에서의 가부장적 향유에서 찾습니다. 이 가부장적 향유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우선 근대 부르주아 핵가족의 구성원리로서의 '사랑'이 전근대적 가족들에 비해 가진 해방적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밑인용문이 왠지 이종영스러워 옮겨 놓아봤습니다.

"공동체는 부부의 공동체적 귀속성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한계화하고 탈가치화한다. 공동체적 연대성에 비하면 개인적 사랑은 사소하고 시시한 것에 불과하고, 그리하여 개인적 사랑은 언제나 공동체적 연대성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사랑 없이 결혼한 자들이 사랑으로 맺어진 자들에 대해 행하는 피학-가학적 복수의 일종임은 물론이다. 희생자들이 승리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질서에 짓눌려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고립된 사랑의 승리자들에 대해 행하는 피학-가학적 복수"(96~97쪽)



그리고 근대 핵가족의 성차별적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인용도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역시 이종영스러워서...

"에릭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정은 전쟁의 세계 속에 있는 평화의 오아시스, 다시 말하면 전사의 휴식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중심주의', 즉 주인공과 동일시하려는 감정이입을 피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전사'는 어떤 악한 침입자들과 대결하는 정의의 전사가 아니다. (...) 그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리인 경쟁을 자기화하고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는 전사이다. 그는 남들을 제거하고 살아남기 위해 야비한 일들을 하고,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도대체 가족은 어떻게 하여 그에게 사회와 똑같은 전쟁의 무대가 아닐 수 있을까? 사회에서 그처럼 전쟁을 치르는 그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처럼 변화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이리였던 그가 집에서는 양이 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집에서는 이미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처럼 이해하면 된다. 남자들이 이미 여자들을 제합해 놓고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인다고. (...) 사회나 가족 둘 중의 하나를 이상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회와는 달리 가족에서는 전투가 이미 끝났다는 것, 그래서 규칙으로서의 공공성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110~111쪽, 강조는 저자.) 



가부장적 향유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맨마지막 문장이 이종영스럽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의 그러한 접합구조가 부르주아 가부장들에게 중요한 존재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여성적 사랑을 행하는 한에서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다. 가족 내에서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에 바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치욕이 가족을 위해 감수되는가?"(112쪽)



이런 가부장적 향유가 사실 상품에 대한 욕망보다 근본적임이 강조되는데 모든 상품형식은 여성성 형식이라는 재밌어뵈는 주장이 나옵니다.

"'여성성 형식'은 어디까지나 상품형식의 '모델'이기 대문이다. 즉 최고의 상품형식은 적어도 남성게게는 여성의 형식(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성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존재는 창녀이다. 상품들이 여성성 형식을 취하려고 노력하지만, 창녀는 그 자체가 여성으로서의 상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녀야말로 모든 상품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녀는 상품형식의 이상형이 결코 아니다. (...) 창녀는 오히려 최악의 상품형식이다. 상품형식은 여성성 형식을 모델로 삼지만, 여성 자체로서의 상품인 창녀는 결코 최상의 상품형식이 아니라 최악의 상품형식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찾아서 창녀에게로 가는 돌아오는 것은 '상품'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프랑스에서 창녀를 뜻하는 '쀠뗑(putain)'은 한국에서처럼 대표적 욕설일 수밖에 없다. 좌절의 원한이 담겨있는 욕설."(128~131쪽)



막간에 본인이 왜 정치의 대상을 '선'이 아닌 '정의'로 보는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여기서 '선'을 정치의 대상으로는 담론들이 반도덕의 외양을 한 도덕주의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항상 결론이 "깨어나세요. 주체여..."식으로 간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11.5/24 내가 밑줄)

"나는 정치의 이념적 대상을 정의로 규정한다."(138쪽)

"현실적 정치는 이념으로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이념의 허구 아래서 부정의를 비호한다. 바디우와 라자뤼스는 정치의 대상으로서의 정의가 허구적 이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제 정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지향할것을 주장한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치의 대상이 선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은 개인적 선택의 대상이고,정치적으로는 부과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46쪽)



일단 이종영은 부르주아적 내면성이라는 게 부르주아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이 부르주아적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의 거의 일반적 심성이라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편성을 부인하고 "나는 부르주아 '이상'의 존재야. (그걸 부르주아라고 깜으로써 확인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놈들을 볼셰비키적 내면성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이를 현실의 운동권이랑 곧바로 비교하면 그냥 그저그런 흔한 짜증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 이종영 이야기가 결국 그런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여튼 우리는 정승같이 써먹을 수도 있음. 

"볼셰비즘은 타자를 분류하고 낙인찍는 기계이다. 여러 가지의 형태의 이단들이 존재한다. (...) 이러한 모든 형태의 낙인들은 최종적으로 귀착되는 한 중심을 갖는다. '부르주아'라는 중심이 그것이다. (...) 낙인찍기의 효력은 혁명 이전, 혁명기, 혁명 이후의 세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혁명 이전의 낙인찍기는 정파간의 권력투쟁을 반영하는 것이고 운동으로부터의 배제로 귀결되는 것이겠지만, 타자를 '악'으로 규정짓고 자신을 '선'에 위치시키는 '도덕적' 향유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한 '도덕적' 향유는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을 살리려는 위선의 극단적 형태이다."(187~8쪽)


여기서 이종영의 부르주아라는 말의 (반半)개념적 지위에 대한 코멘트를 참조해봅시다. 이 님은 부르주아라는 말이 순전히 낙인찍기용이라 보진 않습니다.

"부르주아가 점하고 있는 위치란 어떤 것일까? 부르주아란 어떤 자들일까? '부르주아'라는 용어의 일상적 용법이 단지본가계급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학적 노동은 일상적 언어 용법과의 거리두기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르주아라는 용어의 일상적 용법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 설정된 노동자계급의 '적'의 범주에 대한 일종의 전(前)개념적 일상감각을 표현해 준다는 것이다. (...) 그러한 전개념적 일상감각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반면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전개념적 일상감각과 구분되는 계급의 개념이 엄밀한 과학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서 문제가 성립한다."(32~33쪽)


심지어 지금 한국에도 유행하는 낙인 떡밥 "부르주아"에 관한 이야기.

"낙인의 대상이 되는 행위양태는 낙인찍는 자 자신의 행위유형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인찍은 자는 낙인찍히는 자들의 내면을 샅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탄압은 가혹해진다. (...) 애초부터 모두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심지어 노동자계급 출신들도 말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노동자들도 그 자생적 행위에 있어서 부르주아적이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들이 서로를 부르주아적이라고 낙인찍는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당신은 부르주아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처럼 낙인찍힌 자는 그 말에 결코 항거할 수 없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이처럼 모두가 '원죄'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낙인은 단지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다."(188~9쪽)

이래서 이런 류 개싸움에서는 선빵이 중요. 나중에 말하는 놈은 무조건 '변명'처럼 들린다. 

이행 대안 미래를 타자비판을 통한 자기구원이라는 추상적 종교적 주체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간적인(휴머니즘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실존조건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관점에서 생각해볼 것을 주문하는 대목. 역시 마지막 문장이 이종영스러움.

"물론 이행은 변화를 요청한다. 이행의 두 핵심적 장소는 가족과 생산단위(공장과 회사)이다. 볼셰비키는 이행을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는 어떤 비(非)인간적 괴물의 탄생으로부터 사고하려 한다. (...) 필요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볼셰비키적 '강철'도 칸트적 초월성도 아니다. 다만 인생의 보잘것없음과 쓸쓸함에 대한 공감, 자기파괴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에의 배려'로 충분하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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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22:27 2011/05/15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