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에 대한 의의(4)


 

강령과 강령을 통해서 조직화 및 노동자 대중을 계급의식화 하고자 하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담보해야 하는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혁명적 전위정당이 필요하다. 명확하고 일관된 혁명적인 사회주의 강령에 기초한 혁명정당은 비혁명적인 일반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과는 분리 될 수뿐이 없는 계급적인 기반이 다른 관계로 분리가 되어져야 한다. 이미 노동관료와 소자산가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농민에 대한  애틋한 애정으로 굶어가면서까지 투쟁을 하면서 비정규직의 노동자의 투쟁은  모른척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확연히 들어 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대중들에게 피부로 와 닿지 못하고, 오히려 보수 정당과의 차별성이 없다라는 인식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대중들을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빠져들게 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어지게 하는데 급급한 실정이다. 이런 모습은 이들이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을 강제할 만한 정치조직이 없는 상태이며, 자신들의 품안에서 놀겠다라고 아부하는 조직 및 조직원들이 많은 관계로 더욱 더 자신의 위세를 위풍당당하게 과시하고 있다. 개량주의정당의 존립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속에서  발전 한다는점을 깨닫고 있는 관계로 이들의 투쟁을 자신을 위하여 하라고 자신들의 안에서 해야한다라고 크게 강조하면서 그동안  안하던 장외집회에서까지 동원하여 티비에서만 보였던 모습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동안 무엇을 인식했던가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것은 대중보단 오히려 사회주의를 외치는 동지들의 모습에서 더 이상의 의욕은 사라지고 허무함이 남는다. 자본주의체제내의 개혁을 주장하는 민노당을 아직도 찬미를 하고 따르고 있는 모습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름 가지고,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설쳐되는지...

 

9월 10일 좌파 토론회 열려라는 제목으로 해방 4호에서 보면 "정윤광 선배는 ....운동의 새로운 질을 만들어 내야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질의 창출은 사회주의정치조직9사회주의정당)의 건설과 이에 기반한 실천에 있음을 강조.....(그의 대안으로는-필자)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혁신을 위한 활동을 통해 ....정치조직(사회주의 정당)건설을 준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일재 선배는 조직의 임무로서 1차목표가 민주노동당을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히 그 밥에 그 나물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 결국엔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을 바꿔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지지기반을 바꿀 수 있을까?


두가지에서 가능하다. 첫 번째로서는 그들의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사상이 바뀌어야 한다.  이미 노동관료의 이익과 소자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을 받고 착취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려면 의회에서의 압박을 통한 개혁을 주장 할 것이 아니라, 의회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해서 대중을 실천적인 모습에서 찾아봐야 한다. 의회라는 틀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회 밖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모습 속에서 보여질 것이며,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틀을 만들 것이다. 그런 것을 통해서만이 민주노동당의 모습을 바꿀 수 가 있는 것이다. 또한, 대중정당으로서의 모습은 뚜렷한 계급의식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봐, 이는 실천적인 모습을 강령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으며 강령은 형식으로 존재하고, 선거때만을 위한 공약집으로 역할만 할 뿐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에 대한 어떠한 모습은 존재할 수가 없고 단호하게 투쟁하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은 노동대중정당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소부르조아 및 노동관료에 의해서 유지 될 수 뿐이 없는 개량주의정당으로 변천이 되는 것이다. 이미 태생부터 노동관료의 유지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던 모습에서 어떠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습은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들을 바꿀려는 노력은 눈물이 겹도록 아름답지만,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보단 미꾸라지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안타깝게 느껴진다.

 

현 시기 노동대중의 투쟁은 사회주의자들의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모습인 패배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생존권에 매달리는 모습이 아니라, 개량주의에 빠진 노동관료들과는 차원이 틀리게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첫 걸음마로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운동의 청신호인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걸음마를 완성하지 못하였고, 지금 시작했지만 이미  부르조아지들은 수십 년의 경험의 축적으로 이 힘을 분산시키기에는 언론의 통제를 통해서 지역에 한정된 투쟁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만들었으며, 또한 그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공장 점거나, 타지역 노동자의 연대를 막기 위한 조치도 함께 이루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지금의 투쟁의 불길을 패배한 노동대중의 모습에서 찾으려고 했고, 이를 노동대중의 사기를 진작 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전술의 운영을 기회주의적 방식으로 도입을 했던 것이 오히려 노동대중의 투쟁의 불길을 잠재우기에 충분하기에 이르른다.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제 철폐 등등 이런 방식의  투쟁에서 무엇을 노동대중에게 보여줄 수가 잇는가? 패배주의에 빠진 것은 노동대중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의 패망과 더불어서 조직이 산산이 분열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속에서 IMF를 무사히 넘기고 노동대중은 자신들의 피와 땀을 부르조아에게 헌납해 왔던 것이 사회주의자들에겐 아주 아픈 아킬레스건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투쟁을 애써 외면하면서 부르조아 정치판에서 어떻게 하면 한자리를 얻을 까하는 모습이 바로 민주노동당에서 원내진출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버리고 사회주의라는 포장을 치면서 마치 혁명적인 조직의 모습을 갖춘 것 같은 착각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대중의 패배주의가 아니라, 동지들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에겐 필요한 것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노동대중이 아니라 그 노동대중을 새로운 세상을 만들 동력으로 만들기 위한 조직이 필요 한 것이다. 그것이 말로 이 땅에서 패배주의를 몰아 내는 것이다. 20년동안 혁명정당의 필요성을 누구나 공감을 했으나, 아직도 정당 건설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 대안으로서 민주노동당을 찾는 다면 노동대중은 또다시 자본주의의 멍에 속으로 빠져 허우적거리며, 패배주의로 빠져들던지 무정부주의로 빠져  진보진영이던지, 혁명진영이던지 무관심한 대중에게 떠밀려 설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미 앞에서 강령으로의 의미는 누차 강조했으니 같은 말은 다시 반복할 필요성은 없다. 현 시기 노동운동의 쟁점은 무엇인가? 비정규직 노동대중의 투쟁에서 봤듯이 비정규직 노동대중의 처우 개선문제이다. 정규직과의 차별성으로 인하여 그 차별을 줄여서 더 낳은 조건에서 대우를 받고 싶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존권적인 투쟁은 고립되었고 분산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하게 공장 점거나, 노동대중에 의해서 공장 시스템이 멈추지 않은 상태에선 자본가 계급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이런 투쟁은 결국엔 패배를 할 수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투쟁의 수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자스스로 예전에 해 왔던 방식으로 공장점거(1), 및 공장 생산 시스템이 멈추게 하여 직접적인 타격을 행사 할 때만이 부르조아와의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이렇게 할 때만이 인정을 받고 주체로서의 자작 및 승리의 조건을 하나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루어 질 뿐이며, 언제든지 부르조아의 물리력으로 역전을 할 수 있으며, 이런 투쟁은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계속 될 수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대안으로서는 물류 시스템의 장악을 통한 상품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노동자 통제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존재해야하며, 이런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 노동대중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대중의 공장통제관리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선 이루어 질 수 없으며, 오로지 노동자 정부에서만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선동을 해야 하며, 자본주의 생산의 순조로운 활동을 돕는 국가 권력에 대한 타격으로 발전 할 수 있는 매개고리가 될 것이다.

노동자 통제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며, 조직은 권력의 맹아적인, 형태를 띨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권력의 도구를 찾아 낼 수는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의 형태든 부정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과 미래에 나타나는 제 형태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우리의 선택의 폭을 좁히지는 않는다. 그 결과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에 봉사를 하던지,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목적의식화를 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혁명의 시기에만 나타난 권력의 맹아들이 ㅡ 꼼뮌, 소비에트. 평의회, 노동자 위원회 등등 ㅡ 일반적인 시기에 그것이 필요한 상태의 강령적인 내용을 제기 한다고 하면 급진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제기 할 수도 있는 것을 안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제안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들이 조직화가 될 때, 그들의 세상을 건설 할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가 자본주의로 편입이 되어 더 이상 뻗어나갈 길이 없는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서, '더 높은 생산성을, 더 많은 상품의 판로를, 더 적은 인건비를'라는 내용으로서 약진에 약진을 거듭하여 더 많은  빈곤층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개방을 통한 자유무역을 전면에 내걸고, 자신들의 집안을 더욱 더 안전하게 다지기 위하여, 쥐어짜면 짤수록 노동대중의 투쟁은 강화되어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기 때문에 이들은 중간에 하나의 다리를 두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충실한 일꾼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세계자본과의 경쟁을 통하여 한국의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초일류, 세계1위라는 꿈을 대중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중간에 놓여져서 더 자본가계급이 전해주는 이윤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 노동관료나 노동귀족들은 더 이상 노동대중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지 않고 부르조아의 변종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면서 애국심, 민족주의와 더불어서 한탕주의로 이끌어 가는 로또, 도박, 주식투자로 이들의 관심을 이끌어 가고 있다. 제 3세계나 중국 등등 현지 투자를 통하여 초과이윤을 얻어 자신들의 자본을 탄탄하게 하지만 이는 다른 자본가계급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라는 지상 최대국가의 물리력을 이용하여 국지전이라는 자원쟁탈 및 새로운 시장 개척의 편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는 세계 대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전초전이 보이고 있다. 어느 자본가계급간의 모순이 첨예화될지는 모르지만, 생산력의 발전은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지위를 향상하고자하면 이를 막고자 하는 기존 자본가계급간의 결투는 세계경제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자본가를 더욱더 소수의 자본가로 만들어 줄뿐이지만 이윤을 위한 처절한 그들 내부의 투쟁은 언제나 그 불씨의 재료가 존재하고, 타오를 불씨만 있다면 지구를 하나의 용광로로 만들 것이다. 부르조아들의 조국은 자신들이 다른 존재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을 안식처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타국의 자본가계급 및 타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배척의 대상으로 만들기에 족하고, 또 하나 민족의 고유성이라는 의미로 피부색깔, 언어, 국가의 경제적 규모의 영향력으로 무시하고 배척하게끔 유도하여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을 유도하여 새로운 극우세력을 유지하고자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 정책은 자국 내에서도 꾸준히 이루어져 있으며, 그 분열의 형태가 한국의 비정규직, 정규직의 모습, 외국노동자와 국내 노동자의 차별화 등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현대자동차, 기아노조 등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은 더 이상 자본주의 한국의 투쟁의 견인차의 역할을 빼앗아 버렸다. 이미 배부른 그들은 배고픈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젠 투쟁의 고리는 비정규직으로 넘어 갔다. 이들의 투쟁을 전국적 계급적으로 확산 시켜야하며, 이 투쟁을 진정한 계급투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이 투쟁의 고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목놓아 외친다고 해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선 이름만 바뀐 또다른 희생자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를 막는 것은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이고, 그 고리는 자본주의라는 마지막으로 소수 지배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것을 끊어 버릴 것은 '실현이라는 전망 속에서'라는 생각으로 대중으로 하여금 따라 올 것이라는 사고로 대중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새로운 세상의 건설이라는 대안으로서 그 모습을 확연히 보여 줄 때만이 가능 한 것이다. 그것은 물류시스템을 노동자 통제화 해야 하는 것이며, 공장자주관리를 할 수 잇는 통제가 존재해야 생산자가, 또는 화물 노동자가 마음 편히 생산을 담담하여 한국의 정체되어 잇는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 통제가 바로 현시기의 노동자 대중이 제시 해야하는 강령적인 요구로서의 대안 인 것이다. 

 

"공공사업은 전반적인 계획의 일부로서 상당 기간동안 진행되어야 실업자들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다. 이 계획의 틀 내에서 노동자들은 공공사업의 일환으로 경제위기의 결과 문을 닫은 개인 기업들이 다시 문을 열고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 경우에 노동자에 의한 통제는 노동자들 자신의 직접적인 경영으로 대체될 것이다.

착취자가 아니라 피착취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기본적인 경제계획의 실행조차 노동자에 의한 통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자본주의 경제의 모든 공개적이고 비공개적인 측면들을 노동자들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개별 기업들을 대표하는 위원회들이 회의에 모여 트러스트, 산업 전체, 경제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경제 전체 등을 다룰 해당 위원회들을 선임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노동자에 의한 통제는 계획경제의 학교가 된다. 통제의 경험에 기반하여 노동자계급은 마침내 때가 왔을 때 국유화 산업을 직접 경영할 준비를 스스로 갖출 것이다.....기업비밀을 철폐하는 일이 노동자에 의한 산업 통제의 필요조건이라면 노동자에 의한 산업 통제는 사회주의 경제 운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행강령 중에서)


한국의 경제는 내수의 부진 속에서 수출이라는 호재로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으나, 이는 한국내의 노동자의 분열을 조장하여, 비정규직화,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자들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며,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더욱 정당화하고자 하며, 정리해고라는 칼을 더욱 쉽게 들어 언제든지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 몰수 있어 이를 통한 이윤을 더욱 극대화시키며 자본가계급의 배를 부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태풍이 시작하기 위한 맹아가 이미 시작되었다. 노동자대중들이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하기 위해서 자위권을 발동을 했으며, 투쟁의 열기는 서서히 한반도를 달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시작되어진 불길은 작으나 활화산이 되어 언제든지 터질 듯한 열기를 동반해가고 있다. 이젠 대중에게 권력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뚜렷한 전망 없이 그저 손길 닫는 데로 눈길이 이어지는 데로  실현을 위한 투쟁은 효력을 이미 잃어 가고 잇다. 좀더 높이 날아야 만이 더 멀리  볼 수 잇는 것이다. 같은 맑스 사상을 가지고도 기회주의가 말을 하면 대중을 반항하게 만들어 목적의식을 없애서 부르조아의 세상에서 영원히 맴돌게 할것이며, 혁명주의자들이 말을 하면 그 방향성을 찾아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나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회주의 사상을 변혁하는 것이다.  

 

현 시기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자칭 사회주의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군웅 할거 시대에  이미 기회주의사상이라고 할 것은 대부분의 주류가 되었고, 비주류는 눈에 보이지 않고,  서클적인 만학도의 정신으로 똘똘뭉쳐 자신들의 사상의 벽을 세워 대중과는 괴리가 되어 우물 안의 개구리로서 자신들이 한 일에 만족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은 실천을 동반을 할 때만이 그 힘을 유지 할 것이고, 그 실천은 대중과 결합이 될 때만이 올바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기회주의 사상은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대중에겐 그것이 올바른 것으로 각인시키고 있으며 대안이, 대안이 아닌 차선 속으로라는 내용으로 기만하고 있는 관계로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의 개혁이라는 착취구조에서 양보를 얻어내는 것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사상을 퍼뜨려 더 이상의 진군을 하지 못하고 부르조아와 더불어 잘살아 가는 세상의 건설을 몸으로 실천하게 한다. 같은 이슬을 먹어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

다가오는 혁명의 시기를 위해선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칭 사회주의자들의 썩은 사상이다. 썩은 사상을 짤라버리고 혁명적인 사상으로 무장할 때만이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조직하라! 투쟁하라!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정당 건설을 매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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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톤 판네쿡의 노동자평의회에서 나온 글을 잠시 인용하겠다.
"현장점거가 필요하거나 노동자들이 이를 수행 할 수 있는 곳에서는 투쟁에서 하나의 방법으로 주장되었다. 자본가들과 법률가들은 현장점거를 소유권의 침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현장점거는 재산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소유권의 효과를 보류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즉 현장점거는 현장을 탈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자본가에 의한 처분권을 순간적으로 보류시킨 것일 뿐이었다. 싸움이 해결된 이후에, 자본가는 예전처럼 주인이 될 것이고, 확실한 소유자로 남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현장점거는 위의 상황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현장점거에서, 지평선에서 비치기 시작하는 여명처럼, 희미한 미래의 발전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현장점거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들의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줬다. 그들은 현장조직으로써 견고한 상호결속이 나타났고, 자연적인 통일체는 단일 개별자들로 용해되지 않았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작업장과 자신들의 친밀한 연관을 의식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은 이제 작업장의 주인이 그들을 해고할 때까지,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명령하는 사람의 건물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에게 기계가 있는 작업장은 자신들이 운용하는 생산적 기구이자, 단지 자신들의 노동에 의해 사회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을 만들어내는 기관이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즉,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은 작업장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작업장의 법적 소유자들, 주주들에게보다 더욱 편안한 공간이었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 생산적 노동의 중심이자 공장을 살아있는 기관, 사회의 총체의 요소로 만들어주는 집합체로서 노동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키워갔다. 현장점거에서, 노동자들이 전적으로 생산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인류의 부를 소비하고 남용하며 전 지구를 황폐화시키면서 명령만 하는 자본가들 같은 무가치한 외부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막연한 감각이 생겨났다. 그리고 힘든 투쟁을 거치면서 작업장이 조직화 및 공동행동의 단위로서, 그리고 아마도 힘의 기반이자 본거지, 그리고 중심이자, 투쟁의 목표로서 일차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 되었다. 노동자들과 작업장의 자연적인 관계와 비교할 때, 자본의 명령은 인위적이고 외적인 지배로서, 아직까지는 강력하기는 하지만,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성장하는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와 같이, 현장점거에서 작업장이 노동자들의 소유가 되고, 작업장 모두가 조화로운 단위를 형성하며, 작업장을 통해 해방을 위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의식의 성장 속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의 단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노동자통제는 투쟁의 강령으로 직접 내세우기에는 문제가 많다. 그러나 현재의 강령들에서 표현되어질 어떠한 강령적 표현은 이보다 더 낳은 것이 없어서 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보다 더 낳은 강령이 현계급투쟁의 쟁점을 정확하게 밝혀준다는 것이 있다면 본인은 언제든지 철회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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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6 17:33 2005/12/1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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