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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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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8] ‘달관’마저 강요당하는 청년의 미래

- 세대담론 끝내고 청년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중심으로 조직해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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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동 경향신문사 앞에 가면 매일 같이 1인 시위를 잇고 있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민주노총 귀족노조 형님들! 삼촌들! 좋은 일자리 독점하시지 말고 비정규직, 청년들에게도 나누어주세요.”

결연하고도 못 마땅한 얼굴로 깔끔하게 정장도 차려입은 앳된 얼굴의 두 청년. 한 명은 피켓을 들고 선동 발언을, 다른 한명은 경호원이나 정보과 형사들이 착용하는 무전기와 이어폰을 끼고 수시로 상황을 주고받는다. 무언가 비밀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으나 참으로 영리한 선동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노동조합 운동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에게 더 다가가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좋은 일자리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논리는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잘못이 있다면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미련함에 있다.

 

‘달관하라’는 주문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많은 이들이 세계경제의 위기가 또 다시 도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기준금리를 인상시킬 시점을 재고 있고, 유럽의 통화동맹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채무위기가 만연해지면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중국은 동북아 패권을 두고 미국과 팽팽한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대외적으론 미·중 두 강국의 동북아 패권 싸움 앞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 헤매고 있고, 국내 경제는 부동산 대란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계부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권력은 세월호 참사나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 등 인민의 사회적 요구들은 철저하게 짓누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내부의 비리 문제로 자중지란에 빠져 있다.

자칫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정치질서가 큰 혼돈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한국 우파의 이데올로그이자 선봉장 노릇을 하는 조선일보가 느닷없이 ‘달관세대’를 꺼내든 것의 노림수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기사는 단순히 시시껄렁한 말놀이일 수 없다.

당도할 위기에 앞서 내부비용의 평가절하를 보다 단호하게 결행함으로써 이른바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완수하는 것은 위기에 대처하는 한국 지배계급의 필수 과제다. 위기를 초래한 것은 정치권력과 자본 자신이지만 그 대가는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자본권력의 생리 아니던가? 

요컨대 정부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겠다는 것의 의미는 그 사이 어딘가 중간쯤을 찾자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하향평준화를 이뤄 ‘좋은 시절’의 기억일랑 싹 잊으라는 명령이다. ‘달관세대’의 주문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더 이상 윗세대 노동자들처럼 안정적이고 생활 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없으니 지금과 같은 수준에서 ‘안빈낙도’하며 제 나름의 아비투스를 길러보라는 주문, 일종의 최면인 것이다. 

 

체념의 反정치

더 나은 삶(공동체)을 만들어가기 위해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을 재생시킬 것인가, 유동하는 ‘달관자’ 혹은 체념하는 ‘이등시민’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곤경 앞에 ‘집단적인 문제 해결’의 창구로서의 사회운동, 혹은 정치의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각자도생 속에서 살아남거나, 종교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문인지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때로는 위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꾸짖기도 하는 빼어난 멘토들의 ‘강연’이 흥행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지난해 법륜스님은 세계 100여 개 도시를 순회하며 ‘세계 100회 강연’을 펼쳤다. 종교를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관심이 놀라울 정도다. 만약 한국의 사회운동에게 이만한 흡입력이 있었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많은 대안을 보여주며 성장하고 있지 않았을까 내심 부러움도 생긴다.

많은 청년들이 그에게 외롭고 우울하며 벅찬 자신의 삶에 대해 토로하고, 해법을 갈구한다. “입사한지 4개월 된 신입직원입니다. 아침에 회사를 가려고 하면 너무 괴롭고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계속 눈물이 나고 집에 올 때도 그냥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고 가슴도 답답하고 너무 아프고 그래서 눈물도 나고 그럽니다.” 입사 직후 참혹한 근로 환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한 젊은 노동자에게 법륜이 주는 해법은 간명하다. 모든 번민은 욕심에서 오는 것이니 욕심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훌훌 떠나라는 것이다.

톱스타 멘토 강신주는 조금 다르다. 그는 종종 꾸짖는 말투로 상담자에게 ‘당당하게 주체로 서라’고 말한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는 “상담의 목적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주체로 세우는 것”이라며 사람들을 주체로 세우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그러나 법륜스님의 방식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의 집단적 해결을 모색하기보다 ‘훌훌 털고 떠나기’라는 개인적 해법 역시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아니겠는가.

노동권이 추락한 사회의 멘토들은 이토록 쿨하다. 우리가 노동할 때 마주하는 곤경들에 대한 공연한 욕심일랑 포기하고, 순응하거나 ‘탈주’하라는 것. 조선일보발 ‘달관세대’의 최면이나, 정세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판단을 결여한 상태로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유동하는 삶을 예찬하는 논리와도 맞닿아 있다.

슬프지만 오늘날 우리는 마주한 모순들에 맞서 집단적인 해결의 의지를 상실하고 포기한 지 오래다. 요컨대 청년들의 ‘생존’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런 낭만적 멘토링 뒤에는 다수의 비참이 가려져 있음을 모른 척 할 뿐이다.

 

청년들의 연이은 죽음

제대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돌아왔을 때 어딘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다들 말수가 적어졌고,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난 뒤의 패잔병 같았다. 광우병 촛불시위나 용산 참사, 쌍용차 옥쇄파업과 노무현의 죽음, 한예종 사태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진 후였다.

물론 이는 아주 피상적인 느낌을 거칠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안에는 감정들의 복잡한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해 나는 주변을 살피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을 조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과거' 속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듬해 2월 몇 년 전 입학 직후 스치듯 만났던 한 선배의 부음이 들렸다. 굶주림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잘못 알려지긴 했지만, 그녀가 생계고와 지병을 앓았던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였음은 사실이었다. 그해에만 그 자그마한 학교에서 4명의 재학생들이 자살했다. A는 불과 한 주 전 함께 맥주를 마셨던 친구였고, B는 같은 해 영상원에 입학해 같은 수업을 듣기도 했던 이였다.

20대 예술학도들의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툭하면 학교 극장 앞에 "음악원 **학번 김 아무개, ** 콩쿨 대상 수상!"이라는, 대형 걸개 현수막이 걸리곤 하던 늦여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 즈음 청년들의 연달은 죽음은 꽤나 논란거리였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2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지표가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 성적 경쟁에 시달리던 카이스트 학생들이 연달아 자살했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산재로, 생활고나 실업에 대한 비관으로 죽는 이들에 대한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다.

모여서 영화를 보거나 함께 책을 읽고 밤새 술만 퍼마시던 우리는 무던히도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우리 주위의 죽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위장된 고급 예술의 허울 너머에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의 실체가 무엇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망발들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구토를 내뱉듯 곤욕스런 현실을 응시하고 자리를 찾으려 발악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다 정치적이고 실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겼고 공론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지역, 예술, 운동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모임을 만들었다. 희망버스 같은 큰 투쟁들에 연대하기도 했고, 축제 땐 다양한 방식으로 퍼포먼스들을 기획하고 공연이나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 안의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열악하고 굴욕적인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해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2012년 가을 한예종 청소노동자들과 경비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우리는 예술과 정치 사이의 현저한 간극을 노려보며 어느 한쪽으로도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정쩡한 자리에 대해 고민했다. 국립예술학교 학생답게 초절기교를 가꾸기보다 점점 더 정치적인 실천들에 주목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떠도는 청년들

간석오거리에는 두세 평 남짓의 작은 편의점이 있다. 그 편의점 냉장고에는 잠을 지연시키는 온갖 음료수들이 가득하다. 핫식스, 레드불, 박카스, 번인텐스, 몬스터…. 종류도 어림짐작 10가지는 넘어 보이는,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진열대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유독 더 잠이 많나? 이 도시의 안개에는 수면제가 섞여있나? 판단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추정은 공단 노동자가 많은 동네라는 사실이었다.

예닐곱 개의 공단이 있는 대도시 인천. 공단과 공단이 맞닿아 있는 베드타운이 바로 간석오거리였다. ○○공단의 노동자들은 하루 10~12시간, 주 6일씩 일을 한다. 공단이 포괄하는 면적이 아주 넓고 수천개의 공장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회사로부터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서너 곳에 불과하다. 쉴 새 없는 구조조정의 폭풍우에 대부분의 공장들은 노동자들을 파견직으로 두고 6개월마다 갈아치운다.

핫식스를 마시지 않고서는 일할 수 없는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쾌쾌한 냄새 가득한 공장. 공장 옆에 세워진 아우디 안에는 사장 아들이 에어컨 켜고 앉아 낮잠을 자고, 공장 안에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 물량이 조금만 떨어져도 우수수 잘려나가는 노동자들과 성경 구절과 성화가 걸린 공장 곳곳의 기만적 풍경들. 저임금 장시간노동을 통한 원가 절감으로 얻어진 회장님의 이윤은 97개의 교회를 세우는 혁혁한 공으로 귀결됐다.

학교를 떠나고 공장에 갔었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공단에 양계장처럼 줄지어있는 공장들. 이른 아침 공단 앞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아무 표정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발 댈 틈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야 할 통근버스를 기다린다. 안개 자욱한 유수지 근처에만 가면 온갖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그곳에서 나는 법정최저임금을 받으며 제조업 파견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그곳에도 동년배의 청년들이 있었다. 근로기준법 같은 볼썽사나운 권리 대신 반나절 일하다 홧김에 작업복을 집어던지고 집으로 가버리는 ‘쿨함’. A공장에서 B공장으로, B공장에서 C공장으로, 다시 C공장에서 A공장으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게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인 불법파견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공단에서 '더러워서 때려치기'는 그들이 유일하게 택할 수 있는 자유였다. 아픔에 무디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기대를 접은 지 오래인,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끊임없이 주머니 속 어딘가에 적대를 숨기고 쌓는 것에 익숙해진 청년들. 4년제 대학을 나왔다는 30대 관리자가 벌레 취급하며 떠드는 욕지거리에 침 뱉어주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디지털 유목민’, ‘노마드적 삶’ 따위의 슬로건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물론 오늘날 청년들의 삶이 점점 유목민처럼 변해가는 건 사실이다. 개중에는 자기계발과 경쟁력의 면모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례도 전시된다. 그러나 그러한 탈정치적 노마드의 몇몇 사례는 끊임없이 유동하기를 강제 당하는 청년 파견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실업난의 극심한 좌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감추는 효과를 발휘할 뿐이다. 우리 공장의 잔업은 반강제였다. 그러나 30대 중후반만 되어도 잔업은 필수였다. 최저임금일지라도 더 벌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 청년노동자의 죽음

동료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나 역시 다른 사정으로 인해 떠나야했다. 2013년 늦여름 나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로부터 상근활동 제안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그해 7월 삼성그룹 하에서 만들어진, 일정 규모를 넘어서는 노동조합이었다. 수십개의 협력사들로 나누어진 전국 곳곳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었지만 모두들 삼성 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고장 난 삼성 제품을 고치는 수리기사들이었다. 고령화된 금속노조에선 찾기 힘든 2,30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렇게 한 순간에 1천명의 고단했던 삶들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9월말. 칠곡센터에서 일하던 30대 중반의 노동자 임현우씨가 출근 준비를 하다 쓰러졌다. 여름 성수기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일해야 했던 그는 매일같이 극심한 피로와 아픔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협력사 사장은 비아냥거리며 그의 휴식을 막았다. 휴직 신청이 겨우 받아들여지고 마지막 출근일 아침.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진 그는 엠뷸런스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눈과 귀, 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세상을 떠났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았어요.” 한 달 전 다른 조합원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한 달여가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저녁, 숨 고를 새도 없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천안센터에서 에어콘 중수리 기사로 일 해온 서른셋 최종범 조합원이 그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저 최종범이,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 님처럼 그러지는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불과 엿새 전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와 서울역 앞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참가하러 서울에 올라오기도 했던 그였다.

기술을 배우고 사회에 나와 오직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버텨온 청년. 그는 노동조합 만든 후 100일이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고 말하곤 했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조를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나는 그를 숭고한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의 유서에 왜 ‘전태일’이 적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철없는 30대 초반 남자에 불과했다. 다만 남들보다 덜 이기적이어서 나보다는 동료들을 먼저 챙겨주던 사람이었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가 죽고 몇 달이 지난 언젠가 나는 예전에 촬영한 사진과 영상 파일들을 살펴보다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죽기 6일 전, 상경투쟁에서의 모습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자꾸 카메라가 그에게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팔뚝질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하게 느껴졌다.

50여 일 동안 처절한 투쟁이 이어졌다. 한 겨울 서초동, 거대한 빌딩들 사이에서 천막 하나 없이 자야했던 날들이 오래된 기억처럼 지나갔다. 10년 전 쯤, 열사 투쟁 같은 고통스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우리는 또래 청년의 영정 사진을 들고 ‘열사 정신 계승’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최종범의 장례가 끝나고 5개월도 되지 않아 또 하나의 조합원이 자살했다. 그가 죽기 사흘 전 주고 받은 카톡메시지가 기억난다. 2박3일 상경투쟁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던 그는 도중에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에 들렸었다. 그는 삼성전자 사업장들이 넓게 퍼져있는 수원 영통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하나도 걸려있지 않다며 이왕 이곳에서 노숙 농성장을 차렸으니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현수막과 리본을 곳곳에 걸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나는 바로 현수막과 노란 리본을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쁜 소식이 들린 것이다. 양산센터의 염호석 분회장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고 전화기가 꺼져 연락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혼비백산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그를 찾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한 시신과 몇 백 만원의 빚, 그리고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승리하는 날 자신을 화장해 정동진 앞바다의 떠오르는 태양에 뿌려 달라”는 유서뿐이었다. “저는 지금 정동진에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회가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저희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주세요. (…)”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았으니까”

노동조합 초기 어떻게 삼성에 맞서 노동조합을 만들 생각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조합원이 이렇게 답한 적 있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세월호 참사 한참 이전에도 사장과 관리자들은 ‘너무 힘들다’는 노동자들의 하소연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좋아질 거야. 나중에 다 챙겨줄게. 삼성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어봐.

그러나 내내 참고 기다렸던 이 청년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일하는 조건이 더 나빠졌고, 임금은 떨어질 뿐이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간 죽을 것 같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반 발자국만큼 용기를 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렇게 노조를 만들었다고 해서 세상이 단번에 좋아지진 않았다. 오히려 탄압은 더 심해졌고, 임금이 떨어지기도 했다. 동료들은 낭떠러지에 내몰렸고, ‘열사’라는 수식이 붙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 밀린 탈퇴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여전히 노조를 지키겠다고 한다. 어떤 숭고한 이상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자각, 그리고 뭉쳐있는 스스로를 믿지 않고서는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얼마나 자신들을 속이고 기만해왔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세대담론을 종결시키고 스스로를 조직하기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매일 같이 1인 시위를 하는 저 우익 청년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는 ‘88만원세대’인가, ‘달관세대’인가? 그는 우석훈의 요청대로 ‘88만원세대’ 청년의 처지를 호소했고, 동시에 ‘짱돌’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실천적으로 거리로 나왔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행동하는 우익청년과 ‘달관세대’, 달갑지 않지만 이는 ‘88만원세대’라는 담론이 낳은 쌍생아처럼 보인다. 한국의 세대담론은 그 떠들썩한 흥행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사회비판과 변화의 기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현실에서 계급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독소로서 작용할 뿐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세대 담론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어쨌든 기성 노동운동이 지닌 약점을 타격하는 우파 청년의 정치적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을 노동운동에 대한 분노로 치환시킴으로써 실업난에 대한 지배질서의 책임을 거꾸로 기성세대 노동자계급, 그것도 전체 노동자 중 약 10퍼센트 정도 밖에 조직되어있지 않은 취약한 조직노동에게 전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근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이와 동시에 최저임금의 비약적 인상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의 원인을 노동자 내부의 세대 갈등으로 돌리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자신의 대의를 알리는 것에 약점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동년배의 청년들을 만났다. 군대에서, 예술학교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삼성의 노조탄압에 항거하며 자결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혐오 집회를 여는 일베를 비롯한 반공 청년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청년을 향한 다양한 지배담론과 정책들이 있지만, 장기적인 불황의 시대에 청년 자신의 삶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은 선의에 의해 만들어진 세대담론도,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통한 청년실업 해소라는 허무맹랑하고 얄팍한 사기도, 법륜이나 강신주 같은 멘토도 아니다.

‘청년세대 담론’은 갈 길을 잃었다. 처음부터 문제는 ‘청년’이라는 호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청년세대 자신의 계급적이고 집단적인 열망을 세우고, 오직 청년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전자서비스나 케이블 비정규직 노조의 청년 노동자들이 그랬듯 우리 세대의 요구를 ‘어리고 불우한 세대’의 요구가 아닌, 시대 자체의 요구, 계급 전체의 요구로 등극시키는 것, 그것만이 이 지리멸렬한 청년세대 담론을 종결시키고,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의 문제에 대면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지루한 세대 담론을 이쯤에서 끝내고, 청년이라는 이름을 지우자. 오늘날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어떤 엿 같은 상황들을 마주보고 있는가? 우리는 왜 죽어가는 가? 저임금에다 불안정한 일자리, 안전과 건강과는 무관한 위험한 일터를 벗어날 수 없는 오늘.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다. 파견에 계약직이고, 파트타임일지언정 도처에서 스스로를 조직해 우리 자신의 집단적 열망을 떠올릴 때, 우리의 길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비참은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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