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개악 ․ 로드맵 등 현 시기 자본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 총단결전선을 열어젖히자!



1. 들어가며
  - ‘로드맵 못 막으면 다 죽는다!’

비정규 개악안과 신노사관계 로드맵을 앞세운 자본의 총공격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다. 노동자의 생존권과 자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겨냥한 자본의 공격이 마침내 민주노조운동을 넉다운 시키고 KO승을 거둘 결정적인 한방을 휘두르는 찰나이다.

87년 대투쟁으로부터 쌓아올린 민주노조운동이 말 그대로 존폐의 기로에 선 순간이다. IMF 이래, 더 거슬러 올라가면 90년대 중반 이래 구조조정/노동유연화와 노조 무력화/현장 초토화로 요약되는 자본의 공격 앞에 민주노조운동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조직노동자계급 운동은 수년 동안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왔다. 이제 마침내 자본은 비정규 개악안과 특히 로드맵의 관철을 통해 공격의 한 시기를 최종 승리로 굳히고 민주노조운동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총공격에 돌입한 것이다.

자본은 이렇게 마지막 일격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을 끝장내겠다는 태세인 데 반해 노동운동 진영은 어떠한가? ‘투쟁이 과연 되겠느냐’, ‘어차피 못 막는 것 아니냐’ 등등 투쟁에 대한 비관주의와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다. 총파업에 대한 회의와 냉소가 깊숙이 퍼져 있다. 물론 대중들의 불신과 냉소로 말할 것 같으면 근거가 없지 않다. 그 동안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들의 노사협조주의, 사회적 합의주의, 투쟁회피, 양치기 소년식 총파업 철회, 형식적인 껍데기 총파업, 상층부들만의 기만적인 보여주기식 투쟁전술 등등에 대중은 질려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대중들이 냉소와 체념으로 빠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들은 이제 대중의 이러한 냉소와 체념을 핑계로 자신들의 투쟁회피를 정당화한다. 대중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임무를 보이콧하고 대중투쟁 대신 자신들만의 면피성 보여주기식 투쟁으로 관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이와 같은 냉소와 체념, 비관주의와 패배주의를 시급히 불식시키고 자본의 총공격에 맞서 조직노동자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낼 노동자 총단결전선을 쳐내지 못한다면 민주노조운동은 말 그대로 끝장을 맞이할 것이다. 대공장 조직노동자 운동은 완전히 해체될 것이며, 비정규직 투쟁 또한 더욱 더 고립과 방치 상태로 내몰릴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기간 솟구쳤던 전투적 활력을 급속히 빼앗긴 채 정규직 운동과 함께 동반 침체로 들어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90년대 초중반 이래 계속되어 온 계급투쟁 퇴조기가 마침내 마감되고 이제 서구의 70년대 초- 90년대 중반의 시기와 같은 장기침체기로 돌입하게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퇴조기의 경우 언제든 솟구쳐 나올 정세 반전의 계기들이 잠재해 있었지만, 장기침체기는 말 그대로 계급투쟁의 암흑시대이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이하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은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할 때다. 투쟁판을 만들기 위해 선두에 나서야 할 때다. 단사 현장과 지역, 그리고 전국 등 각급 차원에서 투쟁을 적극 제안하고 전선을 설치하기 위해 분투해야 할 때다. 현 시기 노동조건 악화 및 고용불안, 정리해고의 압박과 더불어 자본의 노조 무력화/ 현장 초토화 공세에 직면하여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필요성은 노동자 단결전선으로 즉시 현실화될 수 있다. 노동자 단결전선의 이러한 객관적 근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노조가 무력화되고 현장이 초토화되고, 조직노동자 운동이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고, 자본의 공격에 맞서 생존권을 방어하는 투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체념과 패배주의가 대중들 사이에 굳어져 버린다면 이로부터 가장 타격을 받게 될 정치세력은 그 누구보다도 혁사진영일 것이다. 개량주의 세력들 또한 타격을 받겠지만,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들과는 달리 그들은 얼마든지 운동의 침체와 대중의 체념을 먹고서 살아나갈 수 있다. 대중의 전투적 기운이 드높고 현장 투쟁이 활성화되어 있을 때는 혁사 세력의 영향력 확대 가능성도 증대하는 데 반해 운동 침체와 현장 초토화 상황은 당연히 혁사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가로막는 난관과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로드맵 등 현 시기 자본의 총공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최대의 정치적 희생자는 혁사진영일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혁사진영의 일부 세력들은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들을 핑계대고 ‘투쟁이 되겠느냐’, ‘어차피 기만적으로 끝날 거 아니냐’는 등 스스로 패배주의 정서를 유포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새로운 주체의 발굴과 새로운 대중운동의 형성”이라는 허풍선이 구호 뒤에 숨어 계급투쟁에 대한 수동성과 대기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마치 당면한 이 투쟁이 자본의 승리로 결말나더라도 다음은 ‘우리의 시대’가 될 것이므로 그때 가서 다 뒤집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의 전투적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앞장 서야 할 상황에서 이들은 그간의 대기주의적인 실천을 아예 노선으로까지 체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드맵이라는 가공할 핵폭탄 투하 전야인 지금 그 무엇에도 우선하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임무는 노동자계급의 총단결, 특히 조직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운동 내 모든 진영이 명확히 한정된 투쟁 목표와 면밀하게 명시한 행동 프로그램을 가지는 노동자 단결전선(공동전선이든 통일전선이든 뭐라 부르든)에 나서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편 이러한 임무는 혁사진영에게 단일한 대오 구축과 민주노조운동 내 전투파의 결집을 위한 당적 지도력의 발휘를 요구한다. 최소한 당장 단일한 전술 대응부터라도 시작해서 비정규 개악 ․ 로드맵 분쇄 공동투쟁 전선을 주동적으로 열어나가야 한다. 요컨대 지금이야말로 혁사진영이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을 펼쳐야 할 때다. 노동자 통일전선 정책이야말로 현 시기 정세의 모든 뒤얽힌 실타래를 풀어젖히기 위해 혁사진영이 붙잡아야 할 실마리, 중심고리이다.

그런데 지금 혁사진영은 이러한 임무로 나아가는 데서 내부의 장애물로 인해 발목이 잡혀 있다. 종파적 대기주의, 계급투쟁에 대한 뿌리 깊은 수동성, 노선으로까지 격상되고 있는 전선 기피증 등이 그것이다. 계급운동의 명운이 걸린 사안인 만큼 혁사진영 내부의 이러한 경향을 빠르게 불식하고 노동자 총단결전선을 주도하기 위한 단일 대오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다. 혁사진영 내부의 이러한 문제들은 꽤나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근본 노선의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이 글의 목적상 공동전선 전술 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점들에 한정하겠다.



2. 공동전선을 완고히 거부하는 혁사진영 내부의 질병들을 시급히 치유해야 한다

1) 개량주의 주적론

종파적 대기주의, 계급투쟁에 대한 수동성, 전선 기피증 같은 혁사진영 내부의 질병들은 모두 그 근저에 하나의 기본 가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개량주의 주적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혁사진영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글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개량주의 주적론을 바탕에 깔고 개량주의 세력과 노조관료를 비판, 폭로하는 작업에 지면의 압도적인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이 계급투쟁에서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가 극에 이르고 있는 지금 이 자본의 하수인들을 폭로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비해 실제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한 안과 계획을 제출하는 글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양적 불균형의 문제를 넘어 운동노선상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혁사진영의 많은 동지들은 개량주의 세력과 노조관료를 타격, 무력화시키지 않고서는 현 시기 자본의 공격에 맞서 승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 개량주의 노조관료를 패배시키지 않고서는 자본과의 대결로 나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생각이 다양한 편차를 보이면서 혁사진영의 글들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 생각은 맞는가? 역사라는 긴 세월에 비추어보면 이 생각은 무조건 옳다. 또한 모든 선전에 이용할 수 있는 올바르며 필요한 말이다. 그러나 이 사고를 단순반복하는 것은 당면의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체로 혁명적 전략의 관점에서 올바른 사고는 전술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을 경우 거짓말 그것도 반동적 거짓말로 전화된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노동자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이 생각은 올바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고통을 증대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체적 조치와 당면한 공격들에 대해 지금 모든 힘을 다해 싸울 필요가 없다고 결론내리는 자는 반동이거나 멍청이일 것이다.

몇 달 안에 혁사진영이 개량주의의 영향력과 자본의 공격을 모두 분쇄할 수 있을까? 누구도 감히 이렇게 주장할 수 없을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자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개량주의 세력을 폭로, 무력화시키지 않고서는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을 분쇄할 수 없다’는 선언만을 되풀이하고 마는 것은 곧 로드맵 관철과 자본의 승리적 결말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본의 핵폭탄이 우리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지금 우리는 먼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 시기 자본의 공격에 맞선 승리 없이는 개량주의에 대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노조 무력화/현장 초토화를 노리고 있는 신노사관계와 노조관료의 운신 폭을 상대적으로 더 열어주고 있는 기존 노사관계는 모두 자본가계급이 노사관계 영역에서 운용하는 전술이다. 자본주의 지배가 계속되는 한 자본가계급은 이 두 전술을 가지고 다양한 조합을 이루어 가면서 자본주의적 노사관계 체제를 유지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들은 같은 공통분모로 환원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 지배체제를 타도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지금 자본은 이 체제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자 새로운 노사관계를 통해 이 체제를 안정화시키고자 로드맵을 앞세워 공격에 나섰다. 자본의 이러한 공격, 자본의 이러한 노조 무력화/ 현장 초토화 책동을 일단 분쇄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동지들이 나서서 말을 가로막고, ‘그러한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량주의 노조관료를 분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현 시기 로드맵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오직 무미건조한 도식주의에 의해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이 악순환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뿐이다. 그리고 이 행동의 성격은 추상적인 범주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적 세력들 간의 실제 상호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단순히 선전이 아니라 정치투쟁이 필요하다.  

개량주의 주적론에 빠져 있는 동지들은 현 시기 개량주의 관료 때문에 자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으므로 신노사관계가 들어서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가정하고, 지금은 오직 “관료층을 포위해나가는 작업에 힘을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지금은 자본의 공격에 대항하는 투쟁보다 개량주의 관료를 타격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정세에 부합한다고 한다. 지금 개량주의 관료와의 공동전선은 “붕괴하고 있는 낡은 것에 매달려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미래연대는 이러한 경향을 하나의 체계화된 논리로 표현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운명, 아래로부터의 결단으로 개척하자!>라는 미래연대 글에 의하면 지금은 “노동운동에서 낡은 것의 붕괴와 새로운 것의 탄생으로 요약”되는 전환기이다. 노조관료 ․ 개량주의 세력 등 낡은 것은 붕괴하고 비정규직 투쟁 등 혁신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미래연대는 기존의 민주노조운동, 관료와 개량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대공장 조직노동자 운동 또한 낡은 것으로서 붕괴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전환기’라는 미래연대의 현 시기 규정에는 자본의 총공격이 민주노조운동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고 대공장 조직노동자 운동을 완전히 해체시킬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라는 절박감을 비웃는 냉소주의가 짙게 배어 있다. 개량주의 관료들과 그들의 기반이 붕괴하기만 하면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이 승리로 결말나더라도 그 다음 ‘새로운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이 이루어질 것이며 모든 것을 만회할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승리할 것이다. 새로운 노사관계 체제가 들어서면 그때 노동자계급의 공동전선이 수립되어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릴 것이다. 미래연대는 사실상 이러한 전망을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을 위로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노동자계급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치스러운 짓이다.

결국 미래연대는 이러한 전망 제시를 통해 로드맵 관철에 길을 내주고 있다. 이러한 전망은 대중의 심리와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철저히 오해한 결과이다. 노동자계급이 로드맵 도입을 허용한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치명적인 수동성을 보인다고 하자. 그러면 신노사관계 체제가 들어선 후 바로 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수동성을 훨훨 벗어던지고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인가? 이렇게 가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미래연대는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자본의 노조 무력화/현장 초토화 공격이 승리한 이후에나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이 이뤄질 수 있다. 자신의 무기력을 이보다 더 애처롭게 고백할 수 있을까? 미래연대는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킬 능력이 없으므로 이 임무의 짐을 신노사관계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다. 신노사관계가 우리 대신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고 나면 그때 우리의 진면목을 보일 것이다. 미래연대는 이렇게 허풍을 떨고 있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승리할 것이다.’

개량주의 주적론은 현 시기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만들어내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고 혁사진영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 개량주의 주적론은 1930년대에 “히틀러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허풍을 떨면서 파시즘의 승리에 길을 내준 스탈린주의 독일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사민당 주적론)을 연상시킨다.  

  
  2) 종파적 대기주의, 계급투쟁에 대한 수동성

현 시기 자본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이루어내기 위한 전선의 설치를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가서야 할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놓기 때문에 미래연대가 모든 계급적 투쟁과제 앞에서 언제나 대기주의로 빠져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미래연대는 이러한 대기주의를 명시적인 활동 노선으로까지 끌어올리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사노신은 <<사회주의 노동자>> 창간호를 통해 이 일을 했다. 이 잡지의 기조논문인 <사회주의자의 현장활동, 어떻게 전진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사노신은 “운동의 침체기”라고 말하면서 “이 상황에서 우리가 적응해야 할 활동의 패턴”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나서  ‘소모임 활동 강화’를 현 시기 사회주의자의 활동노선으로 제출한다. 또한 소모임이 “현재에도 유용한 조직화의 형태”이자 “사회주의자의 강력한 조직화 무기”라고 권유함으로써 소모임 조직을 현 시기 조직론으로서 제출하고 있다.  

사노신은 이러한 활동 ․ 조직 노선에 입각하여 공동전선을 대중의 정서와 투쟁의지에 기반하지 않은 ‘선도투’라고 비판하면서 침체기에 전국적인 투쟁조직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의 패배의식을 확대하고 대중과 활동가를 분리시키는 역효과”를 낸다고 훈계한다. 그 대신 지금은 착실하고 장기적인 소모임 활동과 조직화를 통해 대중에 대한 “끈질긴 설득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 “끈질기게 계급대중에 뿌리내리는 작업, 이를 통해 사회주의자와 전투파가 현장에 착실하게 영향력을 쌓아나가는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소모임을 통해 “새로운 운동 주체의 발굴과 그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의 형성”을 장기적으로 준비해 나가는 것이 현 시기 사회주의자의 임무이다.

현장에서 사회주의자와 전투파가 정세와 무관하게 일상적으로 줄곧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소모임 활동을, 왜 사노신은 현 시기에 특별한 노선으로 제기하고 있는가? 그 의도와 취지는 알 수가 없지만, 현 시기 공동전선과 전국적인 투쟁조직 건설을 비판하는 맥락으로 볼 때 정세적인 전술 대응과 전선 운용에 대한 반정립으로 소모임 활동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조직이 자신의 주체적 조건상 정세로부터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격리하여 일시적으로 내부적 작업에 집중하는 경우가 불가피하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정세가 제기하는 절박한 투쟁 과제를 자신들이 받아 안지 못하고 있음을 조직적으로 의식하고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기 조직의 그러한 내부적 작업을 운동의 노선으로 격상시켜 제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전선으로부터 이탈하고 정세가 제기하는 투쟁과제를 회피하는 실천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종파주의의 논리가 된다. 사노신의 소모임 활동론이 바로 그렇다. 소모임 활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내부적으로 거기에 집중하겠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세적인 대응 및 전선 운용을 일상적인 소모임 활동에 대립시켜 “대중의 패배의식을 확대하고 대중과 활동가를 분리시키는 역효과”를 낸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노신의 소모임 활동론은 종파주의적인 운동노선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정세가 제기하는 당면의 투쟁과제를 받아 안기를 거부하는 한편, 소모임 활동을 통해 자 조직의 기반이 구축되게 되는 미래에, “새로운 운동 주체의 발굴”이 이루어지는 미래에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부활시키고 이를 정확히 혁명정당 건설로 모아낼 것이라고 허풍을 떨고 있다.

3개월 뒤 또는 5개월 뒤에 로드맵 관철 등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이 승리로 결말난다면,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은 지금보다 그 이후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3개월 뒤, 5개월 뒤에 자본의 공격이 승리로 일단락된다면 3년 혹은 5년 뒤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대기론적 운동 계획은 한심하고 치욕스런 잡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정치학에서 시간 계산은 군사작전을 수행할 때만큼 결정적이다.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이 노조 무력화/현장 초토화로 요약되는 신노사관계의 도입으로 결말난다면 이는 민주노조운동의 종말뿐만 아니라 혁사진영의 물리적 입지 파괴와 나아가 정치적 파산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결말이 불가피하다고 가정하면서 투쟁해야 할 때 투쟁 한번 하지 않고 공허한 언사를 방패삼아 무기력하게 물러서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운동주체의 발굴’ 운운하는 것은 운동 청산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종파적 대기주의는 특별히 사노신이 하나의 명시적인 논리로 제출했다는 점을 빼면 공통적으로 혁사진영 내 상당수 동지들의 실천을 완강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 시기 노동자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병은 시급히 치유되어야 한다.

종파적 대기주의와 안짝을 이루는 것이 계급투쟁에 대한 뿌리 깊은 수동성이다. 혁사진영의 정책은 국민파나 ‘범좌파’ 세력을 지지하는 조직노동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혁사진영이 혁명적 ․ 전투적이라서가 아니라 혁명을 성취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대중의 혁명적 ․ 전투적 단결을 주도해낼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쓸데없이 혁사진영에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지못해 국민파나 범좌파를 지지할 때 이 노동자들은 국민파나 ‘범좌파’에 신뢰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혁사진영에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보수화되어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실리주의에 빠져 투쟁을 기피한다는 이야기들은 진정 사실인가? 정말 조직노동자 대중이 투쟁을 기피하는지는 전술을 제출하고 투쟁 조직화를 통해 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거쳐보아야 한다. 투쟁판을 만들어보고 투쟁 과정에서 투쟁을 통해 판단해야지, 그런 과정을 거쳐보지도 않고서 ‘안 움직인다’, ‘침체기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개량주의 세력들이 대중 탓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개량주의 세력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다수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전투적 단결을 정말 어느 정도나 거부하는지는, 기간 혁사진영에 지배적인 선전주의와 종파주의, 자기중심의 고립주의적인 활동, 그리고 소모임 활동을 특별한 노선으로 격상시키는 협소한 수공업적 경제주의 등등을 대신하여 올바른 전술이라는 다른 척도가 필요하다. 다름 아닌 공동전선 전술이 필요하다.

과거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전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투쟁 목표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발전과 일치하는 한 대중과 함께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대중과 대중조직에게 증명해 보인다. 투쟁하는 대중의 실제 상태를 고려한다. 대중뿐 아니라 대중이 인정하는 조직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집중한다. 대중이 보는 앞에서 계급투쟁의 실제 문제들을 가지고 개량주의 조직과 대면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이 아니라 개량주의 진영 지도자들의 의식적인 사보타지로 인해 공동투쟁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발전을 가속화시킨다.”

공동전선과 관련된 이러한 개념들은 케케묵기는커녕 오늘날 더욱 더 적실성을 가진다.  

혁사진영 일부 신문의 기자양반들은 공동전선 정책을 개량주의와의 화해조치로 해석할 것이다. 이들은 편집실 문밖을 나서지 않은 채 의례적인 비판을 통해 개량주의를 공격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대중투쟁이라는 공동의 무대 위에 개량주의자와 함께 놓고 평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들이 짐짓 혁명적인 체 하면서 ‘화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계급투쟁에 대해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수동성은 자신들이 진지하게 정치투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수동성과 우유부단성은 입으로 하는 혁명적 고고함으로 그 정체가 위장되어 있다. 사실 계급투쟁에 수동적이고 투쟁과업을 지체시키는 바로 그 세력들이 지금 혁명적 전투성의 가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투쟁의 난관과 ‘안 되는 상황’만을 보는 것은 가장 커다란 오류가 될 것이다. 대중의 폐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장 적실한 구호와 요구안을 제출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 구호와 요구들이 대중들을 사로잡는 정도를 추적해야 한다. 모든 곳에서 수만 개의 촉수를 두면서 대중의 증언을 모으고 모든 문제들을 심사숙고하고 대중의 집단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적극적인 당을 통해서만 이 임무는 달성될 수 있다.

좌우파 노조관료들이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과 계급투쟁의 첨예화보다 타협과 굴종을 더 선호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선택을 할 경우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들은 휘하 노동자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여 엄청난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자본의 공격에 대항하는 노동자 단결전선 정책은 바로 이 전체적인 상황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전술은 혁사진영에게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전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종파적 대기주의와 계급투쟁에 대한 수동성을 끊어내야 한다. 그리고 계급투쟁 정세로부터 격리된 채 각자가 현장을 개척해서 각자가 자기 부대를 만들어 나가자는 각개약진주의 같은 파멸적인 이론과 실천을 거부해야 한다.  

수동적인 대기주의와 침체기 정서에 사로잡힌 혁사진영 일부 세력들은 가장 중요한 사항, 즉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사회적 투쟁의 강점을 잊어먹고 있다. 조직노동자계급의 힘은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 투쟁할 능력뿐만 아니라 승리할 능력도 갖추고 있다. 대공장의 현장노동자들이 실리주의에 빠져 있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대부분 관찰자의 저하된 사기, 고립 상태에 안주하려 하는 지도자들의 패배주의와 침체기 정서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큰 싸움에서는 확고한 지도부가 필요하다. 이 점을 노동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피 터지는 전투를 치러야 할 상황을 언제나 기피하거나 겁먹어 하지는 않는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 지도부가 보일 주저와 동요, 투쟁 철회, 배신과 투항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혁명정당이 확고하고 분명하게, 자신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현장의 사기침체나 의기소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3) 전술 혐오증과 전선 기피증

대기주의와 수동성은 전술 기피증을 체질화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투쟁 현안과 투쟁 과제를 받아 안고, 그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해 그 어느 세력보다도 선두에 서려고 하는 세력이다. 계급투쟁에 대해 대기주의적이고 수동적인 자세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다양한 세력들 및 인자들과 대중을 투쟁으로 끌어내서 투쟁판을 만들고 투쟁전선을 치기 위해 앞장서서 투쟁계획을 제출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의주장은 대중 공간에서 이러한 투쟁계획으로서의 전술을 통해 그 옳음이 대중적으로 검증된다.

그래서 만약 전술은 없고 주의주장만 있다면 그것은 대중 공간에서 지도력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지도력이 없다면 설사 ‘사회주의’, 심지어 ‘혁명적 사회주의’의 간판을 두르고 있어도 현실에선 전투적 조합운동 수준에도 못 미치는 후진적이고 초보적인 운동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를 자임하는 세력이 이러한 운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지배적인 경향이 추상적 선전주의이다. 원칙과 ‘전략’을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대응’으로, 즉 전술로 전화시켜내지 못하는 무능력의 표현인 것이다.

현 시기 혁사진영은 대체로 이러한 추상적 선전주의의 극단적 형태는 탈피했지만, 여전히 그 뿌리가 남아 현재는 이것이 대기주의와 결합하여 전술 혐오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혁사진영의 많은 세력들이 공동전선을 거부하는  배경에는 ‘개량주의 주적론’ 및 대기주의와 함께 이 전술 혐오증이 상당 부분 작용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미래연대와 사노신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공동전선이란 기본적으로 전술이다. 투쟁전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투쟁할 때 항상 계급의 모든 부위가 동시에 함께 투쟁한다면 공동전선이란 불필요할 것이다. 현재 남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반면 대공장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은 매우 가라앉아 있다. 잘 알다시피 대공장 정규직노조가 대부분 개량주의 세력들의 영향 하에 있다는 점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의 투쟁하는 부위만으로가 아니라 투쟁하지 않는 부위 또한 투쟁으로 끌어내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계급적 단결투쟁의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제기된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적 단결투쟁을 가로막는 계급 내부의 세력, 즉 개량주의 세력의 존재와 그 영향력을 염두에 두면서 계급적 단결투쟁을 만들어내기 위한 계획이 공동전선 전술이다.

미래연대는 작년 전노투 결성 후 전노투 공동투쟁에 함께 하지 않는 이유를 대면서 현 시기 공동전선을 거부하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현재 한국에서 공동전선의 모태가 될 수 있는 부위는 ‘투쟁하는 노동조합들’, 그리고 이 부분에 박혀 있는 선진활동가 조직들이다. 이 부위를 연대망을 통해 공동투쟁의 장으로 이끄는 것을 통해서만 공동전선의 본래 의의를 다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전망이 열릴 수 있다.”

그냥 “투쟁하는 노동조합들” 속에서 하면 되지 따로 공동전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 시기 투쟁하는 노동조합들, 즉 비정규직노조들과 중소영세사업장 노조들만 가지고 자본의 공격을 분쇄할 수 있는 전선을 처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오히려 이 투쟁하는 노동조합들이 고립 방치되고 계급적 연대를 이끌어내지 못해서 각개격파 당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 아닌가. 바로 이러한 상황이 지금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계급적 투사들로 하여금 분노하고 좌절하게 만들고 있는, 현 시기 민주노조운동 초미의 쟁점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미래연대가 현 시기 ‘투쟁하는 노동조합들’만으로 공동전선의 본래 의의를 다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미래연대가 현재 운동의 이 절박한 문제를 알기나 하고 있는 건지, 계급적 연대를 이끌어내는 데 정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나 한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투쟁에 나서지 않고 있는 계급 부위들(지금의 경우 대공장 조직노동자 부위)을 투쟁으로 끌어내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이뤄내기 위한 혁사진영의 전술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현 시점에서 공동전선을 거부하기 위해 비정규직 등 ‘투쟁하는 노동조합들’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위로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공동전선을 이해하지 못해서이기 이전에 적극적으로 전선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술 노력을 혐오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대공장 조직노동자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개량주의 세력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공동전선을 말 그대로 ‘전선’으로 세워내기 위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치러야 할 개량주의 세력과의 투쟁에서 무능력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전술 혐오증 및 개량주의 세력과의 투쟁 기피증이라는 질병이 현 시기 혁사진영의 노동자 단결전선 전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전술 혐오증은 혁사진영 최대의 질병인 전선 기피증으로 이어진다. 이 전선 기피증을 감추기 위해 내세우는 명분이 소위 ‘현장 정치활동’, ‘사회주의 현장활동’이다. 미래연대는 투쟁 현안과 투쟁 과제를 받아 안아 투쟁계획을 제출하고 대중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한 일체의 전선 운용 노력을 두고 현장 정치활동을 포기하는 것, 독자적인 사회주의 현장소조망 구축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여 공동전선 전술과 현장 정치활동을 대립시킨다. 사노신 또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공동전선 전술을 ‘한 방의 캠페인성 실천’이라고 폄하하면서 이에 대비해 소모임을 통한 사회주의 현장활동을 내세운다.
이 동지들이 말하는 현장 정치활동(또는 사회주의 현장활동)이 무엇인가? 장황한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학습을 통해 사회주의 노선으로 무장하는 것, 둘째 사회주의 선전선동을 수행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개하는 것, 셋째 노동조합 투쟁을 비롯한 모든 일상적 현장투쟁에서 가장 단호한 투사로서 실천을 전개하는 것 등이다. 과연 이런 활동들이 전선 운용과 배치되는 것인가? 공동전선 전술은 이런 활동들을 배제, 포기하는 것인가? 단사 현장에서 공동전선 전술을 운용할 때 전술 주체, 즉 현장소조도 없이 유령이 운용하는가? 공동전선 전술을 운용하는 현장소조는 현장소조망 구축과 확대를 포기하는가?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 대중투쟁 전선을 구축하고자 할 때 그 조직은 조직의 모든 수준에서 전선 구축을 시도한다. 즉 전국 단위뿐만 아니라 지역과 단사 현장에서까지 전선을 구축하고자 한다. 지역 지부 조직과 현장 세포(또는 현장 분회) 조직을 통해 모든 단위에서 통일적으로 전선 구축을 위한 전술을 운용한다.
현 시기 로드맵 등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노동자 단결전선 전술을 운용할 경우를 상정해보자. 단사 현장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현장활동가들(현장분회 회원들)은 여타 개량주의 정파의 현장활동가들에게 로드맵 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을 제안한다. 공동투쟁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들을 망라하는 공투전선(비상투쟁위원회든 무엇이든 명칭과 관계없이)으로 노동조합을 확대개편하자, 또 현장조직 연석회의를 소집하고 현장공투위를 결성하자, 공동 출퇴투, 중식선동, 공장․ 부서(지부)․ 라인 순회투쟁 등 구체적인 투쟁사업들을 배치하자, 등등의 투쟁계획을 제안한다. 이러한 공동전선을 통해 전체 조합원의 단결 투쟁을 이끌어낸다. 투쟁 과정에서 개량주의 정파 소속 활동가들이 비상투쟁위원회나 현장공투위가 공동전선으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저해하고 투쟁의 확대 강화를 가로막기 위한 책략과 기만 조치들을 펴려고 할 때 투쟁에 나선 조합원들 사이에 독자 선전물을 배포하고 대중적으로 폭로한다. 또한 이 투쟁기관들 내에서 논의되고 합의되는 일체의 사항들을 독자 선전물을 통해 매일 마다 알려낸다. 투쟁을 회피하고 가로막는 개량주의 세력들로부터 그들 영향 하에 있는 조합원들을 분리시켜, 조합원 대중의 전투적 단결을 강화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 사이에 혁명적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연히 현장소조망도 확대한다. 현장소조의 이러한 공동전선 전술은 로드맵 같은 전국 사안이 아닌, 소속 단사의 현안이나 더 좁게는 부서, 분과(지부)의 현안을 둘러싼 공동투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전술 운용 능력을 갖추려면 의당 일상적으로 학습을 통해 사회주의 노선으로 무장하고, 사회주의 선전선동을 수행하고, 모든 투쟁에서 가장 단호한 투사로서 실천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전선 운용은 이러한 일상 활동들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러한 활동들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는 것이다. 즉 위에서 미래연대와 사노신이 말하는 수준의 현장 정치활동은 기본일 뿐,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같은 전선 운용의 수준으로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릴 수 있어야 정녕 <사회주의 현장세포의 현장 정치활동>이라는 그 말에 값하는 활동일 것이다. 요컨대 공동전선 전술은 가장 높은 수준의 현장 정치활동인 것이다. 전술은 정치활동의 꽃이라는 말은 현장에서도 그대로 맞는 말이다.

이 점에서 미래연대와 사노신이 전선 운용을 현장 정치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의 유아적인 정치활동 수준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공동전선 전술을 ‘한 방의 캠페인성 실천’으로 희화화하면서 사회주의 현장활동과 대립시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소아병적인 전선 기피증을 감추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전선 기피증이 어떻게 현장에서까지 뻔뻔스럽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냈을 따름이다.

현장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을 투쟁기관, 대중투쟁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투쟁 사안(전국적․ 정치적 현안이든 현장의 현안이든)을 매개로 해서 현장에서 부단히 공동전선 전술을 운용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선전선동과 이데올로기 투쟁, 가장 단호한 투사로서 실천투쟁의 전개를 당연히 수반한다.  
따라서 미래연대가 그러는 것처럼 그냥 노동조합이 공동전선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조합을 공동전선으로 바로 세워내야 한다. 편협한 관료적 기구로 변질된 노동조합을 말 그대로 전선으로, 대중투쟁기관으로 바로 세워내야 한다. 노동조합이 저절로 공동전선이 되지 않는다. 공동전선은 추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의식적인 전술이다. 전술 주체들의 의식적인 전술 노력이 없으면 노동조합은 전선이 되지 못하고 관료 기구로 퇴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투쟁전선으로 바로 세워내기 위해 부단히 공동전선 전술이 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술 혐오증과 전선 기피증은 현 시기 노동자 단결전선뿐만 아니라 그 동안 계급투쟁 속에서 혁사진영이 성장하고 대중들 사이에서 그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심각히 저해하였고, 앞으로도 줄곧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질병을 빠르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당면 투쟁을 떠나 해당 조직들로서는 조만간 혁명적 사회주의 정체성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공동전선에서 당과 계급

공동전선 전술은 무원칙한 대동단결주의나 음모적인 책략이 아니다. 그 전술은 기본적으로 당과 계급의 변증법적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 기계적으로 당과 계급의 관계에 접근할 경우 혁명당의 독립성 포기가 아니면 종파주의적 최후통첩이라는 양극단의 편향으로 빠져버린다

먼저, 흔히 중도주의 성향의 정치적 감상주의자들은 ‘정파 이기주의’, ‘종파주의’를 비판하면서 “당의 이해보다 계급의 이해가 앞선다”고 호소한다. 이들은 이 감상적 언사를 통해 자기 당, 자기 정파의 이해를 은폐하고 있다. 반동 세력이 ‘나라’의 이해를 계급의 이해보다 우선하기를 요구할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체’의 이해를 허울로 해서 반동 세력이 착취계급의 이해를 추구한다고 폭로한다. 나라의 이해는 지배계급의 관점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계급의 이해는 강령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강령은 당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옹호되고 실행될 수 있다.

계급은 그 자체로는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은 즉자적 사회계급에서 대자적 정치계급으로 변모되는 순간에만 독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 정치적 변모는 당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은 계급대중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역사적 기관이다. ‘계급이 당보다 더 우위에 선다’고 말하는 것은 즉자적 계급이 계급의식의 획득 과정에 있는 계급보다 더 우위에 선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틀릴 뿐만 아니라 반동적이다. 이런 오만하며 천박한 이론은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데 아무 쓸모도 없다.

계급대중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과정, 즉 장차 노동자계급을 지도할 혁명당의 건설과정은 복잡하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계급 자체가 동질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 내부의 개개 부문들은 각기 다른 경로를 거쳐 각기 다른 시차를 두고 계급의식을 획득한다. 그리고 자본가계급도 이 과정에 적극 개입한다. 노동자계급의 각 부분들을 서로 이간질시키기 위해 노동자계급 내에 자기 조직을 만들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조직들을 활용한다. 노동자계급 내부에는 여러 정당들이 동시에 활동한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특정 시기에 대단히 첨예하게 등장하는 단결전선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해는 혁명정당 또는 적어도 혁사진영에 의해 표현된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있다. 혁사진영의 정책이 올바라야 한다. 혁사진영의 임무는 노동자계급 다수를 계급의식으로 획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임무가 성공할 때에만 사회주의 혁명도 성공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정당 및 조직들로부터 정치적 ․ 조직적 독립성을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 보존해야 혁사진영은 자신의 임무를 달성할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은 곧 노동자계급에 대한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은 혁사진영의 강령과 노선을 기계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통해서 혹은 단계별 교육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의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투쟁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단결해야 한다. 이것은 정부의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는 전국적인 정치투쟁의 경우뿐 아니라 공장 담벼락 안에서 부분적인 경제투쟁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단결전선 전술은 우연적이거나 인위적인 속임수가 결코 아니다. 이 전술은 노동자계급의 발전을 규정하는 객관적 상황에서 전적으로 나온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저버려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 전체와 다른 별개의 이해를 갖지 않는다고 <공산당 선언>은 말하고 있다. 즉 계급의 다수를 획득하고자 하는 당의 투쟁은 투쟁 속에서 단결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어떤 경우에도 충돌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혁명당의 정치적 목적은 원칙적으로 같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전체적으로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의식하고 있거나 모든 상황에서 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이해를 생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당이 필요하다. 투쟁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에게 당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해 보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당의 임무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종파주의자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간판만으로 노동자계급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파주의자들은 이렇게 되풀이하고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가 주도하지 않는 공동전선은 기회주의라서 같이 할 수 없다”,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의 지도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또는 우리 조직의 주의주장을 수용하지 않는 모든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반대된다.” 이 경우 노동자는 사전에, 투쟁의 경험 이전에 혁사 조직을 신임해야 하는 문제로 된다. 혁명당의 깃발 아래 노동자계급의 절대 다수를 단결시켜야 한다는 혁명당의 역사적 문제는 아직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가 종파주의자들에 의해 최후통첩이 되어 노동자계급의 정수리를 겨누는 권총이 되었다. 형식적, 행정적, 관료적 사고가 변증법을 대신하고 있다.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으로 선언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으로부터 획득해야 할 신임이 이미 얻어진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치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소망하는 바 또는 최종적으로 얻어질 결과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종파주의자들이 결론으로 내린 입장은 사실 당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노동자계급이 미리 종파주의자들의 지도력을 인정해야 한다면 당이 역사를 통해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해 바쳐야 하는 모든 노고는 다 무슨 소용인가?

혁명당 가입을 희망하는 노동자에게 당은 이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당의 강령, 규율, 선출된 기구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한정된 투쟁목표를 위해 공동행동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와 똑같은 선험적인 요구를 여타 노동자 조직의 대중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당의 기초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왜냐하면 당은 계급대중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자기 임무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분노와 모욕감을 주는 일방적인 최후통첩 대신 당은 공동행동을 위한 명확히 적시된 행동 프로그램을 제출해야 한다. 이것이 실제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최후통첩은 노동자계급을 설득하지 못하자 강간을 시도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공동전선을 허용하지 않겠다. 이것은 파멸로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여전히 개량주의 진영에 남아 있는 노동자의 다수는 개량주의 지도부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혁사진영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개량주의 조직들에 남아 있는 것이다. 투쟁의 경험 속에서 혁사진영의 지도력을 몸으로 입증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한 그러한 노동자들은 계속 개량주의 조직들의 휘하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자본의 공격에 대항해서 싸우기를 진정 원하고 있다. 공동행동의 첫 발을 누가 모범적으로 내디디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행동을 하자고 요구할 것이다. 이때 자기 조직이 머뭇거리면 이들은 조직과 결별을 심각히 고민할 것이다.

개량주의 조직 휘하의 노동자들이 경험을 통해 올바른 투쟁의 길을 찾도록 돕는 대신 종파주의자들은 개량주의 지도부들이 휘하 노동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도록 돕고 있다. 전진과 노힘 같은 조직들은 혁사진영이 공동투쟁에의 참여를 기피한다고 비방하면서 자신들의 투쟁 기피증과 투쟁을 지도할 수 없는 무능력을 성공적으로 위장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혁사진영이 공동전선 정책을 완고하고 어리석고 뻔뻔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개량주의 조직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개량주의 조직들과 함께 하는 공동전선이 기회주의라고 한다면 필경 개량주의 휘하의 대공장 조직노동자들 대다수를 ‘맛이 간’ 것으로 규정하고 포기하는 방향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 동안 혁사진영은 종파적 대기주의의 파멸적인 오류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극소수에게만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기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당연시하고 나아가 자랑한다. 마치 혁명적 순결성을 지켰다는 보증서인 것처럼 말이다.

혁사 조직이 주도하지 못하는 모든 공동전선이 기회주의라면 혁사 조직이 대중투쟁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대중투쟁을 미루어야 한다. 그런데 혁사 조직은 스스로 대중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계급의 전면에 등장할 수 없다. 그리고 수만, 수십만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공동전선을 매개하지 않고서는 혁사조직의 투쟁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투쟁적일 수 없다. 혁사진영에 소속되지 않은, 혹은 그 영향 하에 있지 않은 조직노동자들일수록 공동전선 정책 이외의 방식으로는 투쟁으로 인도될 수 없다. 다수를 휘하에 두고 있는 개량주의 조직들과의 공동전선은 기회주의적이라서 거부하고, 다수 조직노동자들을 투쟁으로 끌어내는 대중투쟁을 스스로 조직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대기주의로 빠져들고..... 악순환이다. 종파적 최후통첩은 이 악순환을 타개할 수 없다.


4. 현 시기 공동전선의 구체적 조건

  1) 개량주의 조직들과 구체적인 투쟁사업 등을 명시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

노동자 공동전선에 개량주의 정파들(민주노동자전국회의, 전진, 노동자의힘)의 참가를 강제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들만의 ‘적색 공동전선’이 아니라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파들과의 상층연합으로 노동자 공동전선이 되겠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공동전선은 정파들을 제끼고 곧바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정파 간의 협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다른 정파들 휘하의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야 이런 문제 자체를 분분히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전선은 정파들 간의 협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협정은 휘하의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협정이다. 이러한 협정은 곧바로 단사 현장과 지역 차원에서의 각 정파 소속 활동가들 간 협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을 비상투쟁위원회로 확대개편하는 협정, 현장조직들 간의 현장공투위를 구성하는 협정, 지역에서 지역선봉대를 꾸리는 협정뿐만 아니라 각급 집회와 공단순회투쟁, 공동 출퇴투, 중식선동 등 보다 직접적인 투쟁사업에 대한 협정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공동전선의 목적은 상층연합이 아니라 혁사진영 휘하 대중과 개량주의 진영 휘하 대중의 단결, 즉 대중투쟁을 위한 대중들 간의 단결이다. 대중 기반이 없는 정치조직들과의 합의가 아니다.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과 현장에서, 그리고 지역 차원에서 각 진영의 현장 및 지역 활동가들 간의 공동전선이 수립되어 각각의 영향력 하에 분할되어있는 대중들을 단결시켜야 한다.
공동전선은 정치조직들의 선전연합이 아니다. 공동의 선전기구, 공동 편집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연합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선전 영역이다. 선전은 명확한 원칙과 강령에 기초해야 한다. 선전은 따로 하되 목표물에 대한 타격은 함께 하는 것이 공동전선이다. 연합은 실제적인 대중행동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원칙의 기반도 공유하지 않은 채 지도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합의, 즉 선전연합은 혼란만 가중시킨다.

기껏해야 몇백 명짜리 조직들과의 공투가 무슨 노동자 총단결전선이 될 수 있겠느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혁사진영은 수적 규모에서 그 보다도 못하다.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소수파다. 이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개량주의 조직들이 각기 수백 명 규모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도 민주노조운동으로 표현되는 조직노동자 운동을 여전히 주도하고 있고, 대사업장 노조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아직 그들의 대중 영향력은 미래연대가 호기 있게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시돼도 괜찮을 정도로 축소되지 않았다. 그들의 실체가 “극명하게 폭로되었다”는 것도 여전히 소수의 투쟁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일 뿐, 혁사진영이 무시해도 될 만큼 충분히 대중적으로 폭로된 것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더 많은 대중투쟁, 더 큰 규모의 대중투쟁이 필요하다.  

또 한 가지 노동운동의 한국적 현실을 면밀히 봐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에 유기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 중심의 남한 정치조직들과 그렇지 못한 서구 정치조직들(수만 명, 수천 명 규모) 간에 조직 규모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국가간 ‘환율’로 비유하면 10대 1, 심지어는 30대 1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조합원 대중이 이들 조직의 회원이 아니더라도 이들 조직 소속 활동가들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된다.
투쟁 속에서 이런 대중들을 이들 조직들로부터 분리시켜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조직의 기회주의 지도자들과 단결전선을 수립할 용의가 있음을 대중에게 보여야 한다. 우리들 사이에만 폭로된 것을 가지고서 그들 휘하의 대중들한테까지 폭로된 걸로 가정해선 안 된다. 조직노동자 대중들 사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정파들을 젖혀버리려는 것은 가장 투쟁 고양기의 상황에서조차 자살 행위가 될 것이다.
개량주의 정파의 지도부들 또한 혁사진영의 수적 규모와 영향력 문제를 떠나 전투성과 진정성의 외피가 필요해서 혁사진영과의 공동전선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일단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태의 결과는 이들 지도부들의 이러저러한 속셈 보다는 역사가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정도와 방법에 달려 있다.

한편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볼 때, 수적 규모를 떠나 노동운동 내 모든 세력을 망라한 공동의 비상투쟁위원회, 현장공동투쟁위원회, 지역선봉대는 조직노동자 대중들한테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개량주의 휘하의 노동자들도 이러한 투쟁기관 수립이 주는 구심력을 계속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조직 활동에 가장 익숙해 있는 모든 조직노동자 부위들이 투쟁기관으로 결집할 것이다.
이 공동전선 내에서 혁사진영은 계급투쟁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새롭게 전취하게 될 것이다. 혁사진영이 그 내부의 고질적인 질병들을 일찌감치 극복하여 개량주의 세력과 노조관료들이 대중을 냉소와 체념으로 몰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개량주의 휘하에 있던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을 것이고, 이들과 혁사진영 휘하 노동자들의 전투적 단결에 기반한 광범한 투쟁전선이 펼쳐졌을 것이다.  

노힘, 전진, 전국회의 등 개량주의 조직들과 구체적인 투쟁사업들을 명시한 협정을 혁사진영은 맺어야 한다. 어떻게 개량주의 세력들과 같이 하느냐, 이미 그 기회주의적이고 노사협조적이고 투쟁회피적인 추악한 실체가 다 폭로된 개량주의 조직들과 뭣 때문에 공동전선을 하느냐는 항의와 반론은 현 시기 자본의 총공격에 맞서는 투쟁의 절박함 앞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다른 노동계급 조직들과 공동전선 수립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지 않고 어떻게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현장과 지역, 전국 단위에서 대중투쟁기관을 수립할 수 있는지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자본의 핵폭탄 투하 전야를 맞아 대중투쟁기관 수립을 거부하는 것, 사실상 노동조합을 투쟁기관으로 세워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단결이라는 추상적인 원칙 때문이 아니라 이 자본의 하수인들을 노동조합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영향으로부터 대중을 분리시켜야 하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혁사진영은 공동전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혁사진영만의 공동전선, 적색 공동전선은 노동자 공동전선 수립을 거부하는 것이다. 혁사진영만의 노조, 혁사진영만의 소비에트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없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적색 소비에트, 적색노조 전술의 오류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정치적 차이와는 무관하게 자본의 공격 앞에서 모든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가능성을 제공하기에 대중투쟁기관으로서의 공동전선이 노동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다. 물론 적색 공동전선을 반대한다고 해서 대중투쟁을 지도할 혁사진영의 권리, 노동자 공동전선을 주도할 권리는 조금도 부정되지 않는다.


  2) 공동행동을 위한 실제 조처들을 구체화해야 한다

혁사진영 일부 조직의 지도부들 가운데는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들을 대면하는 것에 겁을 집어먹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노조관료 ․ 개량주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은 기회주의로 빠진다고 알고 있다. 기회주의는 동맹을 좋아한다는 말을 이들은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어떤 조건의 동맹이냐를 따질 필요 없이 무차별적으로 반대한다. 예를 들어 선거 동맹과 침탈로부터 파업을 방어하기 위한 사수대를 꾸리기 위한 동맹의 차이를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포괄적이고 중장기적인 전략적 성격을 띠는 사안을 놓고 맺는 동맹과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사안을 놓고 맺는 동맹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혁명주의 조직과 개량주의 조직의 선거연합, 노조 상층기구 내의 ‘좌파 블럭’ 등 포괄적인 강령적 성격의 내용에 대한 합의를 담게 되는 동맹은 보통 개량주의 조직에게 이익이 된다. 또한 민주노조운동 ‘혁신’과 같은 중장기적인 전략적 성격의 사안은 각 세력들이 저마다 상과 내용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 혁신이라는 것의 방향이 모호하고 행동에 대한 구속력이 전혀 없으며 따라서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개량주의 정파에게 이익이 된다. 반면 대중투쟁을 위한 연합은 언제나 혁사진영에게 유리하다. 전투적 대중행동을 위한 어떠한 합의도 철저하고 대담한 혁명조직에게 항상 이익이 된다. 그래서 개량주의 정파는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전투적 대중행동을 위한 합의를 비껴가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하고 나서 ‘범좌파’ 비대위가 구성된 뒤 전진과 노힘은 ‘투쟁과 혁신’을 위한 공동활동을 전노투 소속 조직들에게 제안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혁신’은 각 조직이 저마다 그 상과 내용을 달리 하는 사안이므로 구체적인 공동행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빼버리고 ‘투쟁’에 한정해서 ‘비정규 개악 저지 공동투쟁’으로 명확히 하자고 수정제안을 했다. 전진과 노힘 등 개량주의 정파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나서 이들은 민주노조운동 혁신의 주체가 되기에 태생적인 한계를 띠고 있는, 아니 그 자신이 사실상 혁신의 대상인 비대위의 관료적 본질을 감추고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혁신의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내용 없는 ‘혁신’ 구호만을 소리 높여 외쳐대는 한편의 쇼를 연출하고 있다. ‘혁신’뿐만 아니라 ‘투쟁’ 또한 기만적이다. 명망가들 자신들만의 국회 앞 농성과 단식으로, 현재 대중투쟁을 조직해야 할 임무를 고의적으로 보이콧하고 있는 자파 소속 대공장 노조 집행부들의 범죄행각을 감추어주는 데 복무하고 있다.

개량주의 세력 및 노조관료들과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전략 과제를 공동으로 내거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행진은 따로 해야 한다. 오직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직접적인 행동에 관해서 공동으로 한다. 타격의 방법, 대상, 시기에 대해서만 오직 합의하고 협정을 맺을 수 있다. 이러한 동맹, 이러한 합작, 이러한 연합전선은 악마, 악마의 할애비, 심지어는 이수호, 단병호, 이상욱과도 체결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우리의 손발을 묶지 않아야 한다.

지체 없이 실제 조처들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노조관료층 내 다양한 조직, 분파들과 비정규 개악과 로드맵 등 자본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조 권리들을 방어하는 공동투쟁에 관한 합의들을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이 훤히 알 수 있는 명확한 조건들을 각 조직, 분파들의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앞에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정파들을 단순히 ‘폭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비정규 개악 ․ 로드맵 분쇄 등 자본의 공격에 맞서 생존권과 현장의 권리를 방어하는 투쟁에 목적이 있다.
공동전선에 협정한 모든 세력을 망라하여 노동조합을 비상투쟁위원회로 확대개편 하는 것, 각 정파별 현장조직들을 현장공동투쟁위원회로 묶어내는 것, 지역 차원의 선봉대 구성, 전국 차원에서 개량주의 정파와 혁사진영의 행동 조정 등의 문제들을 협정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의 목적을 위해서는 개량주의 정파들 및 노조관료와의 동맹은 인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종파적 대기주의와 전선 기피증 때문에 ‘원칙’을 들먹이면서 동맹을 거부하는 것은 자본의 공격을 직접 돕는 것과 같다. 지금 시간이 별로 없다. 공동행동을 위한 협정은 엄격히 실제적이며, 엄격히 객관적이며, 투쟁의 목적에 부합해야 하며, 어떠한 인위적인 ‘주의주장들’도 없어야 하며, 유보조건들도 없어야 한다. 개량주의 정파들의 영향 하에 있는 노동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혁사진영의 제안 내용은 로드맵 등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는 투쟁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 제안을 바탕으로 우리는 모범을 통해 개량주의 휘하의 노동자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을 투쟁에 끌어들여야 하며 필시 걸림돌이 될 이들의 지도자들을 이들 앞에서 폭로해서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이뤄내야 한다. 이 방법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5. 마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노동자계급 내부에 가장 극악하고 위험한 분열, 즉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분열을 초래한다. 현재 개량주의 세력들은 산업 중심부와 대사업장을 장악하고 있고, 혁사진영은 비정규직 투쟁들을 주도하고 있다. 자본의 분할지배 전략을 막아내지 못한 채 노동자계급의 양대부문 모두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간 고립 방치된 투쟁으로 깨져나가는 것을 보며 어떠한 전망도 가지지 못하는 속에서 무너져 내려가고 있다.
전망과 희망이 없이는 어떤 계급도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혁사진영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단결을 이루기 위한 노동자 단결전선을 통해 계급적․ 전투적 해결의 전망을 열지 못할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 대중의 절박감은 노동운동에 대한 저항과 반감으로 바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초미의 계급적 현안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서라도 지금 바로 혁사진영은 노동자 공동전선 수립의 임무에 착수해야 한다.    

한편 혁사진영이 단일 대오를 갖춰 노동자 총단결전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선다면 무소속의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을 대거 규합할 수 있다.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세력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전투적 활동가들은 분열되어 있는 혁사진영이 단일 대오를 이루어 전장에 나선다면 그 구심력에 이끌려 적극 합류할 것이다.
혁사진영이 나서서 전투파 활동가대회를 소집, 개최하자. 전투파가 단일한 대오로 어떻게 개량주의 세력들을 상대로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을 구사할 것인지 이 자리에서 토론하고 결의하자.
단일한 혁사진영을 중심으로 전투파 총결집을 이뤄낸다면 그 만큼 개량주의 세력들도 노동자 단결전선을 거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전투파가 주도하는 단결전선은 능히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고 투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로드맵 분쇄투쟁의 승리와 함께 정세 반전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혁명정당 건설을 위한 주체적 조건들 또한 이 속에서 형성될 것이다.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패배와 굴종을 원하는 자들이다.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의 병균을 퍼뜨리는 자들을 혁사진영에서, 아니 노동계급 운동에서 즉각 몰아내자!
지금 로드맵 못 막으면 다 죽는다! 죽느냐 사느냐, 혁사진영의 결단에 계급의 운명이 달려 있다.




                         2005년 12월 3일

                          통합새조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2/11 18:28 2005/12/11 18:28
http://blog.jinbo.net/choyul/trackback/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