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plebs.tistory.com/119

(*)저번주 우리는 전인권 씨의 [남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몇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기록의 강박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가면 뭔가 아쉬우니 몇 가지로 정리하면

1.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의 합당함. 이것이 정신분석학이나 자서전 류의 문화적 매개에 의해 강제된 건 아닌지. 그렇지 않다면 혹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외적 규정성에 환원되지 않고 남아있는 해당 행위의 수행성과 의미. [서문]

2. 생활공간이라는 일상적 요소가 정체성 형성에 끼치는 의미 [1장]

3. 보통 가부장제 비판 담론에서 익숙한 수직적 부성권력뿐만이 아닌 수평적 모성권력에 대한 주목. [1장 말미]

4. 수평적 모성권력의 자녀들의 분할지배(?), 그리고 이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데 멈추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하게 된 논리적 분석 또는 어머니에 대한 저자의 감성적 이해. [5장]

5.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비판. 개념적인 맛은 떨어지지만 이렇게 '기술'(description)적으로 접근하는 것의 합당함 그리고 과감함. 내용적인 면에서는 "욕망을 달성한 오이디푸스" [3장] => 하지만 세미나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저는 전인권이 프로이트 사상의 핵심이라 할 만한 것을 이 책 전체에서 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정신구조,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서의 정신구조라 할만한 것이 있고 그것이 그 이후의 주체를 '규정'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는 항상 과거를 사는 동물이라는 점.

6. 신분이 대화를 대체하는 상황의 한국적 보편성. 여기서 '한국적'이라고 할 때는 특정한 객관적 지리가 아닌 '나의 한국'이라는 실존적 의미가 이론적 층위에서 묘하게 배여들어있음. [6장]

7. 동굴 속 황제의 심리적 영토. 플라톤을 조금 봤는데 다 아는 것 같고 누가 그걸 읽었다고 말하면 느끼면 배알꼴림에 대한 공감. (145쪽) [6장]

8. 아버지에 대한 서술에 있어 사실이 아니라 환상을 기술하고 이런 통찰의 성격을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는 과감함.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참 '프로이트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음. [8장]

9. 이 책 자체의 보편성에 관함 물음. 가장 사적인 것을 씀으로서 공적인 것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서술의 위대성은 아니더라도) 고유성.[서문과 9장 마지막 절]

10. 진급하는 삶과 모범에 대한 죄의식. 그리하여 '비천함'.
 

"내게 미래는 현재의 삶을 질식시키는 미래였다. 마치 선배가 나의 모든 것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처럼, 미래는 현재의 내 삶을 억눌렀다. 그러니까 미래는 또 하나의 하늘 같은 선배이자 아버지였다. 이것은 동굴 속 황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슬픔이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주인인 것 같지만, 어디에서나 노예이자 머슴이었다."(235쪽)

" 그런 점에서 나의 죄의식은 모범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와 유사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생활계획표를 통해 '모점적 인간'이 되었다기보다는 그 '모범적 인간'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그런 열등감이 나를 타락하지 않도록 붙잡아주기도 했겠지만,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았다. (...) 자신에게 제시된 목표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은, 죄의식과 더불어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했다. 그런 발견이야말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람다워진다. 그런 생활계획표는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팽개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생기게 했다."(264쪽)


11. 남성성의 두 얼굴. 지배하는 동시에 소외되는 아버지. 성을 유린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유년기의 저자. "풀잎은 새로운 성기 카니발의 도구가 되엇다. 진흙놀이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집단적으로 성에 대한 놀이를 시작하면 물건으로 변해버린 성과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성이 난무했다. (...) 보지풀을 혼자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건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 그렇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풀잎 하나를 따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아름다웠고 가슴이 떨려왔다. 그처럼 예쁜 풀잎이 여러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것도 애처로운 일이었다."(277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5/10 21:18 2011/05/10 21:18

이 선언을 하고자 하는 우리는, 조직과 결합하지 않았으나 변혁을 갈망하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개인들입니다. 이 선언의 목적은, 합당국면에서 규모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이 사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고, 선언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서로의 공간을 터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상의 홍보와 활동을 통해 선언에 동의하는 이들과 함께 다듬어나가며 변혁운동의 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설 공간을 터나가고자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선언 포스팅의 블로그로의 펌글을 통해, 그리고 blog.jinbo.net/wethesocialists의 해당 선언 포스팅에 대한 댓글을 통해 참여를 받고 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매주 월요일(3/28)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생활도서관에 모여 선언의 구체적 의미와 방향에 대해 논의합니다. 활동과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얼마 전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 원칙’을 삭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 원칙이 진보세력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무엇보다 이를 삭제하는 것이 기층 당원들의 눈높이에 맞춘 처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저런 구실로 사회주의 원칙을 퇴색시키려는 시도들은 단지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현실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어느 곳에서든 우리 자신의 원칙과 노선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현실 정당 내부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유혹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호와 강령을 약간만 완화하고 약간만 타협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협박과 회유에 직면해 있다. 우리들은 변혁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현실 정당과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조직들에서조차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어려운 현실에 대해 어떤 손쉬운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노회한 진보적 어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단지 겉치레에 불과했다. 지난 역사는 ‘진보’라는 저 막연한 관념이 사회주의 원칙을 얼마든지 판돈으로 걸 수 있는 것을 몸소 실증해 주었다. 사회주의를 말하는 여러 조직 역시도 의회정치의 의제에 끌려 다니면서 젊은 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환상은 끝났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말할 것이다.

 

  ‘진보’니 ‘통합’이니 하는 저 막연한 이름으로 우리가 견지하는 원칙들에 더 많은 힘이 실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 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대신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공공연하게 말하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신념을 선언하고 어디에서든 가르치자. 현재 운동이나 정당의 규모가 작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체 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것이며, 우리들이 말하는 이 진실이 어느 곳에서도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란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치적 권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관한 우리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우리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가 시혜의 대상이나 선심성 정책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라는 사실을 무조건적으로 단언할 것이다. 복지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 교육권, 주거권, 행복 추구권, 그리고 사회적 국가를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복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소수 기술관료들이나 카리스마적인 정치인의 즉흥적인 판단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복지는 무엇보다 예산주권의 문제이다. 이제라도 사태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시민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육문제, 교육문제, 노동문제 등에 관해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들이 한다. 이에 관한 ‘정치적 책임’은 당신들, 예산을 멋대로 주무르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져야 한다.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을 마련하는 데 예산을 우선 배분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 예산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각종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같은) 소꿉놀이를 하라. 무엇보다 복지의 혜택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부자이든 빈자이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돌아가게 하라. 우리는 ‘보편적’ 무상급식 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 이제 복지에 관해서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인지에 관한 모욕적인 판단을 국가와 관료들이 내리는 시대는 끝났다. 복지는 이 사회의 시민 구성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자랑스러운 권리이다. 국가와 관료의 책임은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두 번째, 노동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은 여전히 명목상의 문구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다 노동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며, 노동권이 단순히 몇몇 소외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정치적’ 권리라는 사실을 단언할 것이다. 우선 차별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조의 자유로운 결성을 방해하는 저 흔한 폭력적인 시도들은 그 정의상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철거민들에게 용역폭력을 동원하는 자본가들을 구속하라!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들로 하여금 임금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라. 근로조건에 관한 그들 자신의 요구는 노동의 분할(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을 강제하는 자본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수준까지 허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도’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한가한 ‘걱정’을 공유하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저임금이 아닌 ‘생활임금’을 지지한다. 모든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가 이룩한 문명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최저한’의 임금은 바로 그러한 권리를 척도로 산정되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들은 모두의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한다. 우선적으로 공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을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오늘날 의무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수많은 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라. 공교육 내부의 경쟁과 폭력에 시달렸던 수많은 학생들이 ‘대안학교’를 찾아 전전하는 불행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교육 자체가 그들에게 ‘대안’을 제공하도록 요구하자. 그것이 국가가 응당 져야 할 책임이다. 학력 신장을 명목으로 학교에서 자행되었던 흔한 사적 폭력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라. 학교는 시민 양성소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시민적 권리를 우선적으로 교육하라! 무엇보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공교육을 넘어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에 강력히 동의한다. 제 정신을 가진 대학생들은 이제 ‘대학 선진화’라는 미명 하에 캠퍼스를 화려하게 꾸미고 값비싼 상점들을 학내에 들이며 등록금을 인상하는 저 술책들에 더 이상 기만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학과 자본이 상아탑 위에 쌓아올린 이윤은 우리들에게 외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 대학이든 비명문 대학이든 그들이 쌓아올린 이윤은 단지 이 땅의 파행적인 학벌제도와 차별적인 노동시장 구조를 이용하여 갈취한 지대(rent)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위선적인 소수의 명문대학들은 명문대학으로서의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선전하는 저 역겨운 행위를 통해 그들이 제공하는 교육이 단순히 시장에서 제공되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반증해 주었다. 대학은 자본이 아닌 학생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제공하라! 그리고 대학은 그들이 갈취한 이윤을 학내 구성원들, 학생들, 노동자들 모두에게 되돌려라!

 

  네 번째,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청년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재생산’의 ‘책임’을 지고 있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며, 그들의 사회적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느 정치적 세력도 청년들을 단순한 ‘동원’의 대상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 청년들 사이에서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현실인식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들이 청년에게 요구되는 ‘패기’와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공간을 점유해왔던 기성세대 자신의 책임이다. 이제라도 위선적인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사회적 참여할 것을 훈계하는 짓은 중단되어야 한다. 시위와 집회에 나가고 투표를 하는 등의 사회적 참여의 진정한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는 ‘우리들’이 ‘결정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무한정 유예된 사회적 독립과 독자적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각자의 사적영역 속에서 자기계발과 노동에 매진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대의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라. 그들이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 등의 사회적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 이상 부모가 그들을 무한적 부양할 필요가 없어질 때,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과 더불어 그들의 제반 권리를 위해 투쟁의 당위성이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서슴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거리에 나서는 유럽의 청년들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각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라.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진보니 뭐니 하는 공허한 정치적 미사여구에 속지 않을 것이며, 청년들을 본연의 사회적 주체로 진지하게 인정하는 정치세력들만을 진지한 연대의 상대로 고려할 것이다.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사회주의라는 대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위기는 ‘조직’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개인’ 양자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그 동안 진보적 이념을 내세우는 각종 조직과 정치세력들은 그들을 떠받쳐 왔던 개개인들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등한시 해 왔다. 조직들이 진보적 개인들을 추수하기에 급급한 상황 속에서, 반대로 진보적 개인들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무력감과 냉소주의에 빠져들었다. 지난날 촛불시위는 과거의 조직들에 절망한 개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최후의 시도였다. 촛불시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의 자발적인 내면과 의식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반대로 각 조직들은 조직의 재생산이라는 장벽에 부딪히며 대중 동원능력을 급격히 상실해 가고 있다. 그들이 하나 둘 의회전술과 진보 대연합이라는 유혹에 굴복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직들은 자신의 책임과 과오를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상황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문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과 정파를 떠나, 우리들은 진보적 이념을 내거는 각 정치세력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할 것이다. 진보대연합이나 각종 선거공학에 기초한 망상들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앞서 말한 사회주의적 원칙을 분명하게 내거는 세력들만 지지하고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의사를 분명히 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대중들에게 진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자. 조직들로 하여금 그들이 할 일을 하도록,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혹자는 이념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대해, 이념을 분명히 함으로써만 비로소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말로 대답할 것이다. 지금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 사회가 재생산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공통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계급 사회가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공통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만연한 위기의식과 당혹스러운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이념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거리로 나서 당당하게 선언하자. 혹자가 말했듯이, "사회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1만 사회주의자 선언 블로그 : http://blog.jinbo.net/wethesocialist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4/07 20:57 2011/04/07 2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