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의문들

from 분류없음 2011/05/20 02:22

  1. 다른 곳에 올린 글을 지우셨더군요. 그렇지만 블로그의 글은 지우지 않으셨길래 제 블로그의 글을 그냥 두었습니다. 사실 덧글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서 이제 와서 제 마음대로 지우기도 곤란합니다.

 

  2. 이미 충분히 논쟁에 지치셨을거라 생각되고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지만 또 여쭤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하는 글의 길이 문제로 말을 줄이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엄격한 칸트적 입장에서 행위의 부도덕성의 정도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애초에 칸트는 'A는 B보다 악하다' 거나 '덜 악하다'  거나, 그런 논의에서 효용이 그다지 없는 포지션에 있다.  정언명령에 대입해보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돈을 목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둘 다 부도덕하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살인이 사기보다 더 큰 죄라고 느낀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부도덕한가에 대한 비교는 칸트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행위의 특수한 규칙(준칙)은 정언명령의 틀을 통과한 다음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토대로 행위에 옮겨질 때 도덕성을 갖는 것이지, 준칙이 그 자체로써 도덕적 명령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므로. 즉 그것은 도덕의 외연을 정해 줄 수는 있어도 도덕 아닌 것들의 부도덕함의 정도를 비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고용인을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 대하는 것과 돈을 주고 타인을 내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칸트를 잘못 이해하면 등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칸트적 정언명령은 그 둘을 등치시킨 적이 없다. 다만 '둘 다 악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악의 층위를 변별하는 것은 사실 칸트를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슈리님은 칸트적 정언명령에 따를 경우 일반적 고용관계와 성의 매수-매도는 등치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접근법에 따라 성매매의 부도덕성을 판단하려 들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학적 영역에서 언급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을 동원하여 성매매의 부도덕성을 입증하며 그것은 미미한 악이라고 말한다. (왜 미미한지는 논증되지 않았다.)  미미함의 정도는 대략 사랑 없는 성관계나 사랑 없는 결혼 만큼이라고 한다. (확실히 이 부분에서 논의는 칸트를 뛰어넘는다. 칸트는 모든 종류의 혼외정사를 반대했다. 칸트의 입장에서는 혼전 연인들의 성행위는 부도덕한 반면 부부끼리의 성관계는 모든 면에서 서로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행위로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슈리님의 이 정도비교는 무엇으로 뒷받침되는 논리일까?)

 

  칸트적 입장의 도덕성 판별이 부도덕함의 층위를 구분해 주지 못한다고 해서 명제적 도덕성을 아예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일단 명제적 도덕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충분히 논증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통감각이 도덕성의 기반이라 볼 수 있는가? 슈리님은 '우리의 공통감각이 단순히 가상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을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은 사실상 취미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당위성은 대체 어떻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취미판단이 개별 주체에게만 타당하지 않음은 도덕적 보편성과는 다른 영역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오해하고 있다면 오해를 지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슈리님은 첫 글중 두 번째 파트 [성과 도덕]에서  성매매(性賣買) 행위에 대한 도덕성을 판단하겠다고 해놓고 사실상 성매도자( 여성)의 도덕성을 판별한다. 그는 성매매 행위가 선택될 수도 있다고, 즉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은 성매매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혹 여기서 선택의 자유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본체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면, 99명과 1명 같은 이야기는 애초에 나와서는 안 된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녀를 동정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회가 평균적인 인민에게 어떤 경제적 현실로 작용하느냐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정량화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략)...앞에서 나는 성매매의 궁극적 동기가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평균적인 여성에게 얼마만큼의 성매매 유혹을 느끼게 하는지 묻는 것은 유효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는 이런 양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같은 조건에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데, 1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면, 그 1명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100명 중 99명의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물론 이런 사회는 유지될 수 없겠지만)에서, 같은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를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는 1명의 여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는 99명의 여성들이 성매매를 하지 않는 세상은 아마 성적 억압이 사라진 세상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우리는 사실 부르주아적 매매혼을 통해서 합법적인 성매매를 늘 접하고 있다.

  노동이 젠더화되어 있고, 여성노동이 저평가받고, 노동 자체에 대한 여성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성적 억압이 존재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받거나 결혼을 통해 일정 부분 자신의 주체성을 '가족' 의 이름으로 포기하고 아내로서의 형식을 부여받는 것 사이의 선택지를 강요당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결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결합 중의 많은 사례가 경제적 성격을 배제하면 성립하지 못했을 성격의 계약이다. 오늘날 '듀오' 와 같은 기업은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결혼시장에서 개인의 '등급' 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남성에 대한 주된 평가 기준은 소유 자산과 가문이며, 여성에 대한 주된 평가 기준은 얼굴생김, 몸무게, 키이다.

 

  사실 여기서 슈리님이 설정한 '성매매에 대한 공통감각' 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은가? 성매매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이 돈을 받고 성을 거래하는 행위에 대한 혐오라고 볼 수 있는가? 듀오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만나서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꽃다발을 들고 다소곳이 식장에 들어서는 신부를 보는 우리의 기분은 우리가 성매매 여성에 대해서 가지는 꺼림칙함의  1/10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결혼 후의 상황은 어떤가? 남편의 폭력과 불륜 등등으로 인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이혼 후 생계가 막막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여성에 대해서 우리는 동정을 보낼 것이고, 비난할지언정 '창녀'라고 매도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차이라면 성매매 여성은 대체로 일회적인(지속성이 없는) 성관계 후 현물 화폐를 받았고 결혼한 여성은 현물 화폐 외에 다른 물질적, 정서적인 대가도 같이 받았으며 관계의 지속성을 서약한다는 것 뿐이다. 화폐/비화폐의 구분은 혐오의 감정에서 아마 고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혐오감의 실체는 사실 성매매 행위가 아니라 이성애 모노가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성행위에 대한 거부일 수는 없을까?

  

".전통적으로 좌파들은 거인의 요술장화를 신고, 윤리학의 영역을 자유주의적, 혹은 부르주아적이라고 조롱하며 가볍게 건너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이에 반하여 나의 생각은 모종의 윤리적 실체에 대한 고려 없이는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 같은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슈리님의 문제의식은 정확히 나의 그것과 같다. 좌파를 자칭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 체제라는 추상적 명제에서, 구체적인 자신의 행동에 모든 도덕 영역을 사상시켜도 된다는 이상한 정당화 논리를 발견한다. 즉 어차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덕적일 수가 없으니까 도덕판단 따위는 사회주의 도래 후에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은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 사안에 대한 합리적인 도덕판단을 통한 선택과 행위 대신에 개인 자아의 위상에 복무한다. 도덕성은 사안을 판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이나 훌륭하고 정당한 기준을 따르고 있으니까 나는 역시 위대하다는 사실을 지탱해주기 위해서, 개인 인격의 판별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당위로 존재를 규정했던 칸트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도덕 실천을 위한 여건이 열악하다는 것은 도덕성을 포기할 이유가 못 된다는 것이다. 도덕이란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이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이론적으로 논하는 것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하고, 따라서 슈리님이 선택하신 논거에 대한 정당화를 들려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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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0 02:22 2011/05/20 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