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

다아윈에 대한 나의 말을 근거로 삼아 섁트먼은 동지가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라고 말했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 애매한 칭찬은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변증법을 이용합니다. 일정량의 소금은 수프의 맛을 좋게 하며 소금을 좀더 치면 맛이 엉망이 된다는 것을 주부들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맹 상태의 농민 아낙네는 수프를 만드는 데 양질전화라는 헤겔의 법칙을 받아들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이와 같은 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뿐만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에 따라 실천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 네발 달린 짐승과 새는 영양분도 풍부하고 맛도 좋다는 것을 여우는 알고 있습니다. 산토끼, 집토끼, 암탉 등을 보면 여우는 이 동물들이 맛있고 영양가 있는 부류에 속한다고 결론내리고 뒤쫓습니다. 여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읽은 적이 없지만 이 경우 완벽한 삼단논법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우가 늑대처럼 자기보다 덩치가 큰 동물을 만나면 양이 질로 변한다고 재빨리 결론을 내리고는 도망칩니다. 확실히 여우의 다리는 완전히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헤겔의 논리학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예들은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모두 포함한 사고 방법이 이성의 자의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실재하고 있는 상호관계의 표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만물은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모든 상호관계는 여우와 인간의 의식이라는 언어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의식형태들을 일반화하여 이것들을 논리적(변증법적) 범주들로 전환시켜 주위 세계를 더욱 깊게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는 변증법의 가장 완성된 표현은 헤겔과 맑스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다아윈은 자신의 논리 방법들을 검증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 영역에서 보인 그의 천재적인 경험주의는 변증법적 일반화의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다른 논문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런 의미에서 다아윈은 "무의식적 변증법론자" 였습니다. 그러나 다아윈의 가치는 변증법에 이르지 못한 그의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을 설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엥겔스는 맑스와 같이 자연도태 이론의 위대성을 즉시 인정했지만 다아윈의 협소한 경험주의에 대해 안달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아윈은 죽을 때까지 맑스가 전개한 사회학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다아윈이 변증법이나 유물론을 언론에서 공격했다면 맑스와 엥겔스는 다아윈의 권위가 사상적 반동을 위장하지 않도록 배가된 힘으로 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동지가 "무의식적 변증법론자"라고 섁트먼은 변호사처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적이란 말에 방점이 주어져야 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격하시키면서 동지와의 동맹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섁트먼의 (역시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목적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섁트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변증법론자와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구태어 이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논리를 통해 섁트먼은 맑스주의 방법론을 깍아 내리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악의 정도는 이 정도를 이미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의식적인 또는 반의식적인 변증법론자들이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정치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아주 뛰어나게 적용했습니다. 이런 동지들을 공격하는 것은 명백히 현학적인 돌대가리짓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동지의 경우는 다릅니다. 동지는 맑스주의 방법론으로 당을 교육시킬 임무를 지닌 당 이론지의 편집자입니다. 그러나 동지는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가 아니라 변증법에 의식적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섁트먼이 주장하듯이 동지가 정치 문제에서 변증법을 충실히 적용했다 하더라도 즉 동지가 변증법적인 "본능"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동지에 대해서 투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지의 변증법적 본능은 다른 개인적인 자질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지만 의식적인 변증법적 방법론은 어느 정도 당원들 모두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증법과 다이즈씨

어쩌면 동지는 변증법적 본능을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것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의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본능도 현실과 무관한 학자적 관행과 지적인 오만함으로 인해 거의 질식되어 있습니다. 노동자의 계급적 본능은 상대적으로 쉽게 문제들에 대한 변증법적 해결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정신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계급과 유리된 지식인은 맑스주의 정치로 올라설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섁트먼과 에이번은 동지가 이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을 힘이 닿는한 막고 있습니다. 버넘 동지, 이들은 동지를 지지하는 것을 통해 동지에게 아주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분파적 방종의 동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연합으로 힘을 얻어 동지는 철학, 사회학, 정치, 조직 등의 영역에서 오류에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오류들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동지는 하나 하나의 문제를 접근할 때 다른 문제들과 이것이 갖는 연관성을 끊어버리고 특히 사회적 요인들과 국제적 경험을 이것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동지는 변증법적 방법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풍부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는 정치에서는 마치 마술사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이즈 위원회(Dies Committee)의 문제에서 동지의 이해할 수 없는 논리는 핀란드 문제의 경우처럼 아주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의회 기구를 활용하고자 하는 나에 대해 동지는 이 문제가 원칙적인 고려가 아니라 동지에게만 알려진 어떤 특별한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이 특별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사실 특별한 상황은 별 것이 아닙니다. 부르조아 여론에 동지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특별한 상황입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 분파 모두는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으며 다이즈 위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체제의 이해를 위해 체제의 너무나 적나라한 억압 기구들로부터 창피스럽게 관심을 딴 쪽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노동분업입니다! 낡은 사기술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나 새로운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해야 합니다! 동지가 막연하게 지칭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일 분파 특히 아주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일 분파는 동지처럼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영향력 하에 있습니다. 노동관료의 편견에 물들지 않은 보통 노동자들은 자기 계급의 적들에게 향해진 모든 대담한 혁명적 언사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환영할 것입니다. 지배계급의 기구가 반동적이면 반동적일수록 이 기구에 가해지는 혁명적 언사들은 더욱더 노동자들을 만족시킵니다. 이것은 역사의 경험에 의해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질려 즉시 뒤로 후퇴한 다이즈 자신이 동지의 입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싸움을 피한 채 숨는 것보다는 적이 후퇴하도록 만드는 것이 언제나 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섁트먼이 화가 나서 나에게 항의의 몸짓을 하는 것이 눈에 선합니다: "소수파는 다이즈 위원회에 대한 버넘의 견해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문제는 분파적 성격을 띠지 않았다." 등등. 물론 다 알고 있습니다. 소수파 전원이 다이즈 위원회 불참 전술을 지지했어야 했는데 이것만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사되었어도 전혀 사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의미없는 일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만 모두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견해를 공공연히 표현한 소수파 지도자 한 사람이 불참 전술을 지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종교"에 대해 논쟁을 일삼은 역사 시대보다 동지가 더 진보했다면 제4인터내셔널 전체는 기권을 가장 혁명적 정치라고 생각한 역사 시대보다 더 진보했습니다. 동지의 방법론 결여 이외에도 동지는 스스로가 정치적 지혜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경우를 통해 드러내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혁명가라면 긴 논쟁을 할 필요없이 적이 활짝 열어준 문을 지나가면서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이용했을 것입니다. 동지와 함께 다이즈 위원회 불참을 선언한 소수파 성원들의 숫자는 적지 않습니다. 이들 동지들에게 특별 강좌를 베풀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인 집단의 사이비 급진주의적 기권주의는 혁명적 전술의 기본적 진실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정치문제들"

소수파는 자신이 특별히 강하다고 생각하는 영역 즉 일상적인 혁명정치 영역에서 정확하게 가장 커다란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동지에게 더욱 적절하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폴란드, 발트해 국가들, 핀란드 등에 관한 문제에서 동지와 반대파 전부는 거대한 사태들에 직면하여 무능력을 확연히 드러내었습니다. 소련군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항하는 동시다발적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섁트먼은 자신의 논리를 개진했습니다. 그는 현자의 돌(a philosopher's stone)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아주 멋진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생각을 현실로 옮길 기회를 섁트먼이 결여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동부 폴란드의 선진노동자들은 이렇게 올바르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반대하는 동시다발적 봉기는 아마 미국 뉴욕의 브랑스(Bronx)구에서는 아주 편리하게 준비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준비 작업이 더욱 어렵습니다. 지금부터 곧 다가올 봉기 사이에 해야할 임무를 다룬 `구체적 정치문제'에 대해 버넘과 섁트먼으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한편 소련군 총사령부는 점령지의 폴란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토지와 공장을 점령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촉구는 소련군대의 지지 속에 점령지역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스크바 신문들은 노동자와 빈농들의 한없는 "열성"에 대한 보도를 지면이 넘치게 실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불신을 가지고 이러한 보도들을 접근해야 합니다. 언제나 거짓말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폴란드 지주를 이중적인 적으로 간주한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핍박당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지주에게 복수하고 자본가들을 몰아내라는 촉구는 이들의 기상을 고조시켰음에 틀림없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이 아니라 프랑스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연대를 맺고 있는 멘셰비키의 빠리 기관지는 단언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군의 진주는 혁명의 파도를 몰고 왔으며 이 메아리는 루마니아의 농민대중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이 기관지의 전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태인 분트, 폴란드 사회당 그 밖의 조직들의 지도자들은 소련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서 도망을 나왔으며 멘셰비키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동부 폴란드의 볼셰비키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완전히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노동자 농민과 함께 이들의 선두에 서서 지주와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대중들이 아무리 소련 관료집단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들과 유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짜르에 대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대중들로부터 러시아 혁명가들이 유리되지 않은 것과 똑같은 경우입니다(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투쟁 과정에서 대중들을 교육시키고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이들의 소박한 희망에 대해 이들에게 경고하십시오; 그러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어서는 안되며 이들 진영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이들의 투쟁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이 투쟁에 가능한한 최대한 독립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스탈린에 대항하는 봉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폴란드의 이후 사태는 이 정책의 올바름을 완전히 확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은 특히 스페인에서 펼쳤던 과거 우리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폴란드와 핀란드의 상황 사이에는 원칙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정책을 바꾸어야 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수파는 폴란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제 핀란드를 마치 구원의 새로운 닻인양 부여잡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핀란드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가? 트로츠키는 내전을 말하고 있는데 신문에는 아무런 보도도 없다," 등등. 소수파에게 핀란드 문제는 원칙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문제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각각의 문제는 고립되어 사태의 일반적 과정과 무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사태의 전개에 의해 혼란에 빠지자 소수파는 매번 우연적, 부차적, 일시적, 상황적 요인들에 기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핀란드에 내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는 항의는 결국 소수파가 실제 내전이 발발할 경우 우리 정책을 따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까, 아닙니까? 그렇다면 소수파는 폴란드에 대한 자신의 기존 입장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폴란드에 내전이 발발했지만 이들은 개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탈린과 히틀러에 대한 동시다발적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버넘 동지, 동지와 동지의 동맹세력은 이 문제를 끝까지 숙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핀란드 내전에 대한 나의 주장은 어떻습니까? 핀란드와 소련 사이에 군사적 분쟁이 일어날 시초에 이미 소련이 혹시 "소규모" 응징 원정을 통해 헬싱포르스(Helsingfors) 정부를 갈아치우고 다른 발트해 국가들과 같은 관계를 핀란드와 유지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가 테리요키(Terrijoki)에 쿠지넨(Kuusinen) 정권을 수립한 사실은 이들이 다른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전보는 핀란드 "적군"의 창설을 보도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태는 위로부터 소규모 정부가 구성된 경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쿠지넨의 강령이 발표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대토지가 빈농들에 의해서 분할되었다는 전보가 언론에 등장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전보들은 소련 관료집단이 내전을 조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내전입니다. 즉 인민 대중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는 핀란드 혁명정당의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우도 아닙니다. 외부 세력의 총칼을 통해 내전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소련 관료집단이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는 내전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폴란드 사태를 논의할 때 이 문제들을 모두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전의 문제입니다. 하층민과 빈곤층에게 호소하며 이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들을 몰아내거나 체포하라고 촉구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을 내전이라는 말 이외에 어떻게 달리 묘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렇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결국 핀란드 내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이것은 트로츠키 동지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군의 패배와 후퇴때문에 핀란드 내전은 물론 마너하임(Mannerheim)의 총칼 하에 진행될 수 없다고 나는 대답합니다. 이 사실은 나의 논지가 아니라 섁트먼의 논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초기 몇 단계에게 군대의 규율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는 봉기를 조직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그동안의 사태전개가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테리요키보다는 뉴욕 브랑스구로부터 두 전선에 걸쳐 봉기를 조직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군의 첫 두 분견대가 패배할 것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크렘린궁에 의해 숙청당해 머리가 잘린 적군 총사령부와 크렘린궁을 지배하고 있는 스탈린 관료집단은 우둔함과 사기 침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점의 정도를 우리는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군사적인 사건으로 우리의 정치노선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경우 소련 관료집단은 핀란드에 대해서 더 이상의 공세를 완전히 기피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 소수파의 세계정세 전반에 대한 시각을 혼란시키고 있는 문제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스칸디나비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핀란드에 대해 군사 원조를 제공한다면 핀란드 문제는 소련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 속에 잠겨 겉으로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심지어 소수파의 다수 동지들조차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을 유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소수파는 이 두 변종 즉 소련의 공세 중단 또는 소련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 발발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소수파는 소련의 핀란드 침략이라는 분리된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봅시다. 만약 지금 예상하고 있는 바대로 두 번째 공세가 좀더 잘 준비되고 수행된다면 적군의 핀란드 영토 진주는 내전의 문제를 다시 일정에 올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스럽게 실패했던 첫번째 시도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로 내전이 진행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정책은 이 문제 자체가 일정에 올라 있는 이상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적군이 핀란드에 성공적으로 진군하고 내전이 진행된다면 소수파는 무엇을 제안할 것입니까? 소수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루 하루 한사건한사건에 매달리고 사설의 개별 문구에 매달리면서 강령의 겉모습이나마 갖추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경험주의자와 인상주의자의 약점은 언제나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론적 당황과 기권주의

소수파의 모든 동요와 소동이 아무리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이론의 정점에서부터 가장 사소한 정치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수파의 두 가지 일반적 특징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통일된 개념의 결여입니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사회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분리하고 정치를 사회학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폴란드에서의 임무를 스페인의 경험으로부터 분리하고 핀란드에서의 임무를 폴란드에서의 입장과 분리합니다. 이로서 역사는 일련의 예외적인 사건들로 변모합니다. 여기서 말 그대로 맑스주의의 해체, 이론적 사고의 해체, 정치의 개별적 구성 요소들로의 해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험주의와 이것의 배다른 형제인 인상주의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수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버넘 동지, 변증법의 반대자요 경험주의자로서 자신의 경험주의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동지가 소수파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수파의 모든 동요와 소동 가운데에서 첫 번째 특징과 긴밀히 연관된 두 번째 일반적 특징이 있습니다. 늘상 그렇듯이 초급진적 수사라는 위장막에 감추어진 경향 즉 적극적인 행동을 꺼리는 경향, 스스로를 투쟁으로부터 제외시키려는 경향, 기권주의 경향이 이것입니다. 동지는 폴란드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을 그리고 핀란드에서 스탈린과 마너하임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지는 똑같이 양쪽 진영을 거부합니다. 다시 말하면 동지는 내전을 포함한 투쟁에서 기권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핀란드에서 내전이 발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적이며 상황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내전이 전개되면 소수파는 폴란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른 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소련 관료집단이 그 성격상 "제국주의적"임으로 "우리는" 이 더러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말로는 "구체적인" 정치적 임무를 외쳐대면서 소수파는 실제로 역사 과정 밖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버넘 동지, 다이즈 위원회에 대한 동지의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수파의 기권주의와 당혹감을 극명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동지의 지도 원칙은 언제나 같습니다: "고맙습니다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어느 개인, 당, 심지어는 계급도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가 특히 대사건에 직면하여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불가피하며 다시 말하면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지식인들은 당혹한 상태를 "과학"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소수파의 모순적인 강령은 지식인의 허풍스러운 말로 표현되었을 뿐 쁘띠부르조아의 당혹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계급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쁘띠부르조아와 집중주의

조직 영역에 대한 동지의 견해는 이론 영역이나 정치 영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조적, 경험적, 비혁명적입니다. 등잔불을 손에 든 채 스톨버그(Stolberg)같은 사람이 어떠한 극단적인 행위도 없으며 테르미도르와 반혁명도 없는 이상적인 혁명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지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자기 머리에서 생각난 것은 무엇이든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고 관료적 퇴보로부터 당을 보호하는 이상적인 당내 민주주의를 찾고 있습니다. 당은 자유로운 개성을 주장하는 장이 아니라 노동자혁명의 도구라는 사소한 사실을 동지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승리한 혁명만이 당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와 현대 문화 전체를 퇴보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직의 미국 지부가 너무 과도한 집중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지는 않습니다. 말을 꺼내기조차 우스운 주장이 될 것입니다. 몸살은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민주주의를 기괴하게 남용하고 왜곡하는 데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당내 위기의 뿌리입니다.

노동자는 하루 종일 공장에 매여 있기 때문에 당을 위해서 보낼 시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모임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사항들을 배우려고 합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에 따른 정치적 결론이 이것입니다. 가장 명확하고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현실을 평가하고 사건들을 면밀히 추적하는 지도자들을 그는 소중히 여깁니다. 노동계급으로부터 유리된 쁘띠부르조아 특히 비계급적 분자들은 인위적이며 폐쇄된 환경 속에서 무기력한 생활을 영위합니다. 이들은 정치나 그 대체물을 맛보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이들은 약점들을 잡아내고 당 "지도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토막 뉴스나 한담들을 주고받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비밀"을 제공하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토론은 이들의 타고난 환경입니다. 이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여전히 모자랍니다. 말싸움을 통해 이들은 제4차원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악순환 속을 헤매다가 소금물로 갈증을 해소합니다. 소수파의 조직 강령을 동지는 알고 싶습니까? 당내 민주주의의 제4차원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논쟁더미로 정치를 매장시키고 지식인 집단의 무정부주의더미로 집중주의를 매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천 명의 노동자들이 당에 가입하면 이들은 쁘띠부르조아 무정부주의자들을 확실하게 정리시킬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빨리 일어날수록 그만큼 더 좋습니다.  

결론

왜 내가 소수파의 다른 지도자들이 아니라 동지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동지는 알고 있습니까? 동지는 소수파 연합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에이번 동지의 분파는 강령과 깃발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위장막이 필요합니다. 한때 섁트먼이 위장막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스펙터와 함께 마스티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섁트먼이 추종하는 동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동지의 사상을 나는 노동계급 내 부르조아적 영향력의 표현으로 간주합니다.

일부 동지들에게는 이 편지의 어조가 너무 날카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자제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 운동의 이론적 기초, 정치원칙, 조직방식 등을 거부하고 폄하하고 타도하려는 시도에 당이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근 논문을 읽은 후 에이번 동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직의 분리를 의미하는군." 이 반응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한 헌신성을 에이번 동지가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는 서클에나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어쨌든 조직의 분리를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견해 차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결과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에게 문제는 조직의 분리가 아니라 당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당면한 당대회가 가차없이 수정주의자들을 격퇴하기를 나는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회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유리시키고 정치를 사회학으로부터 유리시키려는 시도를 통해 소수파 지도자들은 맑스주의와 결별했으며 쁘띠부르조아 경험주의의 전달장치가 되었다고 당대회는 단호히 선언해야 합니다. 당은 결연히 그리고 완벽하게 맑스주의 사상과 볼셰비즘의 정치적 조직적 방법들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공식 출판물 편집진을 이 사상과 방법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데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당은 미래에 당출판물의 지면을 맑스주의 사상에 뭔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일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당원들에게 당연히 확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가지고 숨바꼭질을 하거나 이것을 경솔하게 우롱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의 정치는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 정당, 이데올로기 경향들에 대한 계급적 분석이 없이는 올바른 정치 노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소련에 대한 정책을 개별 사건으로부터 도출하는 한편 소련의 계급적 성격과 유리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당은 저속한 기회주의라고 비난해야 마땅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붕괴 현상은 쁘띠부르조아들을 격렬한 불만 속에 가두면서 이 계급의 하층이 좌로 움직이도록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혁명세력에게 커다란 기회와 동시에 심각한 위험을 제공합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결정적으로 노동계급의 입장으로 넘어온 쁘띠부르조아 분자들만을 원합니다.

이들의 이론적 정치적 변모는 과거의 환경과 완전히 결별하고 노동자들과 긴밀한 유대를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당을 위해 노동대중을 당원으로 가입시키고 교육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노동계급의 환경에 적응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증명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당원 자격에서 지지자의 지위로 강등되어야 합니다.

계급투쟁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당원들은 책임있는 지위를 맡을 수 없습니다. 부르조아 환경에서 넘어온 분자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사회주의에 헌신하더라도 노동계급의 교사가 되기 전에는 노동계급의 학교에 가야 합니다. 청년 지식인들은 지식인 청년의 지도자로 올라설 것이 아니라 힘든 실천적 작업을 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중심지에서 몇 년을 보내야 합니다.

당의 계급적 구성은 당의 계급적 강령과 일치해야 합니다. 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는 노동계급적 성향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존재를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 * *

버넘 동지! 이러한 원칙들의 기반 위에서 우리가 합의에 도달한다면 어려움이 없이 우리는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에 대해서도 올바른 정책을 수립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동지가 관료주의나 보수주의의 어떠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투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맹세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현재 당내의 위기를 종식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1940년 1월 7일

볼셰비키로서 인사를 드리며,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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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29 2005/10/0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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