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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 돌란

추석 연휴에 달밤에 밖에서 달을 찍고 방구석을 뒹구는 것말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책을 읽었다.

아니, 영화도 봤다.

자비에르 돌란의 영화를 봤다.

<나는 엄마를 죽였다>와 <농장의 탐 Tom at the farm>

탐앳더팜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가 끝내줬다.

그 노래는... 누구더라... 아무튼 매우 매력적인 톤을 가진 남자 가수의 노래로 going to a town 이란 노래였다.

조지 미셸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라고 하는데 원곡보다 훨씬 좋았다.

그런데 영화가 뭐 그렇게 엄청나게 좋은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자비에 돌란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약간 과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고(젊고), 잘 생겨서 좀 더 그런 것 같고, 또 연출을 하면서 연기를 좀 잘 하기도 하고.

셀카를 찍을 때조차도 모델처럼, 얼굴 각을 틀어서 찍던데... 별로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걸 열등감이라고 하는 건가?

이런 얘기를 오랜만에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 정민이형과 나눴더니, 걔는 키가 168이라고 말해줬다.

"그랬구나... 형, 고마워요."

형이 대답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린 잘 안 될거야."

"아니예요, 형. 우리는 잘 될거예요. 형도 잘 될거고. 잘 할 거예요."

나는, 조금 쉬고, 숨도 돌리고, 여유롭게 살면서 '잘', '제대로' 살거예요. 영화를 하든 노동운동을 하든 '그걸' 포기하지 않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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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탈탈

술 기운 가득 아침에 일어났다.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니 나에게 깊은 울화병을 안겨준 아무개님이 날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페이스북에 친구공개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만, 이름도 밝히지 않고 썼을 뿐, 없는 얘기를 지어낸 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멘탈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목격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빈 속에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마시며 석관동으로 가서 남는 것 하나 없는 수업을 들었다. <내 깡패 같은 연인>이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뗴웠는데, 이미 두번이나 봤던 영화라서 앉아있는 그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리곤 다시 연남동 사무실로 향했다. 내부순환로 터널을 지나가는데 그 어둠이 너무 숨막힐 것 같았다. 야맹증이 있는 건지, 아니면 폐쇄공포증인지. 아마 후자겠지.

사무실에 가서 변호사님이 요청한 증거 사진들을 열심히 찾았다. 두 시간 내내 찾았지만 내가 바라는, 재판에 필요한 사진이 없었다. 그러다가 급히 서부지법으로 갔다. 빠듯하게 도착.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 오늘 재판은 중앙지법이었다. 서부지법, 중앙지법에 재판에 몇 개씩 있어서 나 스스로 헷갈렸던 것 같다. 중앙지법으로 향하는데 삼각지 쪽에서 차가 너무 막혔다. 판사가 제발 기다려주길 바라며 달려갔다.

중앙지법에 갔더니 다행히 재판이 진행중이었고, 작년 5월 19일 서초사옥 앞에서 열렸던 무기한파업 첫날의 시위 건이었다. 나는 이 건으로도 기소됐고, 그보다 두 달 전 세종대왕상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빙자한 집회를 개최했다는 혐의로도 기소되었다. 너무 황당하지만 내가 기소된 예닐곱개 사건들의 절반이 대개 이렇다.

재판이 끝나고 증인으로 와주신 영등포센터 교선부장님에게 너무 죄송하고 고마워서 영등포까지 데려다드렸다. 갔더니 서울부지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같이 쌈밥을 먹었다. 오늘 처음 먹는 밥이었다. 꾸역꾸역 먹고 다시 집으로 왔다. 집에 왔더니 기다리는 건 3년만의 학교 과제. 2분짜리로, 나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쌓이는 벌금 고지서와 이어지는 재판들, 온갖 스트레스에 멘탈이 탈탈 털리는 나날들이다. 2분 내내 밤바다에 거친 파도가 치는, 아무 내레이션도 없는 영상을 촬영해서 제출해야 할 것 같다. 삶은 고통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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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8] ‘달관’마저 강요당하는 청년의 미래

- 세대담론 끝내고 청년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중심으로 조직해야할 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정동 경향신문사 앞에 가면 매일 같이 1인 시위를 잇고 있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민주노총 귀족노조 형님들! 삼촌들! 좋은 일자리 독점하시지 말고 비정규직, 청년들에게도 나누어주세요.”

결연하고도 못 마땅한 얼굴로 깔끔하게 정장도 차려입은 앳된 얼굴의 두 청년. 한 명은 피켓을 들고 선동 발언을, 다른 한명은 경호원이나 정보과 형사들이 착용하는 무전기와 이어폰을 끼고 수시로 상황을 주고받는다. 무언가 비밀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으나 참으로 영리한 선동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노동조합 운동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에게 더 다가가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좋은 일자리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논리는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잘못이 있다면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미련함에 있다.

 

‘달관하라’는 주문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많은 이들이 세계경제의 위기가 또 다시 도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기준금리를 인상시킬 시점을 재고 있고, 유럽의 통화동맹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채무위기가 만연해지면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중국은 동북아 패권을 두고 미국과 팽팽한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대외적으론 미·중 두 강국의 동북아 패권 싸움 앞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 헤매고 있고, 국내 경제는 부동산 대란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계부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권력은 세월호 참사나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 등 인민의 사회적 요구들은 철저하게 짓누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내부의 비리 문제로 자중지란에 빠져 있다.

자칫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정치질서가 큰 혼돈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한국 우파의 이데올로그이자 선봉장 노릇을 하는 조선일보가 느닷없이 ‘달관세대’를 꺼내든 것의 노림수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기사는 단순히 시시껄렁한 말놀이일 수 없다.

당도할 위기에 앞서 내부비용의 평가절하를 보다 단호하게 결행함으로써 이른바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완수하는 것은 위기에 대처하는 한국 지배계급의 필수 과제다. 위기를 초래한 것은 정치권력과 자본 자신이지만 그 대가는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자본권력의 생리 아니던가? 

요컨대 정부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겠다는 것의 의미는 그 사이 어딘가 중간쯤을 찾자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하향평준화를 이뤄 ‘좋은 시절’의 기억일랑 싹 잊으라는 명령이다. ‘달관세대’의 주문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더 이상 윗세대 노동자들처럼 안정적이고 생활 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없으니 지금과 같은 수준에서 ‘안빈낙도’하며 제 나름의 아비투스를 길러보라는 주문, 일종의 최면인 것이다. 

 

체념의 反정치

더 나은 삶(공동체)을 만들어가기 위해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을 재생시킬 것인가, 유동하는 ‘달관자’ 혹은 체념하는 ‘이등시민’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곤경 앞에 ‘집단적인 문제 해결’의 창구로서의 사회운동, 혹은 정치의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각자도생 속에서 살아남거나, 종교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문인지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때로는 위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꾸짖기도 하는 빼어난 멘토들의 ‘강연’이 흥행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지난해 법륜스님은 세계 100여 개 도시를 순회하며 ‘세계 100회 강연’을 펼쳤다. 종교를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관심이 놀라울 정도다. 만약 한국의 사회운동에게 이만한 흡입력이 있었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많은 대안을 보여주며 성장하고 있지 않았을까 내심 부러움도 생긴다.

많은 청년들이 그에게 외롭고 우울하며 벅찬 자신의 삶에 대해 토로하고, 해법을 갈구한다. “입사한지 4개월 된 신입직원입니다. 아침에 회사를 가려고 하면 너무 괴롭고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계속 눈물이 나고 집에 올 때도 그냥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고 가슴도 답답하고 너무 아프고 그래서 눈물도 나고 그럽니다.” 입사 직후 참혹한 근로 환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한 젊은 노동자에게 법륜이 주는 해법은 간명하다. 모든 번민은 욕심에서 오는 것이니 욕심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훌훌 떠나라는 것이다.

톱스타 멘토 강신주는 조금 다르다. 그는 종종 꾸짖는 말투로 상담자에게 ‘당당하게 주체로 서라’고 말한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는 “상담의 목적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주체로 세우는 것”이라며 사람들을 주체로 세우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그러나 법륜스님의 방식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의 집단적 해결을 모색하기보다 ‘훌훌 털고 떠나기’라는 개인적 해법 역시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아니겠는가.

노동권이 추락한 사회의 멘토들은 이토록 쿨하다. 우리가 노동할 때 마주하는 곤경들에 대한 공연한 욕심일랑 포기하고, 순응하거나 ‘탈주’하라는 것. 조선일보발 ‘달관세대’의 최면이나, 정세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판단을 결여한 상태로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유동하는 삶을 예찬하는 논리와도 맞닿아 있다.

슬프지만 오늘날 우리는 마주한 모순들에 맞서 집단적인 해결의 의지를 상실하고 포기한 지 오래다. 요컨대 청년들의 ‘생존’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런 낭만적 멘토링 뒤에는 다수의 비참이 가려져 있음을 모른 척 할 뿐이다.

 

청년들의 연이은 죽음

제대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돌아왔을 때 어딘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다들 말수가 적어졌고,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난 뒤의 패잔병 같았다. 광우병 촛불시위나 용산 참사, 쌍용차 옥쇄파업과 노무현의 죽음, 한예종 사태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진 후였다.

물론 이는 아주 피상적인 느낌을 거칠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안에는 감정들의 복잡한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해 나는 주변을 살피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을 조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과거' 속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듬해 2월 몇 년 전 입학 직후 스치듯 만났던 한 선배의 부음이 들렸다. 굶주림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잘못 알려지긴 했지만, 그녀가 생계고와 지병을 앓았던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였음은 사실이었다. 그해에만 그 자그마한 학교에서 4명의 재학생들이 자살했다. A는 불과 한 주 전 함께 맥주를 마셨던 친구였고, B는 같은 해 영상원에 입학해 같은 수업을 듣기도 했던 이였다.

20대 예술학도들의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툭하면 학교 극장 앞에 "음악원 **학번 김 아무개, ** 콩쿨 대상 수상!"이라는, 대형 걸개 현수막이 걸리곤 하던 늦여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 즈음 청년들의 연달은 죽음은 꽤나 논란거리였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2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지표가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 성적 경쟁에 시달리던 카이스트 학생들이 연달아 자살했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산재로, 생활고나 실업에 대한 비관으로 죽는 이들에 대한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다.

모여서 영화를 보거나 함께 책을 읽고 밤새 술만 퍼마시던 우리는 무던히도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우리 주위의 죽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위장된 고급 예술의 허울 너머에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의 실체가 무엇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망발들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구토를 내뱉듯 곤욕스런 현실을 응시하고 자리를 찾으려 발악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다 정치적이고 실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겼고 공론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지역, 예술, 운동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모임을 만들었다. 희망버스 같은 큰 투쟁들에 연대하기도 했고, 축제 땐 다양한 방식으로 퍼포먼스들을 기획하고 공연이나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 안의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열악하고 굴욕적인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해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2012년 가을 한예종 청소노동자들과 경비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우리는 예술과 정치 사이의 현저한 간극을 노려보며 어느 한쪽으로도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정쩡한 자리에 대해 고민했다. 국립예술학교 학생답게 초절기교를 가꾸기보다 점점 더 정치적인 실천들에 주목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떠도는 청년들

간석오거리에는 두세 평 남짓의 작은 편의점이 있다. 그 편의점 냉장고에는 잠을 지연시키는 온갖 음료수들이 가득하다. 핫식스, 레드불, 박카스, 번인텐스, 몬스터…. 종류도 어림짐작 10가지는 넘어 보이는,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진열대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유독 더 잠이 많나? 이 도시의 안개에는 수면제가 섞여있나? 판단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추정은 공단 노동자가 많은 동네라는 사실이었다.

예닐곱 개의 공단이 있는 대도시 인천. 공단과 공단이 맞닿아 있는 베드타운이 바로 간석오거리였다. ○○공단의 노동자들은 하루 10~12시간, 주 6일씩 일을 한다. 공단이 포괄하는 면적이 아주 넓고 수천개의 공장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회사로부터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서너 곳에 불과하다. 쉴 새 없는 구조조정의 폭풍우에 대부분의 공장들은 노동자들을 파견직으로 두고 6개월마다 갈아치운다.

핫식스를 마시지 않고서는 일할 수 없는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쾌쾌한 냄새 가득한 공장. 공장 옆에 세워진 아우디 안에는 사장 아들이 에어컨 켜고 앉아 낮잠을 자고, 공장 안에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 물량이 조금만 떨어져도 우수수 잘려나가는 노동자들과 성경 구절과 성화가 걸린 공장 곳곳의 기만적 풍경들. 저임금 장시간노동을 통한 원가 절감으로 얻어진 회장님의 이윤은 97개의 교회를 세우는 혁혁한 공으로 귀결됐다.

학교를 떠나고 공장에 갔었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공단에 양계장처럼 줄지어있는 공장들. 이른 아침 공단 앞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아무 표정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발 댈 틈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야 할 통근버스를 기다린다. 안개 자욱한 유수지 근처에만 가면 온갖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그곳에서 나는 법정최저임금을 받으며 제조업 파견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그곳에도 동년배의 청년들이 있었다. 근로기준법 같은 볼썽사나운 권리 대신 반나절 일하다 홧김에 작업복을 집어던지고 집으로 가버리는 ‘쿨함’. A공장에서 B공장으로, B공장에서 C공장으로, 다시 C공장에서 A공장으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게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인 불법파견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공단에서 '더러워서 때려치기'는 그들이 유일하게 택할 수 있는 자유였다. 아픔에 무디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기대를 접은 지 오래인,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끊임없이 주머니 속 어딘가에 적대를 숨기고 쌓는 것에 익숙해진 청년들. 4년제 대학을 나왔다는 30대 관리자가 벌레 취급하며 떠드는 욕지거리에 침 뱉어주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디지털 유목민’, ‘노마드적 삶’ 따위의 슬로건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물론 오늘날 청년들의 삶이 점점 유목민처럼 변해가는 건 사실이다. 개중에는 자기계발과 경쟁력의 면모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례도 전시된다. 그러나 그러한 탈정치적 노마드의 몇몇 사례는 끊임없이 유동하기를 강제 당하는 청년 파견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실업난의 극심한 좌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감추는 효과를 발휘할 뿐이다. 우리 공장의 잔업은 반강제였다. 그러나 30대 중후반만 되어도 잔업은 필수였다. 최저임금일지라도 더 벌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 청년노동자의 죽음

동료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나 역시 다른 사정으로 인해 떠나야했다. 2013년 늦여름 나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로부터 상근활동 제안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그해 7월 삼성그룹 하에서 만들어진, 일정 규모를 넘어서는 노동조합이었다. 수십개의 협력사들로 나누어진 전국 곳곳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었지만 모두들 삼성 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고장 난 삼성 제품을 고치는 수리기사들이었다. 고령화된 금속노조에선 찾기 힘든 2,30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렇게 한 순간에 1천명의 고단했던 삶들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9월말. 칠곡센터에서 일하던 30대 중반의 노동자 임현우씨가 출근 준비를 하다 쓰러졌다. 여름 성수기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일해야 했던 그는 매일같이 극심한 피로와 아픔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협력사 사장은 비아냥거리며 그의 휴식을 막았다. 휴직 신청이 겨우 받아들여지고 마지막 출근일 아침.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진 그는 엠뷸런스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눈과 귀, 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세상을 떠났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았어요.” 한 달 전 다른 조합원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한 달여가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저녁, 숨 고를 새도 없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천안센터에서 에어콘 중수리 기사로 일 해온 서른셋 최종범 조합원이 그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저 최종범이,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 님처럼 그러지는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불과 엿새 전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와 서울역 앞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참가하러 서울에 올라오기도 했던 그였다.

기술을 배우고 사회에 나와 오직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버텨온 청년. 그는 노동조합 만든 후 100일이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고 말하곤 했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조를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나는 그를 숭고한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의 유서에 왜 ‘전태일’이 적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철없는 30대 초반 남자에 불과했다. 다만 남들보다 덜 이기적이어서 나보다는 동료들을 먼저 챙겨주던 사람이었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가 죽고 몇 달이 지난 언젠가 나는 예전에 촬영한 사진과 영상 파일들을 살펴보다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죽기 6일 전, 상경투쟁에서의 모습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자꾸 카메라가 그에게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팔뚝질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하게 느껴졌다.

50여 일 동안 처절한 투쟁이 이어졌다. 한 겨울 서초동, 거대한 빌딩들 사이에서 천막 하나 없이 자야했던 날들이 오래된 기억처럼 지나갔다. 10년 전 쯤, 열사 투쟁 같은 고통스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우리는 또래 청년의 영정 사진을 들고 ‘열사 정신 계승’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최종범의 장례가 끝나고 5개월도 되지 않아 또 하나의 조합원이 자살했다. 그가 죽기 사흘 전 주고 받은 카톡메시지가 기억난다. 2박3일 상경투쟁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던 그는 도중에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에 들렸었다. 그는 삼성전자 사업장들이 넓게 퍼져있는 수원 영통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하나도 걸려있지 않다며 이왕 이곳에서 노숙 농성장을 차렸으니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현수막과 리본을 곳곳에 걸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나는 바로 현수막과 노란 리본을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쁜 소식이 들린 것이다. 양산센터의 염호석 분회장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고 전화기가 꺼져 연락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혼비백산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그를 찾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한 시신과 몇 백 만원의 빚, 그리고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승리하는 날 자신을 화장해 정동진 앞바다의 떠오르는 태양에 뿌려 달라”는 유서뿐이었다. “저는 지금 정동진에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회가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저희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주세요. (…)”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았으니까”

노동조합 초기 어떻게 삼성에 맞서 노동조합을 만들 생각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조합원이 이렇게 답한 적 있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세월호 참사 한참 이전에도 사장과 관리자들은 ‘너무 힘들다’는 노동자들의 하소연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좋아질 거야. 나중에 다 챙겨줄게. 삼성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어봐.

그러나 내내 참고 기다렸던 이 청년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일하는 조건이 더 나빠졌고, 임금은 떨어질 뿐이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간 죽을 것 같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반 발자국만큼 용기를 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렇게 노조를 만들었다고 해서 세상이 단번에 좋아지진 않았다. 오히려 탄압은 더 심해졌고, 임금이 떨어지기도 했다. 동료들은 낭떠러지에 내몰렸고, ‘열사’라는 수식이 붙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 밀린 탈퇴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여전히 노조를 지키겠다고 한다. 어떤 숭고한 이상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자각, 그리고 뭉쳐있는 스스로를 믿지 않고서는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얼마나 자신들을 속이고 기만해왔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세대담론을 종결시키고 스스로를 조직하기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매일 같이 1인 시위를 하는 저 우익 청년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는 ‘88만원세대’인가, ‘달관세대’인가? 그는 우석훈의 요청대로 ‘88만원세대’ 청년의 처지를 호소했고, 동시에 ‘짱돌’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실천적으로 거리로 나왔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행동하는 우익청년과 ‘달관세대’, 달갑지 않지만 이는 ‘88만원세대’라는 담론이 낳은 쌍생아처럼 보인다. 한국의 세대담론은 그 떠들썩한 흥행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사회비판과 변화의 기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현실에서 계급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독소로서 작용할 뿐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세대 담론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어쨌든 기성 노동운동이 지닌 약점을 타격하는 우파 청년의 정치적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을 노동운동에 대한 분노로 치환시킴으로써 실업난에 대한 지배질서의 책임을 거꾸로 기성세대 노동자계급, 그것도 전체 노동자 중 약 10퍼센트 정도 밖에 조직되어있지 않은 취약한 조직노동에게 전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근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이와 동시에 최저임금의 비약적 인상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의 원인을 노동자 내부의 세대 갈등으로 돌리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자신의 대의를 알리는 것에 약점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동년배의 청년들을 만났다. 군대에서, 예술학교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삼성의 노조탄압에 항거하며 자결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혐오 집회를 여는 일베를 비롯한 반공 청년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청년을 향한 다양한 지배담론과 정책들이 있지만, 장기적인 불황의 시대에 청년 자신의 삶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은 선의에 의해 만들어진 세대담론도,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통한 청년실업 해소라는 허무맹랑하고 얄팍한 사기도, 법륜이나 강신주 같은 멘토도 아니다.

‘청년세대 담론’은 갈 길을 잃었다. 처음부터 문제는 ‘청년’이라는 호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청년세대 자신의 계급적이고 집단적인 열망을 세우고, 오직 청년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전자서비스나 케이블 비정규직 노조의 청년 노동자들이 그랬듯 우리 세대의 요구를 ‘어리고 불우한 세대’의 요구가 아닌, 시대 자체의 요구, 계급 전체의 요구로 등극시키는 것, 그것만이 이 지리멸렬한 청년세대 담론을 종결시키고,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의 문제에 대면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지루한 세대 담론을 이쯤에서 끝내고, 청년이라는 이름을 지우자. 오늘날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어떤 엿 같은 상황들을 마주보고 있는가? 우리는 왜 죽어가는 가? 저임금에다 불안정한 일자리, 안전과 건강과는 무관한 위험한 일터를 벗어날 수 없는 오늘.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다. 파견에 계약직이고, 파트타임일지언정 도처에서 스스로를 조직해 우리 자신의 집단적 열망을 떠올릴 때, 우리의 길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비참은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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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온편지] 을지로 빅텐트를 찢기 위해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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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진보재편 논의는, 긴박하고, 폭넓게 다뤄져야 하는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자존심 싸움 멈추고, 깔끔하게 토론하자

 

불행히도 우리 진보정당운동의 도전은 실패를 향해 노정하고 있다. 상황은 점점 음울해지고 있으며, 전면적인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운동진영 안팎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나머지 활동가들은 하나둘 좌절에 빠지고 있다. 이럴 때 좌파의 조직적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역사 투쟁의 대의를 갖고 장렬히 전사(혹은 문호를 닫고 자기보호)하거나,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한치 앞도 계측하기 어려운 길로 나서거나.

좋든 싫든 오늘 우리는 어떤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사실 이런 조건은 누구도 원한 것이 아니었고, 예고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억울하고 분통터진다 할 수 밖에. 게다가 몇 년 전 통진당으로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발생했던 진통은 일부 당원들에겐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이런 뒤틀림과 과오, 증폭된 아이러니에 의해 이지경까지 왔고, 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이 있지 않다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처지에 놓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분리될 수 없는 진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당(진보신당)이 지금껏 제대로 시도라도 해본 적이라도 있었느냐’, ‘우리 나름대로의 제대로 된 도전을 해보기라도 하고 접든 말든 해야할 것 아니냐’, ‘우리에겐 아직 재편 과정에 주체적으로 가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나는 역시 이런 지적들에도 엄연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재편 논의의 절차적인 과정에 대해 강조하고 ‘아직은 포기하지말고 제대로 해보자’는 목소리들이 존재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 반대편의 조건 역시 우리가 똑바로 응시해야할 사실임은 분명하다. 노동자운동은 추락하고 있고, 좌파는 이제 어디가서도 존재감을 찾기 어렵다. 흔히 미디어에서 말하는 ‘좌파’ 안에도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시민이나 주진우 같은 스타들이 보일 뿐이다.

더군다나 재편이 곧 ‘포기’인 것처럼 취급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좌파 정당은 대중조직이 아니지 않은가. 정세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옷을 바꾸고 폭을 넓히며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 노동당이 존재해왔던 것이지 우리끼리 노동당을 잘 하기 위해 운동에 동참해온 것은 아니다. 특히나 노동조합운동에서 진보정당은 자기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나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우리 당원들이 보인 헌신적인 연대를 잘 알지만, 조합원들이 선거에서나 미디어에서 컨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을지로위원회 밖에 없다. 이런 뼈 아픈 기억은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현상이다.

2013년 가을 최종범 열사가 돌아가신지 이틀째 되던 날 밤, 삼성전자서비스 천안두정센터 앞의 나는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했다. 금속노조는 뼈 아프게 모든 것을 건 싸움을 다짐하고 있었지만 은수미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을 때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양산의 또 다른 주범인 새민련(열린우리당-민주당)의 의원들을 향해 박수쳤고, ‘은수미! 은수미!’를 연호했다. 그건 결코 조합원들이 개량이어서도, 파견법 개악의 주역이 민주당이었다는 사실을 몰라서도 아니다.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랜 고공농성 투쟁을 마치고 내려올 때에도 두 노동자들의 ‘착륙’(?)을 마중할 수 있는 지분을 지닌 정치인은 오직 을지로위원회 뿐이었다. 지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헌신적으로 도왔다는 의미이기도 할 게다. 그 자리에 서너개로 분리된 진보정당들의 자리는 없었고, 뼈 아프지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건 누군가의 탄식처럼 당의 깃발이 데모 현장에 게으르게 보여서도 아니고, 덜 헌신적이어서도 아니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택지에도 보이지 않는 진보정당. 자리를 잘못 잡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너무도 쉬운 일이다.

 

전략의 방황, 전술의 부재, 정념의 과잉

이따금 지인들로부터, ‘노동당은 내 생애 마지막 당’이라는 선언을 들을 때 놀라움을 감추기 어렵다. 그런 굳은 다짐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는 것은 가히 모범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로 정치적 입장을 세울 순 없는 노릇이다. 대중/운동이 있기에 (대중)정당도 존재하는 것이지, 당이 있어서 대중/운동이 있는 것은 아니며, 조직논리가 당위가 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속한 조직, 당이 얼마나 해당 정세에 걸맞는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얼마나 견고한 전략전술, 정치의 질서를 갖추고 활동하고 있는가이다. 

지금 당의 형질은 대중정당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단체적 성격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져 있다. 전국적인 조직망은 와해되다시피 했고, 이를 하나하나 재건하는 일은 곳곳에서 다른 진보세력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해산 이후 전면적인 대중조직으로의 산개를 통해 무섭게 토대를 닦고 있는 구 통진당 활동가들이나 원내정당으로서의 장점을 십분 살리며 무섭게 파고를 올리고 있는 정의당, 자신만의 장점을 살리며 전망을 확장하고 있는 녹색당에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조직의 형태를 감정적으로 고수하는 태도는, 당의 진로에 대한 여러 견해차를 막론하고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면 문제, 즉 불가피한 조건에 대해 침착하고 냉정하게 다루기를 방해하기 일쑤다.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원점에 놓고,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정세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길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3항-되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요동치고 있다. 남유럽 국가들의 극심한 내핍 속에서 유로화폐동맹은 전무후무한 격변을 겪고 있고, 서유럽은 우경화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경찰국가 미국은 금리인상 시기를 점치며 다른 국가들을 긴장케 하고 있고, 장기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은 미국과의 군사동맹과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군사화의 길을 노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일본식 장기불황의 미래로 가는 듯하면서도 통화의 불안정성 문제까지 걱정할 처지다. 물론 이에 대해선 조금씩 다른 견해들이 있기에 잠시 차치해두기로 하자. 

중요한 건 정세의 긴박함에 비해 주체들의 조건이 한 없이 뒤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이데올로기의 끝없는 우경화에 좌파는 속수무책이다. 따라서 조직된 운동들(노조, 협동조합, 지역운동 등)의 정치적 응집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이런 운동들의 제2의 정치세력화를 꾀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가권력과 운동들이 제대로 충돌할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절대 다수의 미조직 대중들을 만날 매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존립에 대해 시험 받을 수밖에 없으며, 노동운동은 양당제로 굳어지는 정치질서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중대한 과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제3의 대안’으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영미권의 좌파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보라. 영원한 이항대립의 정치 질서에서 좌파가 설 자리는 없다. 문제는 ‘그 세 번째 항에 누가 설 것인가’이다. 지난 5년 사이 보수세력이 이 ‘3항’으로서의 민노당-통진당을 삭제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는 ‘국민모임에게 정당을 건설할 실력 따위는 없다’는 견해에 대해 그리 반대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럴 수 있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인 활동이나 대중조직 운영의 경험이 일천했을 때 벌어지는 여러 과오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국민모임이 지지부진하게 3항의 자리를 선점한 상황에서의 재편 논의를 죄다 ‘국민모임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재편의 전략적 가치까지 폄훼하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실력을 갖고 보다 합리적이고 급진적인 견해를 지닌 좌파들이 주도하자고 말하는 것 아닌가. 좋든 싫든 미디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3항’의 견적 따위가 있다면, 우리는 그 견적을 짜고 질서를 흔들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이를테면 일간신문 정치면에서 천정배가 아니라, 좌파가 ‘3항’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노동당은 악조건을 감수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향후 몇 년간 역변될 정세에 ‘3항’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라도, 대중정치의 토대를 ‘질서재편’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

 

심플하게 논쟁하자

지난 1월 당대표 선거를 통해 우리는 과거 겪은 여러 풍파 이후 남아있는 평당원의 과반 이상이 당 안팎 제 진보세력의 결집이라는 ‘프로젝트’에 동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그것은 각자의 지역에서 탁월한 활동을 펼쳐온 주요 활동가들에 대한 신뢰도 밑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 지도부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당선 직후 열린 전국위원회 회의에 대한 소식들, 4.29 재보궐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잡음들, 그리고 최근 당게에서의 논란까지.

그러나 새 지도부에 브레이크를 거는 여러 공격들이 과연 얼마나 생산적이고 유의미한 것이었는지, 정말 당내에서 미래 전략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토론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눈팅하는 당원들의 혐오를 키웠을 뿐이며, 당게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게 만들어왔을 뿐이다. 결집의 조건과 전술에 대한 토론은 미진하고, 절차에 대한 흠집내기, 정념적 대립만 가득했다.

나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논쟁은 아무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전략적 견해차에 대해 논쟁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심도 깊고 폭 넓게 토론하고, 표결에 부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정치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경제위기가 점쳐지는 불안정한 정세에서 좌파의 미래 전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전체 당원이 토론하고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 합당하다. 더군다나 ‘진보결집’과 ‘당원총투표’는 현 지도부가 당선의 과정 속에서 과반 당원에 의해, 대중적으로 승인 받은 것이지 않은가.

심플하게 논쟁하자. 제 진보세력이 결집해 광범위한 블록을 만드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깃발을 고수하는 게 맞는가. 나는 전자가 옳다고 확신하며,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다수 당원은 이 쟁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의 실내용에 대해 더 토론하고, 당원총투표를 통해 길을 정하면 된다. 상황을 자꾸 실제 쟁점이 아닌 곳으로 안내해선 안 된다. 

우리에게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군소하지만 ‘좌파적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대중적으로 의미있는 각인 속에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줄다리기의 장으로 나설 것인가. 앞서 펼친 여러 근거들 때문에 나는, 몇 년 전 완고한 독자파에서 지금 ‘결집’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임박한 파국 앞에서 마이크 스피커를 최대한 높게 하고 넓게 외칠 수 있는 언덕 위에 올라서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이다. 그때 좌파는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얼마나 프로패셔널하게 대중들을 만날 것인가. 나는 여러 조직된 노동자들, 당 밖으로 흩어진 여러 좌파들을 결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이다. 우리 안의 지독한 냉소를 뚫고, 그 길에 더 많은 당원들이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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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노동자 현실 외면하는 한겨레

[한겨레] 기사입력 2005-02-13 17:00 / 2월 14일자 한겨레신문 왜냐면 기고

 

민주노총 폭력 사태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점거행동을 한 노동자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공세를 가해온 수구언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사회적 합의기구 참가에 대해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정규직 대공장 노조 간부들이 밀어붙여온 것을 모르는가? 

지난 1일 민주노총 임시 대의원대회가 점거사태로 무산된 것에 관한 <한겨레>의 무차별 공세에 대해 비판한다. 한겨레는 지난 1월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여러 시간 지연되다가 일부 대의원이 퇴장함에 따라 정족수 미달로 무산된 일, 그리고 2월1일 임시대의원대회가 폭력사태로 무산된 것에 대해 노동운동 진영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으로 일관했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가 무너졌다느니, 비민주적이고 비생산적이느니 하는 비판을 가했다.

그간 민주노총 내부에서의 사회적 교섭 안건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인한 충돌은 지도부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접합할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 극단의 사태로 치달아 왔다. 이 점에서 민주적 의사결정의 내부 구조가 취약하다는 박순빈 기자의 비판은 일견 맞다. 그러나 그 비난의 화살이 점거행동을 한 노동자들에게만 향해 있는 것은 마치 가난하고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파업만 하면 시민들의 발을 묶고 경제를 어지럽힌다는 등의 논리로, 자기 권리를 위해, 나아가 평등한 사회를 위해 싸워온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여론공세를 가해온 수구언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실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며, 이마저도 대공장, 대기업 노조 간부가 대부분이다. 기아자동차 노조 사건은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비리였으며, 지난 시기 민주노총 내부에 존재하던 민주적 의견 수렴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들 지도부의 반민주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박 기자는 윤진호 인하대 교수의 말을 빌려 민주노총이 사회적 합의기구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본의 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내가 보기에 실제 자본의 공세에 같이 놀아나는 것은 지금의 한겨레다. 사회적 합의기구가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자 탄압 ‘개혁’의 좋은 방편으로 이용되어 왔던 이제까지의 모든 사례를 모르는가? 유럽에서도 남미에서도 계속 그랬다. 사회적 합의기구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 늘리는 자본과 정권의 구실좋은 수단에 불과했으며,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가장한 여론 공작용 수단에 불과했다. 사회적 합의기구 참가에 대해 민주노총 내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하는 반면, 정규직 대공장 노조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밀어붙여온 것을 모르는가? 

한겨레는 ‘민주’니, ‘사회적 합의’니 하는 말로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혀 들어주지 않는 이땅의 언론과 정권, 자본의 편에서 장난치지 않길 바란다. 이땅 신자유주의 지배질서 아래 고통받는 민중들은, 이제 한겨레의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빈민들에 대한 ‘연정’ 어린 눈빛조차 모두 가식과 거짓으로 느낄 뿐이다.

홍명교/고려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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