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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10월 5일)슈퍼스타 이수호- 사회적 합의주의

 

  발제 1. 사회적 합의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최바울(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0. 어떻게 싸워야 할까 - 강경파와 온건파?


 ① 투쟁이 계속되면 선거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빨리 투쟁을 정리하고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②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돌파구로 만들어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으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① 고용허가제는 이주 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완전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의 싸움에 남한의 노동자들 역시 연대해야 한다.

  ② 고용허가제가 문제가 많지만 당장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고용허가제의 안 좋은 점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길이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개혁적 의원들과의 정책 협의로 가능하다.


  1. ‘온건파’ ―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남한의 노동운동은 87년 6월 항쟁 이후, 7-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시작된다. (이 시기 통계를 살펴보면 120만의 노동자들이 노동악법을 무시하고 3255건의 불법 파업을 벌였으며, 1400개가 넘는 신규 노조를 건설하였다.) 물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조를 포함하여 여러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대중적인 규모로서 노동자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민주노조’로 이름 붙여진, 실제로는 회사 측과 완전히 한통속인 어용노조를 깨뜨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건설해 낸 노동조합 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왔다.

  남한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인 힘에 직면하여 운동 진영 내에서의 정치적 논쟁 역시 활발하게 벌어진다. 궁극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벌어졌던 열띤 논쟁은 두 가지 큰 흐름에 의해 크게 굴절된다. 하나는 91년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92-93년 경에 접어들면서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안착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예전과 같은 전투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운동 주체들은 이제 이전과 같은 식의 ‘빡센 투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 정당을 통해 체제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해 나가겠노라고 자신들의 전향을 선포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이 곧바로 노동조합 운동에 강하게 착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이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이었던 중소기업 노동조합 중심의 전노협뿐만 아니라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건설된다. 그리고 바로 이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의 위원장이 오늘날 이름 높은 권영길 씨이다. 이들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사회개혁투쟁”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들과 연대, 경영 참가와 정책 참가를 중요시하면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 기구에 적극 참여하는 노선을 취했다. (바로 이러한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바로 “국민파”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전처럼 빡세게 투쟁만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별로 없으니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는 상층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더 선호했던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말대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는가? 우리는 96-97의 노동법개악 투쟁의 경험과 97-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96년 말, 당시 김영삼 정권은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복수노조 금지와 제3자 개입금지를 폐지하는 대신에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을 도입하는 노동법 개정을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로 처리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이제 더 이상 민주노조 운동을 군부 독재 식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정부도 인식했다는 것, 그렇다면 합법성을 인정해주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제도권 내로 포섭하면서 노동 대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해 보자는 속셈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지도부는 아래로부터의 폭발적인 대중 투쟁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파업 투쟁을 관료적으로 통제해 나가기에 급급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했을 때만이 그들이 부르짖는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와의 물밑 협상에 끝까지 목을 맨 그들은 결국 파업 투쟁의 열기가 꺾일 줄 모르던 1월 26일 정부의 민주노총 합법화 약속을 대가로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해버린다. 결국 이후 여야합의로 개정된 노동법은 애초 정부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노총의 국민파 지도부는 정부의 충실한 들러리로 기능했을 뿐이다.

  97-98년의 IMF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황이 닥쳐오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들의 탈출구는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와 대규모의 임금 삭감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민주노총의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지도부는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정리해고제 시행과 근로자파견제 법제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합의문에 조인한다. 이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속도로 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800만에 달하게 되었음을 떠올려보라! 이들 국민파 관료들은 자신들이 자본과의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되는 것 따위와 수많은 노동자 대중의 절박한 생존권을 맞바꿨던 것이다!


  2. 사회적 합의주의의 오늘 - 민노당의 의회 진출과 ‘새로운’ 노사정위


  국민파 관료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이 말하는 대화와 타협이 결코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이 없는 것임은 이들 관료들에 대항한 노동자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97-98 노사정 합의 이후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장은 쇠파이프로 무장한 현장의 조합원들에게 점거당할 정도였다. 결국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은 기립투표를 통해서 압도적 다수에 의해 부결된다. 물론 이후 결의된 총파업이 기회주의적인 지도부에 의해 흐지부지되면서 이미 떠난 배를 뒤돌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 국민파 관료들이 노골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말하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국회에 노동자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96-97 총파업이 실패한 까닭도 자신들의 투쟁회피주의, 관료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 우위의 사회적 세력관계를 반전”시키고 “구체적인 법개정 성과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치력과 교섭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런 논리 아래 이미 97년 대선 시기 “국민승리 21”이라는, 도대체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라는 사상과는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는 정체불명의 운동을 펼친 바 있었다. (다 떠나서 이들의 선거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98년 노사정위 합의안 부결과 지도부 총사퇴, 총파업 철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토대로 하여 정치세력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확대재편하여 노동자중심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는 정치방침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것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민주노동당이다. 사실상 민주노동당의 화려한 등장은 노동자 계급의 비타협적 투쟁이 관료적으로 왜곡되고 통제된 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의 원대한 구상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과 더불어 현재 이수호 위원장의 집권 이후 가속화된 산업별노조 건설 흐름으로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된다. 그들에게 산별노조는 대정부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좋은 압박 수단에 불과하다. ‘노동자를 위한 법을 만들어 내는 정치투쟁은 민주노동당, 임금을 올려받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경제투쟁은 몸집을 불린 산별노조’라는 양날개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노동조합 차원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재참여 하는 것뿐이다.

  눈여겨 볼 지점은,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부정적 인식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 역시 명백하게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내실있는 준비 이후에 수행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에 따르면 노사정위원회는 논의 의제를 대폭 확대하고, 노사정 협의의 틀을 산업별, 지역별로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이 개편될 노사정위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토론을 넘어 중층적인 교섭구조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조직력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노사정위원회의 참가를 향한 자신의 구상과 그것의 정치적 본질 ― 자본에게 완전히 굴종하는 것 ― 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야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노무현 정권이 자본을 위해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카드인 ‘노사관계로드맵’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합의’의 외양을 쓰고 관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의 입장에서야 손뼉을 치면서 좋아할 일 아닌가! 마치 남는 게 더 많기 때문에 뒷돈을 써서 자리를 청탁하듯이, 민주노총의 관료 몇 명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해줌으로써 자본의 몸집을 불릴 수 있다면 이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출범 첫 해부터 배달호 열사 투쟁, 화물연대 투쟁, 철도 투쟁들에 데어버린 노무현 정권은 어서어서 노동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길 원한다. 민주노총의 주문대로 정부는 노사정위를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의 총괄기구로 개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반기 들어 가속화 되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현재 민주노총의 숨고르기로 다소 연기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참가는 이미 시기 선택의 문제로밖에 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서 업종, 지역별로 얽힌 교섭 구조 속에서 노사정위 참가를 위한 주객관적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해 나가느냐 하는 점에 있을 뿐이며, 이것이 노사정위 참가가 유보된 유일한 까닭이다.


  3. 사회적 합의주의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가?


  언뜻 보기에는 노사정위 참가를 비롯하여 정부/자본과 대화와 타협을 벌이자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이야기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교섭 없이 투쟁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옳다. 하지만 개별 사업장에서의 교섭은 투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노사정위 참가의 문제는 국가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화시키려는 자본의 의도에 완전히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과 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노동과 자본은 한 배를 탄 운명인 것인가? 노동자가 잘 되려면 기업이 잘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국가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분쟁을 중립적으로 중재해주는 공간인 것인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합의주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장한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자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오로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된 폭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온건파’, ‘국민파’,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으며, 그로써 그들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본가 계급의 충실한 보조자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권과 자본의 본질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주의의 본질 역시 똑똑히 알고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산악같이 일떠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보론.‘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누구의 편인가


- 돌멩이(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1. 선한 의도, 그러나 예견된 실패


  체제를 변혁하는 투쟁을 해야한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가 모순이 많고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망했다.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사회 전체를 점진적으로 바꾸는 게 훨씬 현실적이다.'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민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합의’와 동의의 절차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해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프로젝트.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선한 의도는 역사상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외쳐지는 자유, 평등, 합의, 평화, 공생은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실상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사민주의는 그 가면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보통 이러한 견해를 개량주의 또는 수정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왜?


  2.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자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이 실패한 예로서 우리는 종종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얘기한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는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세계의 많은 좌파들은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이라며 흥분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았다. 이제 자본가들이 공장 문을 닫고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지원을 중단하고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공장주의 사보타지로 생산이 중단되고 물가가 오르자 노동자들 역시 이에 맞서 결집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중재자를 자처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개각단행과 정책마련으로 지배계급(여전히!)을 달래려 했으나 이는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했다. 결과는 3년 후의 군부 쿠데타였고, 아옌데를 지원하며 실질적인 조직적 힘을 비축하지 못한 좌파는 전멸하고 말았다.

  칠레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자본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그러한 물적 토대를 이용, 사회주의 소련에 대당하기 위한 사민주의가 성행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노동당, 공산당 등이 수차례 집권에 성공했으나 그들의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현하지 못했다. 길었던 전후 호황기가 끝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부터 이러한 이상은 환상일 수밖에 없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던져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적인 권력은 대통령이나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게 있지 않다. 당연히 '국민'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순진한 사민주의자들이 법 개정과 정책 마련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을 때, 금융, 산업, 상업 자본가들은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사보타지를 통해 전 사회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다. 이들은 생산을 중단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고 다른 자본들과 연합해 경제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으며 언론을 통한 흑색 선전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자본의 지배력을 손상시키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실질적인 정책이 상정되면 자본은 즉각 이러한 조처들로 정부를 위협하고, 결국 이러한 정책은 철회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사민주의의 역사였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진정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사회의 실제적 권력을 장악해야 함이 너무도 명확해지지 않는가.


  3. 국가와 법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국가에 대한 관점이다. 이들은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로 생각한다. 국가는 단지 틀로서 기능할 뿐이고 이 틀에 다른 내용물이 들어가면 그 기구의 성격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속편한 환상에 불과하다. 국가기구는 관료제적 위계질서로 구조화되어 있고, 검, 경찰, 군대, 사법부, 행정부 등에서 수뇌부를 차지한 이들은 국가기구 안에서 실질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 정권을 획득한 것이 사민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구의 수뇌부가 자본과 실질적인 커넥션을 유지한다면 수많은 개혁정책들은 바위를 치는 계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힘은 경제력이다. 이것은 공권력이 실제로 행사되는 곳이 어디인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공권력은 사회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한다고 한다. 그러나 공권력이 출동하는 곳은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의 집회 장소이거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는 공장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장하는 안정과 질서는 누구의 것인가? 계급사회에서 '전국민'의 안정과 질서란 공문구에 불과하다. 자본가들은 국민의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요구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적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을 신봉한다. 이들은 법의 개정, 제정을 통해 자본주의로 인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법은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근본적 관계를 결코 변화시킬 수가 없다. 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뿌리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곁가지들일 뿐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자본과 임금노동의 메커니즘인데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법률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결핍으로 인한 빈곤이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 있는 한 세상의 그 어떠한 법률도 노동계급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산자, 곧 노동계급의 소유에서 생산수단을 박탈해간 것은 경제적 발전이지 법률이 아니기 때문이다."1)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법률적 형식을 띠지 않기 때문에 법을 바꾼다고 이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조차 법의 실제적인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힘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도 근로기준법은 존재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을 담보하게 된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였다. 한편 노동자 계급의 결집된 힘이 미약한 2004년 현재, 파견법 및 비정규직법 개악안이 버젓이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섬뜩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수 의석 확보와 정책적 대안 마련에만 온 힘을 기울이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방관하는 민주노동당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4. 의회 민주주의 - 빛 좋은 개살구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실속이 없는지, 아니 누구의 실속을 채워주는지를 확인하자.


  2004년 6월,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민소환'으로 좌초위기에 처했던 우고 차베스가 국민투표로 재신임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가 소환됐을 때, 자신이 쏜 화살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온 격이라고들 했다. 국민소환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차베스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국내외 자본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모았고 이 제도를 이용해 차베스를 소환했다.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얼마전 대통령 탄핵으로 한국사회가 떠들썩했을 때 국민소환, 국민발의를 주장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차베스의 사례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을,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고 있는 공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자본가들의 민주주의가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를 끝장내기 위해 파업을 하고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고 생산을 통제하는 것, 사수대를 조직해 자본가와 공권력은 공장 내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이다.


  5. 나가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민주적 절차를 따지고 평화적으로 대결할 것을 외친다면 상대방은 이들을 비웃을 것이다. 사민주의 혹은 개량주의자들이,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탄압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이용가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우려는 사람들에게 ‘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선동해주고, 동시에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해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들은 단지 어리석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는 상관없이 혁명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데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립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결국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발제 3. What is to be done?

               -승리를 위한 안타 한방을 날려보자!


- 페나(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다시 살아나는 악몽

 앞선 발제에서 우리는 사회적 합의주의, 다시 말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손을 맞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또 노동자계급에게 해악이 되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기만의 역사가 다시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다. 이수호위원장을 위시로 한 민주노총 관료들은 노동자대중에게 “이번엔 삼진아웃”을 장담하며, 노사정위 등판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5월 31일, 청와대에서는 노사정(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과 자본가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서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약속하였다. 물론 지난 9월 31일 민주노총 2차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노사정 교섭 재개 여부를 내년으로 미루어, 당장 하반기에 노사정 교섭틀이 가시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위원회에 참가했던 민주노총관료들의 발언만 참고하더라도 그들의 속내를 알 수가 있다.


"사회적 교섭은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LG칼텍스, 코오롱 등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우리가 먼저 사회쟁점화하고 성과있는 투쟁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교섭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없는 것보다 훨씬 낫게 대응할 수 있다. 예를들어 하반기 운수산업에서도 철도관련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는 수단은 결국 책임있는 정부 당사자와의 교섭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1기 노사정위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것에 대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 정치적 힘이 있었다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란 평가에도 이견은 없다. 4.15총선에서 우리의 정치환경은 변했고 우리는 사회적 교섭구조를 통해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이 많다"

-김형근 서비스연맹 위원장


   다시 싸움을

 이와 같이 민주노총 관료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든든한 지지기반을 업고, 투쟁 일변도의 과거 방식에서 새 시대(?)에 걸맞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합의주의’를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주의에 맞선 흐름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지난 8월 21일 결성된 ‘노사정담합 ․ 사회적 합의주의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가 바로 그것이다. 전노투에는 전국의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20여개가 넘는 정치/현장 조직 그리고 언론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정권과 자본이 계속해서 들이대고 있는 노동탄압의 칼날에 맞서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들어 기만적인 사회적 합의를 분쇄하겠다는 기조로 전노투를 결성하였다. 전노투가 다양한 단체와 조직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단체인만큼 내부적으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 인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이들의 결성과 행동이 얼마나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 낼 수 확신을 할 수 없을 만큼 역량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가? 노동탄압은 거세져가는 데 반해 아래로부터의 대중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희미하기만 하다. 또, 자본의 분절전략에 의해 점점 더 노동자들 사이의 골이 깊어져만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금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과 잃어버리고 있는 민주노조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결성된 전노투는 분명 의미가 있으며, 또한 하반기 우리가 주목해야할 큰 흐름 중의 하나이다.


  비정규직 보호=비정규직 확대양산?

 정권과 민주노총 관료들이 싸바싸바 움직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하반기가 되자마자 노동부에서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을 내놓았다. 그동안 자칭 ‘개혁’정부는 점점 늘어가는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 정책’을 내놓겠다고 떠들어왔다. 그럼 그 보호 입법이 대관절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비정규직의 확대양산이다. 비정규직 보호=비정규직 확대양산? 초등학생들도 =이 양쪽이 같을 때에만 쓰이는 부호라는 것도 다 알텐데, 책상에 앉아서 정책을 짜내는 양반들은 역시 기본도 안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정부가 내놓은 입법안에 따르면, 종래에 특정 직종에서만 제한되어 있던 파견 근로가 이제는 특정 직종을 제외하고는 확대된다. 애초에 정부가 비정규직 ‘철폐’가 아닌 ‘보호’를 하겠다는 데에는 자본의 탈을 쓴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이제는 합법적으로(!) 재편하겠다는 심산이 담겨져 있었다. 어차피 불법파견은 점점 늘어가니 이제는 법으로 그것을 보장해주는 대신,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을 보호해준다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 것이다.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으로!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발표한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은 지난 9월 16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열린 우리당 당사를 점거했다. 국민의 뜻을 하늘 같이 받들겠다던 열린우리당 측은 그동안 전 노동자의 70%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차피 너희는 우리 안 찍을 것’이라며 묵살해왔다. 점거 농성에서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들은 파견법 개악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지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총파업이 결의되었고, 다음 날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정부안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정부의 파견법 개악안은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지 못하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이 있을 때에만 저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정규직 연대회의는 오늘도 전국에서 노동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한 데로 모아 단결하고, 계급적인 연대의식으로 투쟁할 중요한 구심이 될 것이다.


  승리를 위한 안타 한 방을 날려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도 암울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2004년 하반기,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노동유연화와 비정규직확대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 속에서도 자본과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냐고 또다시 ‘화해와 타협’의 손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 없지 않은가? 미약하나마 꿈틀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 흐름들을 우리는 부여잡고 나아가야만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전노투와 비정규직연대회의는 그 중요한 두 흐름이 될 것이며, 우리 학생들도 노동자들과 함께 파견법 개악저지와 비정규직 철폐,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를 위해 목적의식적인 연대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을 갈라놓고, 이기주의라 매도하는 정부와 자본에 맞서는 길은 강고하고 단결된 투쟁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우리의 행동들이 당장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투쟁으로 승리를 위한 안타 한 방을 날려보자! 그 첫걸음으로 10월 10일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견법 개악 저지와 노동유연화 분쇄투쟁에 함께 싸우자!


1) 로자 룩셈부르크, 「개량이냐 혁명이냐」, 『룩셈부르크주의』,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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