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필요하거나 합당할 경우 조직 분리 문제를 다룬 우리의 편지들과 라이트 동지의 편지들을 묶어서 케넌 동지가 출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격심한 분파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의 단합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이 편지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셰비키 분파가 소수파가 되더라도 당의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으며 케넌 동지도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장을 했습니다. 이 두 인용문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논문에서 핀란드 사태를 언급한 바가 있는데 몇 마디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핀란드와 폴란드 사이에 원칙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적군이 폴란드에 개입하면서 내전이 벌어졌습니까? 아니면 아닙니까? 분트 그리고 폴란드 사회당 망명객들과 친분이 있어서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멘셰비키 신문들은 적군이 영토 내로 진군하자 혁명의 물결이 적군을 둘러쌌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련 관료집단은 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 내부 세력들의 내전을 통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려 합니다. 이점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래서 크렘린궁은 핀란드에 쿠지넨(Kuusinen)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핀란드 적군의 창설 움직임, 대토지가 몰수된 적군 점령지에서 보인 핀란드 빈농들의 "열성" 등에 대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전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전의 확대는 전적으로 적군의 핀란드 영내 진입에 달려있었습니다. 인민의 "열성"은 충분히 달아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너하임(Mannerheim) 이라는 교수집행인의 칼날 아래에서 노동자 농민의 독자적 봉기들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초기에 적군이 후퇴하면서 내전의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중지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자들이 핀란드의 자본가 계급을 효과적으로 지원한다면 이후 핀란드 내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군의 증원군이 좀더 성공적으로 핀란드 영토에 침투한다면 이 침략이 진행되는 정도와 마찬가지로 내전이 필연적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이럴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보다 더욱 높습니다.

모든 군사적 사건들, 순전히 전술적인 흥미밖에 없는 승리와 패배들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이 사태발전의 일반적인 "전략적" 경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소수파는 원칙에 입각한 정책 대신에 순전히 상황적이며 인상주의적인 정책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핀란드 내전은 제한되고 반정도 억눌린 성격을 가질 것이며 다음 단계에서 내전은 핀란드 인민 대중과 소련 관료집단 사이의 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소수파 만큼이나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공개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가능성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벌어지는 그대로 분석할 뿐 첫 번째 단계를 두 번째 단계와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1940년 1월 5일

모든 동지들에게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15. An Open Letter to Comrade Burnham] 버넘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동지,

내가 알기로 동지는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나의 논문에 대해 논평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변증법에 대해 토론할 의향이 없으며 오직 "구체적인 문제들"만 논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미 오래 전에 종교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에 맥스 이스트먼도 이와 똑같은 심경을 피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논리를 종교와 동일시 하는 관점은 타당한가

맑스, 엥겔스, 레닌의 변증법은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고 동지가 암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 언급하자면 변증법은 진화의 논리입니다. 공장의 도구실이 모든 부서에 필요한 도구들을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는 인간의 모든 지식 영역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동지는 대체로 논리를 종교적 편견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수파의 자기모순적인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한탄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논리가 종교적 편견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논리를 동지는 받아들이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변하지 않는 사물과 현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과학 사상은 모든 현상들의 기원, 변화, 붕괴를 연구합니다. 다아윈주의, 맑스주의, 현대 물리학, 화학 등 과학의 발전이 우리의 사고 형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삼단논법만이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하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까? 성요한 복음서는,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태초에 이성 즉 삼단논법으로 표현된 이성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성 요한에게 삼단논법은 하나님이 가진 여러 필명(筆名) 중의 하나입니다. 삼단논법이 기원도 발전과정도 없는 불변의 것이라면 이것은 신의 계시물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논리 형식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정에서 발전한다고 인정할 경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진행된 논리의 발전과정을 누가 분석하고 체계화시켰는지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동지는 명확히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인 변증법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동지의 관점은 인간 사고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동지의 완전한 무지와 피상적인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혁명가가 종교에 대항해 싸울 의무가 없습니까?

그러나 뻔뻔스러움을 넘어선 동지의 빈정거림이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도 동지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종교는 현실의 지식으로부터 가상의 지식으로, 좀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저승에서 보상받는다는 거짓 희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 이 사실을 동지도 인정하리라 희망합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입니다. 종교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못하는 어느 누구도 혁명가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지가 변증법을 종교의 변종이라고 본다면 변증법에 대항 투쟁을 거부할 명분과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동지의 말에 따르면 동지는 종교 문제에 신경을 끈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동지 자신만을 위해 종교에 대한 신경을 껐습니다. 그러나 동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종교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면 우리 혁명가들은 종교 문제에 대해서 결코 신경을 "끌" 수 없습니다. 변증법이 종교라면 우리 당 내부에서 이 아편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어쩌면 동지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암시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혹시 종교를 신봉하면서도 동시에 일관된 공산주의자이며 혁명 투사가 될 수 있다고 암시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성급한 주장은 감히 펴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후진 노동자들의 종교적 편견에 대해 가장 배려깊은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강령을 위해 투쟁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당은 유물론과 무신론의 정신을 그에게 끈질기게 교육시킬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동지가 동의한다면 내가 알기로 이론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우리 당 절대 다수 동지들의 "종교"에 대한 투쟁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습니까? 동지는 확실히 문제의 이 가장 중요한 측면을 간과해왔습니다.

자본가 계급의 식자층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종교와 결별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무신론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간직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당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태도를 갖는 것이 가능합니까? 맑스주의의 철학 기초들에 대해 나와 토론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변증법에 대한 동지의 경멸에는 당에 대한 경멸 역시 깃들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대화 가운데 나온 말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고 있다고 항변하지 마십시요. 공개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거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고 반대의 변을 늘어놓지 마십시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동지의 날개돋친 말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동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강령의 이론적 기초를 구성하는 사상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해 왔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당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섁트먼과 공동으로 저술했으며 당 이론지에 발표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이란 논문에서 동지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거부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확인되었습니다. 동지가 도대체 왜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당이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제4인터내셔널 이론지의 편집자가 마치 건네진 담배 한 가치에 대해서, "고맙습니다만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적으로 거부한다."라고 단순히 선언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잘 갖추어진 도구실이 생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과 똑같이 올바른 철학사상 즉 올바른 사고방법의 문제는 혁명정당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지적 방법들을 가지고 구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직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방법들을 먼저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서 구 체제가 타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이 사고의 근간들 자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올바른 길을 지적하는 것이 동지의 기본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동지의 행동은 진정한 "과학" 사상을 파악할 능력이 결여된 노동자 조직에 대해 학자가 보이는 교만한 태도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보다 나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훈적인 예들

기회주의 심지어는 부르조아 반동 진영으로의 투항은 아주 빈번하게 변증법의 거부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노동자 정당 내 여러 경향들의 투쟁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맑스주의의 가장 허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정치적 차이보다 철학적 차이를 증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이용해 먹습니다. 이 오래부터 알려진 사실은 그간의 모든 경험들에 의해 입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위대하며 뛰어난 모든 혁명가들 특히 맑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등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바탕 위에 서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폄하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가 과학과 종교를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버넘 동지, 너무 건방지지 않습니까?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프란츠 메링의 예는 매우 교훈적입니다. 베른슈타인은 변증법을 "스콜라주의", "신비주의"라고 명백히 거부했습니다. 카우츠키는 섁트먼 동지와 같이 변증법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반면에 메링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치지 않고 선전하고 옹호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철학과 문학의 모든 발명품들을 파악하며 지치지 않고 관념론 , 신칸트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기타 모든 형태의 신비주의 등을 폭로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정치적 운명은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잘난 체나 하는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카우츠키는 중도주의자에서 저속한 기회주의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러나 메링은 공산주의 혁명가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스트루베 , 불가코프, 베르다예프 등 세명의 매우 저명한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맑스주의 철학을 거부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반동과 그리이스 정교회 진영으로 넘어갔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스트먼, 시드니 훅 그리고 이들의 친구들이 변증법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동반자에서 자본가 계급의 동반자로 변절할 때 변증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위장막으로 이용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예들은 다른 나라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외인 것처럼 보이는 플레하노프의 예는 실제로는 규칙을 증명할 뿐입니다. 플레하노프는 뛰어난 변증법적 유물론의 선전가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실제 계급투쟁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실천과 유리되었습니다. 1905년 혁명과 이후 발발한 세계대전은 그를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진영으로 던져 넣으면서 그가 실제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세계대전 중에 그는 국제관계 영역에서 칸트의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인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의 주창자로 공공연히 등장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 그 자체가 사람을 혁명가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플레하노프의 예가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한편 섁트먼은 리이프크네히트가 감옥에 있으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유작을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는 온갖 생각들이 머리에 들어차고 이것들은 타인과의 교제로 인해 제지될 기회가 없습니다. 리이프크네히트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이론가로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노동운동에서 영웅적 행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변증법을 반대하는 어느 미국인이 이와 비슷한 자기희생과 독립성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를 응당 혁명가로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변증법적 방법론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리이프크네히트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최종 결론을 내렸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저술을 출판하기 전에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프란츠 메링과 로자 룩셈부르크 같이 좀더 능력있는 친구들에게 이것을 검토하도록 의뢰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충고로 그가 원고를 불속으로 집어던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론 영역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가 이 저술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메링, 룩셈부르크, 레닌 등이 이 행위를 문제삼아 그가 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어느 누가 이런 어리석은 제안을 했을 경우 이들은 리이프크네히트를 대신해서 단호하게 개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그와 철학적 동맹을 맺기는커녕 그의 이론적 오류들로부터 단호하게 거리를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섁트먼 동지의 행동은 이와 아주 다르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플레하노프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뛰어난 이론가였다. 그러나 결국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리이프크네히트는 뛰어난 혁명가였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청년당원들을 교육하는 자리에서 했습니다! 이 주장이 어떤 의미라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 변증법적 유물론이 혁명가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리이프크네히트와 플레하노프의 예들을 이렇게 인위적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놓고 섁트먼은 작년 그의 논문에 담긴 견해를 강화하고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방법론이 비일관성이라는 신의 선물에 의해 정치와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는 방법론에 달려있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의 견해입니다. 두 "예외들"을 잘못 해석하는 것을 통해 섁트먼은 규칙을 뒤집으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이 맑스주의 "지지자"의 주장이라면 적들로부터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은 맑스주의에 대한 철저한 청산으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것 이상입니다. 모든 사상과 모든 방법론에 대한 청산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안이 무엇입니까?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은 영원하며 변할 수 없는 철학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변증법적 사고입니다. 과학적 사고가 좀더 발전하면 좀더 심오한 사상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 사상을 위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기초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맑스와 같은 사람이 매년 또는 10년마다 탄생하지 않을 바에야 이 철학혁명이 쇠퇴하고 있는 부르조아 체제 내에 달성되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죽고 사는 임무는 세계를 새로이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 세계를 개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당분간 행동하는 위대한 혁명가들을 기대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맑스의 탄생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사회주의 문화의 기반 속에서만 인류는 과거의 사상적 유산을 검토할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지식 창조의 영역에서도 사회주의 문화를 습득한 후손들은 우리를 월등히 능가할 것입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범죄집단입니다. 모든 생활 영역에서 불평등을 더욱더 조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민의 지식 활동을 비밀경찰의 한없는 돌대가리 수준으로 저하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 달리 노동계급이 운이 좋다고 합시다. 그러면 전쟁과 혁명의 현 시기에 맑스주의를 능가하여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초월하여 논리학을 전진시킬 새로운 이론가나 쟁쟁한 이론가 집단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선진노동자들은 이들 새로운 선생님들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며 구세대의 사람들은 스스로 재교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이것은 미래에 대한 멋진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 체계를 대체할 저술들에 대해 동지는 나의 관심을 촉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술들이 실재한다면 확실히 동지는 변증법이라는 아편에 대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술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의 평판에 손상을 가하려는 동지는 아직도 이를 대체할 어떤 것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젊은 아마추어 의사가 수술용 칼을 사용하는 외과의사와 논쟁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젊은이는 해부학, 신경학 등이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이것들의 많은 부분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고 불완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 관료들"만이 이러한 사이비 과학 등에 의거하여 수술용 칼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 외과의사는 무책임한 젊은 의사에게 수술실을 떠나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버넘 동지, 우리 역시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에 대한 값싼 비방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 문제가 분파 투쟁 과정에서 내내 쟁점으로 부상했으므로 모든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대오 내에 부르조아 회의주의가 침투하는 것을 경계하시오. 아직까지 사회주의는 맑스주의 이상가는 과학적인 세계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과학적 사회주의 방법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진지하게 연구하십시오! 맑스, 엥겔스, 플레하노프, 레닌, 프란츠 메링 등을 연구하십시오. 이것은 캐넌 동지의 보수적 행태를 지적하는 편향되고 메마른 그리고 약간 우스꽝스러운 논문들을 연구하는 것보다 100배 이상 더 중요합니다. 청년 당원들이 혁명 투쟁을 위한 진지한 이론적 기초를 가득 머리 속에 채울 계기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의 논쟁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도록 노력합시다.  

잘못된 정치"현실주의 "

그러나 동지의 경우는 변증법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한 당의 입장을 지금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겠다고 동지는 결의안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동지는 당헌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세 살먹은 어린애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지의 이 말 자체는 훨씬 더 황당하고 해로운 의미를 또 하나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동지는 정치를 맑스주의 사회학과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용하지 않고 국가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고 합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분석하지 않은 채 올바르게 정치노선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수파 지도자들은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대외정책이 그 성격상 "제국주의적"임에 틀림없고 소련을 "무조건" 방어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명확한 강령입니다!) 소수파 "파벌"이 당대회에서 소련의 사회성격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진짜 범죄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수파 동지들은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즉 각기 다르게 투표할 것에 동의했습니다. 영국 정부 내에서도 이런 전례가 있습니다. 각료들이 "견해를 달리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 즉 다르게 투표한다는 전례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네 국가의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당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들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 있습니다. 즉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해 동맹하기 위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견해를 달리할 사치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맑스주의이며 원칙에 입각한 정치라면 무원칙한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통해 동지는 스스로 현실 정치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자기기만은 지난 50년간 노동운동 내 분파투쟁의 역사를 동지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결과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원칙적인 분파투쟁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사상과 강령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정정당당하게 당을 대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만 "구체적인" 문제들이 올바른 위치와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모든 색조의 기회주의자들 특히 원칙에 입각한 논쟁에서 몇번의 패배를 당한 기회주의자들은 언제나 맑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평가와 대립시켰습니다. 그런데 늘상 그렇듯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평가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압력 속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의 분파투쟁들에서 이러한 역할 분담은 지속되었습니다. 소수파는 사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고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소수파는 이론 영역에서 수정주의 전통과 정치 영역에서 기회주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영국에 있는 동안 앵글로-색슨족이 발명한 경험주의와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철학들은 가장 형편없는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죠 ! 이 철학들의 영향을 받아 그는 지난 세기말에 수정주의적인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가차없이 반박당했습니다. 그러자 독일의 기회주의자들은 갑자기 철학과 사회학으로부터 물러났습니다. 당대회와 당기관지를 통해 이들은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을 일반적인 원칙 문제들로 바꿔치기하는 맑스주의적 "현학들"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을 가했습니다. 지난 세기말과 현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남긴 기록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동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듯이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지배하는 정도에 스스로 놀랄 것입니다.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발전에 [이스크라]가 수행한 위대한 역할을 동지는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크라]는 노동운동 내의 소위 "경제주의" 그리고 인민주의(나로드니키, 사회혁명당)경향에 대해 투쟁하면서 출범했습니다. [이스크라]는 이론 영역에서만 맴돌고 있음에 반해 "경제주의자" 자신들은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측면을 지도하려고 한다는 것이 "경제주의자들"의 주요한 논지였습니다. 사회혁명당의 주요한 논지는 이렇습니다: [이스크라]가 변증법적 유물론 학파를 창시하려는 반면에 우리는 짜르 전제를 타도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나로드니키 테러분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손에 폭탄을 들고는 자기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당시 우리는 이렇게 논박했습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폭탄도 아주 좋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논리를 명료하게 해야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은 폭탄을 가지고 출발한 당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지고 출발한 당에 의해서 주도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경험입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같은 당에 있을 때 당대회 준비기간과 당대회 기간은 언제나 의제에 대한 격렬한 투쟁으로 들끓었습니다. 먼저 레닌은 짜르 체제의 성격에 대한 정리, 혁명의 계급적 성격 분석, 우리가 경과하고 있는 혁명 단계에 대한 평가 등과 같은 문제들을 의제에 올릴 것을 제안하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멘셰비키 지도자 마르토프와 단은 언제나 이렇게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사회학회가 아니라 정당에 몸담고 있습니다; 짜르 경제체제의 계급적 성격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임무들"에 대해서 합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나는 기억을 통해 이렇게 인용하고 있지만 실수할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란들은 매년 반복되어 판에 박혔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웠습니다.

"구체적인 정치 문제들"에 대해 집착한 자들에게 레닌은 언제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정치는 상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술은 전략에 종속된다; 노동자들을 특수한 문제에서 일반적인 문제로 인도하고 이들에게 현대 사회의 성격과 이 사회 기본 세력들의 성격을 가르치는 데에 모든 정치투쟁의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 멘셰비키들은 자신들의 불안정한 연합으로 인해 야기되는 원칙상의 차이점들을 응그슬쩍 무마해야할 필요를 언제나 시급히 느꼈습니다. 반면에 레닌은 원칙적인 문제들을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제기했습니다. 지금 소수파가 철학과 사회학에 반대하여 "구체적 정치문제들"을 옹호하는 주장은 단의 주장을 뒤늦게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고문서 보관소에나 들어가 있어야 할 정도로 낡은 맑스주의 정치 원칙만을 섁트먼이 존중하다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버넘 동지는 스스로 맑스주의 이론에서 "구체적인 정치문제들"로 논쟁을 전환하자는 호소를 하는 데 참으로 어색하고 들립니다. 소련의 사회성격 문제를 제기하여 나로 하여금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결정되는 방법론 문제를 제기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바로 동지였기 때문입니다. 동지가 스스로 결의안을 철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분파적 술수는 객관성이 전혀 없습니다. 동지는 사회학적 전제로부터 정치적 결론들을 끌어냅니다. 물론 지금은 일시적으로 이 사회학적 전제를 서류가방에 슬쩍 집어넣고 숨기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섁트먼 동지는 사회학적 전제가 없이 똑같은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면서 동지의 결론에 동조합니다. 에이번 동지 역시 숨겨진 전제를 이용하여 "조직적" 연합의 근거로 삼습니다. 소수파 진영의 실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동지는 반(反) 맑스주의자로 자처합니다. 섁트먼과 에이번은 관념적(Platonic) 맑스주의자로 자처합니다. 누가 더 저질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논쟁의 변증법

소수파가 은폐된 전제들과 전제의 결여를 외교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보수주의자들"은 당연히 이렇게 응답합니다: 출발점으로 어떤 계급적 전제들을 택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힐 경우에만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실있는 논쟁이 가능하다. 동지가 인위적으로 선택한 쟁점들에만 논쟁을 제한할 필요를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제들로서 소련 함대의 스위스 침략 또는 뉴욕 브랑스(Bronx)구에 출몰하는 마녀의 꼬리 길이 등을 논의하자고 누가 제안할 경우 나는 스위스가 바다에 접해있는지 그리고 마녀가 존재하는지 등의 문제들을 미리 제기할 정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심각한 논쟁은 특수적인 심지어는 우연적인 것에서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것으로 발전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동기는 논쟁 당사자들이 어떤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흥미를 끌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논쟁이 발전하면서 제기하는 문제들만이 실제 정치적 의의를 지닙니다. "관료적 보수성"을 비난하고 싶어하며 자신들의 "역동적인 기상"을 과시하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변증법, 맑스주의, 국가의 성격, 집중주의 등과 관련된 문제들은 "인위적으로" 제기된 것처럼 보이며 논쟁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논쟁은 논쟁 당사자인 개인과 파벌의 주관적인 논리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나름의 객관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논쟁의 객관적인 과정은 미리 생각되어진 논리적 계획이 아니라 반대되는 경향들의 살아있는 투쟁을 통해서 결정됩니다. 논쟁의 변증법적 성격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기 다른 계급들의 압력을 반영하는 데에 논쟁의 유물론적 기반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역사 과정 전체와 같이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논쟁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법칙들에 따라 전개되고 있습니다. 버넘 동지가 이진리를 인정하거나 말거나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 법칙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과학" 과 강령에 대항하는 "실험들"

동지는 다수파 동지들의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난은 이 "보수주의"를 뒷받침하는 특정 사회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공허할 뿐입니다. 그리고 동지는 스스로 제출한 문건에서 보수적 정치가 "비판적이며 실험적 정치 --- 한마디로 표현하면 과학적 정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32쪽) 얼핏보면 거만한 투와 함께 해롭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폭로입니다. 맑스주의 정치도 아니며 노동자 정치도 아니며 "실험적인", "비판적인", "과학적인" 정치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우리 대오에서는 참으로 듣기 힘든 허세가 넘치며 의도적으로 어려운 말을 왜 씁니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동지는 부르조아 여론에 영합하고 있으며 섁트먼과 에이번은 동지의 생각에 영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용어 선택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부르조아 지식인 사회에서 맑스주의는 더 이상 유행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맑스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릅니다. 망신살이 낀 이 말을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무엇으로 대체할까요? "과학" 그리고 첫 철자가 대문자로 된 바로 그 과학이란 말로 대체하면 됩니다. 과학은 "비판"과 "실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확고하며, 너무도 관용적이며, 너무도 비종파적이며, 너무도 교수다운 매력이 이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을 쓰면 어떤 민주적인 살롱(salon)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습니다.

동지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보수적인 정치 대신 대담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비판적이고 실험적인 정치 --- 한마디로 표현해서 과학적 정치를 내세워야 합니다." 이 이상 더 좋은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야말로 모든 쁘띠부르조아 경험주의자들, 모든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 모험주의자들이 "편협한", "제한된", "교조적인", "보수적인" 맑스주의에 대항해 사용해온 말입니다.

뷔퐁(Buffon)이 한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문체는 곧 사람이다. 정치 언어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 자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언어 선택은 계급투쟁의 한 요소입니다. 무기력한 현학자만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아니고 동지 자신이 변증법과 유물론뿐만 아니라 맑스주의란 말을 스스로 문건에서 삭제하고 있습니다. 동지는 이런 말들로부터 초월해 있습니다. 동지는 "비판적", "실험적" 과학을 추구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동지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대외정책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라는 말을 선택했습니다. 이 발명품은 동지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좀더 덜 "종파주의적인", 좀더 덜 "종교적인", 좀더 덜 엄격한 표현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치입니까! 이를 통해 동지는 제4인터내셔널이 사용하는 너무 당혹스러운 표현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지는 실험을 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노동자 운동은 풍부한 경험 그리고 동지가 좋아하는 풍부한 실험을 보유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하게 터득한 경험은 명확한 사상 즉 동지가 그렇게도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맑스주의라는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동지에게 실험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전에 당은 이렇게 물어볼 권리가 있습니다: 실험을 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까? 지난 시기 공업 발전과 그동안 진행된 수없이 많은 실험들의 필요한 결론들을 소화하지 않은 자에게 헨리 포드가 자기 공장에서 실험할 권리를 부여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공장의 실험실은 대량생산 설비로부터 면밀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체없는 "과학"의 깃발 아래 수행되는 동지의 실험은 노동운동 분야에서는 무당이나 하는 형편없는 실험입니다. 이것은 더욱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노동운동의 과학은 맑스주의입니다. 정체나 이름도 없는 사회과학, 대문자로 시작하는 바로 그 과학은 이스트먼과 같은 부류들이나 멋대로 수행하라고 내 버려두겠습니다.

동지는 이스트먼과 논쟁한 적이 있으며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는 당을 위해 논쟁을 잘 수행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논쟁할 때 동지는 동지가 속한 집단의 대표로서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계급의 적인 자본가 계급의 하수인으로 논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섁트먼과 공동으로 작성한 논문에서 이 하수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뚜렷이 드러내었습니다. 놀랍게도 동지는 이스트먼, 훅, 라이언즈 등과 같은 인사들에게 놀랍게도 [새로운 인터내셔널] 지면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선전하라고 초대했습니다. 이들이 변증법 문제를 제기하여 이 문제에 대한 동지의 외교적인 침묵을 깨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이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논쟁이 있기 오래 전인 작년 1월 20일자 섁트먼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스탈린주의 정당들 내부의 사태 전개를 면밀히 추적해야할 시급한 필요성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나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스탈린주의 정당의 내부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이스트먼, 라이언즈와 그 밖의 인사들이 자기 개인적 노력의 결과물들을 발표하도록 초청하는 것보다 1천 배나 더 중요합니다. 이스트먼의 내용없고 거만한 마지막 논문에 왜 당 공식출판물의 지면을 할애했는지 약간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는 하퍼즈 잡지(Harper's Magazine), 현대 월간(Modern Monthly), 상식(Common Sense) 등과 같은 부르조아 언론의 지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동지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넓지도 않은 지면을 이들이 더럽히도록 초청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놀라자빠질 지경입니다. 이 논쟁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쁘띠부르조아 지식인 일부에게는 흥미거리를 제공해줄 지 몰라도 혁명 분자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호소]를 어느 정도 개편해서 이스트먼, 라이언즈 등과 같은 작자들과는 좀더 많은 거리를 두고 노동자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스탈린주의 정당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나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섁트먼 동지는 나의 편지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동지가 초청한 맑스주의의 적들이 동지의 초청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해결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좀더 면밀하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동지는 섁트먼의 지지를 받아 우리 당 기관지에 우정어린 글들을 보내도록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역시 같은 섁트먼의 지지를 받아 동지는 변증법과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나와 논쟁할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지는 동맹군 섁트먼과 함께 부르조아 반(半) 야당 세력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표명하면서 소속한 당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맑스주의는 존중될 사상이지만 반대 세력들 간의 훌륭한 동맹은 맑스주의보다 더욱더 의미있다고 에이번 동지는 오래 전에 결론내렸습니다. 한편 섁트먼 동지는 더욱더 추락하여 재치있는 경구나 던지면서 자기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간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일정 시점에 이르면 그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상승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나는 희망합니다. 그의 "실험적" 분파 정치가 최소한 "과학"에 기여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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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28 2005/10/0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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