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는 어떠한 사회인가?(강령해설) (1)


사회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사회와의 어떠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유지 발전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자본주의 모순의 해결은 사회주의사회이며, 남한의

자본주의의 발전 경로는 사회주의로 가기위한 하나의 다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회주의로의 가는 길은 어떠한 방식이라고 특정한 공식이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대중을 과학의 이름으로서 선전선동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아직도 요원하며 우리

의 현실에 존재한 적도 없는 꿈꾸는 자들만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다.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권력의 집권을 위해서 있는 진실을 외면하는가 하면 없는

사실도 만들어 내는 부르주아적 정치가와는 다르게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만들고자 하는

혁명가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객관으로 받아들이며, 대중에게 거짓된 진실을 폭로하면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가지고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게 하는 것

을 주 임무로 삼는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는 세 가지의 혁명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의 확립이며, 사회 경제적으로는 노동자통제이며, 문화적으로는 스스로의 주체적 자아의

확립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형식을 통해서만이 사회주의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혁명을 통해서 발전되어지는 사회주의는 지배계급이 존재하지

만 사멸해가는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이며,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시기로서 비로소 민중이 민중으로서의 자리를 잡아 가는 사회가 도래하며 지역과 지역이 하나로 연결되어 지구가 하나의 경제구역으로서 자리를 잡아 가게 된다. 사회주의 사회는 하나의 지역에서 시작될 수는 있지만 하나의 지구 안에서 자리를 잡아야 만이 가능하다. 하나의 지역과 나라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관료주의를 양산하며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다. 지구의 경제체제가 하나의 모습으로 정착이 되는 모습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했듯이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세계를 하나의 무대로 만들어야 만이 발전되고 유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와의 경쟁은 사회주의를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타락하게 만들어 가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권력을 어떠한 방식으로 장악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잉여가치를 전유하고 누가 사용하고 있는가의 모습으로 투영된다면, 사회주의의 발전을 기대어 볼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인민들 스스로가 책임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려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방식은 어떠한 모양이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길

이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 내용의 질이 담보를 하지 못한다면 부르주아의 지배를

유지하는데 공조하는 길일뿐이다. 계급사회의 모든 억압을 철폐하고 경제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며,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

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의 몫이지만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에 눈이 팔려 있는 사이에 가벼워지는 주머니의 사정 속에서 무계급사회로 가는 길에서의 대중의 동참은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글은 이미 본인이 강령을 제시했고 그 부분에 대한 해설을 겸비하고 있으며 함께 토론해

고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자 제출한다. 강령의 내용이 미흡한 것도 있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나열이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러한 부분의 비판은 받아들일 것이다.


1.정치적 문제(국가권력을 누가 장악할 것인가?)


사회주의에서와 자본주의에서의 정치적 문제의 핵심은 국가권력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회를 통하여 연설의 기회를 가져서 청중에게 선전선동을 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군대, 사법부, 정보부, 경찰 등등의 물리력과 더불어서 그들과 함께 발전해 가는 관료기구들이 존재하며, 이들을 지휘 통제하는 관료들이 있다. 생산수단이 사적소유자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 장치는 항상 존재 해왔다. 지배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을 바꿀 수 잇다는 애틋한 마음으로 투표를 한다는 의미는 대중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의 다른 대안을 알지 못하고, 그 대안에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수동적인 사고방식으로 대중의 의식적인 활동을 조작된 모습으로 비추어진 채 계급사회의 하나인 자본주의는 얼굴만을 바꾼 채, 그 형태는 계속해서 존속되어 왔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 형태가 소수 지배자를 위한 형태 속에서 발전을 했다면, 사회주의사회의 민주주의 형태는 다수의 지배로 바뀐다는 점이다. 부의 가치, 즉 잉여가치를 점유한 부르주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중추세력이며 지배자이듯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자로서 등극을 하며 그 사회의 중추세력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 시킨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부분을 내용적으로서 담보를 하여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이 하나가

되는 변증법적 관계를 지향한다.


 국가권력의 유지의 형태를 제시하고, 더 낳은 발전된 형태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

이 순리다.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되고, 특정한 형태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현재까지 역

사상 존재해 왔던 많은 혁명적인 상황에서의 피지배계급의 민주주의적 활동과 그들이 만들어 왔던 민주주의적 기구들에서 보면 - 광주항쟁에서의 시민위원회, 파리코뮌, 소비에트 등

등의 모습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대체기구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부르주아적 사회의 의

회 제도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의 발전을 위한다면 그것의 대체기구로서 무

엇이 필요한가는 당연한 의문이며, 혁명에 임박한 순간에서만이 기록하고 존재한다는 판단

보다는 어느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의 발전된 모습이라고 제시되어야하는 것이다. 그것의 발

전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노동자평의회이다.


 "의회에서 실천은 평의회와는 정반대이다. 여기서 대표자들은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의견과 명령에서 구속되지 않고 의사를 결정한다. 비록 의회가 지지도를 유지하기 위해 의회대표자가 어떤 한 행동의 맥락과 이유를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게 해명을 할지라도, 이것은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는 자격이다. 그는 명예와 양심에 따라, 즉  그 자신의 의견에 따라 투표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치와 입법문제에 대한 전문가이기에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지시와 명령을 받지 않으려 한다. 무지한 다수 사람들의 임무는 생산과 사적인 반면 그의 임무는 정치, 즉 일반적인규제라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원칙들을 따라 행동해야지 자신의 사적 이해에 따른 협소한 이기심에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정치가들은 다수의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되어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종사할 수 있다."(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p85)


노동자평의회는 부르주아적 국가권력의 핵심인 의회 제도를 부정한다. 노동자평의회는 직장

위원회를 축으로 하여 지역이 아닌 직장에 권력의 기반을 조성한다. 노동대중의 직접적인

생활현상의 모습에서 부딪혀 나가며,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충족시켜 나가는 것이다. 정

치적 이해와 경제적 이해가 하나로 모아진다. 부르주아의 민주주의는 지역이라는 기반을 통

하여 정치와 경제의 형식적인 분리를 나타내며, 노동대중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직장을 통

하여 이루어내고,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지역의 투표소에서 날인함으로써 지역의 인물을 뽑아서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어 뜬구름 속에서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

인지 인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주거지와 직장에서의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통한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부정된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현장 속에서 만들어진다. 기존 부르주아적 사회에서 생성·발전되어 온 노동조합의 관료적인 형태의 모습을 근절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더욱 강력한 하나의 힘으로 모아 나가기 위한 방향으로서 직장위원회, 파업위원회, 공장위원회 등등의 형식을 띄우면서 생산현장의 한가운데서 생산, 판매 등등의 관리 및 통제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면서, 그것의 조합이 모여서 부르주아사회의 모습에서 만들어진 행정부, 입법부의 모습과는 다른 하나로 결합한 모습으로써 자리를 잡게 된다. 위원히에서의 활동은 생산현장의 관리 및 통제를 통한 모습과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모습이 서로 틀리지 않고, 하나의 모습으로써 자리를 잡게 된다. 자신들의 얼굴 마담은 자신의 권익을 위해 싸우게 만들어야하며, 그러한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소환이 가능하게 된다. 파견된 대의원은 자신들이 상사나 부하직원의 위치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며, 자신들의 양심에 의해서 판단되어진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견하게 만든 조직의 입장을 가지고 판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민주주의적 형식은 표의 구걸이나 획득에 의해서 매듭 되지만 개인의 양심적인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견해가 공개적이며, 합목적으로 토론되어지고 뜻이 하나로 이루어져 나갈 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 한다. 급박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몇몇의 대리를 거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중의 듯에 맞지 않는다면 철회되어야 하고, 대중적 견해와 혁명적 견해가 충돌을 일으켰다해도 다수의 듯을 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는 인민대중의 흐름인 것이다. 평의회의 힘은 인민대중의 다수의 힘에 의해서 발전되어진다.  


 “노동자평의회가 작업장에 바탕을 둔다는 점은 대중의 실질적 참여와 대표의 소환 권을 가

능하게 한다. 지역에 따른 투표 박스와는 달리 작업장은 모든 인간의 지속적인 생활 지침이

며, 이러한 현실은 평의회 대의원이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곧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소환 권은 형식적인 법률에 쓰인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서 5

년 간격의 선거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실천 9

월호 p76)


평의회 건설이라는 과제가 제시되는 이유는 권력의 형식을 누가 어떤 식으로 장악하고 있는

가로부터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잇는가라는 것을 하나로 뭉쳐서 설명하게 된다. 다수

의 지배방식을 실현한다는 것은 국경이 사라지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의 시작이

며, 계급사회의 절멸의 시작이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표현이다. 노동계급은 이전의 계급사회와는 다른 형

태의 권력의 집권을 시작한다. 경제적인 요인을 먼저 장악한 후에 사회문화적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후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계급사회와는 다르게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및 경제적인 형태를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과는 다르게 발전의 상을 제시해야 만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모습은 부르주아들의 권력을

잡았을 때 자신들을 위한 경제문화적인 여건을 단단하게 만들었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문화적인 요인을 만들어 나가야하는 길에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어렵다. 실수

도 존재하고, 역사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부분을 보충

하고 크게 만들어 나가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민주주의는 계층 간의 모호한 부분을 보충해주

는 내용으로 채워져서는 안 되고, 직접적인 계급간의 명확한 선을 그어 새로운 권위를 실현

해 나가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어진다.


계급사회의 발전은 무계급사회로의 진화를 촉진한다. 6천여 년의 긴 세월동안의 계급사회의

발전은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에서의 걸림돌의 역할을 습관적인 형태에서 반대급부를 제공한

다. 계급과 계층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무시하며, 잘못된 역사를

평가하지 못하고, 시대적인 상황에 현실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론적인 허무함을 제공하면

서 현실운동의 관점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는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론 속에 빠져 독설과 근거 없는 내용을 발전시켜 나가야하는 연대사회의 모습은

계급사회의 부르주아이데올로기의 역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민중과

프롤레타리아트는 틀리다. 그들의 역할이 틀리고 계급사회에서의 그들이 제시하고 실천적으로 나가야하는 모습 또한 틀리게 나타난다. 지원군과 본대의 역할은 다르게 나타나며, 책임과 투쟁의 역할의 중심은 본대의 모습에서만이 투영이 된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역할이

주연임을 기뻐하지만, 조연으로서 주연급을 뺨치는 모습이 들어나지 못하면서 주연의 모습

으로 비추어 만들도록 노력하는 배후세력은 음모가적인 기질로 대중을 우롱한다.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사회의 간극은 없다. 사회주의사회로의 진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권력 장악에서부터 시작되며, 현재 사회주의로 가기위한 투쟁의 중심이 정치권력이 아

니라 국가권력의 장악을 제시하고 있는 의미가 그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없는 사

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며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장악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무계급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공동체사회로 가는 길목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부르주아적 독재의 대안이다. 사회주의의 실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명확하게

실현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수의 의지로서 사회경제적인 노동자통제를 이룩하는 길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실현한다. 그것의 실현된

모습이 바로 노동자평의회이다.  사회주의는 아직도 계급중심의 사회이다. 다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이 남아 잔존하는 부르주아계급을 지배하는 시대이며, 모든 산업의 집산화가 이루어져가는 사회이다. 완성된 사회가 아니며, 공동체사회로의 발전으로 가는 사회다. 인간중심의 사회를 알고자 한다면 성경과 주체사상을 공부하면 무엇이 인간중심의 사상인지 알 것이다. 사회주의는 계급사회의 잔존적인 이데올로기 및 문화를 무계급사회의 사회적인 모습간의 투쟁의 역사를 그리고 있을 수뿐이 없다. 무계급사회는 공동체사회이며 그때야 말로 진정한 인간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사회다. 자신의 경쟁력을 극대화시키며, 자신의 자

식들에게도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다. 경쟁은 독점을 강화하고 자본주의사회를 유지하는 근

간이 된다. 쁘띠부르주아들의 상부사회로의 진입을 하기 위한 노력은 하부계층의 동요 및

분발을 그리고 좌절을 요구한다. 평등한 사회에서는 생존을 강요하는 경쟁을 할 수가 없다.

적대적인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존재가 적대적인 존재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천국을 이야기 하고, 천국에 가기위해서 예수를 믿어야한다고 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는가!

피지배계급이 가고자 하는 사회는 자신들이 지배계급사회로의 변화를 꿈꾸는 사회다. 원대

한 꿈의 시작은 사회주의 사회이며,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혁명의 긴 세월이 하루아침에 일어나 완성이 안 되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완성이 된다.


노동자국가의 개념을 가지고 노동운동을 지도하고 방향을 잡는 조직이 있다. 노동자정부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통한 개량주의방식이며, 부르주아의 생명

의 연장에 한몫을 한다.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집권을 첫 번째 형태로 생각할 것이며,

두 번째로는 민주노동당과 좌익노동단체의 결합을 통한 권력 이동을 말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한 권력 장악을 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현 체제 내에서 부르주아적 국가체제의 변화 없이 개혁을 통한 변화를 이루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현재의 베네수엘라의 상황과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두 번째로는 좀 더 많은 개량을 확보 할 것인지, 혁명을 통한 노동계급의 권력이양으로 갈 것인지를 판단을 해야 할 것이며, 어느 조직의 힘이 대중에게 환상의 경계를 무너트릴 수 있느냐 보전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발전이냐 퇴보냐의 갈림길에 서있을 것이며 이때 이중권력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세 번째야말로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부르주아이데올로기의 감염에 따르는 노동계급의 그동안의 습관으로 인한 결정 및 책임회피, 무엇을 하고자 하는 소심함으로 인하여 발전의 과정이 가로막힐 수도 있다. 그러나 6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인류의 계급사회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피지배계급의 습관적인 모습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며,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주의혁명의 모습은 3가지의 혁명이 완수 되었을 때 비로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소유한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개혁의 시작은 자신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국가권력(언제나 이야기 하듯이 정치권력은 아니다)을 장악 할 때만이 가능하며, 그 힘을 바탕

으로 하여 사회를 자신들의 뜻에 맞게 개조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평의회는 자본에 대항한 싸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발전하면서 상황에 맞는 자신의 얼굴을 가지면서 노동계급이 승리를 쟁취하는 그 순간까지 권력에 대한 집착을 하며, 경제적인 형태에서는 생산의 조직화를 수행하기 위한 모든 전제족건을 만들어간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의 독재는 사회주의의 완성과 함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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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글은 먼저 글 사회주의강령에 대한 강의3의 내용을 보충한 글이다. 글이 추가가 되었으며 내용의 차이는 없다.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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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06:46 2008/02/09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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