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뤘던 작년 일기

from ... 2012/01/27 06:53
*진보넷 블로그의 특성이 있다 보니까 내가 쓰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이곳에 놓는 게 어쩐지 죄스런 기분; 하지만 다른 블로그 서비스 중에 이정도의 접근성과 익명성을 보장하는 곳을 딱히 모르다 보니까...음...티스토리?ㅠ 아무튼 또 잡담.

 

 

 

 

모 대학에서 하는 여성주의 인식론 포럼 비슷한 것에 다녀왔다, 작년에.

사실 작년이래봤자 며칠 전이긴 하다. 아직 새 해인 동안에는 낡은 해가 가까워서 좋구나.

 

 

거기는 사실 레퍼런스 사냥을 간 거였는데. 소득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보단 이전까지 내 관심사는 아니었던 한 발표가 이따금 떠오르기에 잊어버리기 위해 적어 둔다. 그건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인종 문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발표는 오전 일정이 끝난 후에도 두 번째 순서였고 나는 조금 나른했다. 단상에서 발표자는 "다소 불편한 말로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다수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백인입니다" 라고 첫 운을 떼었다. 그 순간 나는 등을 꼿꼿히 폈다. 흥미가 동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나는 단상과 가까운 자리, 맨 앞쪽에 앉아 있었다.

 

 

그 연구자는 발표를 진행했다. 아직 미발표된 논문이고 내가 텍스트를 읽지도 않았고 게다가 이 상황을 자주 돌이켜 생각했기 때문에 내 기억이 윤색되었을 수 있으므로, 제목이나 연구자 이름은 여기 적지 않는 게 났겠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발표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행동 양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연구자)에 따르면 백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대체로 인종차별에 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적어도 동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활동 중에 인종적 문제가 예민하게 대두될 때는 행동으로 맞서고 발언하기보다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 즉 백인으로서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완전히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가 오갔다. 이런저런 얘기들, 그런 발표에 나올 수 있는 얘기들이 나왔다. 젠더를 계급과 인종과 같이 사유하기, 혹은 거기에 상존하는 여성 주체 분열의 위험성...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별로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불쾌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 뭐랄까, '흑인 페미니즘' 이나 '제3세계 페미니즘' 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더 그렇겠지만 심정적으로 나는 '백인 페미니즘' 에 더 공감을 잘 하는 편이다.(아...저런 표현들 정말 쓰고 싶지 않은데....) 상상적 동일시에 불과하겠지만 이른바 엘리트(부르주아?ㅋ)코스를 착착 밟은 페미니즘 저자들의 저작에서 감추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고통의 흔적 같은 것.

 

 

어쩌면 그 지점이 내가 인정해야 하는 건데, 받아온 혜택에 비해 내가 별로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이때까지 특권적 위치에 있었던 게 맞다. 인종적으로 비백인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종이 문제되지 않았다는 것 - '외국인'의 형상으로 타자를 맞닥뜨릴 때 이외에는 생활에서 스스로의 인종에 끊임없이 의식하고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어쨌든 보편적 위치의 특권이다.(물론 몸과 신체이미지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평가와 규제에 있어서는 좀 다를 수 있고 유럽-백인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중산층 출신의, 교육받은, 비장애인, 젊은 여성. 이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차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그런 이점들을 이용하면서 지배에 동조하고 규율을 강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페미니즘 저서들에서 백인 여성 학자들의 목소리. 감성을 억누르고, 공적 장에서 감정을 퇴출시키고,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대상을 타자화시키는 남성적 '이성' 에 대한 비판을 지극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수행하는 사람들. 피억압자로서 저항의 주체인 자신과 동시에 억압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상정하면서 주체는 고통스럽게 분열한다. 페미니즘에서 차이와 위치의 정치가 중요한 키워드여서이기도 하고, 그래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나는 중산층-엘리트-백인으로서 나의 위치를 인정한다' 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럴 때 느껴지는 어떤 억눌린 고통의 희미한 흔적들을 나는 정말로 예민하게 수용할 수 있는데, 이런 지점들을 내 것으로 상상하기에 적절한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 그래서일까? 나는 손쉽게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이기성과 몰계급성을 비판하는 사람들보다 '백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가 훨씬 더 연대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내 자신이 누리고 이용하는 특권을 방어하고자 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거기에 저항할 수 있을까.

 

 

질의응답도 끝난 후 같이 갔던 사람이 우리가 참석해서 이 자리를 빛내 줬다며 웃었고(우리들 단 둘만 비백인-히스패닉, 아시안-이었다) 나는 따라 웃었지만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참석자 모두가 백인이었다면, 토론에서 좀 더 의미있는 뭔가가 나올 수 있었을 거다. 나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지만(못했나 ㅎㅎ;)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는 예민하게 비백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의식에서 벗어난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백인들이 모여 있는 편안한 자리에서 좀 더 생산적인 토론이 오갔을 거다. 개인적인 대화에서 참으로 눈치가 없어 종종 실수를 하는 나지만 이런 상황은 기민하게 인식한다(너무 예민하기 느껴지기 때문에 언제나 이것이 내 상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아무도 무례하지 않았고 나도 불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정체성을 모두 탈각하고 오로지 '인종' 으로 환원되는 경험을 페미니즘 세미나에서 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탈식민주의, 인종주의, 이런저런 텍스트들이 갑자기 특정한 상황에서 온몸에 거세게 부딫히며 육화할 때, 나는 한편으로는 익숙한 방식이라고 느끼지만 또 버거워서 자꾸 휘청거린다. 텍스트가 이렇게 몸에 닿아야만 이해하다니, 나는 텍스트로 살기는 힘든 인간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 여하튼, 그러므로, 나는 내 몸이 기억하는 이런저런 트라우마틱한 경험들을, '피해의 전시'로 여겨질까 봐 늘 감추고 숨겨 왔지만 누군가는 '대체 그게 왜 별 일이 되는지 모르겠다' 고 평할 이런저런 경험들을 스스로 발화해야 정리할 수 있겠다고 느낀다. 스스로에 집중하면서 고통에 집중하지 않으려면 일단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말로는 무리고 글로 하겠지만 그중 어떤 것은 끝내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다짐이나 회상들이 자꾸 불빛에 이끌려 방 안에 들어왔다 갇혀버린 나방처럼 몸 안을 맴돌아서 여기다 버렸다. 이제는 잊을 수 있겠지. 그러면 스스로 한 다짐도 어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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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7 06:53 2012/01/27 0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