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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에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땅에 당당히 발을 디디고 저렇게 활짝 웃으며 사진까지 찍었으니 국가보안법 제 6조, 제 8조에 의거하여 징역이다!
제 6조(잠입, 탈출)
(1)국가의 존위,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 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 8조(회합, 통신 등)
(1)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아니 반국가단체에 잠입한 녀석이 우두머리 괴수의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듯이 기뻐하고 있다니... 그런데 이 당시 KBS, MBC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물론 주요 일간지에서도 1면에 이 장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네이버, 엠파스를 검색해도 이 사진은 수십 개씩 나온다. 이들도 모조리 국가보안법 제 7조에 의거하여 징역이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 대통령은 또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 손을 맞잡고 높이 치켜 올리는 것이야 말로 상대방에 대한 렬렬한 호의 아니겠는가!
제 7조 (찬양, 고무 등)
(1)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자, 이 사진 한 장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바보 같은 법인지 알 수 있었다. 토론회에 참여하신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들 또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
제 10조 (불고지)
제 3조, 제 4조, 제 5조 제 1항, 제 3항(제 1항의 미수범에 하한다.)제 4항의 되를 범한자라는 정을 알면서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을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자유민주주의’마저도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보안법.
「저의 입국 이후로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 법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최면제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저는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법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이 법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훼손당하고 있다는 모순조차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자기 최면제입니다.」
-<송두율 교수 항소심 최후 진술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법이 계속해서 전제로 붙여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마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양심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전혀 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통해서 이 법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지 알아보았지만, 실상 국가보안법이 가져온 희생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메이데이에 참여하면서 만든 자료집을 소지하였다는 죄, 교보문고에서도 판매중인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을 소지하였다는 죄. 일가친척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혐의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 심지어는 ‘○○나이트 앞에서 김정일을 찾아주세요.’라는 명함을 돌린 죄. 국가보안법에 자유와 민주는 없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은 누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
국가보안법의 모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이다.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을 무마하려는 법이었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국가보안법은 이런 모법을 따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면서 132개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군인 8-9천명을 처벌하였다. 해방공간에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좌익계열을 지지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좌익세력을 청소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다가 거센 저항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채, 5.16 군사쿠데타를 맞았다. 그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이 쓰인 곳은 동일하다. 박정희 정권은 더 나아가서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처벌을 사형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군사정권이건 문민정부건 간에 노동조합 하나 건설하는 것도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처벌하였다. 국가를 보안하기 위해서.
개정과 개정을 거듭하고, 폐지를 하네 마네 말은 많았지만, 그리고 지금도 많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법이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지켜내기기 위한 법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을 건설하면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한다고 잡아넣고, 노동자계급의 사상이나 문학을 담은 책, 예술작품을 판매하거나 전시하였을 때에는 불온사상을 전파한다고 잡아넣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려고 할 때에도 잡아넣었다. 그것은 70년대에 다시 남한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되살아났을 때에도, 80년에 광주민중항쟁이 불같이 타올랐을 때에도, 87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을 외치던 때에도,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그러하다. 이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쳤던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자유주의자’들도 대통령이 되자 국가보안법을 오히려 정권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박근혜 같은 파쇼세력이나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세력이 아무리 박 터지게 싸워도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그 본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발제 2. 악법 어기기. 투쟁 이기기
때는 2004년 9월. 안정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가해 나가며, 이런저런 부르주아 지배 분파들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자본주의 국가 한국. 그곳엔 56년 간 절대 공격이나 침입이 불가능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현대판 ‘소도’가 존재해 왔다.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이 바로 그것. 이 영역을 파쇼적으로 40여년간 지켜왔던 당파와 새롭게 권력을 장악,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개혁파’으로 지칭하는 자유주의 당파가 국보법의 개폐를 놓고서 한판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발단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 tv 프로그램 대담에서 국보법의 폐지를 말한 것었다. 자유부르주아지인 열우당이 당 정책을 아예 국보법 폐지로 선회했고, 한나라당은 개정을 부르짖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부르주아 분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입장 차이는 무엇으로 기인한 것인지 알아보고, 노무현 정권은 국보법 폐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고자 했는지 알아보자.
하나, “보이니? 파쇼와 자유주의의 차이”
다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부터 98년 전까지 집권 여당이었다. 그들은 앞 발제에서 나온 바와 같이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쟁취하려는 민중의 봉기에 대해, 무자비하게 군화발과 탱크로 짓밟았다. 또한, 그들은 건국 직후 ‘빨갱이들이 설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량한 국민들을 오염시키고,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한 사실’, 기득권을 빼앗겨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위기와 공포의 순간을 뼈져리게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붙들어 매주는 것이며, 이를 폐지하면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보법을 폐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협을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탄핵 사태 이후, 급격하게 지지 기반을 상실했던, 한나라당으로선 자신들의 보수적 색채를 더 강화시켜 다시금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원로’ 들과 ‘박사모’등 보수세력이 모여, 국가위기사태를 선언하고 집회를 열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빨갱이’ ‘좌익’ 세력인 노무현을 규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이는 정치사적으로 나름대로 깨끗한 열우당의 우위를 드러내주며, 파쇼적 분파와 자유주의 분파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분파가 온건히 민중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꾀하기 위해 국보법폐지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분파는 왜 국보법 폐지를 말하는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까나?
둘, 눈 가리고 “어흥”하기.
부르주아 인권의 잣대로 봐도 파쇼적일 수밖에 없는 국보법을 폐지함으로써,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좀더 민주주의적이고 좀 더 국민을 생각하는 당으로서의 이미지 확보를 위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열우당은 故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파병 반대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국익 운운하며 추가 파병을 강행, 그들의 가면 속 진실을 엿본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열우당의 지탱 세력을 흐트려 놓아, 그들이 대중을 다시 획득하기 위한 가시적인 것으로 ‘국보법폐지’만큼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도 파쇼세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단순히 대중의 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열망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북한의 시장개방 흐름도 현 정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최근 중국이 단순 대북 지원 정책을 넘어서, 특권층이 많이 살고 있는 인구 220만의 평양시에 전략적 투자를 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저임금 노동력, 특권층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소비시장, 동북아 경제 거점 중심지 허브를 구상하고 있는 한국 부르주아지로서는 이 뉴스는 매우 위협적이다. 따라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자본에 ‘한민족’의 소비시장을 눈뜨고 송두리째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일 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지막지한 법을 폐지하는 입장으로 향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로, dj 정부 시절부터 가져온 평화적 민족적 통일 정책인 ‘햇볕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대중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분파 전체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골고루 얻을 수 있는 절묘한 찬스를 만든 것이다.
두 번째, 2004년에 집권 여당에 의해 국보법 폐지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를 통해서, 자유주의 분파의 계급적 본질과 그 한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 자본주의의 큰 성장은 지배 세력에 있어서 파쇼에서 자유주의 분파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가 확장되는 데 있어서,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파쇼 분파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하지만, 군부정권 시절에 경제가 오히려 발전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후진국 자본가들은 어느 정도 자본을 불려놓기 위해서 정권과 결탁하는데, 이를 통해 남한의 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어느 정도 자본이 성장하게 되면, 정경유착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정권의 지나친 기업 규제 등이 자유로운 경쟁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쇼적인 정책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더욱 급진화한다. 실제로, 국보법에 대한 개폐논의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87년 노동자 대투쟁같은 것을 상기해보자. 폭압적인 정책이 노동자들의 분노와 단결된 투쟁을 잘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부르주아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이 결국 자신들에게 이롭다는 점 역시 말이다. 이렇듯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으며, 열우당이 이 점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국보법 폐지 당론을 확정한 것이다.1) 한마디로 말해, 국보법 폐지는 현 상황에 아무런 폐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남한 자본가들은 56년간 차근차근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착실히 심어놓음으로써, 선심 쓰듯 국보법 폐지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총자본의 이득을 위한 공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들이 실제로, 국보법 폐지 후에 바꿀 형법 개정안을 보면 제87조(내란)와 제102조(준적국)에 각각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지휘통솔 체계를 갖춘 단체’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적대적 국가로 간접 지칭하는 내용 추가, 제90조(예비·음모·선동·선전)에 ‘선전·선동’과 ‘금품수수’에 대한 처벌조항을 신설했으며, 국보법 대체법안인 파괴활동 금지법안은 제2조(정의)에서 ‘적대적 국가 또는 단체’를 ‘대한민국의 존립 및 안전을 침해하는 활동을 하는 국가 또는 국가에 준하는 단체’로 표현해 마찬가지로 북한을 간접 지칭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국가기밀 침해죄(제4조) △민주기본질서 파괴죄(제5조) △목적수행죄(제6조) △금품수수(제7조) 등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불고지죄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국가보안법과 전혀 성격이 다르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입법에 대한 한계는 위와 같은 것을 통해서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 모든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환상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 만든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계급의 착취와 피착취 관계를 은폐하고, 체제와 계급 대립의 완충 장치일 따름이다. 중립적인 의미로, 또는 민중을 위한 체제로 이해되는 민주주의는 오히려, 부르주아지를 이해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투쟁을 결코 방기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 그것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적 제도라는 것은 그들을 해방시킬 충실한 무기이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동할 수 있는 더 많은 권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입법 체제에 대한 한계는 명확하므로, 민주주의 제도를 통한 권리 획득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폐지되더라도, 형법 조항이나, 파괴활동금지법이라는 또 다른 악법이 존재하게 될 것이므로, 다음과 같은 노래가사를 기억하자.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불법으로 투쟁하리라.’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기만적인 유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해야 한다.
“창으로 선물을 받으리라, 창 끝에는 창 끝으로.”2)
발제 3. 제도개선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1. 민주주의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원칙적인 입장에 대해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논란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성명서 발표, 일인시위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노동계급이 가져야할 원칙적인 태도일 것이다.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이 부르주아에게 위협이 될 정도가 되면 부르주아의 수많은 법과 제도들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음을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단체 중심의 투쟁에 대해 진정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부분까지 포함한 원칙적인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주주의투쟁’이기에 이러한 민주주의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직 봉건제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서는 구체제의 유산인 반동적 귀족세력이 실질적으로 군대 등 사회전반을 아우르는 지배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정치적 지배권력을 쟁취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당면과제였지만 노동계급의 그 혁명적 힘의 분출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고 있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공장제 공업의 발전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덜 발전한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엥겔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엥겔스는 봉건적 질서가 남아있는 경우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있어 더욱더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이 요구하는 자유에 관한 다양한 법과 제도들이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1). 그렇다고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의 문제이니 노동계급은 봉건적 질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지켜만 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분명히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부르주아들이 반동적인 봉건귀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를 끝까지 추진하겠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이는 1905년 러시아의 당면 혁명의 과제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 있어 레닌의 주장과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의 태도에 대해 정치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함을 주장하였다.3) 그러면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분명 ‘민중의 혁명’이라고 언급하며, 이 속에서도 ‘민중’ 그 자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로 구분해야 하며, 계급적 독자성에 대해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했다.4) 그러면서 레닌은 명확한 실천 방향은 러시아의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앞당기는 데 있어서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공화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 이외에는 다른 길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 할 수 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제시하였다.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들이니 노동계급은 이에 전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기회주의적 조류와 확실한 선을 긋는 동시에 실제 투쟁에 있어 물리력을 담보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당파성을 확고히 쥐고 가면서,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만들어가는 데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남한에 적용시키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얼마 전 탄핵사태를 경험했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이미 안착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혁의 과제 역시 그 당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은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주장에 담긴 보편적인 입장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투쟁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구체적인 우리의 실천방안은 무엇인가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지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벌여낼 것인가이다. 앞서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계급의 역량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어느 회사 노조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고 하는 소식을 알리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한번 파업이라도 벌어지면 국민경제를 위기에 빠뜨린다면서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펴고 있다. 그래서 지하철노조에서 파업을 할 때는 사회적 명분(?)을 얻기 위해 ‘청년실업해소’라는 슬로건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노동계급의 힘이 집약되어 조직적으로 나타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임금인상을 매개로 한 파업투쟁만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분명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어 ‘친북-좌익-용공’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누구보다 먼저 국가보안법 폐지의 운동적 흐름을 만들어 가야할 노동계급은 뒷전에 있고. 시민단체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역량에 대한 현 주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과연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폐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우리는 해 봐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말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논란은 어디까지나 ‘형법대체입법/파괴활동금지법’ 등 법률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하여 사실상 제 2의 국가보안법을 준비한 상태에서 개혁성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에서 벌이는 투쟁은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대부분은 시민단체에서는 ‘인권’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를 부각시키며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가져가고 있어서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폭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노동계급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뿐이며,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는 개악되면 개악되었지 ‘개선’조차 따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도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실천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늦지만 가장 빠른 길을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현재 역량이 부족하고 국가보안법 완전철폐에 대한 입장을 가자고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노동계급의 역량이 더욱 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는 큰 틀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작은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의 역량은 부족한 상태이지만 얼마 전 파견법 개악으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더욱더 투쟁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며, 이주노동자들은 아직도 강고하게 명동성당에서 농성단을 꾸리고 있다. 이렇게 투쟁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대해 학생으로서 힘차게 연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투쟁을 평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분명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학우들과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입장이 필요한 가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참으로 많을 것이다. 그 속에서 확고히 지녀야 할 원칙적인 입장은 유지하며 다양하게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1)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의 말 “남한 민주주의와 체제의 안정감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
2) 박종철 출판사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6권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 61p
1)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구별되는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 쭌프트 제도에 대립하여 상업과 영업의 자유를, 관료적 후견에 대립하여 자유와 자치를 자신들의 깃발에 써넣어야 한다. 따라서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들은 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지에게 부르주아지이기를 중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물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키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권리와 결사의 권리로써 보통 선거권을 획득하고, 이 보통 직접 선거권으로써, 그리고 아울러 위에 적은 선동 수단들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을 획득한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58~59)
2)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반동파의 앞치마 밑으로 숨어들고 노동자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자신의 적대 분자의 힘에 호소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 그러한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노동자 당에 남아 있는 방도는, 부르주아적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권리에 대한 선동과 같은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의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들이 없이는 노동자 당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다. 노동자 당이 이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 본래의 생존 요소, 자신들이 숨을 쉬는 데 필요한 공기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있어 노동자 당이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꼬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당파로서 행동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노동자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는 자본가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에 맞서 자신의 조직을 확고히 유지하는 한편 계속 단련시킬 것이며,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과 교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만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과 교섭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 당은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개별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 이해에 눈뜨게 할 것이며, 혁명적 폭풍 - 그리고 이 폭풍은 상업 공황이나 춘분․추분시 폭풍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회귀를 하게끔 되어 있다 - 이 불어올 때에는 행동태세를 완비해 놓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60~61)
3) 러시아 민주주의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본질에 있어서 부르주아혁명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맑스의 명제를 반복하여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명제는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며 정치적 슬로건에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기초로 한 모든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적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요구란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제일 먼저 내세운다. 부르주아지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획득한 자유를 어느 곳에서나 주인처럼 행사하면서 자유를 온건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지의 것으로 변형시켜서, 평화적 시기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단히 교묘하게 억압하고 격동의 시기에는 이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데 이 자유를 이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이 부정되거나 또는 비난받아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로지 나로드니크 폭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경제주의자들뿐이다. 이러한 인텔리적이며 속물적인 교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이 의지에 반하여 그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잠시일 뿐이다. 정치적 자유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힘을 배가시키고 조직을 꾸리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그것도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범위, 계급투쟁의 의식, 조직, 결연함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정치투쟁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의 보호자라는 지위에서 노동조합의 비서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혁명의 지도자의 지위에서 자유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2~123)
4) 그렇다. 민중의 혁명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이라는 말이 부르주아적이며 민주주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에 대해 싸워왔고 지금도 대단히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 단어가 민중 내부의 계급적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는 완전히 계급적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은 진보적 계급이 그 자체 내에 머물거나, 좁은 한계 내에 그 자신을 한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의 경제적 지배자가 후퇴하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행동을 마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간계급들의 미지근함, 동요, 주저함 등과 인연이 없는 진보적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전 민중의 대의를 위해서 전민중의 선두에 서서 싸우도록 하기 위해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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