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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걷기 2011/06/2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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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12:15 2011/06/23 12:15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명직, 현실문화연구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소래섭, 웅진지식하우스 

<남성성과 젠더>, 권김현영·나영정·루인·정희진·한채윤·엄기호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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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모던뽀이 경성...>은 만문만화를 통해 경성 보기, 라는 기획. 절망으로 채색된 도시 경성은 "테블 우헤 뿌리를 이저버린 꽃의 임종" 처럼, 도무지 미래를 가질 수가 없어서 애수에 휩싸여 있다. "양장하고 고무신 신은 것처럼" 근대와 전근대가 뒤섞이고, 공황을 동시에 겪느라 비참한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몽 파리' 의 환상으로 도피하는 사람들. 근대로의 이행은 시작되었으나 모더니티는 없으되 모더니즘은 충만한 이 도시…와 같은 분위기 잡기. 사실 책이 너무 좋아서 더 이상 책을 늘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파기하고 사 버렸다. 

 ...

 

 

 

  안석영이 본 근대의 여성들은 어떤 모습인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비판에서 모던걸은 단골로 등장하며, '쇼윈도우' 나 미쯔코시 백화점, 찻집을 다니고 옷이나 장신구로 유행을 따르며 몸을 드러내는 옷이나 여우 목도리 같은 생각 없고 소비적인 문화의 퇴폐성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언급된다. (여성성과 부르주아성은 꽤 긴밀히 연결된다.)당시의 무시무시한 검열을 생각해 보면 계급적대에 대한 언급은 그다지 안전한 소재가 아닌 것 같은데 모던걸에 대한 희화화는 안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비판은  양장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서도 '핸드껄' '스틱껄' 이나 남의 첩이 되어 '사나희의 겨드랑이 밑' 에서 살아가려 드는 모던걸들의 이중성에 대한 혐오로 발전한다. 또한 모던걸과의 낭만적인 연애를 꿈꾸다가도(양화공과 그 청공, 인생스케취) 모던걸들의 연애를 문란하다 비판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낭만적 연애에서 형상화되는 모던껄은 '저 가련한 우리의 누이' 이고, 비판받는 모던껄들의 모습은 (상품을, 연애를, 취향을)욕망하는 여성이다.

 

  또한 안석영은 '모던뽀이' 에 대해서는 대체로 모던걸보다 덜 비난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본인이 모던보이였으니까 당연한가...), 남자가 몸치장에 신경쓰는 일이나 자기 기준으로 여성을 여성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나 차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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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는 식민지 조선에서 감정이란 것이 사실상 날조되고 강요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60~80년대 근대화 과정을 관통해 오늘까지 이르고 있음을 밝힌다. 즉 한편에는 생산성 있고, 비정치적이고, 체제에 고분고분한 모범적 모습과 태도로서 '명랑' 의 강조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조선을 타자화했던 일본인들과, 거기에 동조해  조선인들이 한이나 슬픔을 "민족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민족을 실체화할 수 있는 유력한 방어기제" 로서 이용하면서  결국 식민지 조선인들은 식민지 현실이 슬픔을 구성하고, 슬픔은 다시 식민지 현실을 구성하는 모순적 상황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정말로 웃을 수 없어도 웃고 울 정신도 없는데 울어야 했던 것이다.

 

책은 그 상황에서 '웨츄레-스', '버스걸' ''데파트걸' '엘리베이터걸' '빌리어드걸'  등 주로 감정 노동 직업들이 생겨났으며 이것만이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사실 직업여성 = '창녀' 라는 공식이 깨질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시대니만큼, '직업부인' 은 남성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내가 일을 하는 남성은 나가서 다른 남자고객을 수없이 만나며 희롱당할 아내의 모습을 그리느라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남자의 수발을 들어 주는 '핸드껄' '스틱껄' '매니큐어걸' 혹은 '키스걸' 의 모습은 감정노동이 애초부터 성노동, 돌봄노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성질의 것임을 보여준다.(여성이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도 가정에 제공해야 했던 성노동이나 돌봄노동이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임노동으로 변화하지만, 이런 요소가 두드러지는 노동일수록 거의 최하위급의 지위에 있다.)

 

또,  성적대가 두드러지고  남성의 여성화는 그 자체로 경계된다. 여성독자와 남성독자가 서로 <남성무용론>, <여성무용론>을 쓰면서 싸운 게 있는데(참 보는 사람이 부끄러운 악플놀이 같은 걸 신문, 잡지 지상에다 했다...) 당대의 남성들이 여성에게 갖는 적대감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또한 '남편을 택하는 100가지 비결' 이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는, 남성성에 대한 방어심리 : "여자같이 얌전한 남자와 결혼하지 마라. 그런 남자가 아내를 곱게 다룰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남자는 늘 아내를 박박 긁고 괴롭힌다"

 

 

  이쯤에서 마무리로 <남성성과 젠더>로 넘어갈 수 있는데, 책에서 근대적 주체의 기획이란 것이 결국 그 과정에서 의학, 과학, 담론 등등을 동원해 남성이 아닌 것을 배제하고, 여성은 보충 대립쌍으로 타자화하고 그 외의 '퀴어' 한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의 주체는 남성 주체이다.  식민지의 남성들은 이를 어떻게든 성취해보고자 여성을 더욱 더 격렬하게 타자화하기도 하고, 제국의 여성을 증여받기도 하고, 그도 모자라 제국 남성에 대한 동성애적 동경을 불태워 보지만(이광수?) 결국 현실 속에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남성성을 정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노동' 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지점에서 남성 주체는 위기를 맞고 '초식남' 아니면 '괴물' 로 재탄생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2장의 신여성의 남장 시비 부분인데(권김영현)   신여성들이 '단발' 등으로 근대적 육체성을 재현하는 것은 오로지 "로동하는 녀성…그러치 안은 이가 단발한다면 그것은 허영" 이라는 식으로, 남성성을 근대의 "노동하는 육체" 에 어울리는 것으로 판별하고 남성성을 재현할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노동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사실 젠더적대가 여성주의의 핵심이라고 보는 시각에 회의적이기도 하고, 요새 일부 잉문학계에서 유행하는 '성차의 진리' 론에 대해서도 약간 의심이 간다.(물론 그걸 어떻게든 풀어내려면 바디우든 누구둔 하여간 더 읽어야...)

 

  여성이나 청소년/청소녀 이슈를 말할 때 대체로 근대의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을 가져오는 일이 많은데, 사실상 이들이 이런 '보편적' 인권을 제대로 누려 본 역사가 없기 때문에 인권 개념 확대를 말하는 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주체가 구성된 과정을 생각해 보면, 다른 자들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자꾸 드는 의심은 이 기획이, 이것저것 편한대로 낑궈넣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만만한 걸까. 여성이 배제되어 있으면 여성을 넣고 퀴어가 배제되어 있으면 퀴어를 넣고 미성년자도 넣고...그러면 평등하게 서로를 타자화시키면서 살면 되는 건가, 과연? 뭐 역설적으로 보편적 인권을 통해 주체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가 결국 근대적 주체의 허구성을 드러내 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서 지금 당장은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성차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차가 과대평가되었다 라고 말을 할 때, 결국 섹스=타고난 성/ 젠더=사회문화적인 성이라는 도식을 넘어 우리는 성차 자체가 구성되었던 지점, 어떤 기준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돌아갈 지점이 근대가 아닐까 하는  진부한 생각이 든다. 그

  

 우리가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으로서 근대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았던 여자인간과 남자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확인하고 목격하고 살아온 자의 증언으로 듣고 기록하고 기억하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주체의 자리에 대한 집착을 비우고 행위들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권김영현,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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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01:36 2011/06/17 01:36

6/17 일기. 않는다.

from 분류없음 2011/06/17 00:02

1. 아산 부산 명동 서울대 강남...아, 영등포도 있구나.

당장이라도 뭔가 벌어질 듯한 급박한 나날들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 이 시대가 뭔가 전환점이라는, 더 버틸 수 없겠다는,  혹은 봉기가 임박했다는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평화로운 시대에도 이런 상상을 하는 젊은이들은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3. 내가 지금 공부하겠다고 설치는 건 운동에 투신하지 않기 위해(혹은 하기 귀찮아서) 만들어낸 알리바이가 아닌가? 라는 질문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 봐도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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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00:02 2011/06/17 00:02

너무 졸려서 글을 쓸 수 없어! 그냥 잊어버리지 않게 간단히 기록. 번호만 붙인건 나왔던 얘기들이고 생각 뒤에 있는 건 내 생각이다…라고 해도 섞였나?;

 

1.  이름 붙이기의 정치성/성노동자 내의 계급

 

생각:  성노동에 대한 낙인이 (경제적, 성적) 지배 관계를 공고화. 아울러, 성노동자 내의 계급은 경제적 잣대도 있지만 도덕적 잣대도 존재함. 즉 ‘매춘부’, 집결지여성과 일패기생, 코르티잔, 텐프로 등등이 상대하는 고객(?) 수가 다름. 성노동에 대한 낙인찍기 자체에 이성애 모노가미 강화의 의도가 들어 있지 않은가?

 

2. 남성 성노동자와 여성 성노동자 묘사의 차이(비스티 보이즈/너는 내 운명)

생각 : 피해자화로 인한 비주체화는 경계해야 하는 것. 그러나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동정적 시선이나 남성/여성 성노동자에 대한 서로 다른 묘사는 젠더 권력관계를 반영한 솔직한/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점도 생각해야. 물론 이를 긍정할 수는 없음.

 

3. 스포츠선수, 열정노동자, 서비스업 종사자와 성노동자의 유사점/차이점
스포츠선수 연봉제의 기원(?)과 현실에서 운영되는 부분에 대해서. 자영업 등록 형태의 노동에 대해서. 그리고 성노동과 서비스업, 둘 모두 서비스만 파는 것이 아닌 인간의 지배욕(?)을 상품화시키고 충족시켜 준다는 공통점.

 

생각 : 스포츠선수와 성노동자의 노동과 계약 형태의 유사점이 내 생각보다 크고 알아봐야 하는 지점임. 동시에 모든 서비스업 혹은 ‘감정 노동’ 종사자의 노동이 사실상 고객의 지배욕? 과시욕? 우월감? 을 충족시키는 면이 있다는 것 듣고 성찰할 수 있었음. 그리고 중요한거, 서비스업, 감정노동은 젠더화되어 있다!

 

4. 몸을 판다/ 서비스를 판다.
서비스를 거래하는 것인데도 구매자/판매자 모두 몸을 사고판다고 생각하는 현실
장기매매, 매혈 등과 대리임신 그리고 성노동, 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생각 : 거래되는 것은 서비스이다, 라고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의해선 안됨. 이것이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지향점으로 가져갈 생각해야. 안그럼 인간은 모두 자유롭다고 전제해 버려서 현실적으로 안 자유로워지는 자유주의 같은 모양 될 수 있음.

 

5.성노동자 권리에 대한 긍정과 별개로 성거래 자체에 대한 도덕적 쟁점
  성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긍정 필요하고 성노동에 대한 낙인에 젠더 적대가 개입해 있다고 하더라도, 성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 과연 옳은가.

 

생각 : 지금으로선 성노동자에 대한 탈주체화/낙인찍기에 젠더적대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할 필요 있음.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생계를 위해 성노동을 해야 하는  사회를 긍정할 수는 없음(지금 현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중간 이행단계 정도로는 생각을 해보겠지만). 성노동을 자발적 봉사나 어쩌면 부업의 형태로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좀더 가치론적으로 성찰을 해보겠다. 일단 지금은 딱히 공적으로 반대할 것 같지는 않다.

 

6. ‘노동’ 쟁점과 ‘성’ 쟁점 그리고 성노동자의 권리
여러 가지 얘기를 했었는데;; 아 기억력;;

 

생각 : 성과 노동이라는 관점이 맞부딪히는 첨예한 지점. 당연히 말 많고 탈 많음. 경제학적 분석 필요함. 노동에 대한 정의내리기는 노동의 재정의와 맞닿음. 이는 다시 자영업, 서비스업, 감정노동, 가사노동 등과 맞닿음.


한가지 분명한 것, 여성노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절하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성노동 의제를 가지고 가는 것은 위험하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성노동자의 권리 옹호에 크게 두 가지 노선이 있는데
 

 

1) 노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갈 때
이때 뒤이어 성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 노동 3권 등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아울러 자발적 성노동자들의 주체화.

 이것은 성노동 의제 단독으로는 무리고 노동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의 필요하다 생각. 물론 비생산적 노동(맞나?) 자의 처우 문제와도 일정 부분 연관되어 있음. 그러나 성노동을 노동으로 공식적(?) 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려면 광범위하게 돌봄 노동, 감정 노동 등 전통적으로 여성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영역에 대한 재평가와 이것을 임노동으로 인정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 그러나 이렇게 젠더 노동을 경제적으로 의제화 시키는 것의 현실적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만약 이것이 현실로 실현되면 실질적으로 성분업이나 젠더 적대를 오히려 강화하지 않는가? 안그래도 남편에 대한 미소나 정서적 지지 등등 무대가성 ‘감정 노동’이나 '돌봄 노동' 을 여성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시선이 있는데(오늘도 나옴) 나는 이것이 반여성적이라고 봄.

 

 

2) 노동보다 보편적 권리에 초점을 맞추기.
즉 성노동자로서라기보다 보편 인권으로서. 이때 보편 인권은 공허한 자유주의여서는 안됨. 비선별적, 무조건적 복지, 무상의료 무상교육, 광범위한 기본소득 등등.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논의를 가져가면 성노동이라는 의제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좌파는 성매매에 대해 생각할 수 없...

 

나는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함. 그리고 성노동 의제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성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7. 성노동자와 비 성노동자 여성의 적대
성노동자에 대해서 가정을 깬다, 노동이 될 수 없는 행위이다 라는 적대감

생각 : 이성애 결혼제도 안에 안착한 여성 입장에서 성노동자가 위협적이라는 것 당연. 어려운 문제고, 성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젠더적/경제적 억압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 그러나 어떻게????

 

그밖에 오늘 알게 된 것 : 성노동 연구는 생각보다 새로운 분야이고 축적자료가 비교적 적다. 그리고 성노동은 한글프로그램에서 빨간줄이 그어지는 단어다.

 새로운 고민 : 경제학 공부를 해야겠고 여성주의에서 노동 개념에 대해 더 알아보자. 성노동자의 처우 개선이 제3세계 여성에게 성노동을 전가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우리는 가사 육아 출산 등등을 그들에게 이전시키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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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00:39 2011/06/14 00:39

 공부도 안 되고 그냥 책을 도구삼아 퇴행하고 있다. 요사이는 근대 떡밥이 재미지다.

 거기에 대해선 숱한 서로  다른 지형도가 있으니...일단 지금 당장 관심이 가는 것은 '모던껄' 이다. 근대는 여성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가? 혹은 여성이 어떻게 근대를 규정지워 주었는가 하는 것. 그러나 정작 읽은 책들은 그와 별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구나...; 재미있었으니까 뭐...

 라고 해도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든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지민(이지형), 문학동네

 

  이 책에 대한 평 중에 '시대 재현에 충실했다' 라는 것은 없다. 일제강점기 배경의 서사들이 흔히 띄는 숨막히는 애수와 근엄한 비장미 같은 것도 찾기 힘들다. 왜 하필 이 시대를 배경으로 이런 책을 썼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한데, 작가는 그에 대해 확고한 생각이 있는 듯. 책 속 인터뷰에 인용된 작가의 말은 한국 사회를 "슬로건과 표어의 사회" 로 정의한다.

 

'하면 된다', '휴지는 휴지통' 에서부터, 세계화, 정보화, 인터넷 대한민국까지. 교실, 사무실, 길거리, 신문, TV, 심지어 껌 포장용지에까지, 눈 돌아가는 곳 어디에나 붙어 있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목표들. 온 사회가 마치 수험생의 책상머리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물론, 한 세기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역사적 비극과 시련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그 정도의 의식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해서 학습하고 터득해서 일정 궤도에서 부지런히 빙빙 돌기를 강요하는 그 모든 표어 딱지들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 저는 이런 저의 지긋지긋한 못 견딤을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 그래서 전 역설적이게도 그 넘쳐나는 대의명분을 뚫고 가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이 가장 치열하고 맹렬하게 살아 날뛰던 우리 역사의 최고 암흑기로 시간여행을 가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리의 많은 부분을 규정했던 시대, 그리고 저항과 고통의 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들었던 시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거의 항상 충실하게 슬로건들을 되새기고 내면화한다.  이 소설은 의식적으로, 다소 위악적으로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 좋아 이런거 좋아...설정이 모에요소로 가득 차 있어... 가볍게 나풀거리는 주인공 이해명은 도무지 "역사의식"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인이다('나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구두, 깨끗한 모자, 세련된 양복 차림으로 경성을 날아 다니며 사랑을 찾아 헤메는 이 쿨한 모던보이에게 식민지인으로 조선 총독부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다지 고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죽었기에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고, 그에게 총독부의 푸른 돔 지붕은 대한제국이나 조선의 무덤이 아니라  '나의 둥그런 푸른 무덤' 이다. 결국 소설 말미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거기서 도망치는 것 같다. " '나의 둥그런 푸른 무덤' 은 총독의 무덤도 그 누구의 무덤도 아닌, 바로 나의 무덤이므로, 묻힌다면 나 혼자만이 묻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 도망쳤는가?  한 걸음 물러서서 소설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그리는 지도는 부채꼴로밖에 못 걷는 사람이 걸어간 길을 이은 것처럼 묘하게 한 곳을 향한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일본의 벨 에포크 시대를 맞아 부르주아적 데카당을 온몸으로 재현하는 듯한 유키코의 남편은 총독부 국장으로 시대에 고뇌하는 지식인이다. 낭만적 감수성으로 유키코와 사랑에 빠져있는 신스케도 역시 극동민족소년척후대에게 거짓 노래를 지어내 준 에피소드를 들먹이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나르시즘을 재현한다. 이해명은 다른 곳 아닌 조선총독부  대경성신도시계획회의 연구부서에서 일힌다. 그는 경성의 지도 위로 줄과 금을 그어 경성을 재단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를 지옥까지라도 따라가겠다는 '낭만의 화신' 이고 게다가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난파선' 은 조선의 독립을 향하여 장렬하게 돌진한다. 소설은 기이하게 전경과 배경을 겹치고 시대는 불쑥 전경이 되었다 배경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이해명은 생각 없고 개념 없는 모던보이를 단호하고 정련된 방식으로 연기함으로써 그 모든 시대를, 배경을 배반한다. 그러나 이 배반은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가 배반한 것들은 다시 전경으로 돌아온다. 결국 우리는 하루키를 가질 수 없는가. 뭐 내가 원한다는 건 아니고 사실은 오히려 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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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1 01:10 2011/06/11 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