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약된 경제"

레닌은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경제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섁트먼은 내가 오직 "경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 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정치"를 무시한다고 훈계한다. 그러나 레닌을 활용하려는 이 두 번째 노력은 첫 번째 노력보다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경우 섁트먼의 오류는 정말이지 엄청나다! 레닌이 한 말의 의미는 이렇다: 경제 과정, 과업, 이해 등이 의식적이고 일반화된("집약된") 성격을 획득할 경우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이러한 것들은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며 정치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약된 경제로서의 정치는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원자화되고 무의식적이며 일반화되지 못한 경제활동을 지배한다.

심대하고 전면적으로 경제를 "집약하는" 정도 즉 경제과정의 진보적 경향들을 표현하는 정도에 따라 정치노선의 올바름은 한치의 오차없이 결정된다. 이것이 맑스주의자의 관점이다. 우리가 정치노선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소유형태와 계급관계의 분석에 기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만 "상부구조"의 요인들을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적대 분파의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할 경우 우리는 즉시 이러한 현상의 사회적 즉 계급적 뿌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다른 방법을 채택할 경우 우리는 시끄럽기만 한 맑스주의 모방자 또는 "관념적(Platonic)" 맑스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다"라는 명제는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에게도 적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정책은 일반적 법칙의 예외로서 "집약된 경제"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자유의지가 발현된 경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관료집단의 이해에 의해 굴절된 채 표현되고 있는 소련정부의 정치를 국유화 경제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시도에 대해 섁트먼은 미친듯이 저항하고 있다. 그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정치노선을 경제의 의식적인 일반화로부터가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 즉 주먹구구, 즉흥, 공감과 반감 등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는 이러한 인상주의적 정책을 사회학적으로 근거를 삼는 우리의 정책과 대치시키면서 우리가 정치를 무시한다고 동시에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섁트먼의 허약하고 변덕스러운 정치도 마찬가지로 경제의 "집약된" 표현임에 확실하다. 다만 애석한 것은 그의 정치가 탈계급적 쁘띠부르조아의 경제를 집약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르조아 전쟁과의 비교

섁트먼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한때는 진보적이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 반동적임으로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를 계급적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체제가 모두 진보적이었을 때에만 진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봉건적 소유체제에 저항하여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요인이었을 때에만 진보적이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을 때 반동적인 성격으로 변화했다. 소련과 관련하여 섁트먼은 생산수단의 국가소유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 소유체제가 다른 나라들로 확대되었을 경우 이것이 경제적 반동을 가져온다고 말하고자 하는가? 물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생각들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민족부르조아 전쟁의 예는 정말이지 아주 유익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러나 섁트먼은 이 교훈을 아무 관심없이 흘려버리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통일 독일공화국을 위해 노력했다. 1870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 이들은 독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였다. 이 투쟁이 왕조적 이해에 영합하는 기생집단들에 의해 이용되고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프로이센이 알사스-로렌 지방을 합병하자 맑스와 엥겔스가 즉시 프로이센에 대해 반대했던 사실을 섁트먼은 지적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우리의 관점을 더욱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 경우는 두 부르조아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두 국가는 모두 계급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경우 두 적대국가 가운데 누가 "덜 해로운가"를 결정할 선택권을 역사가 허용한다면 이 결정은 보완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경제적 문화적 공간인 민족부르조아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기에 민족국가는 진보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한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호엔쫄런 왕가와 이 왕가와 연합한 대토지 귀족들(junkers)이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지지했다. 그런데 알사스-로렌 지방의 합병은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에 관해서도 민족국가의 원칙을 침해했으며 보복전쟁의 기반을 조성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맑스와 엥겔스는 프로이센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를 통해 이들은 부르조아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양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력이 더 우수한 프랑스에 대항해서 경제력이 더 열등한 독일의 이해에 봉사하는 위험을 피했다. 만약 1870년에 프랑스가 노동자국가였다면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를 지지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계급적 조건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치 행동을 결정했을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반복하기에 창피한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오래된 부르조아 국가들의 경우 민족적 과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인류는 발전하는 생산력과 너무 협소한 민족국가라는 틀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경우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벗어던지고 사회주의 소유체제에 기초한 계획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국제노동계급의 과제이다.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건설하자"는 우리의 구호가 바로 이 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토지소유주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요인이다. 여기서 크렘린궁 관료집단이 채용한 관료적 몰수방식들은 독일 통일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왕조적 방식들을 채용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동적 방식에 의해 반동적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것과 관료적 방식을 통해 진보적 소유형태를 도입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 우리는 이 두 선택을 같은 차원에 두지 않고 덜 해로운 쪽을 선택한다. 이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호엔쫄런 왕가에 투항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관료집단에 "투항"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불전쟁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수행한 역할은 왕조의 일반적 역사적 역할이나 존재이유 중 어느 것도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상황적 패배주의 노선 즉 콜룸부스와 달걀

이론적 공백의 도움을 받아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가지고 섁트먼이 어떻게 자기 주장을 펴는지를 이제 확인해보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결코 지지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이란 무엇인가?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계속되는 정치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지한 적이 없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지 않은 국제정책을 계속하는 형태인 전쟁을 왜 지지해야 하는가?"(앞의 글 15쪽) 이 주장의 완벽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노골적인 삼단논법을 동원하여 그는 우리에게 완벽한 패배주의 노선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콜룸부스와 달걀처럼 단순한 일이다!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지지해본 적이 없으므로 소련을 결코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독소불가침조약 이전에 그리고 적군의 폴란드 점령 이전에 크렘린궁의 국내 및 국제정책을 거부했다; 따라서 작년에 발생한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도 우리 노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과거 소련을 방어했다면 이것은 순전히 일관되지 못한 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등등. 그러나 그는 제4인터내셔널의 현재 정책뿐만 아니라 과거 정책까지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스탈린에 반대하므로 소련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스탈린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것으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소련에 대해 이적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그는 주장해왔다. 차이가 있다면 섁트먼은 오직 최근에 와서야 이 견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크렘린궁의 정책에 대한 그의 거부는 완벽하고도 확실한 패배주의 노선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섁트먼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좀 전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제국주의 세력이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를 압살하고 러시아를 식민지의 집합체로 변모시킬 의도로 소련을 침공한다면 우리는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이 과거 우리의 노선이었으며 지금도 소수파의 노선이다." (앞의 글 15쪽) 이런, 이런, 이런!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은 반동적이다; 전쟁은 이 반동적 정치의 연장이다; 우리는 반동적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잔악한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침공하고 " 러시아를 식민지로 변모시킬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섁트먼은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말이 되는가? 논리는 어디로 도망갔는가? 버넘의 모범을 따라 섁트먼도 논리를 종교와 그 밖의 다른 박물관 소장품들의 영역으로 격하시킨 것인가?

이렇게 논리가 뒤죽박죽된 상황의 열쇠는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이 추상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 발언은 해부되고 구체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정책 뿐만 아니라 국제정책에 있어서도 관료집단은 자신의 기생적 이해를 최우선에 둔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이들 정책에 대항해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매우 왜곡된 형태로나마 관료집단의 정책은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옹호한다. 그래서 관료집단이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소유와 외국무역 독점을 지키고 짜르시대에 발생했던 부채의 지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이것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과 제국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이러 저러한 정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관료집단의 반동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성과들을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제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 집약된다.

레닌은 패배주의 노선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부터 도출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지배계급의 특정 발전단계로부터 도출했다. 사회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전쟁의 성격이 정확하게 결정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노선을 결정할 때 민주주의, 왕정, 침략, 국가방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그는 권유하였다. 여기에 반대하여 섁트먼은 패배주의 노선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도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패배주의 노선은 소련과 핀란드의 계급적 성격에 관심이 없다. 관료집단의 반동적 특징들과 "침략행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이 핀란드에 비행기와 총포를 보내 핀란드 지배계급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 상황은 섁트먼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 아무 관계가 없다. 만약 영국 군대가 핀란드에 진주하면 섁트먼은 체임벌린의 혓바닥 밑에 온도계를 들이밀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들 것이다. 크렘린궁의 제국주의 정책으로부터 핀란드를 구출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덤으로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들"을 타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온도계가 가리키는 지점에만 온전히 의거하여 그는 소련 패배주의에서 소련 방어주의로 노선을 전환할 용의가 있다. 추상적 원칙들을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로 대체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섁트먼은 과거의 예들을 검토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한다: 과거 언제 어디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쁘띠부르조아적 기회주의를 드러냈는가?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제시한 증거를 보충하기 위해서 스페인혁명과 관련하여 방어주의 및 방어주의 방식들에 대해 우리가 교환한 두통의 편지를 공개하겠다. 1937년 9월 18일 섁트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 `스페인 하원에 우리 동지 한 명이 의원으로 있다면 그는 네그린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것입니다.'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혹시 글자가 잘못되었으면 몰라도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신 쇠퇴하고 있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대결이 지배적인 것이라면 반(反) 파시즘 투쟁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 하원에서 반파시즘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후에스카 전선에 있는 우리 동지가 사회주의자 동지로부터 왜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의원이 하원에서 전선에 보낼 소총을 구입하기 위해서 백만 페세타를 쓰겠다는 네그린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동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가 이렇다할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 (강조는 필자)

이 편지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이지 않다는 순전히 부정적인 기초하에 섁트먼은 배신적인 네그린 정권에 대해 신임을 표명할 용의를 보였다.

1937년 9월 20일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네그린 정부의 국방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신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범죄행위가 될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적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반대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네그린 정부의 전쟁 수행과 전쟁 승리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의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정부가 부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인민을 굶기는 정부라고 비난합니다. 정부는 타도되어야 합니다. 이 정부를 대체할 능력이 없는 한에서 우리는 이 정부의 명령 하에서 내전을 치룹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를 이용하여 우리는 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공공연히 표현합니다. 이 정부에 대항해서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추동하고 이 정부의 타도를 준비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노선은 모두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가 될 것입니다."

내가 보낸 이 답장의 어조는 섁트먼의 기회주의적 입장이 나에게 끼친 놀라움을 미약하게 밖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단편적인 오류들은 물론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지금 이 편지는 섁트먼의 정치 경향에 대해 새로운 진실을 밝히고 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때문에 부르조아 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 사고를 소련에 적용하면 결론은 반대로 나온다. 즉 소련 정부를 신임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역시 사이비 급진주의는 기회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계급적 기준의 기각

다시 한번 맑스주의의 근본원리로 돌아가 보자. 맑스주의 사회학에서 국가, 정당, 철학, 문예사조 등과 같이 주어진 현상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계급 규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계급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발전단계를 경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조건에 놓이며 다른 계급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2차적 또는 3차적 요인들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은 구체적인 분석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또는 전부 계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의 경우 분석할 대상을 계급적으로 규정하지 않고서는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와 근육의 구조만 연구해서는 동물에 대한 해부는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뼈와 근육의 구조를 무시하려는 해부학 논문은 공허할 것이다. 전쟁은 사회 즉 사회 지배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기능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기관 즉 국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 기능을 연구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조직 즉 사회의 일반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기관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뼈와 근육은 생산력과 계급(소유 )관계이다. 기능인 전쟁이 그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 즉 국가와는 무관하게 "구체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있다. 너무도 기괴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근본적 오류는 역시 같은 정도의 노골적인 오류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기능을 기관과 분리시킨 후 기능 그 자체를 연구하는 섁트먼은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를 추상 속에 해소시켜 버린다. 제국주의 전쟁은 금융자본의 기능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독점자본이라는 특수한 자본주의에 기초하여 특정 발전단계에 놓인 자본이 곧 금융자본이다. 이 규정은 근본적인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소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서 이 용어의 범위를 고무줄처럼 늘어뜨린 섁트먼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이론적 기초마저 허물어 버린다. 그는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의 확대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확대에도 적용한 것을 피상적으로나마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두 국가 즉 노동자국가와 제국주의국가의 사회구조적 차이를 추상적이라고 선언하면서 무시한다. 이렇게 맑스주의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섁트먼은 구체적인 분석을 추상적이라고 낙인찍고 추상적인 분석을 구체적이라고 위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이론을 무지막지하게 가지고 노는 행태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국의 모든 쁘띠부르조아들은 모든 형태의 영토 점령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낙인찍고 있다. 특히 지금 미국이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말이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특정 순간에 영토병합에 몰두해 있거나 아니면 핀란드를 다른 나라의 병합으로부터 "방어하는 일"에 몰두해 있거나 간에 금융자본의 국제정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이들은 독실한 신자의 경건한 분노로 몸을 떨면서 화들짝 놀라 자빠진다. 당연히 소수파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적 수준에 있어서 보통 쁘띠부르조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공통의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쁘띠부르조아는 자신의 사회적 기초와 정치적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현실에 대한 계급적 접근방식과 쁘띠부르조아의 사회적 지위 및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유기적인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폴란드에 대해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이 나름의 관료적 방식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혁명에 추동력을 제공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노동계급의 "관료적 혁명"이 어쩌면 가능하다고 내가 주장한 것으로 섁트먼은 윤색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의리마저 없는 행태이다. 나의 표현은 엄격하게 제한된 것이었다. "관료적 혁명"이 아니라 관료적 추동력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 추동력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감지했으며 이것의 의미를 이해했으며 기존 소유관계의 전면적인 전복을 달성하기 위해 이것을 이용했다. 제때에 이러한 추동력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것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혁명정당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이 추동력은 소련의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의 경제체제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만 가능했다. 소련군 점령지 내의 계급투쟁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위력을 통해서만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혁명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운동의 고립적 성격과 소련 관료집단의 막강한 물리력만이 이 혁명적 대중운동을 재빨리 목졸라 죽일 수 있었다. 노동자국가, 피억압 대중, 보나파르트 관료집단 등 세 요인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폴란드 사태에 대해 한담을 늘어놓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의 국회 선거에서 제시된 선거강령은 당연히 크렘린궁의 명령에 의해서 나왔다. 그러나 이 강령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들의 소련에의 편입; 농민을 위한 지주토지의 몰수; 대공업과 은행의 국유화.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단일국가로 통일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전개될 독립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올바르다. 그리고 선거강령의 다른 두 요소들이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동지는 우리 대오에 없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으로 하여금 사회혁명적 강령을 택하도록 강제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길을 찾던 중 섁트먼은 전혀 사회적 변화가 없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자기 주장의 예로 들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 아닌가! 소련 관료집단이 언제나 모든 곳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기를 원한다거나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했지만 소련의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에서 일어난 체제의 전복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집단만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관료집단은 폴란드 내 소련군 점령지역을 소련 영토로 편입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섁트먼은 이 체제 전복 현상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현상을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세우려고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는 민족적 억압이 계급착취를 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토지를 스스로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도망하고 있던 지주들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등등. (같은 글 16쪽) 그런데 섁트먼에 의하면 소련군은 이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소련군은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주한 "반혁명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장악한 서부 폴란드의 노동자 농민 대중은 왜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동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줄행랑을 쳤는데 왜 서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혁명가, "민주주의자", 유태인들이 줄행랑을 쳤을까? 섁트먼은 이 차이점을 곰곰히 생각할 겨를이 없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므로 "관료적 혁명"이란 황당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급하다. 그는 마치 신생아실에 들어가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비유가 너무 과한 것일까?

멘셰비키들은 크렘린궁의 대외정책에 대해 섁트먼보다 더 "화해불가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빠리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소련군이 명령받은 지역에 채 진주하기도 전에 농촌 전역에서 혁명적 농민 자치를 위한 기본 기관인 농민위원회가 등장했다." 물론 소련군 당국은 이러한 위원회들을 자신들이 도시 중심지에 수립한 관료적 기관들에 부속시키는 조치를 시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은 농민위원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위원회가 없이는 농민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Dan)은 10월 19일 이렇게 썼다: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과 소련 관료집단의 등장은 이들 점령지역들 뿐만 아니라 이들 너머 지역까지 사회 소요와 사회변혁의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추동력"이란 말은 내가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 먼저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은 더 나아가 "이 추동력에 의해서 일어난 물결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독일을 강타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도로든 다른 국가들에게 밀려들어갈 것이다"라고 짐작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크렘린궁은 거대한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피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 전에 이미 사라져야 했을 반봉건 농경소유관계가 존재하는 동부 폴란드에 적군이 진주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격렬한 농민운동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위원회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소련군의 철수가 아니라 진주와 함께 이런 사태가 촉발되었다. 내가 멘셰비키들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정보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보소식통은 이들에게 친분이 있는 폴란드인 및 유태인 망명자들이며 이들은 현재 프랑스에 모여 있다. 특히 이들은 프랑스 부르조아들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 관료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흘릴 이유는 없다.

더욱이 멘셰비키들의 증언은 부르조아 언론의 보도로 그 진실이 확인되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폴란드 영토의 농민혁명은 자생적인 운동의 위력을 보여왔다. 소련군이 즈브루치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토지는 먼저 소농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농토의 약 30%가 몰수되었다." ([뉴욕 타임즈], 1940년 1월 17일자)

이제 섁트먼은 내가 전혀 새로운 주장을 꺼내 놓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새로운 주장인양 드리밀고 있다: 동부 폴란드에서 토지를 농민들이 몰수한 사실이 소련 관료집단의 정책 일반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평가가 달라야 한다고 제안한 바 없다.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소련 당국은 노동계급을 혼란시키고 사기를 죽였다. 이 결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해 전쟁을 활용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이러한 범죄행위들에 비교해서 이 두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물론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없으며 크렘린궁 관료집단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폴란드의 예속을 대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을 통해 이 문제는 정책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이 정책일반이 구체적으로 굴절된 문제로 되어버렸다. 갈리시아와 서부 벨로루시의 농민들에게 농민혁명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반동적인 관료집단에 의해서 추동되었다는 이유로 제4인터내셔널이 이 격변을 보이코트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소련군의 편에 서서 이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무조건적인 임무였다. 동시에 크렘린궁 정책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과 이 성격이 소련군 점령지에 미칠 위험을 쉬지 않고 대중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두 과업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같은 과업의 두 측면을 결합할 줄 아는 것 --- 바로 이것이 볼셰비키의 정치이다.  

다시 한번 핀란드에 대해서

폴란드의 사태를 이해하는 기이한 통찰력을 드러낸 후 섁트먼은 배가된 권위를 가지고 핀란드 사태에 대해 나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다. 나의 글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내전에서 현재 소련군은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와 같은 편을 이루고 있다. " 이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현도 칼날 같은 섁트먼 재판관의 승인을 얻지는 못했다. 핀란드 사태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미 그를 뒤흔든 후였다. "편지" 16쪽에서 섁트먼은 "핀란드에 대한 동지의 놀랄만한 발언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경우보다 근거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가 논리를 끝까지 추구하여 나름의 결론을 이끌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애석함을 느낄 뿐이다.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크렘림궁은 자신의 과업을 전략적 소득을 얻는 것으로 한정했다. 즉 짜르제국의 일부였던 이들 나라에 설치한 전략적 군사기지들이 이후 이 나라들이 소련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계산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외교적 위협으로 달성한 이러한 성공에 비해 핀란드에서는 이 계획이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저항에 대해서 화해조치를 취할 경우 소련 관료집단의 "위신 "과 발트해 국가들에서의 성공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과는 반대로 크렘린궁은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로부터 사고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크렘린궁은 핀란드 부르조아지를 겁주어서 이들이 양보를 하도록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이상의 조치를 취할 것인가?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자동적인" 해답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 경향들에 비추어 구체적인 사태전개에 따라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렇게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군사작전은 11월 30일에 시작되었다. 바로 이날 틀림없이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 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핀란드 공산당은 핀란드의 근로인민을 향해 라디오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이렇게 선포했다: "핀란드 역사상 두 번째로 핀란드 노동계급은 유산계급의 지배에 대해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1918년에 있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첫 투쟁은 자본가와 지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로인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정부를 겁주려는 시도는 전혀 없으며 핀란드 국내에 봉기를 촉발시켜 소련군의 침공을 내전으로 보완하려는 계획만이 이루어졌음이 이 선언서 하나만으로도 명백했다.

12월 2일에 발표된 소위 인민정부의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핀란드 각지에서 인민은 이미 봉기에 착수했으며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선언문의 이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렇지 않다면 봉기가 시도된 장소들이 언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준비된 고립된 봉기들이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상황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어쨌든 "봉기들"에 대한 소식은 봉기의 촉구를 의미했다. 더욱이 선언문은 "다가올 전투 과정에서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대오에서 배출된 자원군에 의해서 확대될 첫 핀란드 군단"의 구성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이 "군단"에 속한 병력이 1천명이 되었던 1백명이 되었든 크렘린궁의 정책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군단"의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동시에 전보들은 국경지역 농민에 의한 대지주 소유 토지의 몰수를 보도했다. 소련군이 처음으로 진군한 기간 동안 바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보들의 내용이 조작되었더라도 선언서는 농민혁명을 촉구하는 의도를 완전히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선언할 정당성은 나에게 충분히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12월초에 나는 이러한 사실들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의 내적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해 나는 이 투쟁의 전체 방향에 대해서 필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반(半) 선험적인 결론이 없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관찰자는 될 수 있어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런데 "인민정부"의 호소는 왜 즉각적인 대중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농민 최상층부와 노동관료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는 반동적인 군대에 의해서 핀란드가 완전히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크렘린궁의 정책이 핀란드 공산당을 무의미한 요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셋째, 소련 정부는 핀란드 근로대중에게 혁명적 열정을 불어넣어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조차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호소에 농민들은 아주 느리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지역 소비에트의 권력이 아직 미약했고 백군의 군사적 성공이 있을 때마다 농민들에 대한 가차없는 형벌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농민혁명을 일으키라는 호소에 핀란드의 빈농들이 반응을 늦게 보인 이유는 그만큼 더 당연한 셈이다. 농민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제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준비가 엉망이었던 첫 진공에서 적군(赤軍) 은 실패만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이 봉기한다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단계에서 핀란드에서 독자적인 내전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이 내전을 촉발하는 조치들을 통해서 군사작전을 보완할 것이라고 나는 정확하게 계산하여 말했다. 최소한 핀란드 군대가 전멸될 때까지 나의 이 계산은 적군 점령지와 인근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1월 17일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핀란드 정보소식통은 국경지방 중 한 곳이 핀란드 망명자 부대에 의해서 침략을 받았으며 문자 그대로 동족상잔의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담은 전보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내전의 양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적군이 핀란드 안으로 새로이 진군할 경우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평가는 전쟁의 단계마다 그 올바름이 틀림없이 확인될 것이다. 섁트먼은 사태 분석은 물론이요 약간의 예상조차 할 능력이 없다. 그는 고상한 분노에만 자신을 한정하고 있으며 이 이유 때문에 전쟁이 진전하는 매 단계마다 더욱 깊이 무지의 늪 속에 빠져들고 있다.

"인민정부" 수립 촉구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더불어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섁트먼은 고함을 지른다. 소련에도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는 이것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섁트먼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이미 완성된 지 오래되었다. 부르조아지를 통제하면서 소련은 국유화 생산관리체제로 이행했다. 노동자에 의한 관리에서 지금은 관료집단에 의한 지령경제 단계로 나아갔다. 노동자에 의한 새로운 생산의 통제는 이제 관료집단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봉기의 성공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한편 핀란드에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아직까지 토착 부르조아지를 몰아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부르조아지가 남긴 권력의 공백을 관료집단이 채우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더욱이 동부 폴란드나 핀란드를 인민위원들을 수입해서 통치할 것을 시도할 만큼 크렘린궁이 그렇게 어리석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소련 관료집단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점령지의 근로대중 가운데 새로운 행정기구를 끌어내는 일이다. 이 과업은 여러 단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농민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위원회이다.

쿠지넨의 강령이 "공식적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 강령이다"라는 사실을 섁트먼은 꼭 부여잡고 있다. 그렇다면 크렘린궁은 핀란드를 소련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기보다 그곳에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소련은 스페인을 연방 안으로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은 노동자혁명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실히 보장할 능력을 과시해야 했다. 이것이 이들이 스페인에서 처한 문제의 실체였다. 이 과업은 스페인 혁명이라는 특정 국제 상황에서 소련 관료집단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크렘린궁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과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행동이 증명하듯이 이들은 즉시 또는 두 단계를 거쳐 핀란드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확실히 결정하였다. 쿠지넨 정부의 강령은 "공식" 입장에서 보더라도 1917년 11월 볼셰비키당의 강령과 다르지 않다. 내가 "백치" 쿠지넨의 선언문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실을 섁트먼은 확실히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백치" 쿠지넨은 사태의 내적 논리(변증법) 을 끝까지 사고하기를 거부하며 겉으로 영리한 척하는 많은 소수파 인사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놀라운 분석의 결과 섁트먼은 이번에 소련에 대해 패배주의 노선을 공공연히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이 계속해서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우리는 기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할 경우 세계노동계급은 "이 폭거에 대해 명확히 패배주의 노선을 택해야 한다"(Sozialisticheski Vestnik, 19 20호, 43쪽)고 11월 12일자 멘셰비키 기관지에 밝힌 바 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 시절 단은 열렬한 조국방어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심지어 그는 짜르체제 하에서도 패배주의 노선을 주창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어떤 계급이 자기 계급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핀란드의 사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지에 더 가까이 있으며 허구를 사실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단과 섁트먼은 지금까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 "의 문제에서 섁트먼은 단과 정확히 "똑같은 계급에 충실한 사람"임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 사회학에 의하면 이 계급은 쁘띠부르조아이다. 이 점을 소수파 지도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동맹" 이론

당내의 노동계급 경향,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 맑스주의 방법론에 대항하여 버넘, 에이번과 맺은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하셨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히 그는 위대한 혁명전통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기 위해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섁트먼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을 희생시켰다. 그가 들고 있는 역사적 예들은 철저하게 생각된 것이 아니며 완전히 거짓이다.

모든 협조적 관계가 전부 동맹인 것은 아니다. 장기화된 동맹으로 변모되지 않았으며 그럴 의도도 없는 일시적이며 사안적인 동맹들이 종종 존재한다. 한편 같은 당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은 동맹이라고 전혀 간주할 수 없다. 버넘 동지와 우리는 같은 국제정당에 소속되어왔으며 계속 끝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이 아니다. 두개의 정당은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장기간의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 "인민전선 " 정책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같은 당의 가깝지만 이질적인 경향들이 제3의 분파에 대항하여 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다.

당내에 존재하는 동맹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1) 동맹이 대항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2)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당내의 국수주의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주의자와 중도주의자 간에 맺는 동맹은 흔쾌히 인정될 수 있다. 이 경우 동맹의 결과는 국제주의자들의 강령의 명확함, 이들의 응집력과 규율 등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성들은 세력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수적인 우위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섁트먼은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들어 자신의 동맹을 정당화하고 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이론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나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제 "동맹"의 정치적 측면을 검토해보자. 사실 레닌과 보그다노프의 경우는 동맹이 아니라 같은 조직 내에서 협조관계를 이룬 것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말할 필요가 있다. 당시 볼셰비키 분파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자기 조직 내의 다른 경향들에 대해서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보그다노프의 이론적 편향에 대항하여 레닌은 볼셰비키 화해주의자들(두브로빈스키, 라이코프 등등)과 동맹을 형성하기조차 하였다. 레닌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분파"라고 불리웠지만 독자적 정당의 모든 특징들을 가진 조직 내에서 그가 보그다노프와 상종하는 것이 가능했냐는 것이다. 만약 섁트먼이 소수파를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 보지 않는다면 레닌-보그다노프 "동맹"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논리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예를 잘못드는 경우는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분파-당은 당시 이미 자유부르조아지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임을 완전히 드러낸 멘셰비키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었다. 소위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비난하는 문제보다 이 측면은 훨씬 더 심각한 측면이었다. 섁트먼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자행하는 분파의 계급적 뿌리를 규정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체결한 것은 쁘띠부르조아 기회주의에 대항한 노동계급 경향과 종파주의적 중도주의 경향 사이의 협력관계였다. 여기서 계급적 경계는 명확하다.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면 이 동맹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동맹"의 역사는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섁트먼이 인용한 바 고리끼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정치적 문제들을 순수한 철학적 문제들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섁트먼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레닌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견해 차이는 철학의 고상한 문제에서 줄줄이 이어져 가장 시사적인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동맹"이 볼셰비즘을 기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레닌이 완성된 강령, 올바른 방법론 , 탄탄하게 응집된 분파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분파 내에서 보그다노프 그룹은 소규모의 불안정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섁트먼은 자기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여 버넘 그리고 에이번과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섁트먼에게 완전히 불리하다. 에이번은 자기 분파를 소유하고 있다. 버넘은 섁트먼의 도움을 받아 볼셰비즘에 염증이 난 지식분자들을 결집하여 분파와 비슷한 것을 구성할 수 있다. 섁트먼은 독자적 강령, 독자적 방법론 , 독자적 분파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소수파 "강령"의 절충적 성격은 동맹 내의 모순적인 경향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동맹이 붕괴될 경우 섁트먼은 당과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만을 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동맹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계속해서 섁트먼은 1917년 레닌과 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나와 레닌은 오랜 상쟁 끝에 결합했으며 따라서 당시 우리의 과거 견해차이들을 들추는 것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예는 그가 에이번에 대항해서 캐넌과 동맹할 때 이미 써먹은 바가 있으므로 그 설득력이 약간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 불쾌한 전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비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 볼셰비키당에 합류할 때 나는 레닌식 당건설 방식의 올바름을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인정했다. 동시에 볼셰비즘의 결연한 계급적 경향은 올바르지 못한 나의 예상을 교정시킨 후였다. 1917년 당시 내가 "연속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후 혁명의 전개과정에 의해서 이 문제가 올바른 것으로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공동활동의 기초는 주관적이거나 일시적인 협력관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자체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이것은 탄탄한 기초이다. 더욱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맹"이 아니라 부르조아 계급과 이 계급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들에 대항하여 단일한 당으로 통일을 이룬 것이었다. 당내에서 레닌과 나의 10월 동맹은 봉기문제와 관련하여 동요를 보인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대해 투쟁하였다.

1926년 내가 지노비에프와 동맹을 체결한 것을 섁트먼이 언급하고 있으나 이 예도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투쟁은 몇몇 등을 돌린 개인들의 심리적 특징인 "관료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관료집단, 이 집단의 특권, 이 집단의 자의적인 당운영과 반동적인 정책에 대항한 것이었다. 동맹관계가 허용할 수 있는 차이점의 허용범위는 적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맹 내의 세력관계 역시 전혀 달랐다. 1923년 반대파는 나름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핵들은 섁트먼이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듯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라 주로 노동자였다. 우리의 요구에 따라 지노비에프-카메네프 그룹은 특별 문건을 통해 1923년의 반대파는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올바랐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각기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를 같이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통합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두 그룹들은 독자적인 분파로 남아있었다. 일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1923년 반대파는 1926년 반대파에게 원칙적인 양보를 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반대표를 던져 양보에 반대했으며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양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상황은 오류였다. 그러나 대체로 공공연히 반대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양측은 모두 논란이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23년 반대파 내에서 1천명 중 999명 이상은 나를 지지했으며 지노비에프나 라덱을 지지하지 않았다. 두 그룹 사이의 이러한 관계 때문에 이러저러한 부분적인 오류는 있었으나 모험주의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섁트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동맹을 맺은 자들 중 과거에 옳았던 자가 누가였으며 언제 어디서 옳았던가? 왜 섁트먼은 먼저 에이번을 지지하다가 캐넌을 지지했으며 이제 다시 에이번을 지지하고 있는가? 과거의 쓰디쓴 분파투쟁에 대한 섁트먼 자신의 설명은 책임있는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보모의 것이다: 캐넌은 약간 잘못했으며 섁트먼도 약간 잘못했으며 모두 다 약간 잘못했으며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약간씩 옳다. 누가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과거의 정치적 궤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제는 평가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이라는 유기체에서 그는 떠다니는 콩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의 예들을 찾으면서 섁트먼은 자신의 현 동맹이 실제로 닮고 있는 한가지 예는 피하고 있다. 소위 1912년 8월 동맹이 이것이다. 나는 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동맹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나는 멘셰비키들과 모든 근본문제들에서 견해를 달리했다. 그리고 나는 초좌익 볼셰비키들인 소환파와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반적 정치경향을 놓고 보자면 나는 볼셰비키들에게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레닌식 "조직운영"에 반대했다. 혁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탄탄히 결집된 중앙집중주의 정당이 필수적이라는 진리를 당시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는 온갖 잡탕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수립했다.

8월 동맹에서 청산주의자들은 나름의 분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소환파도 분파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분파로 구성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내가 작성했다. 이 당시 동맹이 발표한 문서들은 원칙적인 차이점들을 피하면서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에 대해 만장일치를 가장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레닌은 8월 동맹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으며 가장 매몰찬 타격은 나에게 가해졌다. 내가 정치적으로 멘셰비키나 소환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한 나의 정책은 모험주의라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이 비판은 가혹했으나 사실이었다.

"정상을 참작하는 상황"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나의 과업은 볼셰비키들에 대해서 우익이나 초좌익 분파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 전체를 단결시키는 데에 있었다. 볼셰비키들도 8월 대회에 초청받았다. 그러나 레닌이 완벽히 올바르게도 멘셰비키와 통합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멘셰비키와 소환파들로 구성된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에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정상참작용 상황은 이것이었다: 진정한 혁명정당으로서 볼셰비즘이라는 현상 자체는 당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실천에서는 볼셰비즘의 볼 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적 전망을 올바르게 조망한 연속혁명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특히 조직영역에서 쁘띠부르조아 혁명가의 구태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멘셰비즘에 대한 화해주의와 레닌식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불신을 질병으로 가지고 있었다. 8월 대회가 끝난 직후 8월 동맹은 그 구성부분들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동맹의 바깥에 존재하였다.

27년 전 레닌과 똑같이 오늘 나는 섁트먼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한다: "동지의 동맹은 무원칙합니다." "동지의 정책은 모험주의입니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섁트먼이 내가 한때 내렸던 결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으면 하는 희망을 진심으로 털어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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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34 2005/10/0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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