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동자 국가도 아닌, 부르주아 국가도 아닌?

  • 분류
    트로츠키
  • 등록일
    2008/03/11 01:38
  • 수정일
    2008/03/11 01:38
  • 글쓴이
    얼치기 공산주의자
  • 응답 RSS
1937년 트로츠키의 저작이다. 최근 다시 재개되고 있는 소련사회성격 논쟁에 도움이 될 만한 글이라 생각하여 옮겨본 것이다. 노동자 국가도 아닌, 부르주아 국가도 아닌? 1937년 11월 25일 트로츠키 정치적 형식과 사회적 내용 번햄 동지와 카터 동지는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관하여 새로운 의문점을 던졌다. 내 의견으로는 그들이 제시하는 답변은 완전한 오류이다. 그러나 이들 동지들이 극좌파들이 하는 것처럼 과학적 분석을 비명 지르기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번햄, 카터와 함께 이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진중하게 토론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번햄과 카터는 소련과 현 부르주아 국가의 중요한 차이가 소유 양식에서의 변화의 결과로서의 생산력의 강력한 발전에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은 더 나아가 " 10월 혁명에 의해 확립된 경제구조가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이 사실로부터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는 하는 것은 소비에트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라는 것을 추론한다. 이 측면에서 우리와 번햄, 카터 사이에 완벽한 동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동의의 정도가 아무리 크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전체 논점을 커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번햄과 카터가 극좌주의자들과 연대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련이 "맑스주의에 입각한 전통적인 용어적 의미에서" 노동자 국가이기를 멈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 구조가 여전히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에",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동시에 번햄과 카터는,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축하할 수 있을 뿐인데, 관료가 독립적 계급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결론적으로 이들 모순되는 주장들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소비에트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 아니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럼 그건[계급지배의 기관이 아닌 국가는-역자-] 뭔가? 그래서 우리는 국가에 대한 계급 이론을 수정하는 새로운 입장을 만나게 된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물신숭배주의자들이 아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이론의 수정을 요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구 수정주의자들의 비탄스러운 경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정형화하기 위하여 시도하기 전에 옛 이론과 새로운 사실들을 10배 보다 더 숙고한다. 번햄과 카터 스스로가 내친김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주객관적 상태에 대한 그것의 종속성으로 인해, "여러가지 다른 정부 형태에서 스스로를 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추가할 것이다: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른 정당들 간의 공개된 투쟁을 통해서건, 하나의 정당의 독점을 통해서건, 혹은 한 사람의 손아귀로의 사실상의 권력 집중을 통해서건. 물론 개인 독재는 정권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험의 현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 조건에서는, 그것이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결론적으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그것의 정치적 형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내용: 즉, 그 국가가 보호하고 방어하는 소유양식과 생산관계의 성격, 에 의해 결정된다. 원칙적으로 번햄과 카터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지난해에" 그들은 "관료가 명백하게 계획화되고 국유화된 경제의 파괴의 길로 들어섰다"고 쓴다.(단지 "그 길로 들어섰을 뿐인가?) 더 나아가 "발전의 경로가 관료를 국유화된 경제의 필요성과 이해와의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깊어지는 대립으로 이끌고 있다"고 한다.(단지 "관료를 이끌고 있을 뿐인가?") 관료와 경제 사이의 모순은 이전에 발견되었으나 지난 해 "관료의 행동들이 적극적으로 계획을 사보타지하고 국가 독점을 붕괴시키고 있다."(단지 "붕괴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직 붕괴되지는 않았는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두 번째 내용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 주요하게 정치적인 카테고리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의 모든 형식, 조직, 기관들이 이제는 파괴되었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가 이제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정권의 "서로 다른 형태들"에 관하여 들은 후라면, 그 자신에 의해 채택된 두 번째 내용은 예상외의 것으로 보이게 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단지 "주요하게"만 정치적 카테고리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 카테고리"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정치는 단지 집중화된 경제일 뿐이다. 국가와 소비에트에서의 사회민 주주의의 지배(독일 1918-1919년)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소유를 신성불가침으로 남겨두는 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제국주의로부터 소유권을 몰수하고 국유화된 소유를 지키고 있는 정권은 정치적 형태와는 독립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말하자면, 번햄과 카타는 "일반적으로" 여기에 동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인 내용과 정치적 내용을 결합시키는 것에 의지한다. 그들은 관료가 명백하게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고 있다고 한다. 지난 시기에 관료가 그들의 모든 반동적 성격을 가진 채 진보적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명백하게 반동적 요소가 되었다. 이 논거에 제4 인터내셔널의 이전의 모든 분석 및 예측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유익한 핵심이 있다. 우리는 "계몽 절대주의"가 부르주아지의 발전에 있어서 진보적 역할을 하였으나 이후 그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대립은 혁명 속 에서 스스로를 해소한다.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놓는데 있어서, "계몽 절대주의"는 단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동안에만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예측은 우리의 눈앞에서 분명하게 확증되었다. 자신의 성공에 현혹되어, 관료는 경제 성장에서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부분을 챙길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편 관료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했고, 이것이 관료의 현재 공황상태와 격렬한 억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소련에서 생산력 발전이 이미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감히 이런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국유화된 경제의 창조적 가능성은 너무나도 위대해서 그것들에 가해지는 관료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록 지금까지와는 현저하게 낮은 비율이기는 하지만 수년 동안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관료를 산산이 분열시키고 있는 정치적 위기가 생산력의 정체에 대한 전망보다도 훨씬 더 오늘날 관료에게는 위험스럽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하여, 관료가 이미 경제발전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었다고 인정하도록 해보자. 그러나 이 사실이 본질적으로 소련의 사회 성격이 변화되었거나 소련이 어떠한 종류의 계급적 성격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우리 동지들의 결정적인 실수가 여기에 있다. 일차대전까지는 부르주아 사회는 자신의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단지 지난 25년 동안, 부르주아는 경제발전의 명백한 장애가 되었다. 이것이 부르주아 사회가 부르주아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가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몇몇 나라에서는 부르주아적 소유의 보존이 파시스트 정권을 통해서만 오로지 가능하다. 즉, 부르주아는 모든 자신의 정치적 지배의 형식과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매개자를 이용해야만 한다. 이것이 그 국가가 부르주아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파시즘이 자신의 야만적 수단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방어하는 한, 그 국가는 파시시트 지배하의 부르주아지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추를 모든 포괄적 의미에까지 부여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관료의 손아귀로의 권력의 집중과 생산력 발전의 정체조차도 아직은 저절로 그 사회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로지 소유관계로의 혁명적 혹은 반혁명적 세력의 침투만이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페너 브록웨이가 편집을 맡고 있는 런던의 신 지도자는 올해 11월 12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독립노동당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경제기초가 파괴되었다는 트로츠키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자기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혼란을 유포할 수 있을 뿐이다. - L.T.) 그러나 역사는 경제와 국가간의 계급적 대립의 경우들에 관하여 진정으로 모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제 3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수년의 기간 동안 그 사회는 여전히 봉건적인 채 남아 있었다. 소비에트 지배의 첫 몇 달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경제의 기초 위에서 통치했다. 농경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수년동안 소부르주아 경제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었다.(상당한 정도까지 현재에도 그렇다.) 소련에서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긴 기간 동안 새로운 정권은 자신의 기초를 국유화된 경제에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와 국가 사이의 일시적 대립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혁명인가 아니면 반혁명인가를 의미한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승리는 승리자의 이해에 입각하여 경제를 재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회적 변혁에서 필요한 국면인 양자택일의 상황은 진짜 주인이 없는 가운데 점원, 다시 말하면 관료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무 계급사회 이론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규범와 사실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변증법적인 접근에 대한 주관적인 "규범적" 방법으로의 대체가 많은 동지들의 소련에 대한 올바른 사회학적 평가에 도달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유도 없이 번햄과 카터는 "맑시즘에 의해 이 용어에 주어진 전통적 의미"에서 소련은 노동자국가로 여겨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소련이 우리의 강령에 나와있는 것과 같은 노동자 국가의 규범에 조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는 어떠한 이견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강령은 노동자 국가의 진보적 발전과 점진적 소멸을 나타냈다. 그러나 항상 "강령에 따라서" 행동하지는 않는 역사는 퇴행하고 있는 노동자 국가의 전개에 우리를 맞닥뜨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강령적 요구들에 대립하고 있는 노동자국가가 그래서 노동자국가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말라리아에 중독된 간은 정상적인 타입의 간에 조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중독된 간이 간이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부학이나 생리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병리학이 또한 필요하다. 물론 질병에 걸린 간을 보면서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러나 내과의사는 스스로에게 그런 사치를 허용할 수 없다. 질병 그 자체의 상태와 그 신체기관의 손상에 기초하여, 그는 치료를 위한 처치("개혁")나 수술("혁명") 여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기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손상된 신체기관이 질병을 앓고 있는 간 이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노동자 국가와 노동조합과 관련된 좀 더 익숙한 유추를 해보자. 우리 강령의 관점에서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기관이어야 한다. 그럼 AFL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조직의 지도부에는 명백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이 앉아 있다. 모든 핵심적인 문제들에서, 그린, 올 등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는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수행한다. 우리는 유추를 확장해서 CIO가 등장할 때까지는 AFL이 얼마간 진보적인 작업을 했다면, 이제는 그것의 주요한 실천의 내용이 CIO의 보다 진보적인(혹은 덜 반동적인) 경향들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그린의 기관은 명백하게 반동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AFL이 노동조합 기관이기를 그만둔 것인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국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형태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 기관의 성격은 그것의 국민소득의 분배에 대한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린과 그 일당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방어한다는 사실은 그들을 부르주아지로 성격 지운다. 여기에 대해서 만약 이 신사양반들이 노동자 쪽으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수입을 방어하고, 파업과 임금인상, 실업자에 대한 원조에 대항하는 투쟁을 조직한다면, 우리는 노동조합이 아니라 파업파괴자의 조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린과 그 일당은 그들의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국민 소득에서 그들 몫의 증가를 위해서 혹은 적어도 감소에 반대하여 투쟁을 지도해야만 한다. 이런 객관적 현상이 모든 중요한 경우들에 있어서 가장 반동적인 노동조합과 파업파괴자의 조직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AFL에서 활동해야 할 의무 뿐만이 아니라 KKK단과 같은 파업 파괴자들로부터 그것을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린의 기능처럼, 스탈린의 기능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은 관료를 위해 복무하며 그래서 세계 부르주아지를 위해 복무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관료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착취하고 있는 사회적 기초를 방어하지 않고는 관료를 위해 복무할 수 없다. 그 정도만큼 스탈린은 제국주의의 공격과 너무나 참을성 없고 탐욕스러운 관료 그 자신으로부터 국유화된 소유를 방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는 소비에트 사회의 총체적 파괴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스탈린 도당이 타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정확하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이 역할을 맡길 수 없다. 스탈린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 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한다. 역사적 발전이 우리를 가장 다양한 종류의 노동조합에 익숙하도록 했다: 전투적인, 개량적인, 혁명적인, 반동적인, 자유주의적인, 그리고 카톨릭의. 이것은 다른 점에서 노동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현상을 우리는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것이 혁명적 강령의 규범의 관점으로부터 오로지 소련에 접근하는 우리의 경향을 설명해준다. 한편, 노동자국가는 서로 다른 역사적 힘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처럼 "전통적인" 규범에 완전히 대립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번햄과 카터 동지가 스탈린과 그 일당은 그들의 정치에 의해서 세계 부르주아지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올바르다. 그러나 이러한 올바른 생각은 반드시 올바른 시간과 장소의 조건에서 확립되어야만 한다. 히틀러 또한 부르주아지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과 히틀러의 기능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히틀러는 부르주아지의 소유양식을 방어한다. 스탈린은 관료의 이해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유 양식에 적용한다. 부르주아 정권의 토양 위에 있는 스페인에서 바로 그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능을 한다.(정치적 방책들에서 그들은 전반적으로 다소 다르다.) 소련과 스페인에서 똑같은 스탈린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나열은 관료가 독립적 계급이 아니라 계급들의 기구라는 것만큼이나 국가의 사회적 성격은 관료의 선행과 악행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노동자 국가가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몰상식한 것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순수한 형태의 국가는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 않는다. 반봉건적 프러시아 왕국은 부르주아지의 가장 중요한 임무들을 수행했으나 자코뱅의 방식이 아닌 자기 자신에 고유한 방식 말하자면 봉건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수행했다. 심지어 오늘날 일본에서 우리는 국가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지배계층의 반봉건적 성격 사이의 유사한 상호관계를 목격한다. 사실, 그것이 계급 착취의 두 가지 양식의 경우를 의미하는 한 봉건적 세력과 부르주아 세력 사이의 상호협조는 부르주아 세력과 프롤레타리아트 세력의 상호협조보다 헤아릴 수 없이 훨씬 쉽게 현실화 될 수 있다는 반대를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완전히 올바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새로운 사회를 하루에 만들지 않는다. 맑스는 노동자국가의 첫 번째 시기에 부르주아적 분배의 규범이 여전히 보존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에 관하여는, 국가와 혁명의 "사회주의와 국가"편을 보라.) 이러한 생각을 잘 숙고해야 한다. 정확히 부르주아적 분배의 규범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노동자 국가 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 국가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가장 혁명적인 관료조차도 부르주아의 기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화와 발전의 일반적 경향이 결정적인 중성을 지닌다. 만약 노동자 국가가 자신의 관료주의적 성격을 잃으면서 점차적으로 소멸한다면, 이것은 그것의 발전이 사회주의로의 길을 따라 진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관료가 더없이 강력하고, 권위적이며, 특권화되며 보수적으로 된다면, 이것은 노동자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대가로 하여 부르주아 경향이 성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자 국가 등장의 최초 나날들로부터 노동자 국가에 존재하는 내부 모순이 "규범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줄어들지 않고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이 분배의 영역에서 생산의 영역으로 이동하지 않는 한, 그리고 국유화된 소유와 계획 경제를 파괴하지 않는 한, 그 국가는 노동자 국가이다. 레닌은 이미 15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국가는 관료적으로 변형된[불구화된] 노동자 국가이다." 그 시기에 관료적 변형은 부르주아 정권의 직접적 유산을 의미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미미한 생존으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비우호적인 역사적 상황의 압력 하에, 관료적 "생존"은 새로운 자양분의 원료를 얻었으며, 엄청난 역사적 요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 국가의 타락[퇴행]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보나파르트적 테러가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타락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했다. "관료적 변형"이었던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노동자 국가를 집어삼키고, 국유화된 소유의 폐허 위에 새로운 소유계급의 씨를 뿌리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정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며 우리는 그 가능성에 미리 굴복할 생각은 없다.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은 "전통적인" 규범에 조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련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것이 그 규범이 잘못 된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규범"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벽한 승리에 기초하고 있다. 소련은 단지 후진적이고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부분적이고 불구화된 표현에 불과하다. 이상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순수하게" 규범적인 사상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로 세상을 건설하려고 하며,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현상으로부터는 간단하게 등을 돌려버린다. 종파주의자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상상에서만 혁명가인 사람들은 공허한 이상주의적 규범으로 스스로를 인도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 노동조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노동자 국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들은 역사를 새로 시작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만약 신이 그들의 손에 이상적인 정당과 이상적인 노동조합을 쥐어 준다면 이상적인 노동자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한 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가능한 많이 현실에 대하여 입을 삐죽거릴 것이다. 삐죽거림 그것이 바로 종파주의자들의 "혁명가주의"의 최고의 표현이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개량주의적인 멘셰비키의 수동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은, 맑스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추잡함으로 오늘의 추잡함을 합리화하는 데 스스로 바쁘다. 이 종류의 대표자들은 대중조직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스스로를 해소한다. 소련의 경멸스러운 "동지들"은 "역사적" 상황에 호소하면서 관료의 비열함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이런 종류의 부류들과는 반대로, 변증법적 사상 - 맑스주의자, 볼셰비키 - 은 객관적 발전 속에서 현상들을 취하는 동시에 자신의 "규범들"의 실현을 위한 기초에서 이 발전의 내부 모순을 발견한다. 물론 강령적 규범들은 그것들이 객관적인 역사적 과정 그 자체의 진보적 경향들의 일반화된 표현일 때에만 실현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의 강령적 정의는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⑴ 노동자들의 개량을 위해 자본주의에 대항에 투쟁하는 ⑵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혁명적 투쟁에 참여하는, ⑶ 사회주의적 기초 위에서 경제 조직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직장 혹은 산업의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만약 우리가 이 "규범적" 정의를 실제 현실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단 하나의 노동조합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말다면, 이런 사실에 대한 규범의 대치, 똑같은 발전의 특수한 표현에 대한 일반화된 표현의 대치 - 이런 형식적이고 비타협적이며 비유물론적인 현실에 대한 강령의 대치는 명백하게 생명력이 없으며 혁명적 정당의 개입을 위한 어떠한 길도 열지 못할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기회주의적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붕괴의 압력 하에서 우리의 강령적 규범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진보적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 노동조합에 우리의 올바른 정책들이 받아들여진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도부의 완전한 변화를 전제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그린, 시트린, 조혹스 일당을 축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스탈린 일당을 축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스탈린 일당을 제 때에 축출한다면,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여전히 국유화된 생산수단과 계획경제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잇점이다! 오로지 이 쪽 가지에서 저 쪽 가지로 부주의하게 뛰는 것에 익숙한 급진주의 멋쟁이들만이 경솔하게 그런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을 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물질적 진보에 경솔하게 손사래를 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사회주의 혁명은 너무나도 엄청나고 힘든 문제이다. 번햄과 카터 동지가 크레이포 등 우리의 프랑스 동지들과는 다르게 생산력의 요소를 잊지 않고 있으며 소련에 대한 방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효과가 없다. 그리고 만약 범죄적 관료 지도부가 경제성장을 마비시킨다면? 번햄과 카터 동지가 이런 경우에 수동적으로 제국주의가 소련의 사회적 기초를 파괴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도 아니고 부르주아 국가도 아니라는 그들의 소련에 대한 비 맑스주의적 정의는 모든 종류의 결론들에 개방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정의가 절대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배계급이면서 동시에 피지배계급 초좌익주의자들은 "어떻게 우리의 정치의식이 스탈린의 지배하에 있는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믿도록 그들이 강요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가 … ?!"라고 말한다. 너무도 추상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은 우리의 "분노"를 일으킨다. 그러나 진실은 분석의 과정에서 필요한 추상적인 범주들은 온전하게 극도의 구체성을 요구하는 통합을 위한 단위들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것들이 부족한 후진국의 지배계급이다.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의 오직 12분의 1을 이루고 있는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나머지 12분의 11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나 라의 후진성과 가난에 의해 불구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세계 제국주의의 압력 하에 두 배 세 배 기형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기관 - 국가 - 는 제국주의로부터의 압력(외교, 군사, 무역, 사상 그리고 관습 등)을 위한 기구가 된다. 역사적 규모에서 고려되는 지배를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료 사이의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세계 부르주아지와의 사이의 것이다. 이 투쟁에서 관료는 단지 전달 장치에 불과하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 도당 측에서의 자신의 보수적 신뢰성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들(스페인에서 스탈린의 반혁명적 정치들!)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국주의는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게 가장 치욕적인 타격도 아끼지 않고 있으며, 그를 타도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그의 힘을 빼앗고 있는 히틀러는 소비에트 관료에 대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태도에 관하여 보다 일관되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부르주아지에게 - 파스시트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게도 - 스탈린의 고립된 반혁명적 착취는 충분하지 않다; 소유관계에서 완전한 반혁명과 러시아 시장의 개방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부르주아지는 소비에트 국가가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것은 올바르다.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에 있는 국내 정권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외국 제국주의의 억압이 이들 나라들의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변화시키고 왜곡시키기 때문에 민족 부르주아지는 (남아메리카의 정치적으로 독립해 있는 국가들에서조차) 단지 부분적으로만 지배계급의 지위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억압을 가하는 자와 억압을 받는 자가 하나의 동일한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이한 수준의 발전만을 대표하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후진국에 가하는 압력이 그들의 기초적인 사회적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인도, 일본과 중국,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차이는 너무도 커서 우리는 분명하게 억압 부르주아지와 피 억압 부 르주아지 국가들을 구분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전자에 대항하여 후자를 지지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여긴다.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반지배, 반억압 계급이다. 소련에 가해지는 제국주의의 압력은 소비에트 사회의 성격을 바꾸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투쟁은 - 현재는 평화적이고, 미래에는 군사적이게 될 - 소유의 형식과 관계될 것이다. 이 투쟁에서 전달장치로서의 자신의 역량 안에서, 관료는 현재 제국주의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지하고 있고, 자신의 권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제국주의에 의지하고 있다. 동시에 관료는 자신들의 호화로운 삶과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미약한 생필품 분배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무자비하게 활용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빼앗기고, 억제되고, 왜곡된 성격을 가진다. 만약 "지배계급인 동시에 피지배계급"이라는 말에 모순이 있다면, 이것은 사상의 오류로부터가 아니라 소련의 상황 그 자체에 있는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정확하게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거부한다. 노동자 국가 - 전형이 아닌 전형의 파괴 - 로서 소련을 이해하는 것이 소련관료를 위한 이론적 정치적 사면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의 반동적 성격이 오로지 그것의 반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와 노동자 국가의 필요성 사이의 모순을 조명하는 속에서 완전하게 폭로될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만, 스탈린 도당의 범죄들에 대한 우리의 폭로가 완전한 동력을 획득할 것이다. 소련에 대한 방어는 제국주의에 대항한 최고의 투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보나파르티스트 관료의 타도에 대한 준비를 의미한다. 소련의 경험은 노동자 국가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얼마나 큰가, 그리고 그 저항의 임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경험은 또한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관료 대리자들의 압력이 얼마나 강력한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화해불가능한 혁명적 투쟁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단련시키는 것이 필요한가를 보여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