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체냐 예속이냐


책상물림의 짐작과 우려

소위 이땅의 가장 급진적 좌파라며 때로는 무장투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하는 운동가들이 노숙인들이 잠자리와 생계수단을 뺏기는 마당에 저항 수단으로 가스통을 지고 가 싸우자고 했다고 못쓸 짓으로 비판하고 있으니 힘없고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 알고 싶다.
등골 빠지게 일해도 밥 먹기 힘든 세상 노숙인이 이리 많은데 법이 대순가.
생존권이 위협당하는 싸움에 약자로서 기껏 시청을 찾아가 항의하다 쫓겨나는 것이 다반사인데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적대감을 고조시키고 날을 세운 임전태세를 갖추어도 이길 동 말 동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집회 신고도 무시하고 시청을 처들어 가서 농성하는 등 감옥도 마다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거대한 공권력에 짓밟혀도 뾰쪽한 대항수단이 없는 민중들은 석유로 불을 지르거나 가스통을 터트리고 심지어는 분신도하고 목매는 죽음으로 항거하여 권리를 차고자 하는데 저항 수단을 강구하자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맨손으로 안 되면 무기도 들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다 희생도 될 수 있는 것이 민중의 싸움이고 그것이 대중적으로 폭발하면 무장투쟁이 되는 것인데 그 맹아들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혁명적으로 승화되는 것인가?
성장과정도 없이 처음부터 무장투쟁으로 나서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와 희생 속에서 무장투쟁도 나오고 혁명도 나오는 것이지 책상머리에 앉아서 고민이나 하고 토론하고 연대행사 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노숙인들의 절박한 주거권 쟁취활동을 갈라치기 주도권 확보로 보는 것은 너무 심한 선입견이 아닐 수 없다.

잠자리 확보는 생존의 기본이다.

당장에 잠자리 일자리 먹거리를 확보해야 하는 마당에 주도권 다툼이나 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또한 빈민 활동가들과 협력이 안 되는 것은 1년여 동안 생존권 확보에 여념이 없었고 만나서 애기 해봐야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뒤로 미룬 것이지 특별이 외면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학생운동 출신들이 빈민진영에서 활동하면서 도움을 주기 보다는 자기들 이상에 안 맞는다고 비난하면서 한다는 짓이 지역장들 수족이 되어 독단 전횡을 뒷받침함으로서 지금의 썩은 전노련의 원인이 되어왔다.
해방연대 활동가들이 일이 터지면 잠간 들렀다 가고 행사 쫒아 다니고 글을 많이 써낸다고 대중이 호응하고 혁명성이 고조 된다던가.
아직 미숙하고 의식도 부족한 민중들이 현실적 고통과 염원을 혁명적 조건이 성숙할 때까지 노숙하면서 참고 기다리라는 것인지 묻고 싶다.
물정 모르고 갓 태어난 아기가 사물을 인식하고 걸음마를 배울 때까지 수 천 번을 넘어지며 성장하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노숙인들이 잠자리를 확보하기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생존의 기본적 행동인데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생존의 권리도 찾지 말라는 것인가?
더불어 사는집 노숙인들이 빈집을 점거하여 사는 것을 부정하고 다른 단체에서 노숙인 주거권을 확보하기 위해 당국과 협의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것은 그때까지 노숙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따뜻한 보금자리가 보장된 조급 할 것 없는 활동가들이나 하는 예기다.
누구나 현존하는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데 의식을 갖추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연대를 굳건히 한 연후에 주거권을 찾자는 것은 그야말로 노숙인들의 입장을 무시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누가 협조 하든 안 하든 잠자리 확보는 일상의 일인데 절박한 점거를 잘못됐다고 하니 노숙인은 잠도 자지 말란 말인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생존권이 위협당하고 기본권이 유린 될 때 저항하고 투쟁하는데 사회적 의식과 공감대가 팽배해져 지배계급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을 때 혁명은 성공하는 것이다.
노숙인들이 빈집을 접거하고 안 하고는 주인이냐 노예냐의 차이다. 그것은 혁명에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삶의 주체냐 예속이냐다.
주거권은 소유가 아니라 생존의 권리 이다 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빈집 점거는 사적소유를 부정하는 혁명적 행동이다.
노숙인들이 빈집을 점거 했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안정성과 항구성을 확보해야지 계속 불안정 상태로 둔다면 노숙이들은 불안한 마음에 십 중  팔구 흩어져 버린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주거권을 인정받기 위해 세 내겠다고 약속하고 돈 한 푼 안내고 우선 전기 수도 공급받고 정당하게 살겠다는데 개량이라고 비난한다면 노숙인들은 항상 쫒기는 신세여야 되는가?
만약 점거를 안 했다면 어느 세월에 이렇게 공짜로 살겠는가 택도없는 소리다.
나중에 어떻게 되던 우선 잠자리는 확보하고 봐야 할 것 아닌가?
도개공에 점거를 통보했을 때 그들의 황당한 모습에서 또한 단호한 거부에서 뿌리깊은 소유의식을 보았고 그리고 잡아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하라고 달려드는 밑바닥 민중의 처절한 절규에 어쩌지 못하고 맥없는 양보는 권력의 나약함과 한계를 보았다.
그것도 법인체를 만들어 공적지원을 받아 해결하겠다는데 무엇이 나쁘다는 것인가?
점거해 주거권을 보장 받으니까 쉬운 것 같지만 정말 생사를 건 결행과 피를 말리는 긴장과 대치 속에 온몸으로 쟁취해낸 주거권을 어찌 그리 간단하게 매도한단 말인가?
민중운동은 필요할 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데 노숙인들의 잠자리를 뺐으려는 공권력 침탈과 폭력만행에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는지 알려주기 바란다.
호소와 동정유발 선처에 기댄 협상이 자격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안전이 어떻고 질질 끌텐데 시급한 잠자리를 어느 세월에 보장받는단 말인가?

무장투쟁의 불씨

아엔데가 무기를 들 때 무기를 들지 않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자멸의 길을 걸었다.
무장투쟁의 맹아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수단을 강구하는 속에서 한계와 능력에 따라 때로는 죽창과 낫 때로는 까쓰통과 석유통 그리고 총과 폭탄으로 바뀌어 왔다.
한편 왜 동지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느냐 했는데 이미 공감하여 조직적으로 결의하여 작년 7월 이후 해방연대 동지들이 더불어 사는집 사업에 참여하고 화의도 가졌으나 활발하지 못하여 우리 식구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만약 명분이 없거나 부당한 일이라면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연대에서 질질 끌려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숙인 사업평가는 막연한 짐작과 우려를 가지고 비참한 현상을 벗어나려는 노숙인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뜻을 같이 해온 동지들을 일방적인 잣대와 가치관으로 매도했다.
방법과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노숙인 사업자체를 대상화가 어떻고 연대가 어떻고 준비가 어떻고 하면서 주체의 역량과 발전과정을 무시하면서 혁명적 시각이 아닌 뷰티적 시각으로 일관했다.
연대온 동지들이 빈민들이 싸우거나 대치하고 있을 때 잠간 얼굴을 비치고 가버릴 때 업습하는 공권력의 위협과  협박에 얼마나 가슴 졸이며 한 사람이라도 더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랬는지 아는가.
이 핑게 저 핑게 되면서 하나둘 빠져나갈 때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위축되고 초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적으로 같이 하기로 했다면 회의나 토론에 성의 있게 참여하여 진지하게 대화한 적이 얼마나 있던가?
몇몇 동지들이 노동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서 별로 실천에 나서지 않고 빈민운동을 개척해가는 사업을 주마가편 식으로 함부로 농단한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일이다.
행사 연구 연대 토론 등 다 좋다. 고민과 담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천과 연동되는 속에서 부딪치며 깨지고 단련되며 모순이 극복되는 것이지  머리나 말로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
빈민운동은 변화무쌍하여 인내와 아량 창의와 도전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이 시대 이 만큼 자본주의 모순과 치열하게 행동으로 싸우는 조직도 드물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고 패배와 좌절도 있다. 그렇다고 엄존하는 현실을 어렵고 미흡하다고 비겨가거나 방기 할 수는 없다.
아무리 험난하고 고통스럽드라도 민중과 함께 나아갈 때 자유와 펑등이 구현 될 것이다.
혁명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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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30 16:51 2005/10/3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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