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철씨의 답변

 

제가 주장한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개량주의적 요구를 비혁명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투쟁에 대해 기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의 저의 주장에 대한 규정은 왜곡입니다. 개량주의는 체제 내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체제에 대한 개량은 착취관계를 종식시키지 못한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량주의적 쟁점이나 요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곧 개량주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개량주의자가 구분되는 기준은 개량을 혁명의 수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량을 목적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개량주의 정당이나 개량주의적 요구를 지지하는 노동대중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개량주의의 한계성은 실천적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량주의적 요구와 투쟁에 대한 공동의 실천속에서 입증되는 것이지, 단순히 투쟁의 외부에서의 관조를 통해서는 입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초좌익들은 개량주의적 요구와 투쟁을 비혁명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기권하고 관조하는 경향성이 컸습니다. 이러한 기권과 개입에 대한 두려움은 급진좌파들과 노동대중사이를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기존의 급진좌파들의 한계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급진좌파들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개입 또한 그 일환입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급진좌파들의 개입은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전화"가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의 한계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고 선진적 노동대중을 선취하는 과정을 목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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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서 무엇을 가지고 선진적노동대중을 선취할것인가? "급진 좌파의 개입을.....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한계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고 선진적인 노동대중을 선취하는 과정"이라고 햇다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할것인가를 보여주는것이 옳바르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할수 잇는 즉 비교할 수잇는 조직이라든가! 아니면, 특별한 강령의 차이라든가 보여줄것이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노동당과의 차이가 별반없는 해방연대 조직의 특성상 그들의 견인한다라고 하는것은 말로만으로 사회주의를 외치는 그들에게 대중을 또다시 부르조아의 체제내속으로 몰아 넣는 상태뿐이 안되는것이다. 본인은 늘 글에서 대중을 체제내속에서 안주하게 할것인가? 아니면 현체제를 부정하고 다음 체제로 나가기 위한 토대를 대중에게 인식시킬것인가의 차이점을 밝혀 왔다.

 

두번째로서 강령에서의 개량투쟁과 일반적인 개량투쟁의 차이점을 아직도 모르고 잇다는점이다. 강령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현자본주의체제를 부정하고 대안으로서 노동자정부가 해야하는 일을 밝히는것으로서 길을 인도하는 것이며 여기서 표현되어지는 개량적인부분이 비록 자본주의에서 나타날수도 잇다고 해도 그것은 지배계급의 체제 수호를 위한 방편으로 나타난것으로 체제의 위기의 한표현이라고 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량투쟁을 거부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투쟁을 강령투쟁으로  발전 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것이다. 허기진 사람에게 허기를 면할 식량을 얻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권력타도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면 반발이 나오는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런일을 한다는 것은 동지가 이야기 하는 초좌익이 아니라 소아병에 걸린 써클주의에 함몰되어있는 형태이기때문이다. 물론 기존에  많은조직이 그러한 오류를 나타낸것은 사실이며 그동안의 그 반발로 개량에 대한 투쟁을 체제내의 노동계급의이익을 대변한다라고 하는것은 사회주의관점을 벗어난 순수한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한 수정주의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동지의 주장은 늘 개량투쟁을 해야 한다라고 했고, 선진적인 대중을 이끌어 내와야 한다라고 했으며, 혁명적인 시기에는 권력 투쟁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든지 권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하며, 강령을 통한 개량투쟁을 이끌어야 한다라고 했으며, 언제든지 어느 장소에 관계없이 개량투쟁은 존재 해왔고 항상 나타날 수뿐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지적으로 혁명적인 시기에 개량투쟁은 투쟁을 더욱 지속시키며 투쟁의 폭을 더 멀리 더 넓게 확산시키며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혁명정당의 건설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그 사실을 동지만이 주장하고 잇듯이 개량정당과 부르조아 정당의 차이점이 없다라는 것을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으며, 개량투쟁은 강령에 의해서 구체화될 때 대중을 체제부정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목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이해하기 싫어 하는 것이다. 개량을 위한 투쟁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개량은 체제 내 에서 노동자를 그나마 물적인 부담을 덜어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노동계급을 가장 쉽게 투쟁의 대열에 흡수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노동 대중이 자본주의의부정을 쉽게 느낄수 잇는 물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많은 물적개량은 더 많은 노동대중의 착취를 기본으로 하기대문에 현실적으로 노동관료와 노동대중과의 괴리가 나타나며, 이들 노동관료는 현 자본주의체제내의 안주를 위하여 착취를 받는 노동대중들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을 위해서 투쟁할 것을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수호 집행부가 보여주었던 작태가 아닌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에겐 대안이 늘 존재 해왔다. 그 대안을 위해서 현시기 무엇을 할것인가를 고민해왔고 행동하게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본인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자들은 언제든지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잇다라고 판단을 할수있으나 그것이 기회주의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관념속으로 파묻어 버릴땐 대중은 발전이 아니라 정체가 되어 더 많은 세월을 착취와 억압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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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2 10:38 2005/12/0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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