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명직, 현실문화연구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소래섭, 웅진지식하우스 

<남성성과 젠더>, 권김현영·나영정·루인·정희진·한채윤·엄기호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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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모던뽀이 경성...>은 만문만화를 통해 경성 보기, 라는 기획. 절망으로 채색된 도시 경성은 "테블 우헤 뿌리를 이저버린 꽃의 임종" 처럼, 도무지 미래를 가질 수가 없어서 애수에 휩싸여 있다. "양장하고 고무신 신은 것처럼" 근대와 전근대가 뒤섞이고, 공황을 동시에 겪느라 비참한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몽 파리' 의 환상으로 도피하는 사람들. 근대로의 이행은 시작되었으나 모더니티는 없으되 모더니즘은 충만한 이 도시…와 같은 분위기 잡기. 사실 책이 너무 좋아서 더 이상 책을 늘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파기하고 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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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석영이 본 근대의 여성들은 어떤 모습인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비판에서 모던걸은 단골로 등장하며, '쇼윈도우' 나 미쯔코시 백화점, 찻집을 다니고 옷이나 장신구로 유행을 따르며 몸을 드러내는 옷이나 여우 목도리 같은 생각 없고 소비적인 문화의 퇴폐성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언급된다. (여성성과 부르주아성은 꽤 긴밀히 연결된다.)당시의 무시무시한 검열을 생각해 보면 계급적대에 대한 언급은 그다지 안전한 소재가 아닌 것 같은데 모던걸에 대한 희화화는 안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비판은  양장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서도 '핸드껄' '스틱껄' 이나 남의 첩이 되어 '사나희의 겨드랑이 밑' 에서 살아가려 드는 모던걸들의 이중성에 대한 혐오로 발전한다. 또한 모던걸과의 낭만적인 연애를 꿈꾸다가도(양화공과 그 청공, 인생스케취) 모던걸들의 연애를 문란하다 비판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낭만적 연애에서 형상화되는 모던껄은 '저 가련한 우리의 누이' 이고, 비판받는 모던껄들의 모습은 (상품을, 연애를, 취향을)욕망하는 여성이다.

 

  또한 안석영은 '모던뽀이' 에 대해서는 대체로 모던걸보다 덜 비난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본인이 모던보이였으니까 당연한가...), 남자가 몸치장에 신경쓰는 일이나 자기 기준으로 여성을 여성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나 차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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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는 식민지 조선에서 감정이란 것이 사실상 날조되고 강요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60~80년대 근대화 과정을 관통해 오늘까지 이르고 있음을 밝힌다. 즉 한편에는 생산성 있고, 비정치적이고, 체제에 고분고분한 모범적 모습과 태도로서 '명랑' 의 강조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조선을 타자화했던 일본인들과, 거기에 동조해  조선인들이 한이나 슬픔을 "민족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민족을 실체화할 수 있는 유력한 방어기제" 로서 이용하면서  결국 식민지 조선인들은 식민지 현실이 슬픔을 구성하고, 슬픔은 다시 식민지 현실을 구성하는 모순적 상황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정말로 웃을 수 없어도 웃고 울 정신도 없는데 울어야 했던 것이다.

 

책은 그 상황에서 '웨츄레-스', '버스걸' ''데파트걸' '엘리베이터걸' '빌리어드걸'  등 주로 감정 노동 직업들이 생겨났으며 이것만이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사실 직업여성 = '창녀' 라는 공식이 깨질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시대니만큼, '직업부인' 은 남성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내가 일을 하는 남성은 나가서 다른 남자고객을 수없이 만나며 희롱당할 아내의 모습을 그리느라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남자의 수발을 들어 주는 '핸드껄' '스틱껄' '매니큐어걸' 혹은 '키스걸' 의 모습은 감정노동이 애초부터 성노동, 돌봄노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성질의 것임을 보여준다.(여성이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도 가정에 제공해야 했던 성노동이나 돌봄노동이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임노동으로 변화하지만, 이런 요소가 두드러지는 노동일수록 거의 최하위급의 지위에 있다.)

 

또,  성적대가 두드러지고  남성의 여성화는 그 자체로 경계된다. 여성독자와 남성독자가 서로 <남성무용론>, <여성무용론>을 쓰면서 싸운 게 있는데(참 보는 사람이 부끄러운 악플놀이 같은 걸 신문, 잡지 지상에다 했다...) 당대의 남성들이 여성에게 갖는 적대감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또한 '남편을 택하는 100가지 비결' 이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는, 남성성에 대한 방어심리 : "여자같이 얌전한 남자와 결혼하지 마라. 그런 남자가 아내를 곱게 다룰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남자는 늘 아내를 박박 긁고 괴롭힌다"

 

 

  이쯤에서 마무리로 <남성성과 젠더>로 넘어갈 수 있는데, 책에서 근대적 주체의 기획이란 것이 결국 그 과정에서 의학, 과학, 담론 등등을 동원해 남성이 아닌 것을 배제하고, 여성은 보충 대립쌍으로 타자화하고 그 외의 '퀴어' 한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의 주체는 남성 주체이다.  식민지의 남성들은 이를 어떻게든 성취해보고자 여성을 더욱 더 격렬하게 타자화하기도 하고, 제국의 여성을 증여받기도 하고, 그도 모자라 제국 남성에 대한 동성애적 동경을 불태워 보지만(이광수?) 결국 현실 속에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남성성을 정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노동' 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지점에서 남성 주체는 위기를 맞고 '초식남' 아니면 '괴물' 로 재탄생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2장의 신여성의 남장 시비 부분인데(권김영현)   신여성들이 '단발' 등으로 근대적 육체성을 재현하는 것은 오로지 "로동하는 녀성…그러치 안은 이가 단발한다면 그것은 허영" 이라는 식으로, 남성성을 근대의 "노동하는 육체" 에 어울리는 것으로 판별하고 남성성을 재현할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노동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사실 젠더적대가 여성주의의 핵심이라고 보는 시각에 회의적이기도 하고, 요새 일부 잉문학계에서 유행하는 '성차의 진리' 론에 대해서도 약간 의심이 간다.(물론 그걸 어떻게든 풀어내려면 바디우든 누구둔 하여간 더 읽어야...)

 

  여성이나 청소년/청소녀 이슈를 말할 때 대체로 근대의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을 가져오는 일이 많은데, 사실상 이들이 이런 '보편적' 인권을 제대로 누려 본 역사가 없기 때문에 인권 개념 확대를 말하는 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주체가 구성된 과정을 생각해 보면, 다른 자들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자꾸 드는 의심은 이 기획이, 이것저것 편한대로 낑궈넣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만만한 걸까. 여성이 배제되어 있으면 여성을 넣고 퀴어가 배제되어 있으면 퀴어를 넣고 미성년자도 넣고...그러면 평등하게 서로를 타자화시키면서 살면 되는 건가, 과연? 뭐 역설적으로 보편적 인권을 통해 주체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가 결국 근대적 주체의 허구성을 드러내 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서 지금 당장은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성차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차가 과대평가되었다 라고 말을 할 때, 결국 섹스=타고난 성/ 젠더=사회문화적인 성이라는 도식을 넘어 우리는 성차 자체가 구성되었던 지점, 어떤 기준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돌아갈 지점이 근대가 아닐까 하는  진부한 생각이 든다. 그

  

 우리가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으로서 근대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았던 여자인간과 남자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확인하고 목격하고 살아온 자의 증언으로 듣고 기록하고 기억하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주체의 자리에 대한 집착을 비우고 행위들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권김영현,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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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01:36 2011/06/17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