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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공동체 라디오 운동 사례와 방송 매체 규제 개혁과 민주화의 문제
- 우본라트 시리유바삭(Ubonrat Siriyuvasak),
출라롱코른 대학 커뮤니케이션 아트 학부교수
* 발표주제 : 운동으로서의 공동체 라디오와 미디어 개혁
태국 사회에서 커뮤니티 라디오 또는 비상업적이고 비국가소유의 미디어 영역이라는 개념은 개혁 의제가 뜨겁게 논의되었던 1998년에 처음 등장하였다. 2000년에는 이러한 관심이 한발 더 나아가 워킹 그룹인 ‘자유로운 민중을 위한 민중의 의제’의 제안으로 민중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 권리에 새로운 균형을 창출하고자 미디어 개혁 과정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 워킹 그룹은 민중 조직들이 공동체, 지역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민중 미디어 영역에 충분히 참여하고 또 소유할 수 있도록 민중 조직들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2002년까지 수십 개의 공동체 라디오 방송을 위한 훈련 워크숍이 전국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를 위해서 사회투자자금(SIF), Civicnet Institute, 지역공동체 발전협회, 공동체 발전 협회와 FNS의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훈련은 공동체와 시민 그룹들이 라디오 방송과 방송국 운영기술의 기본을 배우고 참여를 통해 공동체를 조직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2002년 드디어 그 노력은 공동체 라디오 방송을 현실화 시켰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바탕에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방송할 필요성을 느낀 공동체 조직들의 문제제기와 1998-1999년에 걸친 공동체 라디오 방송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한 공동체 조직들의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경험이 있었다. 또한 2000년에 제정된 새로운 주파수 법안은 ‘공동체 방송’에 전체 주파수의 20%를 할당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바탕으로 민중 진영의 법 집행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와 자기 훈련으로 얻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주파수 법에 의해 얻어진 법적 정당성은 풀뿌리 집단들이 그들의 공동체 라디오를 조직하고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태국의 공동체 라디오 방송은 오랜 역사적 경험이나 제도적 토대가 마련된 가운데 쉽게 출발한 방송이 아니었다. 제도적 성과를 얻기 위한 투쟁과 더불어 제도를 현실화 시키고자 스스로를 훈련하고 요구함으로써 얻어낸 성과이다.
이제 공동체 라디오 운동은 하나의 매체를 얻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방송 매체 전반의 규제개혁과 그 민주적 개혁이라는 화두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공동체 방송’이라는 큰 화두와 함께 태국 공동체 라디오 운동은 2005년 현재, 끝나지 않은 투쟁으로 계속 진행 중에 있다. 지금 태국 공동체 라디오 운동의 진행 현황과 더불어 주변 국가들의 현황을 짚어보자.
* 발제자 소개 - 우본라트 시리유바삭(Ubonrat Siriyuvasak)
우본라트 교수는 미디어 학자로 미디어 산업과 구조, 대중문화 뿐 아니라 여성, 어린이와 미디어를 중심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이들 각각의 주제와 관련한 서적과 학술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으며, 특히 출판과 학술저널을 통해 태국 미디어 산업과 대중문화의 경향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태국의 민주적인 미디어 규제개혁에 관한 글을 통해 공동체 라디오 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성과를 발표하였다.
공동체 라디오 운동 : 태국 방송 미디어의 개혁을 위하여
글 : 우본라트 시리유바삭
번역 : 주자영
Abstract
지난 12월 공동체 라디오가 처음 방송을 내보냈을 때 풀뿌리 그룹들과 시민단체들은 몹시 들떠있었다. 바로 이곳 칸자나부리에서 그 전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2002년 중반, 145개 단체들은 언제든 그들의 가정용 송신기를 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공관계부와 우편통신부가 이 ‘무허가 방송국’을 폐쇄시키겠다고 위협했지만, 전국 곳곳의 공동체 라디오는 그들의 표현의 자유 권리를 행사할 준비가 되어있다.
미디어 개혁의 길을 제시하는 공동체 라디오
태국 사회에서 공동체 라디오 또는 비상업적이고 비국가소유의 미디어 영역이라는 개념은 개혁 의제가 뜨겁게 논의되었던 1998년에 처음 등장하였다. 2000년, '자유로운 민중을 위한 민중의 의제(the People's Agenda for a Free People)'는 민중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 권리에 새로운 균형을 창출하고자 미디어 개혁 과정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민중 미디어에 대한 역할에 있어서 '민중의 의제' 워킹 그룹은 민중 조직들이 공동체, 지역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민중 미디어 영역에 충분히 참여하고 또 소유할 수 있도록 민중 조직들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2년 후 공동체 라디오가 처음 개척되기 시작하면서 민중들의 목소리는 드디어 침묵에서 깨어났다. 2002년 10월 10일 타마삿 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제 1회 태국 공동체 라디오 연합 전국대회에는 전국 10개 지방에서 145개 공동체 단체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정부의 정책 의지가 있든 없든 사회가 미디어 개혁 의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개혁의 추진력은 공동체 라디오의 필요성과 관련성을 인지한 공동체와 시민 단체들로부터 나왔다. 우선, 몇몇 그룹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또 몇몇은 공동체 라디오를 실제로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 미심쩍어했다. 너무나 훌륭하니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또 몇몇은 공동체들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해낼 능력이 있는가에 관해 다소 못미더워했다. 2000년에서 2002년 동안, 수십개의 훈련 워크샵과 세미나가 전국에 걸쳐 열렸다. 이는 사회투자자금(SIF), Civicnet Institute, 지역공동체 발전협회, 공동체 발전 협회와 FNS의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훈련은 공동체와 시민 그룹들이 라디오 방송과 방송국 운영기술의 기본을 배우고 이러한 참여를 통해 공동체들을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워크샵이 진행되면서 아이디어가 잡히기 시작했다. 많은 공동체 조직들은 두 가지 이유로 이 프로젝트에 결합했다. 지역 미디어가 절실히 필요했다. 예컨대 1995-1997년에 있었던 태국-버마 가스 수송관 프로젝트에 반대해 싸웠던 칸자나부리 보존단체는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대중의 지원을 동원하기 위해 공동체 라디오가 필수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게다가 몇몇 공동체들은 라디오 태국의 지역 방송국에서의 제작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주: 이전 정부는 공적 자원인 주파수에 대한 민중들의 직접적 접근권을 위해 국가가 주파수를 배분해야 한다는 결정을 지연시키고자 2년간 56개 방송국에서 공동체 라디오 파일럿 프로젝트를 실시했었다.) 1998에서 1999년 사이에 예를 들어 우본 라차타니, 페차부리, 송클라, 난, 코랏 등지에서 시민 단체들이 공동체 현안과 문화 프로그램들을 제작해 방송을 내보낼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들은 선구적 공동체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방송인들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두 번째로, 2000년에 제정된 새로운 주파수 법안은 공동체 방송에 전체 주파수의 20%를 할당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하여 이 주파수 법에 의해 얻어진 법적 정당성은 풀뿌리 집단들이 그들의 공동체 라디오를 조직하고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반면 국가의 미온적 자세와 1992년부터 이어져온 미디어 개혁에 대한 더딘 진행으로 인해 미디어와 시민의 자유 그리고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기대하던 이들 사이에 광범위한 회의(pessimism)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비록 최근 경제 하강으로 상업 미디어가 궁지에 놓여있긴 하지만 거대 미디어 집단들은 1997년 헌법으로 윤곽이 잡힌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구조보다는 특별 보호 관계 속에서의 특권을 선호한다. 권위적 체제의 최후의 보루 중 하나인 공공 관계부가 대중들의 개혁 압력에 완강히 버텨온 것도 물론이다. 이들 둘을 위시한 주류 방송 미디어들은 온 힘을 다해 개혁 의제에 저항하려 하지만 그들이 더 많은 이윤 배분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보다 민주적인 미디어 구조를 위한 현재 진행 중인 개혁 과정은 진보적인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위협으로 인식되어왔다.
지난 5년간의 발전을 보면 미디어 개혁 과정의 역동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 정치구조 바깥의 힘으로부터 추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풀뿌리 단체, 시민단체, 미디어 관련 비정부 기구, 학계 그리고 전문 기관들(주: ‘타이 리포터와 저널리스트 협회’와 새로 설립된 직능 연합인 ‘타이 방송국 저널리스트 연합’은 미디어 기업들의 직능단체인 ‘타이 방송인 연합’에 대항하여 개혁 의제에 대한 대중의 지원을 얻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지역 조직 세미나에 적극 가담했다.)의 동맹으로 공동체 라디오가 점점 구체화돼가고 있었다. 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칸자나부리, 인부리, 피치트르에서 들려왔고 이제 더 많은 목소리들이 들릴 것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상의하달식 커뮤니케이션 모델과 국가와 미디어자본에 의한 독점은 풀뿌리 공동체 라디오들로부터의 쏟아지는 변화의 요구를 막아서지 못하게 된다. 미디어 구조의 민주화는 전환점에 서 있다. 그러나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국가는 헌법이 정한 위임권을 거부하고 있다.
운동으로서의 공동체 라디오
“공동체 라디오는 사회 변화를 위한 진보적 전망 속에서의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함으로써 그 공동체의 요구에 부응한다. 공동체 라디오는 각각의 공동체의 고유한 사회적 맥락에 조응하여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참여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의 민주화를 도모한다.”
공동체 방송인들의 국제 연합(AMARC), 1998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목소리‘여야 할 미디어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을 수세기동안 품어왔다.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고문과 학살로 인해 침묵해왔던 것은 근래의 역사적 사실이다. 아니,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경제적 약탈과 봉쇄를 통해서도.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들의 삶은 자본가들과 지배계급들의 철저한 통제 하에 놓여있었다. 그들이 그들끼리, 대일반 대중에게 그리고 세계와 소통할 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주류 미디어는 지구상의 이 비참한 자들의 삶과는 관계없는 상업적 메시지와 정치적 선전만을 전달한다.
유네스코의 공동체 라디오 핸드북(2001)에 의하면, 공동체 라디오는 세계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생겨났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1947년 볼리비아에서 ‘광부들의 라디오’가 시작되면서 노조 라디오의 신기원이 시작되었다. 23개 방송국이 설립되었다. ‘광부들의 라디오’는 혹독한 노동조건과 주석 광산들의 소유에 대항한 투쟁에서 광부들을 단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광부들의 라디오’는 광부들의 기부를 통해 재정을 지원받았지만 방송국의 운영과 프로그램 정책은 조합에서 결정되었다. 하지만 방송국이 광부 공동체 마을에 인접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부들은 프로그램에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동안 그들 라디오는 독재 정권에 의해 종종 파괴되거나 장비 몰수를 당했다. 그들은 또한 맑시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차원에서 주류 선전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980년대 초반, 광부들은 볼리비아 독재 정권을 몰락시킨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1985년 정부는 수많은 주석 광산을 폐쇄시켰고 20,000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일부 ‘광부들의 라디오’는 농민 그룹에 넘겨졌고 10개 미만 정도가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콜럼비아에서는 안데스 지역 마을에서 카톨릭 신부인 조아껭 살세도의 주도로 1947년 농민 교육을 위해 ACPO(Sutatenza)가 설립되었는데 광범위한 인기를 얻었다. 교육 방송은 농민들을 조직하여 이 ‘라디오 학교’라 불리는 것을 듣게 하였다. 라디오 학교는 대략 20,000개 정도였고 학생 수는 200,000명 정도 되었다. Sutatenza는 라틴 아메리카 교육 라디오 방송국 연합(LER)에 소속되어 있었다.(주: ACPO는 유럽 카톨릭 단체들과 콜럼비아의 로만 카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농민 공동체가 소유하지도 운영하지도 않았다. 1970년대에 ACPO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책임있는 제작과 관련하여 교회가 문제를 야기하자 교회와 심각한 충돌에 직면하게 된다. 교회는 지원을 중단했고 ACPO는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 건물과 음반제작 공장 그리고 수도에 있는 14층짜리 건물을 포함해 방송국을 상업 라디오 네트워크에 매각했다.)
동시대 역사로 옮겨오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진 이후의 남아공의 경험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따를만한 사회 운동의 길을 닦아놓았다. 1990년대 들어 말리, 부르키나 파소, 나미비아 그리고 남아공은 국가 방송 분산의 일환으로 전파를 풀고 공동체 라디오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공 정부는 방송 미디어가 과거의 갈등을 화해시키고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 하에 새로운 방송 정책을 발의했다. 남아공은 1993년 방송 미디어를 관할하는 법적 기관으로써 ‘독립 방송 기관(IBA)’을 설립했다. 또한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는 국가적, 지역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범위의 공적, 사적 그리고 공동체 방송 서비스를 장려하는 새로운 방송법을 제정했다. 남아공 방송법의 컨셉은 2000년 태국 주파수법의 역할과 유사한 모델이다. 그러나 태국의 법안이 정부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남아공과 큰 차이를 보인다.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었지만 지금껏 정부는 민주적 방송 정책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자유시장의 힘과 거대 미디어 재벌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Pacifica Foundation과 청취자의 후원을 받는 라디오인 KPFA는 1948년 방송에 관한 공공 지식 포럼의 중심에 있었다. 퍼시피카의 활동으로 대안적 뉴스와 정보, 음악 그리고 소수민족 공동체들의 광범위한 문화 프로그램들을 방송하는 비상업적 공공 라디오 영역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FM 채널에는 대략 2천개의 공공 라디오 방송국이 있고 이들 중 몇몇은 1990년대 풀뿌리 라디오 연합체를 결성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동안 미국에서는 새로운 운동이 출현했다. 1986년 스프링필드, 일리노이에서 WTRA 방송국(거주권 연합)을 선봉으로 한 저출력 방송국 또는 저출력 라디오라는 ‘자유 라디오 운동’은 미국 전역의 소수민족과 저소득 공동체들의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집단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무허가 방송국들은 그들 방송의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해 연방 커뮤니케이션 위원회(FCC)에 맞섰다. 버클리 자유 라디오, 인권 라디오, 흑인 해방 라디오, 줌 블랙 매직 라디오, 액설런트 라디오, 시애틀 해방 라디오들은 자신들을 저항의 주파수로서 인식했다.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미국의 팽창주의와 전쟁 캠페인에 분명히 비판적인 것이다. 이들 방송국들은 초기 예산이 적은 까닭에 이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저예산의 송신기를 개발해냈다. 이러한 기술적 접근가능성 때문에 대서양에 걸쳐있던 이 운동은 네덜란드로, 인접 멕시코로, 그리고 억압받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상의 사례들은 국가와 기업의 담장을 뛰어넘어 자유롭고 민주적인 미디어 시스템으로 나아가려는 민중들의 욕구를 극히 일부분만 보여줄 뿐이다. 기실 공동체 라디오는 규모와 깊이에 있어 계속 성장해왔다. 이는 지역적 혹은 국가적 네트워크뿐만이 아니다. AMARC(세계 공동체 방송인 연합)이 1983년에서 1998년의 기간동안 증명하듯이 이것은 분명 전세계적 운동이다. 현재 세계 106개 국가에서 3천명에 육박하는 회원과 연합체들이 있다. 다가오는 제 8회 세계 공동체 라디오 회의는 지역주체로서 Radio Sagarmatha와 함께 네팔 카트만두에서 2003년 2월에 열릴 예정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라디오는 전세계적 의미를 가지고 대안적 민중 미디어로서의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금기였던 이들을 위한 마법의 목소리다. 태국 사회에서 공동체 라디오 네트워크는 보다 민주적인 미디어 문화를 위한 이 지구적인 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ENDNOTE
10월 31일 경찰은 Angthong 공동체 라디오 매니저(책임자)가 외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송신 기술자를 체포해갔다. 법 전환 기간동안의 ‘공동체 라디오 시험방송’이 허가될 수 있도록 정부와 ‘태국 공동체 라디오 연합’의 대표단 간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주: 내각은 2002년 7월 16일 국무총리실에 속한 기관 산하에 위원회를 구성하여 법 전환 기간동안 공동체 라디오 시험방송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로 결정했다.) 공공관계부와 우편통신부는 이미 법 효력을 상실한 1955년 방송법과 라디오 커뮤니케이션 법을 권위적으로 강제했다. ‘연합’은 민중들의 커뮤니케이션 권한과 전파에 대한 접근권에 근거해 이 체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2년 11월 20일
공동체 라디오 : 2000-2002 활동 연혁
2000/3/8 : 전파법 제정
2000~2002 : 전국의 공동체와 시민 단체를 위한 훈련 워크샵, 세미나, 지역회의 개최
2001/11 : 칸자나부리와 인부리, 싱부리 지역에 공동체 라디오 시험방송국 설립
2001/12/19 : 칸자나부리 공동체 라디오가 100.75 FM, 반경 20sq.km에 걸친 10와트 송신기로 방송 시작
2002/2/12 : 공공관계부(PRD)가 1955년 방송법으로 칸자나부리와 인부리 공동체 라디오가 불법이라며 방송 중단 요구
2002/2/25~7/15 : 칸자나부리와 인부리, 싱부리 공동체 라디오가 PRD와 정부의 폐쇄조처에 탄원. 동시에 두 방송국은 10개 지역 공동체 라디오 네트워크, 국회 공공 참여 위원회, 국회 대변인, 교육&미디어 중재 소위원회, 인권 위원회에 도움 요청. 국회 공공참여 위원회와 인권위원회가 각각 조사위원회 꾸려 공동체 라디오 네트워크의 대표단, PRD 그리고 우편통신부를 만나 분쟁을 중재함. 양측 모두 공동체 라디오가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 국가적 의제를 설득하지 못함.
2002/7/16 : 국회는 국무총리실에 속한 기관 산하의 소위원회를 설치해 불법 공동체 라디오 문제에 관한 임시방편의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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