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마드모아젤 : 이는 프랑스에서 존칭이 아니라 성별에 관한 것. - Marie Darrieussecq 2012. 2. 24 가디언 기사

 

 

 

 

* 가디언지에 실린 칼럼을 번역한 것이다. 원본은 아래 링크. Madame, Mademoiselle: in France these are about sex, not respect

 

 

 

 

  프랑스에서는 남성은 언제나 무슈로, 여성은 언제나 마담 혹은 마드모아젤로 지칭된다. 무슈는 언제나 무슈인데 반해, 마담은 결혼한 여자이고 마드모아젤은 비혼 여자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공식 문서는, 프랑스인들이 시빌리테 [시민권, 공민권과 비슷] (civilitė, 결혼, 시민 여부를 포함하는 단어) 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 이 세 개의 [체크]박스와 함께 인쇄되었다.

 

 

 이번 주에 총리로부터의 공문은 "이런 종류의 구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마담' 이 결혼 여부를 표시하지 않는 남성의 '무슈' 와 동등하게 '마드모아젤' 을 대체한다" 라고 공공기관에 지시했다. 그러나 나는 또다른 공문도 이 끈질긴 실천을 바꿔내지 못할까봐 두렵다. 1967년에, 그리고 1974년에 한번 더 내무부로부터의 공문이 "마담" 이 "무슈" 의 상당어가 되어야 한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상황은 인터넷과 함께 더욱 악화되어왔을 뿐이다. 결혼여부를 묻는 박스에 체크하지 않으면, 그것이 '필수 입력 사항' 이기 때문에 당신은 양식을 제출할 수가 없다. 프랑스의 문서에서, 세금, 사회보장과 각종 예약, 특히 유로스타와 관련해서 나는 그런 일들을 항상 겪게 된다. 영어의 양식에서 나는 MS에 체크할 수 있고 아무도 내 사적인 삶과 관련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물론 "마담"은 매춘굴의 뚜쟁이이기도 하다. 이점에서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마드모아젤" 은 우선적으로 섹슈얼리티의 상태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처녀라는 것. 내 시빌리테[의 체크 박스] 에 표시할 때 나는 사실상 내 섹스라이프에 대한 정보를 요구받는 것이다 - 싱글인지 기혼인지, 교제가 가능한지(available) 아닌지. 이 지점이 정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는 두 개의 페미니스트 그룹이 항의해오던 측면이다.

 

 

    같은 침해가 당신의 이름에도 적용된다. 프랑스 여자가 결혼할 때, 그녀 남편의 이름[성] 을 취할 법적 의무는 전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state)기관은 자동적으로 그녀의 성을 바꿔버린다. 짜증나는 "처녀 적 이름" 칸이 광범위한 주요 행정서류, 봉급명세서, 청구서, 의료기록과 온라인 쇼핑 서비스에까지 등장한다. 나는 내 국가 보험 카드에서 내 진짜 이름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 세금의 경우에는, 지난 2년 동안만 내 이름이 (더이상 어떤 법적 의미도 없는 개념이지만 여전히 사용되는) "가장" 으로 남아 있는 내 남편의 이름 옆에 나타났다.

 

 

 1986년의 프랑스 법은 개인이 그들이 알려진 대로 자신의 이름을 선택할 온전한 자유가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들은 끊임없이 그녀들의 남편의 이름으로, 심지어는 그녀 남편의 성으로 환원되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로버트 듀퐁 부인(Madame)" 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 : 죽음에서조차 여성은 완전히 지워진다.

 

 

  프랑스에서 여성에 대한 친절한 매너(gallantry) 는 여자가 그녀 자신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으로써 "마드모아젤" 로 되도록 오래 불리기를, 그래서 유혹당할 수 있도록, 또는 성관계가 가능하도록 요구한다. 여자를 "마담" 으로 부른 후에 마치 큰 실수를 했다는 듯이 "마드모아젤" 로 고쳐부르는 것은 고전적인 유혹의 대사다.

 

 

  프랑스 여성의 자유는 상당 부분 단어의 문제이며, 나는 이것이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라틴계 언어와 마찬가지로, 남성형은 [프랑스어에서] 형용사의 문법적 일치 등등과 관련해 모든 점에서 우세하다. 우리는 Un Français et trente millions de Françaises song contents; -3천만의 프랑스 여성이 그(남성) 가 없었다면 그랬을 것처럼 [공민권에] 포함되는 대신 그들의 남성 동반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으로 남성형에 귀속되어야만 한다- 라고 말한다.

 

 

   많은 남자들이 우리가 엉뚱한 전장에서 싸우고 있다고, 우리는 동등한 임금이나 유리천장에 맞서 싸워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어는 중요하다(word matter). 비혼 남성이 마드모아젤의 중세 형태인 Ma Demoiselle 처럼 Mon Damoiseau 라는 체크박스에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소년들은 곧 사람들이 자신을 동정성(처녀성)을 암시해서 새라고 부르는 것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43세인 나는, 아직도 문자 그대로 하면 "나의 작은 암컷 새" 라는 뜻인 "마드모아젤" 이라고 불린다. 멋지지 않은가? ==============================================================

 

 

 

 

할 일이 태산인데 어제 좀 기분나쁜 일이 있었기에 기분전환삼아 재밌는 걸 번역하자 하고 시작했더니, 구글독스 모바일에서 작업을 하면서 한문단 작업할 때마다 오류가 나서 그냥 다른 프로그램을 켜고 작업하는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며 끝까지 구글독스로 끝내고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ㅜㅜ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하여간 의역과 오역 왕창.. 특히 중간에 프랑스에서 여성의 자유는 언어의 문제다 뫄뫄뫄라고 하는 부분이 중요한 부분인데 번역이 애매하다. 틀린 것 같다; 그게 프랑스어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가...ㅜㅜ

 

 

또 brothel은.. 집결지나 성노동업소 뭐 이렇게도 할 수 있겠지만 단어 자체가 약간 폄하의 뜻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매춘굴' 로 번역했다. 사실 용어를 몰라서 번역을 잘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왠지 필자가 쓴 대로 최대한 가깝게 해야할 것 같아서 그럴 때가 좀 있는데...예를 들면 인종을 지칭해야 한다면 비백인이라는 말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coloured 라면 유색인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은 그런..하지만 unmarried 는 미혼 말고 비혼으로.. 아니 못한 번역에 뭐 이리 사족이 길담;;

 

 

이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 피곤하므로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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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09:56 2012/02/26 09:56

생각 조각들.

from ... 2012/02/01 03:48
최근 시끄러웠던 일에 대해서 글을 쓸까 했지만 역시 영 내키지 않는다. 괜히 우연히 검색에 걸렸다가 블로그를 난장판으로 엎는 것도 유쾌하지 못한 일이고(물론 글 자체가 유쾌하진 않다). 역시 간단히 몇 가지 생각만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성토하거나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물음표 투성이의 글임을 감안해 주시고 다른 곳에 링크하지 말아주시길. 그리고 가볍고 즐거운 글이 아님은 미리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슬럿워크와 마찬가지로 주체적 선택을 한 것이다' '노출할 자유가 있고 주체적 행동이다' 라는 논거를 들어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당혹스럽다. 그 여성의 자유를 옹호하겠다는 말은, 그 여성이 어떤 옷차림과 행동을 하더라도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옹호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실제로 각오했거나,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한 사람이 불특정 다수에게 그런 식으로 소비당해도 될까? 혹은 본인이 동의했다고 해서 어떤 폭력이든 정당화될까? 그 때문에 방송에서 나온 성희롱적 멘트와 그에 못지 않은 댓글들을 비난할 수 없는 건가.

나는 기본적으로는 슬럿워크 참가자들이 여러 가지 성폭력적 대상화와 시선을 예상치 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대해 가해지는 여러 가지 성희롱들을 비판에서 면제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건 '여자가 야한 옷을 입었으니 나를 유혹한 것이고 따라서 나는 무죄이다' 라고 주장하는 강간범의 자기변호와 뭐가 다를까.)

 

 

-혹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쌍방의 합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지점이(그리고 그 여성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여성혐오는 한참 전에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숱하게 던져진 마초적 농담에서, 세상물정을 모르던 20대 여성들이 우리 덕분에 정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누군가 주장했을 때, 여성은 남성과 달리 후보의 용모에 끌려서 투표를 한다고 방송에서 이야길 했을 때 이미. 그리고 갇혀 있는 사람의 '욕정' 을 해소해야 한다는 농담같은 방식으로 여배우를 동원하자고 주장하고 여성 청취자 전반에게 사진의 형태로 성 상납을 요구했을 때 이미.(물론 그들은 여성혐오같은 건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성을 얼마나 사랑스러워 하고 좋아하는지 열심히 설명할지도 모른다. ) 여기에서 누군가가 사진을 정말로 보냈는지 아닌지, 그 사진에서 신체노출의 정도가 얼마만큼이었는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구분짓기에 대한 강박과 혐오의 표현은 많은 경우 크게 다르지 않고, 한국은 그 둘 다 유독 심하다. 젠더 규범을 강요하고, 거기에 순종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된다.(어느 기준이 누구에게 먼저 강요되었을까.) 예를 들어서, (내뱉기 싫은 비유이지만 스스로를 이해시킬 만한 다른 비유가 없으니 이렇게 말해보자.) 흑인에게 당신네 인종은 체구가 좋으니 힘쓰는 일을 더 많이 해달라는 요청은 인종 차별인가 아닌가. 이 발언이 혐오발언인지 판단하는 데 실제로 인종별 체구와 근력을 판단할 필요가 있는가. 꼼꼼하니까, 섬세하니까, 역시 여자들이 이런 걸 잘 하니까 일터와 가정에서 여성에게 부과되는 감정 노동, 돌봄 노동, 재생산 노동이 차별이라는 것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인식조차 않고 산다. 어느 순간 인지하더라도 몸에 배인 습속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청취자가 듣는 방송에서 여성 전반을 향해 저 남성의 욕정을 풀어달라며 성적 위무를 요청하는 어떤 발화는 혐오 발화가 아닐까? 성욕구는 남성의 본능이니까? 낙화유수가 인간의 본성이니까? (나아가서 여성에게 보조자, 들러리, 꽃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 많은 이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를 내재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산다. 그것이 너무 일상적이라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은 대체로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발화를 절제하는 가식조차도 참 인색한 분위기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성애적 욕망과 여성에 대한 혐오는 종종,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데 혐오에 있어서는 심지어 이성애자 여성들도 전부 예외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종종 이성애자 여성이 성정체성이 굉장히 애매한 위치라고 생각한다. 분명 지배의 위치라고는 볼 수 없는데 적지 않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지배규범에 따라 성적 타자에 대한 혐오를, 심지어 여성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아주 잘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혹은, 나도?)

 

 

-가부장제든 뭐든, 어떤 체제도 피억압자의 주체성을 전부 말살하고 유지되지는 않는다. 체제는 그 존속의 책임을 구성원들에게 돌릴 수 있는 그만큼의 주체성을 언제나 담보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자발적인' 의사표현 중 일부만이 세상에 나오도록 허락받는다는 것이다. 어떤 자발성들은 투명하게 사라진다. 예를 들어 이런 -자발성은 어떤가. 남자 뒤에 서는 대신 폭력에 노출되고 연행되더라도 시위대의 앞에 서고 싶은 자발성, 정치적 이슈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싶은 자발성은 연약하고 순진한, 혹은 그래야 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무시당한다. 거기에 대한 항의에는 누구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그들은 투명하게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다가 어떤 여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남성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고 싶다고 말하는(것처럼 보이는), 오로지 그 순간에만 그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에 대해 보내는 열렬한 지지와 환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저 글은 (사실관계 서술에 문제가 없지 않으나) 그 투명해진 자들의 분노를 보여준다. 그것은 새롭지 않다. 여성주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좀 전형적인 이야기라고 느낄 것이다. 혹은 여성주의에 관심이 없는 여성도 익숙한 상황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건 진영의 차이보다 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보 정당이나 단체에서는 적어도 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선 다른 곳에서라면 넘어가 버릴 성폭력 사건도 수면 위로 많이 올라온다. 그건 분명 선배 여성주의자-활동가들의 투쟁에 힘입어 쟁취한 성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당원이나 활동가가 소외된다고 느끼는 어떤 방식은 비슷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미 구성된 시민-주체의 개념이 여성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성정치의 저 오래된/첨예한 이슈를 기각하고 오직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어떤 여성이 대표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언제나 '일부의 의견을 여성 전체의 것처럼 호도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 중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여성성 전체를 대표하는지 선택하는 것은 단지 숫자인가? 혹은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트위터에서 누군가 신문 기사 두 개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ㅎㄱㄹ신문

ㄱㅎ신문

 

 

첫 번째 기사의 경우, 인터뷰의 교묘한 배치를 통해 어떤 종류의 여성성을 전형적 여성성으로 만든다.(이 지점을 깨닫게 해준 것은 어느 트위터러였다. 그분께 감사.) 작가, 지식인, 예술인(먹물들?)의 부정적인 시선과, '평범한 '2-30대 직장인 여성들의 문제될 것 없다는 시선. 물론 정말 문제없고 불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배치를 통해서 언론이, 여론이, 공적 권위가 특정 의견을 여성 다수의 의견으로, 정상성으로 추인하고 나면 불쾌감을 느낀 이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탓하며 입을 다물 것이다. 항의하기로 한 이들은 '과격하고 예민한 소수' 가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의견을 여성 전체의 것으로 호도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왜 또 다른 종류의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제시하고 싶어하는가. 누가 대표성을 얻어 발언하고 누가 소수가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어디의 누가 가지는가.

 

 

-마지막 조각. 여성이 권력을 차용하는 혹은 공적 발언에 힘을 싣는 방법은 여성성을 최대한 억누르고 남성화 전략을 택하거나, 유혹적인 성적 대상으로서의 매력을 이용하거나, 최대한 가련한 피해자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이다. 더이상 여성이 사적 공간에 유폐되지 않는, 하지만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때때로 셋 중 하나를, 때때로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휘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을 택하든 그 과정에서 그러한 전략들을 선점하지 못한/선택할 수 없는/거부하는 여성들의 발화를 억압한다.

이것을 넘어서 여성주의를 말하고, 또 여성주의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그러니까 첨예하면서도 다른 타자를(다른, 타자, 들이다.) 억압하지 않는 말하기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걸 좀더 생각해 보겠다.

 

 

-이건 그냥 일기다. 그리고 질문은 설득이 아니라 정말로 질문이다. 혹은 실패다.

 

 

-내 언어는 언제나 타협의 언어고, 그래서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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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03:48 2012/02/01 03:48

미뤘던 작년 일기

from ... 2012/01/27 06:53
*진보넷 블로그의 특성이 있다 보니까 내가 쓰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이곳에 놓는 게 어쩐지 죄스런 기분; 하지만 다른 블로그 서비스 중에 이정도의 접근성과 익명성을 보장하는 곳을 딱히 모르다 보니까...음...티스토리?ㅠ 아무튼 또 잡담.

 

 

 

 

모 대학에서 하는 여성주의 인식론 포럼 비슷한 것에 다녀왔다, 작년에.

사실 작년이래봤자 며칠 전이긴 하다. 아직 새 해인 동안에는 낡은 해가 가까워서 좋구나.

 

 

거기는 사실 레퍼런스 사냥을 간 거였는데. 소득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보단 이전까지 내 관심사는 아니었던 한 발표가 이따금 떠오르기에 잊어버리기 위해 적어 둔다. 그건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인종 문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발표는 오전 일정이 끝난 후에도 두 번째 순서였고 나는 조금 나른했다. 단상에서 발표자는 "다소 불편한 말로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다수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백인입니다" 라고 첫 운을 떼었다. 그 순간 나는 등을 꼿꼿히 폈다. 흥미가 동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나는 단상과 가까운 자리, 맨 앞쪽에 앉아 있었다.

 

 

그 연구자는 발표를 진행했다. 아직 미발표된 논문이고 내가 텍스트를 읽지도 않았고 게다가 이 상황을 자주 돌이켜 생각했기 때문에 내 기억이 윤색되었을 수 있으므로, 제목이나 연구자 이름은 여기 적지 않는 게 났겠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발표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행동 양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연구자)에 따르면 백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대체로 인종차별에 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적어도 동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활동 중에 인종적 문제가 예민하게 대두될 때는 행동으로 맞서고 발언하기보다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 즉 백인으로서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완전히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가 오갔다. 이런저런 얘기들, 그런 발표에 나올 수 있는 얘기들이 나왔다. 젠더를 계급과 인종과 같이 사유하기, 혹은 거기에 상존하는 여성 주체 분열의 위험성...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별로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불쾌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 뭐랄까, '흑인 페미니즘' 이나 '제3세계 페미니즘' 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더 그렇겠지만 심정적으로 나는 '백인 페미니즘' 에 더 공감을 잘 하는 편이다.(아...저런 표현들 정말 쓰고 싶지 않은데....) 상상적 동일시에 불과하겠지만 이른바 엘리트(부르주아?ㅋ)코스를 착착 밟은 페미니즘 저자들의 저작에서 감추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고통의 흔적 같은 것.

 

 

어쩌면 그 지점이 내가 인정해야 하는 건데, 받아온 혜택에 비해 내가 별로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이때까지 특권적 위치에 있었던 게 맞다. 인종적으로 비백인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종이 문제되지 않았다는 것 - '외국인'의 형상으로 타자를 맞닥뜨릴 때 이외에는 생활에서 스스로의 인종에 끊임없이 의식하고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어쨌든 보편적 위치의 특권이다.(물론 몸과 신체이미지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평가와 규제에 있어서는 좀 다를 수 있고 유럽-백인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중산층 출신의, 교육받은, 비장애인, 젊은 여성. 이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차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그런 이점들을 이용하면서 지배에 동조하고 규율을 강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페미니즘 저서들에서 백인 여성 학자들의 목소리. 감성을 억누르고, 공적 장에서 감정을 퇴출시키고,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대상을 타자화시키는 남성적 '이성' 에 대한 비판을 지극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수행하는 사람들. 피억압자로서 저항의 주체인 자신과 동시에 억압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상정하면서 주체는 고통스럽게 분열한다. 페미니즘에서 차이와 위치의 정치가 중요한 키워드여서이기도 하고, 그래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나는 중산층-엘리트-백인으로서 나의 위치를 인정한다' 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럴 때 느껴지는 어떤 억눌린 고통의 희미한 흔적들을 나는 정말로 예민하게 수용할 수 있는데, 이런 지점들을 내 것으로 상상하기에 적절한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 그래서일까? 나는 손쉽게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이기성과 몰계급성을 비판하는 사람들보다 '백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가 훨씬 더 연대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내 자신이 누리고 이용하는 특권을 방어하고자 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거기에 저항할 수 있을까.

 

 

질의응답도 끝난 후 같이 갔던 사람이 우리가 참석해서 이 자리를 빛내 줬다며 웃었고(우리들 단 둘만 비백인-히스패닉, 아시안-이었다) 나는 따라 웃었지만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참석자 모두가 백인이었다면, 토론에서 좀 더 의미있는 뭔가가 나올 수 있었을 거다. 나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지만(못했나 ㅎㅎ;)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는 예민하게 비백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의식에서 벗어난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백인들이 모여 있는 편안한 자리에서 좀 더 생산적인 토론이 오갔을 거다. 개인적인 대화에서 참으로 눈치가 없어 종종 실수를 하는 나지만 이런 상황은 기민하게 인식한다(너무 예민하기 느껴지기 때문에 언제나 이것이 내 상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아무도 무례하지 않았고 나도 불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정체성을 모두 탈각하고 오로지 '인종' 으로 환원되는 경험을 페미니즘 세미나에서 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탈식민주의, 인종주의, 이런저런 텍스트들이 갑자기 특정한 상황에서 온몸에 거세게 부딫히며 육화할 때, 나는 한편으로는 익숙한 방식이라고 느끼지만 또 버거워서 자꾸 휘청거린다. 텍스트가 이렇게 몸에 닿아야만 이해하다니, 나는 텍스트로 살기는 힘든 인간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 여하튼, 그러므로, 나는 내 몸이 기억하는 이런저런 트라우마틱한 경험들을, '피해의 전시'로 여겨질까 봐 늘 감추고 숨겨 왔지만 누군가는 '대체 그게 왜 별 일이 되는지 모르겠다' 고 평할 이런저런 경험들을 스스로 발화해야 정리할 수 있겠다고 느낀다. 스스로에 집중하면서 고통에 집중하지 않으려면 일단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말로는 무리고 글로 하겠지만 그중 어떤 것은 끝내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다짐이나 회상들이 자꾸 불빛에 이끌려 방 안에 들어왔다 갇혀버린 나방처럼 몸 안을 맴돌아서 여기다 버렸다. 이제는 잊을 수 있겠지. 그러면 스스로 한 다짐도 어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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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7 06:53 2012/01/27 06:53

블로그를 다시 열다

from ... 2012/01/11 04:04
블로그 할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라고 생각하고 방치하고 있었는데, 그냥 일기장으로 쓰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런고로 영양가 없는 일기가 많이 올라올 예정입니다. 그런데 진보넷 블로그에선 모바일 버전으로는 문단 정리가 안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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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1 04:04 2012/01/11 04:04

 

*잡년행진 Slut walk는 무엇?

슬럿워크 시위는 여성들이 야한 옷을 입고 거리행진시위를 하는 것으로, 올 초 캐나다의 한 경찰관 발언이 불씨가 됐다. “여성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경찰관의 말에 여성들이 분노했다. 슬럿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는 ‘헤픈 여성’ 등을 지칭하는데, 마치 여성들의 야한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말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현지 여성들이 일부러 속옷 차림 등 노출이 과도한 옷을 입고 ‘내 마음대로 입을 권리’, ‘성범죄의 책임은 가해자’ 등을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후 미국 보스턴과 영국 런던, 호주 시드니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잇따랐다.-세계일보.6.26

 

  얼마 한 교사가 등교하는 여고생의 짧은 치마를 지적하며 벗으라고 지시하여 물의를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었다.(기사 : http://news.nate.com/view/20110623n07729)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건전하고 상식적인 시민들 은 고생들의 '하의 실종' 패션에 눈살을 찌푸리며, '저러다가 성범죄의 타깃이 된다' 는 염려 섞인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수는 반라의 차림으로 섹시한 춤을 추는 걸 그룹의 순수한 '삼촌팬' 들이다. 성인들에 대해서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여성 자신들도 노골적으로 섹슈얼한 분위기를 드러낸 차림을 한 여성들을 '헤퍼 보인다' , '싸 보인다' 고 표현한다. 하지만 화장을 아예 하지 않거나 여성적 매력을 전혀 부각시키지 않는 의상을 선호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여기에도 '젊은 아가씨가 좀 멋도 내고 그러는게 좋지 않아?' , 'ㅇㅇ씨는 화장을 좀 하면 참 예쁠 텐데 말이야' 라는 친절하고 자상한 충고가 뒤따른다.

 

  한편에서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으로 가치를 가지고, 다른 편에서는 부정한 것, 가려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런 상황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성폭력을 남성의 본성으로 보면서, 야한 옷을 통해 남성의 욕구를 자극했기 때문에 성폭력이 일어난다는 시각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성폭력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전적으로 남녀간 물리적 힘의 우열관계 때문에 일어난다는 주장도 중요한 지점을 놓친다. 미치도록 더운 날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걸어가는 어린아이를 본 목마른 사람이 아이의 뺨을 때리고 주스를 뺐는 것은, 당연한 생리적 욕구와 육체적 우열관계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나 어린이에게 '너 그러게 왜 그 더운 날 밖에서 주스를 마시면서 걸어다녔냐'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여성에 대해서는? 여성의 옷차림에 따라 성폭력을 가해도 될 여성과 손대선 안될 여성을 구분하는 것은, 응시를 당하는 것은 여성이고 응시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남성이라는 생각에 기반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몇년 전까지 강간에 관한 재판에서 '창녀인줄 알았다' 라는 변명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측면이 있었다는데, 한국은 과연 어떨까? '창녀인줄 알고 실수했다' 는 말에는, 성노동자는 기본적인 인권도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 이 모든 관점은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점을 선포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 중에서 자신은 스스로의 몸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향유하는 주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헌법상의 권리를 완벽히 보장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보편적 인권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비슷한 정도로 나이브한 사람이다.

 

  슬럿워크 시위는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반격하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디어다. 일부러 경멸조의 슬럿Slut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름 붙이기의 정치성'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우다. 즉 오늘날 퀴어queer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모욕적 의미를 띄지 않고 당당한 커밍아웃이나 gay pride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슬럿slut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노동자가 아닌 여성이 자신을 slut 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정숙한 여자/ 헤픈 여자의 구분을 뒤흔든다. 가부장제(라고 부르든 남성중심사회든 뭐든) 는 여성을 타자로 삼아 남성 주체를 발명하며 동시에 여성들을 다시 구분하고 낙인찍어 여성의  쾌락을 통제한다. 여성을 성녀와 마녀, 걸레와 처녀, 된장녀와 개념녀로 나누는 것은 대상화하는 남성-대상화하는 여성 구도를 만들어 여성들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여성내부의 연대를 차단하는 데도 효과적인 전략이다. 슬럿워크는 이 지점을 직접적으로 타격한다.

 

    사실 처음 슬럿워크를 듣고 알게 되었을 때는 거부감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대상화에 저항하기 위한 몸짓이 폭력적인 시선에 의한 또 다른 대상화로 끝나고 마는 것이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체제가 부과하는 규범을 거부하고 마는 순간은 어떻게든 공포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소간 위악적이고 과정된 제스처라도 반향이 두려워서 침묵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참 지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필요할 테니, 좀더 유쾌하고 발랄한 방법이 좋지 않을까. 또한,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은 여성들의 옷차림이 현실의 권력관계와 차별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결국 피해자의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피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하며, 새로운 욕망을 발명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 자신의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그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잡년 행진' 이 필요하다.

 

  *참고

관련기사 :  ‘슬럿워크 시위’ 국내도 상륙한다 - 세계일보

Slut walk Korea 블로그 : http://slutwalkkorea.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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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신문기사 밑에 달린 대부분의 댓글들이 역설적으로 슬럿워크의 필요성을 웅변하고 있다.

++) 여성문제에 좀 집중해서 써 버렸지만, 슬럿워크는 여성 뿐 아니라 성별과 성지향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옷 입고/ 성폭력에서 안전할 권리를 지지한다고 한다. 남성 참가, 복장 도착, 페티쉬는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패션을 환영한다고 하니 사회가 부과하는 '섹시함' '야함' 의 기준에 꼭 맞춰서 참가해야 한다는 강박은 느낄 필요가 없을 듯. 행사의 취지를 지지하는 마음과 자기가 입고 싶은 옷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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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30 19:00 2011/06/30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