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회에 의한 자녀보육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를 떠나서 살아갈 수 가 없다. 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사회의 물질적인 혜택에 의존하며, 사회의 윤리와 도덕적인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발전방향을 가지며, 더 낳은 삶을 향한 도전을 준비하고 시작한다. 사회는 그들의 삶속에서 전쟁터이며, 안식처이고,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자신의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던, 불의의 사건으로 인하여 태어나던 우리들의 2세들은 귀엽고 앙증맞다. 자녀들에 대한 애정은 부모들의 경제적인 박탈감이나, 성적인 학대, 사회적인 불평등에 대한 불만 등으로 인한 자신들의 존재와 사회적인 흐름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 인하여 계급사회의 힘은 사랑을 소유욕구로 분출시키면서, 소유에 대한 독점욕구와 지배적인 욕구와의 결합으로 부모의 권위에 경제와 육체적인 면에서의 지배 종속 될 수밖에 없는 자녀들은 그 안에서 발전과 퇴보가 시작된다. 계급사회에서의 발전은 가족의 발전을 통한 교육 및 보호를 하는 부모들을 개인적인 욕구로 만들어 자신들만의 성으로 지킴을 강요한다. 폐쇄성은 사회를 위한 진보가 아니며 독립되어 있는 신을 불러 일으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차별화와 그에 따르는 모순을 극대화시키면서 또 다른 사회성을 만들어 낸다. 개인과 사회의 충돌은 개인의 합리주의라는 명분으로 강화시키고, 합리성은 지배계급을 위한 무한착취체제를 옹호하게 만든다.


효는 나라의 근간이며, 효자 집안에 충신이 난다라고 예전의 유교적인 풍토에서 주장되고 있지만, 효자 3대면 집안을 말아 먹는다는 말도 존재한다. 효는 자신들의 재테크의 하나이며, 유교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며 개인에 대한, 가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자신들이 지어야만 하는 현실에 기초를 한다.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자신들의 노후에 대한  혜택의 일환으로 보기는 것이 가장 크지만, 자신들이 못 다한 꿈을 이루게 하는 대리만족의 효과로 기대하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며,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윤리적 강요로 가족의 힘이 나타난다. 자신들이 원하는 교육을 위해 하나의 개체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또한 부모, 특히 경제적인 부분을 남편에게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서의 형태는 자신의 삶이 반영된 모습으로써 자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자녀가 자녀로서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 또 하나의 자신들의 삶속에서의 주체임을 알면서도 그 족쇄를 벗어 던지지 못하며, 족쇄를 강화 하면서 그 틀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쁘띠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교도소에 가면 범죄자들도 예가 있어 존속상해는 개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존속상해, 즉 자신의 부모를 폭행 및 살인을 하는 경우는 경제적인 문제가 주요 원인이다. 그것의 핵심뿌리는 대리만족을 통한 부모의 교육이 사회공동체를 통한 것이 아닌, 자녀들의 경제적인 삶이 윤택하게 하기위한 노력만을 강조하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제치고 가야하는 상대이며, 적이라는 교육을 강조하며,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요 해왔기 때문인 것이다. 사회적인 생활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혈육의 만족적인 생활만을 강조가 하기 때문이다. 계급사회에서는, 특히 자본주의사회의 핵가족화는 산업사회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경제적인 종속과 자립의 형태의 모순을 제시하며, 공동체적인 유순함보다는 개인적인 활달함을, 공동체의 경제적인 물질적인 번영보단,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져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망을 우선시하게 되는 모습에서, 가족의 유대는 가족의 유대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져 언젠가 마모되면 교체해야 한다는 사상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다 다 퍼주었던 시절에서 노인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노후 대책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이젠 상식이 되었다.

또 다른 모습에서 여성은 경제적, 물질적인 종속 속에서 남편과의 사별과 이혼의 상징을 가지고 자녀들에 대한 양육과 보호 그리고 미래에 대한 문제에 부딪힐 때, 계급사회에서는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하며, 결손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문제는 문제아를 양성한다는 편견을 심어주어, 여성에 대한 자녀들의 지극한 사랑을 광기 적으로 만들어 또 다른 종속을 만든다. 황혼 이혼의 증가는 문제아를 만들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인 것이다.


사회적 동물은 사회에서 책임을 져야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문제는 이윤의 발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사회적 공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하소연으로 그친다. 사회주의 국가의 교육의 시작은 개인을 위한 개인주의를 사회화, 사회성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에 대한 보육을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그들을 공동체적인 삶의 방향으로 이끌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터를 닦아 갈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아파트, 부모들이나 교육자들 그리고 청소년들을 위한 삶, 교육자들의 성격학적 재구조화, 자신들의 활동이나 존재를 대중의 성격학적 무력함에 근거하려 하는 모든 경제적 경향에 대한 비판, 결국은 독립적인 어른으로 자라나게 할 어린이 교육에서 자기조절 등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 하였다. 이것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에서 커다란 혁명의 시작일 것이다." (성혁명 제4판 서문 중에서 빌헬름 라이히)


사회주의는 무계급사회로 가는 과도기에 존재한다.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는 이전의 소수만이 가지고 있던 지위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면서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이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보다는 사멸해가는 계급의 존재의 위치로서 지위를 차지한다. 사회주의는 무계급사회 이전까지의 변화중의 핵심은 공동체 사회로의 진행이며, 개인주의와 계급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사멸화이다. 그의 핵심은 가족이며 이의 대물림에 의한 체험학습이다. 가족의 형성은 사랑의 매개로 인하여 형성되어진 것은 얼마 안 되며 아직까지도 가족의 내용은 계급사회의 지배욕인 소유하고, 전유하고자 함께 있는 것이다. 권력은 가부장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자의 권력에 대한 횡포는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위함이며, 체통을 지키고자 하는 위함이며, 명예를 세우고자하는 위용이며, 규율을 바로잡기 위함이기에 가부장제적인 가족은 해체되어야하며, 그 내용으로서 자녀들의 사회가 책임지는 보육은 이전까지 해왔던 생활관습을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인 적응과 사회성의 발전을 계급사회의 규율적인 개인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시킬 수 있는 기초가 제공된다는 점이다.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은 지배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따르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따지고 보면 세 가지 색상으로 존재하는 빛의 속성이며, 하나로 모아지면 결국에 하얀 빛으로 모아진 것처럼 다원주의를 표방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세상을 유지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의 유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반박하는 것으로 만하는 것이 아니면, 얼굴을 바꾸면서 여러 가지 속성으로서 나타나며,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비판함과 동시에 새로운 얼굴로 진보의 색상을 띠고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내용은 이윤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교육은 내용을 덮어 쉬우고, 포장을 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시킨다. 계급사회에서의 자녀에 대한 교육은 부모의 권리와 의무로서 책임을 지고 전담하고 있으며, 육아기 에는 유치원 탁아소에, 청소년기에는 학교에 위탁교육시킴으로서 명목을 유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의 획득을 위한 공인된 장소에 자녀들을 맡김으로서 자녀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더욱더 커지면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유지 한다는 명목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활동을 강제 받으면서 교육에 대한 빈부격차는 사교육의 열풍으로서 바람의 세기로서 느끼게 해준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왜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계급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급은 그것의 대물림을 강제하면서 교육을 귀족화시켰고, 현재까지도 계급사회가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인에 대한 책임을 강제한다. 사교육은 계급사회의 기본전통이며, 사교육의 바람은 지배계급으로 승천하고자 하는 미꾸라지의 열망이 담긴 사랑의 결정판인 것이다. 이것은 계급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나며, 특히 교육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이윤의 획득을 위한 명문사학의 등장으로 귀족에 대한 열망의 폭이 넓어 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 획득이 지상과제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도 이윤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윤을 위한 교육은 사회적인 빈부의 차이를 더욱 벌어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가족 교육은 실천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그 어린이가 하루에 몇 시간을 유치원에서 보낸다 할지라도 어린이 집합체의 좋은 영향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유치원이 가족교육에 미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유치원에 영향을 끼친다.······어린이는 가족 속에 강제 편입되며, 그래서 성적이고 권위적인 측면에서 부모에 고정된다. 어린이는 부모의 권위가 엄격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신체가 작기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 압박당한다. 권위주의적인 유대는 곧 성적인 유대를 압도하고, 성적이 것을 무의식적인 존재에 밀어 넣으며, 성관심이 가족 외부세계에 적용되면 나중에는 성 관심과 현실 사이의 강력한 방해 장벽으로 나타난다. 권위주의적인 유대는 대부분이 무의식적이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의식적인 영향에서 벗어난다. 부모의 권위에 대한 의식적인 유대가 종종 반대의 것, 즉 신경증적 반란으로 표현되면 할 말이 별로 없다.·······

 부모유대ㅡ성의 속박과 아버지의 권위에의 복종ㅡ는 사춘기에 성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아도 어렵게 하나. 성숙한 어른이어도 여전히 유아적인 상황에 박혀 있는, 착한 소년과 착한 집안의 딸이라는 쁘띠 부르주아적 이상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청년의 정반대이다.

 가족 교육의 더 나아간 특징은,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집밖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소득을 올리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의 그 내용을 점점 더 자신의 어린이에게서 찾고, 어린이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는 강아지의 역할을 하고, 부모의 정서적 태도는 교육에 완전히 부적합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성혁명 p149~150 빌헬름 라이히)


사회주의의 교육의 핵심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회에 적응하게 만들어 사회의 주역으로써 자리를 잡게 만드는데 있다. 인간의 활동은 생산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지 못하며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살아가기 위하여 사회의 생산 활동에 동참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에 대한 특혜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사회의 일원이 아닌 자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자신들의 할 일을 방관하는 자 또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육의 핵심은 사회 속에서 사회화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로 탄생을 하게끔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군대의 형태에서 강요되어왔던 그러나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상하복명식의 모습과 그에 따른 상관에 대한 명에 의한 수동적인 모습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관료주의적이며 무사 안일한 모습에서 능동적이며 스스로의 주인의식으로 무장되어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발전시켜나가고자 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기존세대와의 단절과 사회화된 교육의 힘으로 가능하게 된다. 무료로 이루어지는 탁아소, 유치원, 초등·중·고등학교의 교육과 자신들이 원하는 한 끝없이 이루어지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책임은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대리만족이나 자신들의 노후에 대한 투자로서 의존하는 것을 과감하게 없애버리고 새로운 인격체로서의 자리를 잡게 만들어 준다. 처음에는 강제성을 띌 수도 있고 설득에 의해서 이루어지수도 있는 교육에 대한 집행은 부모들이 사회적 활동에 대한 제약을 없애 버리고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함으로써 발전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자녀에 대한 보육은 가정의 책임은 아니며 사회의 책임으로써 자리를 잡아야 하며(노인의 복지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인 책임에 의해서 계급사회의 교육이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바탕이 되었다면 사회주의에서의 교육은 계급절멸을 위한 교육으로서 집산 화를 위한 내용으로써 핵심을 이루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빈곤함을 없애기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의 공동체적인 삶에서 개인적인 부의 가치가 없어지는 사회가 사회주의이다.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되지만 격차는 적고 부의 편중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과 녀의 차별이 없는 사회이다. 다수의 지배가 형성되어진 사회이기 때문에 소수를 위한 이익은 존재할 수가 없다. 국가와 민족, 부르주아의 존재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공동체를 위한 임노동을 하는 까닭에 노동시간의 감소와 여유시간의 증대는 삶의 여유와 물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것이며, 대중은 계급사회로의 후퇴에 대한 견제를 강화시키는 스스로의 무장을 강제한다. 대중에 대한 교육은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이윤의 획득을 위한 만큼 필요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대중을 사회화시키위한 것으로서, 계급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묻혀서 지내왔던 습관을 제거하는 것에 주안점이 주어진다. 가족이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에 유지해 왔던 권위주의가족은  해체가 된다.



여성해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식되어야 한다. 노동해방은 여성해방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자신들의 종속적인 지위를 지배적인 지위로 위치 이동하고자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정치적 혁명에 대한 문화혁명은 필수다. 문화혁명은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는 능동적인 위치로 끌어 올려야 하며, 실업 없는 상태의 노동시간 축소 및 경제적 자립을 위한 생활임금 확립,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적용 등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이러한 강령의 실현은 노동의 대가가 없는 사회를 만들 것이며, 필요에 의해서 생산되고 원하는 것만큼 가져가는 사회로의 진입을 가져가는 기초가 된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양산은 새로운 사회의 시발점이자 계급사회의 종착점이다. 자유로운 인간만이 공동체사회를 건설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모순은 극대화되어가고 있기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 무너져 갈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의 모순은 더 높은 수준으로서 갈등을 위한 미봉책에 불과 한 것이다. 흔들리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타격을 위해서는 계급적인 혁명정당은 필수 조건이다.


4.혁명정당에 대한 의미.   


노예제 사회에서의 노예해방운동은 노예사회에서의 발전된 모습을 띄우지 못했고, 봉건제하에서의 농민봉기는 왕의 권위를 세워주는데 급급했다. 생산력의 한계에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만을 제시한다. 자본주의의 노동자 봉기는 노동조합의 모습으로 관료제를 양산 했고 중간 계급으로의 진화를 꿈꾸게 만드는 쁘띠부르주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불러 왔다. 대중은 실천적으로 자신의 삶속에서 계급적인 감각을 깨우치지만 그것이 계급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지배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사상은 부르주아의 사상이며, 노동계급의 체화된 삶속의 의식은 언론과 각종의 매체로 인하여 민족과 국가, 개인주의로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존재와 의식은 상충작용으로 인하여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혁명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르지만,  대중의 존재는 의식과의 모순으로 인하여 자신의 투쟁에 대한 전망과 향후에 무엇으로 사회의 발전에 공헌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활동으로 나타난 지배계급에 대한 애정, 충성심을 확장시켜왔던 것이다. 자신의 계급적인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6천여 년의 모습으로 습관적인 수동적이며, 의타적인 모습을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누려왔던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체화된 물리력 앞에 스스로를 언제나 한정지어 왔다. 이러한 습관은 깨져야 한다. 요행을 바라는 수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혁명을 위해서도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서도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부르주아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지배계급이 부르주아인 이상 현 세상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잔 부르주아다. 부르주아의 지배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세상의 건설을 하기 위해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무기인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그 조직은 계급정당이다.


부르주아에게 대항을 하면 목적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세상에 대한 전망을 항상 제시하면서 나가는 길에 대한 모습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조직은 계급정당이며, 혁명정당이다. 이 조직의 목적은 계급세상의 근절에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성찰을 스스로 해갈 수 있는 그때 이러한 정당은 스스로 해체되어 진다. 전위정당, 계급전당의 필요성은 어떠한 의미에서 피지배계급에게 주어지는가? 기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필요 없는 것인가? 아니다. 혁명은 스스로 일어서는 자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준다. 주인이 주인의 행사를 하고자 한다면 주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전위전당은 대중이 주인의 자리를 처리하는 그날까지 모습을 유지하게 된다. 사회주의혁명이 3가지의 내용을 가진다는 것은 정치혁명 이후에 나타나는 피지배계급의 주인 된 자의 모습이 아닌 권리와 의무를 회피하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태생의 한계가 주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전위정당의 필요성은 혁명전에는 혁명의 주도적인 모습으로 대중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심어주고, 혁명이후엔 대중에게 계급사회의 누적된 때를 벗겨내는 일을 해야 하는 정치 조직이기 때문이다. 경제혁명과 문화혁명을 통한 대중의 자의식의 성장은 계급사회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무계급사회로의,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의 모습으로 가기위한 토대가 된다. 착취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상품의 관계로 전락해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모습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선진대중과 함께, 깨어난 자와 함께, 그리고 혁명의 전진에 따르는 대중의 압박을 함께하고자 한다면 계급성과 전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정치 조직체인  계급정당의 실현은 꿈이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을 반영하는 것이다.

전위정당의 필요성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노동계급에게 무기를 빼앗아 부르주아에게 자신들의 충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들의 속성이다. 혁명에 대한 애정은 말로만 매끄럽게 기름을 바르고 무엇을 하고자 하기 보다는 대중과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추구한다. 자신의 주체성을 가져야 하는 피지배계급의 위치는 한없이 떨어 드리고 지식인의 모습으로 관념적인 형태의 내용으로서 민중에 대한 끝없는 원망을 애정으로 착각하여 계급적인 자각이 아닌 계층의 모습으로 희석시킨다. 피지배계급에겐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급적인 각성이며, 이는 혁명과 이를 유지 발전시켜야만 하는 계급정당, 전위정당의 활동에서만이 확보가 가능한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쁘띠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개인적인 충성심, 영웅주의에 취한 모습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베네수엘라 따라 하기라는 모습을 띄었다. 위대한 차베스의 힘은 민중의 사상을 계급의식화 한다는 선거만능주의로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로 스스로를 타락시킨다. 전위정당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깨고 발전을 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야하는 자들에겐 희망을, 자신의 권리를 바로 잡아야한다는 자들에겐 전망을, 행복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싸우는 전사들에겐 무기를 가져다준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풍부한 물리력인 무장력과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여 피지배계급은 지배해 왔다. 이데올로기와 무장을 획득한 계급만이 다음 사회의 주인으로서 일어설 수가 있다. 굶주림과 고통에서 깨어나는 피지배계급에겐 기존의 지배계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승리에 대한 의심이 없는 믿음이 존재해야하지만, 전망이 없다면 그 믿음은 관념으로 끝나고 말 것이며, 혁명은 또 다른 지배계급의 모습인 관료제의 모습과 쁘띠부르주아의  지배계급으로의 상승으로 인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헛손질은 끝나야 한다. 사회주의는 꿈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살아 숨 쉰다. 대중의 단합된 힘을 하나로 모아 가고, 전망의 인식을 심어주며,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매개는 전위정당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힘은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서 풀어간다는 것이다. 실천은 환상을 깨뜨리고 갈수위는 구체적인 모습인 강령이며, 강령을 현실에 실현시키고자, 대중의 힘으로 변화를 주고자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아야 하며,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기 편하게 언제나 자신의 옆에 두어야 한다.


혁명은 대중의 힘이 가장 역동적으로 표출되어진다. 계급간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면서도 계급간의 그 동안의 습관으로 인한 투쟁의 성과를 양보해 왔던 계급이 존재 해왔고, 가진 것이 많은 계급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모습을 가지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가진 것이 몸밖에 없는 계급은 마지막까지 항쟁을 해 왔지만 자본주의사회의 틀 속에서의 모습은 민족과 국가라는 위대한 이념 속에 한정지어 계급이 계층 속에 매몰되는 것으로서, 말로는 사회주의를 외치고, 또는 민중의 위한 좌익 계열이라고 주장하지만 투쟁의 후미에서 확성기로 외치기는 것은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서 의회를 통한 집권을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의 필연적인 몰락은  혁명운동의 전진이, 대중의 투쟁의 수위가 서서히 본 궤도에 진입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정치조직을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대중의 투쟁은 지배계급에 대한 항거를 꾸준히 행사 했으나, 그것을 받쳐줄 조직이 없는 관계로 전국적인 투쟁의 형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소규모적인 형태로 고립되어 왔다. 이젠 노동계급의 투쟁은 빛을 볼 때가 왔다. 사회주의혁명의 전진을 위한 제반의 길이 열리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긴 여정은 이제 맞춤 표를 찍어야 한다. 지배이데올로기의 상식에 의존하여 투쟁의 대열을 흩뜨려 놓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 한다. 대표적인 기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혁명의 열정으로 다시 돌아올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더 두려운 것이다. 올바른 이론은 올바른 실천을 만들어 낸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대중을 자신들의 이론의 실험무대로 만들어 내는 기회주의 속성에서 대중은 언제 실망을 하고 대안으로써 기존에 존재하는 지배계급을 강력하게 원하게 된다. 대중들의 열광적인지지로 파시즘의 등장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피지배계급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 밀게 되는 것이다. 


흩뜨려진 투쟁의 대오를 하나로 다시 묶어 내기에는 현재의 열정과 힘은 부족하다.  혁명의 전선에서 부족한 것은 늘 존재 해왔다. 민주노동당의 붕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계급적인 선명성을 각인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의 모습을 가져야 함에도 쁘띠부르주아의 조바심으로 무장된 반 계급적인 정서로 내용을 채워 대중에게 진보적인 의미로 다가선다는 것은 이미 생활 속에서 체득 화된 대중과는 괴리감을 느끼게 나타나 홀로서기를 준비하게 한다.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또 다시 80년대의 운동권의 한계를 나타냈다. 이젠 발전되는 모습은 계급정당의 탄생으로 보충해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없는 계급전당의 필요성은 사회주의노동자연합(가칭)의 출현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젠 당이 어떠한 이름으로 들고 나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내용을 계급적인 내용으로 행동과 함께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혁명에 대한 발전과 유지는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음을 역사는 증명해 왔다. 


 5. 맺음말


 현재 대통령당선자의 모습의 행보 중 영어교육문제와 더불어서 나타난 보수행보를 따라다닌 진보의 결말이라고 표현된 민주노동당의 붕괴는 신문과 언론의 내용을 충실하게 해주는 모습이다. 공교육 강하하는 모습은 사교육에 찌든 서민들의 가슴에 파고들지만 기업의 재교육을 담당하는 내용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교육개혁에 따르는 커다란 문제점인 교사양성엔 어떠한 문제점이 주어지고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문법적인 형태의 영어교육을 회화중심으로 바꾼다는 내용은 좋지만 이미 습관 해 되어온 그동안의 학습으로 인한 체계는 쉽게 바꿀 수는 없다 단기간의 처방으로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장기간의 시간을 두고 계급사회의 약점인 이해와 요구를 어떠한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 동안 굳어진 체계가 5년이라는 세월 속엔 한계성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사업의 확장도 마찬가지다. 6천여년의 계급사회의 습관을 몇 년 안에 뜯어 고친다는 것은 어이없는 경우의 생각이며, 하나의 세대의 흐름이 지나 생활 속에서, 또는 이전세대와의 격리되어서 새로운 학습을 받고 자라난 자녀들의 사회적인 자리를 잡아가는 최소한의 기간 20~50년간을 상상해야 한다. 역사의 흐름에서 100년도 한순간이다. 불구화된 교육방식으로 인하여 언어교육은 문법을 중심으로 하여 외우기 교육으로 전락시킨 것은 한국사회의 빠르게 발전되어야 하는 군대식의 전시행정의 표본이었지만 100여년가까이 되어온 교육의 모습은 대체 교육의 모습에서 세대교체는 필수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류사회는 분업화된 사회로 만든 것은 작업의 효율을 위한 것으로 계급사회에서는 수동적이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을 교육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성원으로서 부품의 하나로 자리 잡기를 강요해 왔다. 대중의 능동적이고 합목적적인 인식으로 무장시켜야 만이 사회주의는 유지 발전한다. 계급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아왔던 세대와 이후 세대 간의 자리바꿈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습관화된 운명적인 부분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바꾸는 것은 계급사회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다. 사회화된 교육의 문제는 교사만의 양성이 아니라, 생활상의 체험을 두고 발전하는 것도 아니면 자연스럽게 자녀들이 사회의 적응 속에서 어떠한 형태의 간섭을 배제할 경우에 스스로가 사회화된 인간으로 발전된다. 습관은 선입견에서 자라나며, 선입견이 없는 아이들에겐 계급사회 속에서 발전되어온 습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은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부르주아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입장에 맞추어 나가는 일부 인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교육만이 아니라, 모든 교육이라는 곳에서 성적이 인생을 좌우하고, 자격증이 월급의 액수를 결정하며, 희망과 꿈은 물질적인 욕구에 의해서 결정되어버렸다. 자신의 욕구를 대를 이어 충족시키거나, 자신들의 한을 풀기위한 자식들의 엘리트 교육은 사교육으로 명시된 또 하나교육의 제도를 만들어 냈다. 이미 예전부터 귀족적인 형태의 모습에서 자리를 잡아 왔던 가정교사는 대중화를 선언한다. 부는 부를 낳고 가난은 가난을 낳는 대물림은 무너지지 않는 하나의 선으로 자리 잡았다. 사교육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필수다. 자신의 위치를 더욱 더 공고히 하고 대물림을 통한 지배구도를 가지고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한에서는 필수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교육의 철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서만이 소멸 시킬 수 있다.     


이 글을 시작한지 6개월가량 되었지만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 상 이정도로 마친다. 혁명의 내용으로 충실함이 없다면 채우면 되고, 남으면 자르면 된다. 헛소리를 즐겨하는 베네수엘라를 따라하는 몇몇 사람들의 행보에 계급적인 감각은 더욱 날카롭게 비수를 갈아 대고 있는 현실에서 발 걸움은 가벼워지고 있다. 이젠 혁명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때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전망과 내용을 충실히 하여 대중과 하나로 진군해 나가야 할 때다. 혁명에 대한 투쟁의 열정을 통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상처뿐인 날개를 찾아 활짝 펴 새날의 하늘 속에 날아 가야한다. 


다가올 혁명의 아름다운 날개의 휘저음은 대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보여줄 것이다. 혁명정당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남한의 모습에서 정당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발전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길은 무한확장 한다. 혁명은 대중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발전된다. 대중 앞에 놓여있는 길은 피의 강이며, 그 강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건너야한다. 혁명정당의 실현만이 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따라잡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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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06:50 2008/02/09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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